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10월호

에세이

회사에서 잘리던 날

  • 최고운 작가

    .

    입력2020-10-11 10: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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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회사에서 잘리던 날, 광화문에서 택시를 타고 곧장 망원시장으로 향했다. 늘 다니던 출퇴근길 그대로 버스도 전철도 타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교동족발에 들러 족발 1인분과 막걸리 한 병을 사서 자취방으로 돌아왔다. 좁은 방 한가운데 간신히 소반 크기를 면한 술상을 펼치고 그 앞에 혼자 앉았다. 눈물이 와르르 쏟아질 타이밍인데 허기진 상태에서 막걸리 반병을 급히 마시고 나니 온몸이 흐물흐물 풀어지더니 그대로 등짝이 뒤로 넘어갔다. 방바닥에 대자로 뻗고 나니 천장이 뱅글뱅글 돌면서 잠이 쏟아지려 했다. 엄마 생각이 났다. 우리 집 늙은 개가 꾸벅꾸벅 졸고 있으면 엄마는 지치지도 않고 늘 같은 잔소리를 졸고 있는 개에 대고 했다. “이놈아 네가 무슨 수능을 앞둔 고3이라도 되냐? 누가 본다고 눈치를 보고 졸고 있어, 졸리면 퍼질러 자는 게 개 팔자라서 좋은 건데!”

    “버텨낼 재간이 없었다”

    반쯤 감긴 눈으로 긴 주둥이를 끄덕이며 졸다가 엄마의 잔소리에 벌떡 잠이 깨 꼬리를 치던 우리 개의 얼굴이 떠올라 웃음이 났다. ‘웃자. 웃어버리자. 그리고 회사에서 잘리고 혼자 돌아온 자취방에서 족발 몇 조각에 막걸리를 먹다 취해 방바닥에 철썩 붙어버린 나를 창피해 말자. 누가 본다고. 나를 보는 건 나밖에 없는 이런 순간에까지 눈치 보지 말자, 다시는 그렇게 살지 말자’ 다짐을 하고 나니 그제야 눈물이 찔끔 나왔다. 

    그 시절의 나는 도저히 인생을 버틸 재간이 없었다. 실패의 날들을 깨끗하게 인정하고, 일단은 멈추어야 할 타이밍이 온 것이다. 멈추면 다시 시작할 수 없을까 봐 방향도 모르고 휘적휘적 나아가던 그 동력도 다 돼버린 것이다. 일종의 번아웃(소진 상태) 같은 거였다. 그때 내가 프리랜서로 하던 일들은 클라이언트에게 돈을 떼어 먹히기 일쑤였고 구직에는 연달아 실패했다. 

    경기가 좋지 않다는 말은 너무 자주 들어서 아무런 위로가 되지 않았다. 어렵게 들어간 회사에서 또다시 경기 탓으로 해고당했을 때는 가족보다 먼저 친구에게 전화를 걸었다. 나는 구조 요청을 하듯 말했다. “어디 제주도라도 혼자 다녀오고 싶어.” 물리적으로라도 이 각박한 서울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지 않으면 이 매정한 도시가 나를 잡아먹을 것만 같아 숨이 막혔다. 친구는 나를 위해 인도행 비행기 표를 끊어주었다. 그로부터 인도로 떠나는 날까지 열흘 동안 매일매일 술을 마셔댔다.

    “당신은 우리와 함께 갈 수 없습니다”

    배낭을 꾸리는 데도 한참이 걸렸다. 대학을 졸업하고 반년 만에 취직한 뒤 10년이라는 기간 동안 단 한 번도 긴 휴가를 가져본 적이 없다는 사실이 그제야 떠올랐다. 어떻게 짐을 싸야 하는지조차 모르다니. 조금은 한심했다. 그때까지 내 인생은 금요일까지 이 직장에 다녔으면 다음 주 월요일부터 새 직장에 다니는 식이었다. 쉰다는 것은 돈 벌기를 멈춘다는 의미였고, 그것은 등록금 대출에 이어 자동차 대출까지 갚아야 하는 나를 견딜 수 없이 불안하게 만들었다. 이제와 생각해 보면 내 청춘에 가장 안타까운 시절일지 모른다. 쉼표를 찍을 줄 모르고 정신없이 달리다가 내 의사와는 무관하게 마침표를 찍었으니 말이다. 



    물론 사회 초년생 시절을 지나면서 나도 내가 사회라는 화단에서 가장 아름다운 꽃이 아니라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현실감각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다만 내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기만 하면 된다고 굳게 믿었었다. 세상은 다양한 사람이 각자의 자리에서 힘을 내야 굴러가는 곳이라 배웠으니까. 그 배움이 영 틀린 것은 아니었으나 열심히 살고 최선을 다하는 것이 꼭 좋은 결과로 이어지지는 않는다는 걸 배우는 건 쉽지 않았다. 래퍼를 뽑는 서바이벌 TV 프로그램에서 “당신은 우리와 함께 갈 수 없습니다”라는 말이 반복적으로 나올 때는 바로 저게 냉정한 사회의 현실이라며 저 사람은 저게 부족했고, 이 사람은 이게 모자랐다고 잘도 분석했지만 말이다. 굳은 표정의 심사위원들 앞에 홀로 선 사람이 바로 내가 됐을 때는 결과를 깨끗하게 받아들이기가 너무 힘들었다. 

