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10월호

[북유럽 신화의 재발견 ⑩] ‘빛의 신’ 발데르의 죽음, 파멸의 ‘라그나뢰크’ 전조

  • 김원익 (사)세계신화연구소 소장·문학박사 apollonkim@naver.com

    입력2020-09-24 10: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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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로키 계략으로 숨진 발데르, 끝없는 추모 행렬

    • 본능적으로 ‘세계 종말’ 알아차린 아버지 오딘

    • 신화 서사 구조 차용한 ‘왕좌의 게임’ ‘진격의 거인’ 빅히트

    • 거인은 북유럽의 거친 자연환경…오늘날 거인은?

    발데르의 머리를 맞히지 못하는 
화살들, Elmer Boyd Smith, 1902

    발데르의 머리를 맞히지 못하는 화살들, Elmer Boyd Smith, 1902

    북유럽 신화는 크게 ‘천지창조’ ‘신들의 모험’ ‘라그나뢰크’ 세 부분으로 이뤄졌다. ‘천지창조’는 이 세상이 만들어진 내력과 신들의 탄생 과정을, ‘신들의 모험’은 신들이 아스가르드에서 무지개다리 비프로스트를 타고 거인들의 거처인 미드가르드의 요툰헤임으로 내려가 그들과 싸움을 벌이는 내용으로 가장 많은 분량을 차지한다. ‘라그나뢰크’는 신들과 거인들이 그렇게 만날 원수처럼 싸우기만 하다가 끝내는 이 세상 모든 것과 함께 몰락하는 세계 종말에 관한 이야기다. 그래서 북유럽 신화에 반영된 역사관은 매우 비극적이며 암울하다. 

    우리는 이 세 가지 테마 중 최근 몇 회에 걸쳐 대표적인 ‘신들의 모험’을 살펴보면서 북유럽 신화의 핵심 테마가 신들과 거인들의 갈등과 충돌이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런데 북유럽 신화에서 신들과 거인들의 싸움은 손쉽게 한쪽의 일방 승리로 끝나지 않는다. 두 진영은 늘 팽팽한 접전을 벌인다. 그들은 마주 보고 달리는 기차와 같다. 이처럼 두 세력 사이의 격한 갈등과 충돌이라는 북유럽 신화의 서사 구조를 스토리텔링에 차용해 선풍적 인기를 끈 작품이 미국 드라마 ‘왕좌의 게임’과 일본 만화 ‘진격의 거인’이다.

    야만족이 들끓는 북쪽 凍土

    드라마 ‘왕좌의 게임’에 나오는 거인족(위)과 
애니메이션 ‘진격의 거인’ 방벽. [HBO 제공, 일본 MBS ‘진격의 거인’ 방송화면 캡처]

    드라마 ‘왕좌의 게임’에 나오는 거인족(위)과 애니메이션 ‘진격의 거인’ 방벽. [HBO 제공, 일본 MBS ‘진격의 거인’ 방송화면 캡처]

    ‘왕좌의 게임’은 가상의 대륙에서 패권을 두고 여러 나라가 합종연횡을 벌이는 전쟁 이야기다. 그런데 각국이 암투를 벌이면서도 공통의 적으로 생각해 경계를 게을리하지 않는 진영이 있다. 바로 거인족, 백귀 등 온갖 야만족이 들끓는 대륙 북쪽 끝자락 ‘동토(凍土)’다. 그래서 그들은 그곳에 거대한 방벽을 세워 야만족이 남쪽으로 내려오지 못하도록 공동으로 파수(把守)를 본다. 그것은 마치 북유럽 신들의 파수꾼인 헤임달이 비프로스트 입구에서 거인들의 침략을 감시하는 것과 유사하다. 

    ‘진격의 거인’은 어느 날 갑자기 지구에 나타난 엄청나게 큰 거인들의 무차별적인 공격으로부터 살아남기 위해 사투를 벌이는 인류의 생존기다. 이 만화에서 인류는 거인의 공격에 대비해 어마어마한 원형 방벽을 3개나 세워 그 안에 거주한다. 마치 북유럽 신화에서 신들이 거인들의 공격에 대비해 성벽을 재건한 것과 같다. 3개의 방벽은 각각 1차, 2차, 3차 저지선 구실을 한다. 첫 번째 방벽이 뚫리면 그 안에 살던 사람들은 두 번째 성벽 안으로 피신하는 방식이다. 아울러 인류는 방벽 안에서 제한된 일상생활을 하면서도 거인들을 제압하기 위해 거인 포로를 이용해 그들의 약점을 연구하면서 그들과 싸울 전사들을 훈련시킨다. 

