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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유럽 신화의 재발견

신, 인간, 거인의 공통 키워드

“갈등, 충돌, 욕망”

  • 김원익 (사)세계신화연구소 소장·문학박사 apollonkim@naver.com

신, 인간, 거인의 공통 키워드

  • ●신들과 거인들의 끝없는 대립
    ●‘욕망 덩어리’ 인간을 꿰뚫어본 북유럽 신화
    ●‘최후의 전쟁’ 라그나뢰크가 인간에게 주는 암시
    ●거인의 ‘성벽 보수’ 제안에 신들은 꾀를 내고…
    ●신들의 방해 공작, 거인은 토르의 망치에 숨지고…
    ●그리스 신화 속 영웅들은 善, 괴물은 惡
슬레이프니르를 타고 지하 세계로 내려가는 오딘. [W.G.Collingwood, 1908]

슬레이프니르를 타고 지하 세계로 내려가는 오딘. [W.G.Collingwood, 1908]

북유럽 신화에는 신과 인간의 세계뿐 아니라 제3의 공간인 거인의 세계가 있다. 거인들은 신들과 대립하면서 전체 플롯에서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들은 크기에서 단연 신들을 압도한다. 변신술 등 여러 능력에서도 신들에 필적하며 그들의 세계를 계속 위협한다. 거인이 신의 존재를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라 신이 거인의 공격을 두려워하는 형국이다. 

신들과 거인들은 태초에 긴눙가가프라는 계곡에서 동시에 태어나 대등한 세력관계를 유지한다. 신이 우위에 있는 게 아니다. 그들은 서로 사랑해 자식을 낳기도 한다. 오딘 삼형제도 아버지 보르와 거인 여인 사이에서 태어난다. 지금까지 전승돼온 북유럽 신화에는 거인들의 조직에 대해 자세한 설명은 없다. 하지만 요툰헤임이라는 영토와 우트가르드라는 성채가 있는 것으로 보아 거인들도 아스가르드의 신들 못지않게 탄탄한 조직을 만들어 살았음이 틀림없다.


오딘 삼형제가 죽인 巨人 이미르

신들과 거인들의 적대관계는 태초에 오딘 삼형제가 거인 이미르를 죽인 것에서 불거지기 시작한다. 북유럽 신화에서 신과 거인의 대립은 태초부터 결정돼 있었던 셈이다. 거인들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신들과 충돌하고 싸움을 일으킨다. 아마 선천적으로 자신들의 조상인 태초의 서리거인 이미르를 죽인 오딘과 그의 후손들에게 엄청난 적개심을 품고 복수의 칼을 갈았을 것이다. 

신들의 왕 오딘도 태생적으로 거인을 상대로 한 최후의 전쟁이 피할 수 없음을 예감한다. 미리 지상의 전쟁터에서 죽은 영웅들을 자신의 궁전으로 데려와 에인헤랴르(Einherjar·‘하나의 군대’라는 뜻)’로 명명하고 전쟁에 대비하기도 한다. 북유럽 신화에서 신과 거인의 대립이 전면에 부각되는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의 대립은 북유럽 신화 전체를 관통하는 키워드다. 그들은 사사건건 부딪치며 ‘최후의 전쟁’ 라그나뢰크까지 줄기차게 싸운다. 

그렇다면 북유럽 신화의 거인들은 무엇을 상징할까. 그들은 우선 어둠, 죽음, 불의, 악의 세력 등을 상징할 수도 있다. 거인들은 또한 자연의 거대한 힘을 상징할 수도 있다. 혹독한 겨울 등 거친 자연은 고대 북유럽 사회에서 인간이 살아가는 데 최대의 난관이었을 것이다. 당대 인간이 풀어야 할 가장 어렵고 중요한 숙제였다. 그래서 거친 자연은 신 정도는 돼야 대적할 수 있는 거대한 폭력으로 여겨졌을 것이다. 그 폭력이 바로 북유럽 신화에서 거인들로 형상화된 것은 아닐까. 