    사장 방에 불려가 “미안하지만 퇴사를 해달라”라는 말을 들은 바로 그 순간 비로소 ‘당신은 우리와 함께 갈 수 없습니다’가 나의 현실이 돼버렸다. 회사 사정이 어려워졌다는 말에 ‘그런데 왜 나가야 하는 사람이 나여야만 하느냐’고 되묻고 싶었다. “사실상 당신이 하는 일의 중요도가 높지 않아 당신의 자리부터 필요하지 않게 됐다”라는 말에는 ‘그럼 그동안 한 야근은 무슨 의미였느냐’고 묻고 싶었다. 패자부활전을 노리는 래퍼처럼 사장의 얼굴에 속사포 랩을 퍼붓고 싶었지만, 실제로 내가 뱉은 말은 “네, 알겠습니다”였다. 그나마도 아주 작게 들릴 듯 말 듯한 목소리로.

    빨랫줄과 소주 두 병

    그렇게 엉망진창의 상태로 열흘을 보내고 마지막으로 배낭을 확인했다. 빠진 물건은 없겠지. 없으면 거기도 사람 사는 곳이니 돈을 주고 살 수 있겠지. 나는 스스로를 안심시키며 드디어 배낭을 다 꾸렸다는 문자메시지를 친구에게 보냈다. 친구는 배낭여행이 처음인 내게 두 가지 조언을 해주었다. 하나는 한 달이 넘는 장기 여행 중 가장 골치 아픈 것 중 하나가 옷가지를 빨아서 널고 말리는 일이니 빨랫줄을 가져가면 무척 요긴하다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언젠가 꼭 유용한 순간이 올 테니 그때를 대비해서 플라스틱 소주 두 병을 챙겨 가라는 것이었다. 친구는 “네가 마시게 되든 아니면 여행지에서 만난 낯선 이에게 선물을 하게 되든 기가 막힌 타이밍을 만나게 될 거다”라고 일러줬다. 

    드디어 공항으로 가는 날이 밝았다. 이른 아침 구겨진 슬리퍼에 무릎이 튀어나온 추리닝 바지 차림으로 세수도 하지 않고 집 앞 슈퍼로 갔다. 식료품 코너를 지나 좁게 난 통로를 쭉 걸어 끝까지 당도하니 이런저런 생필품을 파는 코너가 나왔다. 나는 구부정하게 쪼그리고 앉아 바닥에 놓인 박스를 뒤적였다. 그리고 그 안에서 주황색 빨랫줄 뭉텅이를 하나 집어 들었다. 마지막으로 냉장고가 죽 늘어선 곳으로 가 친구의 조언대로 플라스틱 병 소주도 두 개 챙겼다. 

    물건이 새로 들고나느라 고요하면서도 분주한 이른 아침 시장 골목의 공기 속에 나 혼자만 잠이 덜 깨 멍한 상태로 계산대 앞에 줄을 섰다. 차례가 오자 나는 무심하게 빨랫줄과 소주 두 병을 툭 내려놓았다. 나를 흘끔 쳐다보고 다시 물건으로 시선을 돌린 슈퍼 주인아저씨가 불쑥 말을 건넸다. “아가씨, 자살해?” “예에?” 갑자기 웃음이 터졌다. “나야 뭐 장사하는 사람이라 팔긴 팝니다만~” 소주병을 차례로 집어 바코드를 찍는 아저씨의 심드렁한 말투에 웃음이 터져버렸다. 

    나는 모처럼 밝은 음색으로 그게 아니라 여행을 떠난다고 웃어 보였다. 그랬다. 어찌 보면 살기 위해 죽으러 가는 기분이었다. 아등바등하며 살아도 번번이 미끄러지던 나를 일부러 먼 곳까지 데리고 가서 아주 산뜻하게 과거의 나를 죽이고 거기서부터 새롭게 태어나러 가는 그런 기분이었다. 그렇게 나는 뜻밖의 개운한 마음으로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이것은 내가 화단에서 솎아진 첫 번째 경험이다. 다행히 이후에도 몇 번의 솎아짐이 있었고, 경험이 쌓일수록 술도 여행도 필요하지 않게 됐다. 내가 ‘불행’이 아니라 ‘다행’이라고 말하는 이유가 여기 있다. 화단에서 솎아져도 또 다른 흙이 있다는 걸 알게 된 순간, 나는 비로소 어른이 됐다. 서바이벌 TV 프로그램이 끝났다고 해서 거기 나온 출연자들의 삶이 끝난 게 아닌 것처럼 말이다. 

    그래, 나는 참 열심히 살았고 자랐다. 태어났고, 아직 죽지 않았으므로. 여러 화단을 오가면서 얕은 뿌리를 내리기도 했고, 억지로 뽑히다가 잔뿌리를 다치기도 했다. 그래도 다행이다. 주목받는 꽃은 아니더라도 어쨌거나 지금 여기에 이렇게 뿌리내리고 있으니까. 어찌 됐든 열심히 자랐으니 앞으로도 그저 쑥쑥 크자. 나는 잡초에도 물을 주는 소중한 마음으로 살아보기로 했다. 지금까지 이런저런 우여곡절을 넘기면서도 일단은 열심히 살았고 그만큼 자랐으니, 앞으로도 쑥쑥 커보기로 마음먹었다.

    최고운 | 1979년 생, 에세이집 ‘아무날도 아닌 날’, ‘멀쩡한 어른 되긴 글렀군’ 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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