    그렇다면 끊임없는 갈등과 충돌만 일으키다가 결국 파멸로 이끄는 거인들은 과연 무엇을 상징할까. 거인들은 무엇보다 당대 인간이 절대 다스릴 수 없었던 거대한 자연의 힘을 형상화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고대 북유럽 사회에서 혹독한 겨울 등 거친 자연환경은 인간들이 살아가는 데 최대 난관이었을 것이다. 우리 시대의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처럼 당대 인간이 풀어야 할 절체절명의 숙제였을 것이다. 아마 신이나 대적할 수 있는 거대한 폭력으로 여겨졌을 것이다. 그 폭력이 바로 북유럽 신화에서 거인들로 형상화된 것은 아닐까. 



    그런데 그 거인들은 수천 년이 흘러도 끈질기게 살아남아 현재에도 활개를 친다. 가령 유창한 화술로 심신이 유약한 사람들을 조종하는 사이비 교주나, 권력과 돈으로 약자를 억압하는 자들, 그리고 피부색이나 종교와 신념이 다르다는 이유로 차별하고 멸시하는 자들이 바로 북유럽 신화 거인들의 아류다. 영화 ‘어벤져스 시리즈’에서 영웅들이 응징하는 악당들도 모두 북유럽 신화 속 거인들의 변종이다. 다른 점이 있다면 신화의 거인들은 신들과 대등한 세력 관계를 유지하지만, 영화 속 악당들은 늘 영웅들에게 패배한다는 것이다.

    프리그의 꿈, 신들의 시험

    발데르, Johannes Gehrts, 1901

    발데르, Johannes Gehrts, 1901

    대중이 ‘어벤져스 시리즈’에 열광하는 이유다. 악당들을 일망타진하는 영웅들을 통해 대리만족을 느낀다. 어떤가. 우리 시대의 현실을 보건대, 거인들이 패배하지 않고 신들과 함께 몰락하는 북유럽 신화가 훨씬 더 울림을 주지 않는가. 신화는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현상의 ‘원형질’이라고 말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이제 ‘신들의 모험’에 대해서는 이 정도로 정리하고, 이후에 전개되는 ‘라그나뢰크’에 대해 살펴보자. 북유럽 신화에서 ‘라그나뢰크’의 전조는 빛의 신 발데르가 갑자기 죽으면서 나타난다. 빛의 신의 죽음은 이 세상에서 희망의 빛이 사라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발데르는 오딘과 프리그의 아들로 신들 중 용모가 준수하고 가장 착했다. 또한 가장 공정해서 신들의 존경과 사랑을 한 몸에 받았다. 신들은 그가 팥으로 메주를 쑨다고 해도 믿을 정도였다. 어느 날 발데르가 어머니 프리그를 보러 갔다가 깜박 잠이 들었는데, 꿈속에서 정체를 알 수 없는 괴물에게 쫓기다가 막 잡히려는 순간 깜짝 놀라 깨어났다. 프리그는 아들의 꿈을 전해 듣고 불길한 예감이 들어 당장 아홉 세상을 돌아다니면서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에게 아들 발데르를 해치지 않겠다는 맹세를 받아냈다. 들짐승과 날짐승뿐 아니라 모든 신과 인간, 난쟁이들, 심지어 거인들까지도 설득해 맹세를 받아냈다. 