북유럽 신화의 신들과 거인들의 전쟁에 비견될 수 있는 게 바로 그리스 신화의 영웅들이 괴물들과 벌인 싸움이다. 그리스 신화에서 신들의 대리인인 영웅들은 모험 중에 메두사 등 숱한 괴물과 맞닥뜨린다. 이때 이기는 쪽은 늘 정의의 편인 영웅들이고, 지는 쪽은 늘 불의의 편인 괴물들이다. 이에 비해 북유럽 신화에서 신들과 거인들은 늘 팽팽한 접전을 벌인다. 마치 서로 마주 보고 전속력으로 달리는 기차와 같다. 그래서 그들은 최후의 전쟁 라그나뢰크에서 서로 찌르고 찔리다가 함께 비참한 최후를 맞이한다. 

그리스 신화와 북유럽 신화의 이런 차이는 우리에게 무엇을 말해주는 것일까. 북유럽 신화는 역사를 좀 더 거시적으로 바라본 것은 아닐까. 인간의 문제를 좀 더 핵심적으로 꿰뚫어본 것은 아닐까. 세상은 끊임없는 갈등과 충돌의 역사요, 인간은 어쩔 수 없는 욕망 덩어리라고 말하는 거 같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북유럽 신화는 인간은 바로 그런 욕망을 거두어야만 공존, 공생이 가능하다고 경고한다. 그러지 않으면 최후의 전쟁으로 공망(共亡)한다는 것을 암시한다. 요즘 우리나라 정치권이 귀담아들어야 할 경고가 아닐 수 없다. 

북유럽 신화에 나오는 신과 거인의 모험 이야기는 수없이 많다. 그중 아스가르드 성벽을 재건한 거인 이야기는 신과 거인의 관계가 어떠했는지 잘 보여준다.


말을 타고 신들의 성으로 찾아온 거인

신들과 거인들 사이에 폭풍 전야의 불안한 평화가 지속되던 어느 날, 아스 신들의 파수꾼 헤임달의 귀에 아주 멀리서 들려오는 희미한 말발굽소리가 감지된다. 그가 눈을 들어 그쪽을 자세히 바라보니 과연 거인 하나가 말을 타고 무지개다리인 비프로스트 쪽으로 오고 있었다. 헤임달은 앞서 언급했듯 들판의 풀이나 양의 털이 자라는 소리도 들을 수 있고, 밤에도 낮처럼 400km 앞을 훤히 내다볼 수 있다. 헤임달은 북유럽 신화판 ‘걸어 다니는 레이더’였던 셈이다. 

과연 얼마 지나지 않아 잔뜩 긴장한 채 경계를 서고 있는 헤임달에게 말을 탄 거인이 아스 신들을 만나게 해달라고 부탁했다. 그들에게 제안할 중요한 안건이 하나 있다는 것이다. 거인이 하도 정중하게 구는지라 헤임달은 그를 쫓아버리지 않고 오딘에게 데려갔다. 오딘은 거인을 직접 만나보기 전 헤임달로부터 미리 사정을 전해 듣고 즉시 신들의 회의를 소집했다. 아스 신족이 하나도 빠짐없이 회의장인 글라드스헤임 궁전에 모였다. 오딘은 그제야 그 거인을 불러 자신들을 만나러 온 이유를 물었다. 

거인은 자신을 유능한 석공이라고 소개하며 아스 신족과 반 신족의 전쟁 때 부서진 아스가르드의 성벽을 고치지 않겠냐고 물었다. 만약 자신에게 그 일을 맡겨주면 열여덟 달 만에 어떤 공격에도 절대 부서지지 않는 난공불락의 성벽으로 만들겠다는 것이다. 사실 아스가르드 성벽을 보수하는 일은 아스 신족의 숙원 사업이었다. 거인들이 아스가르드를 호시탐탐 노리는 상황이라 정말 화급을 다투는 일이었다. 하지만 지금까지 신들 중 누구도 선뜻 나서지 않았다. 먼저 말을 꺼내 책임을 맡기엔 너무 어렵고 복잡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프레이야의 눈물, 신들의 묘수