    프리그는 그래도 마음이 놓이지 않자 생명이 없는 돌멩이나 바위, 그리고 금속이나 나뭇가지에도 맹세를 받아내고서야 비로소 안심했다. 프리그로부터 소식을 전해 들은 신들은 자신들이 좋아하는 발데르가 정말 모든 위험으로부터 안전한지 확인해야 직성이 풀릴 것 같았다. 그래서 아스가르드의 이다볼 평원 광장에서 한번 시험해 보기로 했다. 광장은 아스가르드에 있는 신들이 모두 모여드는 바람에 그야말로 발 디딜 틈이 없을 정도였다. 모두들 발데르가 어디 있는지 찾느라 사방을 두리번거리던 사이, 어디선가 “와~” 하는 함성이 들려왔다. 신들이 그곳을 바라보니 발데르 주변에 있던 신들이 땅에 있는 돌멩이와 막대기를 주워 발데르를 향해 던지고 있었다. 발데르는 그것을 머리 등에 정통으로 얻어맞고도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두 팔을 양쪽으로 벌리며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그러자 신들은 계속해서 강도를 높였고, 그에게 돌과 나무를 던졌다. 여전히 발데르가 아무런 해를 입지 않자 이제는 아예 발데르를 적당한 거리에 세워놓고 제대로 던져보기로 했다. 마음 약한 여신들은 차마 맨 정신으로는 못할 짓이라며 포기했지만, 남신들은 대부분 제비를 뽑아 번호표를 받아들고 자기 차례를 기다렸다. 처음에 던진 신들은 마치 워밍업처럼 돌이나 막대기를 살짝 던졌지만, 순번이 지나갈수록 던지는 물건이 험악해졌고 강도도 세졌다. 그들은 막대기를 창처럼 뾰족하게 깎아서 던지기도 했고, 쇠구슬을 던지기도 했다. 단검을 던지기도 했으며 창을 날리기도 했다. 급기야 어떤 신은 아예 발데르의 머리를 과녁 삼아 화살을 날리기도 했지만 털끝만큼도 상처를 입히지 못했다. 거의 모든 신이 발데르가 무사한 것을 확인하고 환호성을 지르며 즐거워하고 있었건만 로키만은 왠지 그게 전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는 축제처럼 3일 동안이나 계속되던 소위 ‘발데르 맞히기 게임’을 멀찌감치 떨어져 바라보면서 그 모든 공격을 무위로 만들어버리는 발데르에게 괜히 심술이 났다. 또한 신들이 발데르만 좋아하고 싸고도는 데 질투심이 폭발했다. 그는 축제 둘째 날에 어떻게 하면 신들을 골탕 먹일 수 있을까 궁리했다. 다음 날 아침이 되자 로키는 특유의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자신의 궁을 나섰다. 그가 향한 곳은 바로 오딘의 아내 프리그의 궁전 펜살리르였다. 로키는 프리그의 궁전 앞에서 주위를 한 번 둘러본 다음 주문을 외우더니 대지의 여신인 표르긴의 모습으로 변신한 다음 궁으로 들어갔다. 표르긴은 천둥 신 토르의 어머니다. 나이가 들어 허리가 꼬부라졌고 귀가 어두워 일선에서 물러나 아들의 궁전에 있는 방에서 지내고 있었다. 프리그가 그녀를 반갑게 맞이하며 “축제가 어떠셨느냐”고 묻자, 그녀는 기다렸다는 듯 “발데르가 아무런 상처를 입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신들이 그에게 함부로 무기를 던지는 것은 옳지 않다”고 했다. 그러면서 “모든 무기를 온몸으로 받아내는 발데르가 불쌍하다는 생각이 든다”며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겨우살이는 발데르의 가슴을 관통하고…

    발데르의 죽음, Christoffer Wilhelm Eckersberg, 1817

    발데르의 죽음, Christoffer Wilhelm Eckersberg, 1817

    프리그는 그 말을 듣더니 자신이 아홉 세상에 있는 모든 것에게 아들 발데르를 해치지 않겠다는 맹세를 받아놨으니 걱정하지 말라며 안심시켰다. 노파는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정말 아홉 세상에 있는 모든 것에게 맹세를 받은 것이 확실하냐”고 물었다. 그러자 프리그는 그제야 뭔가 생각났는지 발할라 궁전 서쪽 숲 한가운데에 우뚝 서 있는 커다란 참나무에 기생하는 겨우살이는 찾아가서 만나보니 너무 여려 보여 그럴 필요를 느끼지 못해 맹세를 받지 않았지만, 그까짓 겨우살이 주제에 발데르에게 해코지를 할 수는 없을 것이라고 힘주어 말했다. 

    노파는 프리그가 겨우살이 얘기를 꺼내는 순간 하마터면 탄성을 지를 뻔했다. 자신이 정말 얻고 싶은 정보를 얻었으니 이곳에 더는 머무를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그는 프리그에게 아침부터 시간을 너무 많이 뺏어 미안하다며 허둥지둥 작별인사를 하고 궁 밖으로 나와서는 다시 주문을 외워 원래 모습으로 돌아왔다. 이어 부리나케 발할라 궁전 서쪽 숲으로 달려가 프리그가 말한 그 참나무에 올라가 그곳에 기생하는 겨우살이 가지 하나를 뜯었다. 그것을 들고 축제장인 이다볼 평원 광장으로 득달같이 달려갔다. 광장은 축제 마지막 날이라 그런지 더 성황을 이루고 있었다. 아마 첫째 날과 둘째 날에 미처 오지 못한 신들까지 합류해서였을 것이다. 

    로키가 주변을 둘러보니 심지어 발데르의 눈먼 동생 호드까지 보였다. 그는 호드를 보는 순간 번갯불처럼 신들을 골탕 먹일 수 있는 좋은 계획이 떠올랐다. 그는 천천히 호드에게 다가가더니 오른손으로 그의 옆구리를 찌르며 알은체했다. 호드가 즉시 로키임을 알아보고 경계심을 늦추지 않았다. 로키는 넌지시 그도 한 번 발데르 형에게 무엇을 던져보라고 권했다. 호드는 자신은 앞을 보지 못하는데 어떻게 그럴 수 있겠느냐며 반문했다. 로키는 기다렸다는 듯이 자기가 도와줄 테니 한번 던져보라며 그의 손에 슬며시 겨우살이를 쥐여주었다. 

    호드가 무엇이냐고 묻자 아주 여린 겨우살이라 발데르에게 전혀 해가 되지 않을 것이라고 하면서 그를 우선 선수로 등록시켰다. 이어 그의 차례가 될 때까지 게임장의 약도를 자세하게 설명해 준 다음 겨우살이를 들고 어느 방향으로 어느 정도의 세기로 던져야 하는지 실전처럼 몇 번이나 연습시켰다. 드디어 그의 차례가 되자 호드는 연습한 것처럼 오른손에 겨우살이를 들고 멀리 서 있는 발데르 형을 향해 힘껏 던졌다. 겨우살이는 허공을 가르며 정확하게 발데르의 가슴을 꿰뚫었다. 아마 로키가 마법을 걸어 호드가 겨우살이를 던지는 순간 단단한 화살로 만들었기 때문일 것이다. 신들은 호드가 던질 때 로키가 거드는 것이 수상하기도 했지만, 이번에도 모두 즐겁게 웃을 준비를 하고 있었다. 하지만 겨우살이를 맞은 발데르가 가슴에서 피를 흘리며 꼬꾸라지자 모두 놀라 말을 한동안 잃었다. 

    게임장은 일순간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신들은 발데르의 시신을 둘러싸고 침통한 표정을 감추지 못하고 아무 말 없이 서 있었다. 그러다 불현듯 생각난 것처럼 일제히 로키와 호드에게로 시선을 향했다. 신들은 비록 호드가 겨우살이를 던지기는 했어도 그 배후에는 로키가 있다는 사실을 확신하고 있었지만, 그를 당장 잡아서 죽일 수는 없었다. 신성한 아스가르드는 어떤 피로도 오염시켜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신들은 그저 그들을 노려볼 수밖에 없었다. 호드는 신들의 원망 어린 눈초리를 직접 볼 수는 없어 그저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지만, 로키는 뒷걸음질 치며 얼른 그곳을 빠져나왔다.

    저승에 있는 형을 데리러 간 동생 헤르모드

    발데르를 죽음에 이르게 한 로키를 공격하는 동물들, Elmer Boyd Smith, 1902

    발데르를 죽음에 이르게 한 로키를 공격하는 동물들, Elmer Boyd Smith, 1902

    로키가 도망치고 나서야 한 여신이 울음보를 터뜨렸다. 다른 여신들도 함께 울음보를 터뜨렸고, 남신들도 흐느끼기 시작했다. 오딘은 가장 사랑하는 자식을 잃은 슬픔에 그 누구보다도 고통스러웠지만, 울음을 꾹 참으며 신들을 달래면서 회의장인 글라드스헤임으로 안내했다. 오딘은 자식을 잃은 슬픔보다도 발데르의 죽음이 예시해 주는 암울한 미래가 더 걱정스러웠다. 오딘은 발데르의 죽음을 본능적으로 ‘세계 종말의 전조’로 이해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오딘이 사태 수습을 위해 모두 발언을 하려는 순간 아내 프리그가 혹시 신들 중 저승까지 내려가서 발데르를 다시 데려올 분이 없는지 물었다. 저승을 지키는 헬 여신에게 발데르의 몸값을 지불하고 발데르를 다시 아스가르드로 데려와 준다면 무엇이든지 주겠다는 것이다. 여신들이 그 말을 듣고 반색하며 좌중을 둘러보는 사이 오딘과 프리그의 또 다른 아들 헤르모드가 선뜻 그 일을 맡겠다며 앞으로 나섰다. 몇몇 신도 발데르를 살리는 일에 자원하려 했지만, 그와 가장 가까운 형제가 나서자 단념했다. 