아내 프레이야를 다시 떠나는 오드르. [Carl Emi Doepler, 1882]

아내 프레이야를 다시 떠나는 오드르. [Carl Emi Doepler, 1882]

오딘은 거인의 제안에 귀가 번쩍 뜨였다. 하지만 세상 모든 일에는 공짜가 없는 법. 그는 거인에게 그 일의 대가로 원하는 게 뭐냐고 물었다. 거인은 기다렸다는 듯 자신이 원하는 것은 딱 세 가지뿐이라며 뜸을 들였다. 성질이 불같았던 토르가 거인에게 ‘그러니까 그게 뭐냐’고 다그쳤다. 그래도 거인이 계속 우물쭈물 말하기를 망설이자 토르는 더는 참지 못하고 금방이라도 그에게 묠니르 망치를 던질 기세였다. 그걸 알아차린 거인이 그제야 자신이 원하는 것은 바로 사랑의 신 프레이야와 하늘을 떠다니는 해와 달이라고 대답했다. 회의장이 갑자기 신들의 웅성거리는 소리로 소란스러워졌다. 그들은 거인의 황당한 요구에 모두 아연실색했던 것이다. 

마침 회의장에 앉아 있던 프레이야는 졸지에 거인의 품삯으로 추락해버린 자신의 초라한 신세가 기가 막혀 황금 눈물을 뚝뚝 떨어뜨렸다. 그녀가 황금 눈물을 흘리기 시작한 것은 남편 오드르 때문이었다. 프레이야와 오드르는 한때 흐노스와 게르시미라는 두 딸을 둘 정도로 금실이 좋았다. 

그러던 어느 날 방랑벽이 심한 오드르가 아내와 두 딸을 버리고 갑자기 길을 떠나버렸다. 그러자 슬픔에 잠긴 프레이야가 행방이 묘연한 남편을 찾아 헤매면서 눈물을 흘렸다. 그런데 그녀가 얼마나 애틋하게 울었던지 눈에서 황금 방울들이 흘러 내렸다. 그 이후 프레이야는 남편 오드르를 결코 찾을 수 없었다. 오드르도 다시는 프레이야에게로 돌아오지 않았다. 

프레이야가 슬피 우는 것을 보고 토르를 비롯한 몇몇 신은 분통을 터뜨렸다. 거인의 요구는 결코 받아들일 수 없다고 잘라 말했다. 이 세상에서 사랑이 없어지면 신이나 인간에게 사는 재미가 없을 것이며, 해와 달이 없어지면 세상의 질서는 엉망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바로 그때 로키가 음험한 눈을 번뜩이며 거인의 제안이 일언지하에 묵살해버릴 만큼 불리한 것만은 아니라고 소리쳤다. 한번 심사숙고해볼 만한 가치는 있다는 것이다. 오딘은 로키의 항변에 일리가 있다고 생각하고 우선 거인을 잠시 회의장 밖으로 내보낸 다음 회의를 속개했다. 하지만 신들이 몇 시간째 쉬지 않고 논의해봐도 대원칙만 하나 정했을 뿐 뾰족한 해법을 마련할 수 없었다. 대원칙이란 바로 성벽 재건이 아무리 중요하다고 해도 신이나 인간에게 꼭 필요한 존재들은 결코 양보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몇 시간째 이어지는 회의에서 신들은 번갈아가며 의견을 하나씩 제시했다. 가령 토르는 거인을 힘으로 제압해 노예처럼 부려먹자고 제안했다. 하지만 토르의 의견은 손님의 권리를 짓밟음으로써 신들의 명예에 오점을 남긴다는 이유로 부결됐다. 신들이 모두 의견을 개진하는 동안 로키는 경청만 할 뿐 선뜻 나서서 자신의 의견을 말하지 않고 침묵을 지켰다. 남은 건 로키뿐이었다. 신들의 생각이 그에 미치자 회의장이 한순간 조용해졌다. 신들의 시선이 모두 로키에게로 향한 채 그가 입을 떼기만을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로키가 그것을 의식하고 잠시 눈을 지그시 감고 사색에 잠기더니 묘안이 떠오른 듯 갑자기 눈을 번쩍 떴다. 이어 신들을 향해 거인이 제시한 열여덟 달의 공사 기간을 3분의 1인 여섯 달로 줄여 역제안하면 어떻겠냐고 물었다. 아울러 그 이유를 아주 그럴듯하게 설명했다. 누구도 그 기간 안에는 죽었다 깨어나도 그 일을 해내지 못할 것이며, 거인이 자신들의 역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아도, 혹은 그 일에 착수해서 성공하지 못한다 해도 자신들은 잃을 게 하나도 없다는 것이다.