    발데르 부활 작전이 펼쳐지면서 잿빛처럼 변해버린 신들의 얼굴에서 다시 생기가 돌기 시작했다. 오딘은 하인들을 시켜 먼 길을 떠나는 헤르모드에게 자신의 애마 슬레이프니르를 갖다주도록 했다. 아버지로부터 고삐를 넘겨받은 헤르모드는 말에 올라탄 채 땅바닥에 누워 있는 발데르의 시신을 한 번 쳐다보고는 박차를 가해 달리기 시작했다. 

    오딘을 비롯한 아스 신들은 그날 밤 글라드스헤임을 떠나지 않은 채 죽어서도 여전히 얼굴에서 빛을 잃지 않는 발데르의 시신을 지키며 그를 추모했다. 그들은 헤르모드가 과연 지하 세계에서 자신들이 그토록 사랑하는 발데르를 데려올 수 있을지, 비록 고의는 아니었어도 발데르를 죽인 호드와 발데르를 죽음으로 내몬 로키에게 어떤 벌을 내려야 할지, 발데르의 죽음이 앞으로 어떤 파국을 몰고 올지 등 여러 생각으로 잠을 이루지 못했다. 다음 날 동이 트기 시작하자 젊은 남신 4명이 발데르의 시신을 떠메고 글라드스헤임을 떠나자 나머지 신들이 그 뒤를 따르기 시작했다. 장례 행렬이 아스가르드의 이다볼 평원을 지나는 동안 그 뒤를 따라는 행렬은 점점 불어났다. 

    발데르의 시신이 도착한 곳은 아스가르드 바닷가 항구에 있는, 평소 발데르가 애용하던 그의 배 링호른 옆이었다. 신들은 발데르의 시신을 아스가르드의 관례대로 선장(船葬)을 시킬 생각이었다. 선장은 시신을 배에 안치한 후 불을 질러 바다에 띄워 보내 수장시키는 것을 말한다. 신들은 우선 링호른을 바다로 띄우기 위해 모두들 힘을 합해 선미에서 힘껏 배를 밀었지만 배는 꿈적도 하지 않았다. 어제 발데르가 죽은 이후에 그를 애도하느라 힘을 소진한 신들은 배를 바닷가까지 옮길 힘이 남아 있지 않았던 것이다.

    늑대를 타고 나타난 거인족 히로킨

    발데르의 선장(船葬), Louis Moe, 1898

    발데르의 선장(船葬), Louis Moe, 1898

    오딘은 천하장사로 알려진 거인족 여인 히로킨을 부르러 전령을 보냈다. 얼마 후 히로킨은 독사로 만든 고삐를 쥔 채 커다란 늑대를 타고 나타났다. 오딘은 히로킨이 늑대에서 내리자 늑대를 4명의 베르세르크족 영웅의 혼령들에게 맡겼다. 늑대는 그들을 보자 흥분하며 달려들었다. 베르세르크족은 원래 늑대의 가죽을 입고 전투를 벌였는데, 아마 그 모습을 보고 자신들의 적으로 간주했던 것 같다. 베르세르크 영웅들은 처음에는 늑대를 달래보려 했지만, 녀석이 워낙 미친 듯이 난동을 피우자 하는 수 없이 4명이 합동으로 공격해 녀석의 숨통을 끊어놓았다. 

    히로킨은 자신의 늑대가 그런 일을 당한 줄도 모르고 으스대며 발데르의 배가 있는 쪽으로 걸어가서는 나보란 듯이 주위를 한 번 둘러보더니 뱃머리를 한 손으로 살짝 잡아당겨 배를 가뿐히 굴림대 위로 올려놓았다. 주변에 있는 신들이 놀라는 표정을 지으면서 그 광경을 지켜보는 사이 히로킨은 다시 뱃머리를 잡더니 냅다 앞으로 달렸다. 그러자 배 밑에 깔려 있던 통나무 굴림대가 연기와 함께 우당탕탕 큰소리를 내며 구르면서 배를 순식간에 해안가로 밀어냈다. 토르는 장례식에 쓸 발데르의 배를 함부로 다루는 히로킨을 보고는 달려가 요절을 내고 싶었지만 다른 신들의 만류로 뜻을 이룰 수 없었다. 