전광석화처럼 진행된 성벽 보수

신들은 모두 무릎을 치며 정말 기발한 아이디어라고 생각하며 로키의 제안에 만장일치로 동의했다. 그래서 오딘은 거인을 다시 회의장으로 불러 요구조건을 모두 들어줄 테니 공사 기간을 여섯 달로 줄이라고 요구했다. 거인이 그처럼 짧은 기간에는 그 일은 도저히 불가능하다며 한두 달만이라도 더 늘려달라고 부탁했지만 오딘의 고집을 꺾을 수 없었다. 결국 거인의 공사 기간은 겨울이 시작되는 첫날인 다음 날부터 여름이 시작되는 첫날까지 여섯 달로 확정됐다. 하지만 오딘은 만족하지 않았다. 그는 거인의 실패에 쐐기를 박고 싶어 더 심한 조건을 하나 더 달았다. 그 기간 안에 누구의 도움도 받지 않고 혼자서 공사를 끝내야 한다고 말이다. 

하지만 벼랑 끝까지 몰렸다고 생각한 거인은 더는 양보할 수 없었다. 그는 오딘에게 자신이 타고 온 말 스바딜파리는 쓸 수 있게 해달라고 강력하게 요구했다. 거인은 만약 자신의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면 자신도 성벽 재건을 맡지 않겠다고 배수진을 쳤다. 이 말을 듣고 로키까지 나서 오딘에게 거인의 요구를 들어주라고 충고했다. 거인과 타협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부서진 성벽을 조금이라도 고칠 수 없다는 것이다. 오딘은 결국 못 이기는 척 거인의 청을 들어줄 수밖에 없었다. 그는 또한 거인의 요구대로 공사 기간 철저한 신변 보장도 약속했다. 

그다음 날부터 바로 시작된 거인의 성벽 보수 작업은 그야말로 전광석화처럼 빠르게 진행됐다. 거인은 밤이 되자 수레 대신 성긴 그물을 길게 매단 스바딜파리를 데리고 채석장으로 나갔다. 거인의 힘은 실로 엄청났다. 신들 중 그와 대적할 만한 신은 토르밖에 없을 정도였다. 스바딜파리의 힘도 마찬가지였다. 거인이 달빛을 벗 삼아 채석장에 지천으로 깔려 있는 돌들을 주워 그물에 가득 실으면 스바딜파리는 전혀 힘든 기색 없이 그것을 질질 끌고 성벽 쪽으로 올라갔다. 거인과 스바딜파리의 돌 나르는 작업이 밤새 계속됐다. 하지만 낮이 되면 거인은 부서진 성벽 근처에 산처럼 쌓인 돌들을 차곡차곡 쌓아올렸다. 하루가 다르게 성벽이 점점 옛 모습을 갖추어나갔다.


로키의 꾀 “스바딜파리를 유혹하라!”

로키와 스바딜파리. [Dorothy Hardy, 1909]

로키와 스바딜파리. [Dorothy Hardy, 1909]

거인과 스바딜파리는 매일 거의 잠도 자지 않고 밤에는 돌을 나르고 낮에는 성벽을 쌓아갔다. 마침내 여름이 시작되려면 3일이 남았을 무렵 부서진 성벽이 거의 재건됐다. 거인과의 내기에서 자신들이 이길 것이라고 확신했던 신들은 어느 날 부서진 성벽 기단에 우뚝 솟은 새로운 성벽을 보고 깜짝 놀랐다. 이제 남은 것은 부서진 성문 하나뿐이었다. 앞으로 3일만 지나면 그 성문도 완성될 것은 불 보듯 뻔했다. 오딘은 결과가 예상과는 다르게 나오자 대비책을 마련하기 위해 당장 신들의 회의를 소집했다. 하지만 아무도 신통한 방법을 내놓지 못하고 우왕좌왕할 뿐이었다. 프레이야의 울음보도 다시 터져 그녀의 주변이 온통 눈물 모양의 황금으로 쌓여갔다. 

신들은 결국 이 모든 사태의 책임을 로키에게 돌렸다. 거인의 제안을 받아들이자고 한 것이 바로 로키였기 때문이다. 신들이 모두 로키에게 비난의 화살을 돌리며 그를 성토하자, 오딘도 갑자기 떠오르는 기억이 있어 로키에게 성큼성큼 다가가 두 손으로 멱살을 움켜쥐었다. 이어 로키가 거인에게 스바딜파리를 쓰게 하자고 고집을 피우지만 않았더라도 이런 사태가 벌어지지 않았을 것이라며 그에게 무조건 책임을 지라고 윽박질렀다. 로키가 캑캑거리며 신들이 만장일치로 동의한 사안이라고 아무리 변명해보아도 소용없었다. 오딘은 그의 목을 더욱 더 세게 죄어올 뿐이었다. 로키는 어쩔 수 없이 오딘에게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반드시 비극은 막겠다고 맹세하고서야 그의 손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이후로 로키는 깊은 생각에 잠긴 채 어디론가 총총히 사라졌다. 

어느덧 거인과 신들이 약속한 날도 하루밖에 남지 않았다. 이제 내일 낮이면 성문 보수도 끝날 참이었다. 거인은 마지막 저녁이 되자 여느 때처럼 마지막 작업에 쓸 돌을 구하려고 스바딜파리의 고삐를 잡고 채석장으로 향했다. 채석장이 있는 들판으로 가려면 꽤 긴 숲을 지나야 했다. 그런데 거인이 막 숲을 벗어나려고 하는 순간 숲속에서 갑자기 매끈하게 잘 빠진 암말 하나가 튀어나왔다가 홀연히 숲속으로 사라졌다. 달빛에 얼핏 비친 암말의 엉덩이는 통통하게 살이 올라 건드리면 금방이라도 터질 듯했다. 수말인 스바딜파리가 그 모습을 놓칠 리가 없었다. 게다가 녀석은 암말이 뒤에 잔뜩 풍기고 간 암내를 맡자 정신을 잃고 어쩔 줄 몰라 했다. 결국 스파딜파리는 발광해 몸부림치다가 급기야 고삐를 끊고 암말이 사라진 곳을 향해 미친 듯이 달려갔다. 

당황한 거인은 잽싸게 스바딜파리를 잡으려고 뒤따라갔지만 어쩔 수 없었다. 어느 누가 평범한 말도 힘든데 발정난 말을 따라잡을 수 있겠는가. 거인은 밤새도록 숲속을 헤매면서 욕설을 퍼붓기도 하고 달래기도 하면서 스바딜파리의 꽁무니를 쫓아다녀봤지만 녀석의 마음에 휘몰아친 사랑의 광기를 진정시킬 수 없었다. 암말은 자신에게 마음을 빼앗긴 스바딜파리를 이용해 거인을 밤새도록 농락했다. 