    한 사람의 인품은 그 사람이 죽은 다음에야 제대로 파악할 수 있다고 했던가. 발데르의 장례식에는 아스가르드의 신들뿐 아니라 스바르트알프헤임과 요툰헤임에서 온 장례 사절단도 참석했다. 개인 자격으로 온 난쟁이들과 거인들도 있었으니 발데르는 그야말로 통합의 상징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인간들도 만약 아스가르드에 올 수만 있었으면 장례 사절단을 보냈을 것이다. 하지만 북유럽 신화에서 인간들은 신들의 세계인 아스가르드에는 죽은 영웅이 아니면 절대 들어갈 수 없다. 어쨌든 신들은 발데르의 배를 해안 말뚝에 단단히 묶은 다음 장례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링호른 연기구름 남기며 떠나간 발데르

    발데르에게 마지막으로 작별 인사를 하는 오딘, W. G. Collingwood, 1908

    발데르에게 마지막으로 작별 인사를 하는 오딘, W. G. Collingwood, 1908

    신들은 먼저 배 중앙의 돛대를 묶는 기둥 옆에 장작을 가지런히 쌓았다. 그러자 젊은 남신 4명이 아까 링호른이 있던 곳에 잠시 내려둔 발데르의 시신을 다시 운구해 와 장작 위에 올려놓았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 남편의 시신을 마지막으로 살펴보던 발데르의 아내 난나가 갑자기 몸을 사시나무 떨 듯 부르르 떨며 쓰러지더니 일어날 줄을 몰랐다. 여신 몇몇이 비명을 지르며 그녀에게 다가가 부축하려 했지만, 그녀는 이미 가슴이 시퍼렇게 멍든 채 피를 토하며 숨을 거둔 후였다. 그녀는 마지막으로 남편의 얼굴을 대하는 순간 슬픔이 북받쳐 올라 심장이 터져 급사한 것이다. 신들은 애통해하며 상의 끝에 그녀의 시신을 남편 옆에 나란히 뉘었다. 

    링호른의 화장단에 불을 붙여 바다로 띄워 보내기 전 마지막 의식으로 그 안에 여러 가지 부장품을 넣었다. 우선 발데르와 난나가 끼고 있던 장신구들을 시작으로 부부가 쓰던 생활용품을 차례로 넣었다. 이어 발데르가 죽은 이후 먹이도 먹지 않고 물도 마시지 않던 그의 애마도 죽여 주인 옆에 나란히 뉘었다. 마지막으로 발데르의 아버지 오딘이 링호른 위로 올라가 자신이 아끼던 황금 팔찌 드라우프니르를 천천히 팔에서 빼 발데르의 팔에 끼워 주었다. 아들을 한참 동안 쳐다본 다음 귓가에 대고 마지막 작별인사를 나누었다. 

    링호른에서 내려온 오딘이 신호를 하자 시종 하나가 횃불을 들고 링호른에 승선해서 마침내 화장단에 불을 붙이고 내려왔다. 화장단이 활활 타오르자 누군가 배를 말뚝에 묶은 줄을 도끼로 내리쳐 끊었고 배는 천천히 바다 쪽을 향해 나아갔다. 장례식에 참석한 모든 이의 시선이 바람결에 흘러가는 배를 따라갔다. 마치 오늘날 화장터에서 관이 불구덩이에 들어가는 순간 가족들이 흐느끼기 시작하는 것처럼, 가장 준수하고 가장 착했으며 가장 공정한 신을 떠나보내야만 하는 것에 슬퍼하며 오열하기 시작했다. 모두들 그렇게 링호른이 하늘로 커다란 연기구름을 남기면서 수평선 너머로 사라질 때까지 해안가를 떠날 줄 몰랐다.


    김원익
    ● 1961년 전북 김제 출생
    ● 연세대 독문학과 졸업(문학박사), 독일 마부르크대 수학
    ● 신화연구가, (사)세계신화연구소 소장
    ● 저서 : ‘신화, 인간을 말하다’ ‘그림이 있는 북유럽 신화’ 외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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