새벽 동이 트기 시작하자 거인은 너무 지친 나머지 스바딜파리를 단념하고 숙소로 돌아왔다. 그러자 얼마 지나지 않아 녀석도 그에게 돌아왔다. 하지만 거인은 이제 얼마 남은 시간으로는 성문을 완벽하게 보수하는 것은 물 건너갔다는 것을 깨달았다. 밤에 채석장에서 성문 근처로 날라둔 돌이 하나도 없었기 때문이다.


토르의 묠니르, 거인의 최후

성벽을 쌓는 거인과 스바딜파리. [Robert Engels, 1919]

성벽을 쌓는 거인과 스바딜파리. [Robert Engels, 1919]

거인은 자신이 오래전부터 치밀하게 계획했던 일이 하루아침에 모두 수포로 돌아가자 그동안 꾹꾹 눌러두었던 특유의 폭력성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그는 자신이 일을 망치게 된 것이 신들의 음모 탓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글라드스헤임에서 벌어진 신들과의 마지막 연회에서 술에 취해 그들에게 분통을 터뜨리며 온갖 욕설을 퍼부어댔다. 심지어 신들을 사기꾼이라고 비난하며 지난밤 스바딜파리를 꾀어내 자신의 일을 망친 범인을 당장 색출해내라고 고함을 질러댔다. 신들이 자신들은 절대로 그런 일을 한 적이 없다고 아무리 해명해도 거인은 글라드스헤임의 집기들을 던져 부수면서 점점 더 폭력적으로 변해갔다. 

신들은 자신들이 비록 예전에 거인에게 신변 보장을 약속한 적이 있더라도 이제 참는 것은 무리라고 생각했다. 그들은 은밀하게 전령 신 헤르모드를 시켜 마침 아스가르드를 떠나 외근 중이던 천둥 신 토르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토르는 글라드스헤임에 들어서자마자 고래고래 고함을 지르며 행패를 부리던 거인을 향해 잽싸게 망치를 던졌다. 토르의 망치 묠니르는 한 번도 주인을 실망시킨 적이 없다. 이번에도 두개골을 정통으로 맞혀 단 한 방에 거인을 죽은 자들의 세계인 헬로 보내버렸다. 글라드스헤임에 금세 다시 평화가 찾아왔다. 

그렇다면 로키는 그동안 어디로 사라졌던 것일까. 그는 오딘에게 한 맹세를 지킨 것일까. 사실 거인의 말인 스바딜파리를 유혹한 암말은 로키가 변신한 것이다. 로키는 고심 끝에 거인의 작업을 방해하기 위해 거인의 충복이던 스바딜파리를 유혹하는 우회적인 방법을 택한 것이다. 그는 암말로 변신해서 일종의 미인계를 썼다. 몇 달이 지나자 로키는 미드가르드에서 망아지 한 마리를 데리고 무지개다리 비프로스트를 건너 아스가르드로 돌아왔다. 

로키가 데려온 망아지는 바로 암말로 변신한 로키가 스바딜파리와의 사이에서 낳은 말 슬레이프니르였다. 이 세상에서 가장 뛰어난 회색 말이다. 녀석은 신기하게도 다리가 여덟 개였으며, 육지나 물속이나 하늘을 똑같은 속도로 미끄러지듯 빠르게 달릴 수 있었다. 슬레이프니르라는 이름도 ‘미끄러지는 자’라는 뜻이다. 로키는 오딘에게 화해의 선물로 이 말을 선물로 줬다. 오딘은 나중에 이 말을 타고 발데르가 죽기 전에 꾼 불길한 꿈을 해몽하기 위해 지하 세계로 내려간다.


신, 인간, 거인의 공통 키워드

김원익
● 1961년 전북 김제 출생
● 연세대 독문학과 졸업(문학박사), 독일 마부르크대 수학
● 신화연구가, (사)세계신화연구소 소장
● 저서 : ‘신화, 인간을 말하다’ ‘그림이 있는 북유럽 신화’ 외 다수




신동아 2020년 1월호

김원익 (사)세계신화연구소 소장·문학박사 apollonkim@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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