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1월호

“혐생에 치인다, ㅇㅈ?” 신조어로 본 MZ세대 특징

[사바나]

  • 김건희 객원기자

    kkh4792@donga.com

    입력2020-12-21 10: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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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ㅇㅈ’은 ‘이응 지읒’ 아닌 ‘인정’ … 초성으로 축약하기

    • ‘대통령’→‘머통령’, ‘동묘’→‘동豆’ … 한글 자모 바꾸는 야민정음

    • ‘나레기’ ‘노답’ ‘이생망’ … 암울한 청년 현실 반영

    • “언어체계 해체·독창적 재구성에서 짜릿함·즐거움 느껴”

    밀레니얼 플레이풀 플랫폼 ‘사바나’는 ‘회를 꾸는 ’의 줄임말입니다.

    MZ세대가 즐겨 쓰는 신조어는 ‘ㅇㅈ’을 비롯한 초성체만이 아니다. 기존 단어를 비슷한 모양 글자로 변형해 표현하는 ‘야민정음’도 인기다. [GettyImage]

    MZ세대가 즐겨 쓰는 신조어는 ‘ㅇㅈ’을 비롯한 초성체만이 아니다. 기존 단어를 비슷한 모양 글자로 변형해 표현하는 ‘야민정음’도 인기다. [GettyImage]

    “금요일 밤 11시쯤 야식으로 힘 좀 보충해야 함. 다들 ㅇㅈ? 다이어트는 물 건너가고…. ㅁㅊㄷ ㅁㅊㅇ. 그래도 잘 먹으면 면역력 강화되고 잠 푹 잘 수 있으니까 ㄱㅇㄷ.” 

    20, 30대가 주로 모여 소통하는 한 온라인 커뮤니티에 올라온 게시물이다. 야식의 유혹에 넘어가 다이어트를 포기하지만 그로 인해 얻는 이점도 있다는 내용이다. 본문 내용이 대략 이해되긴 하지만 뜻 모를 글자가 군데군데 등장한다. 하지만 누리꾼들은 단번에 이해한 듯 “ㅇㅇㅈ” “ㅇㄷㄱ” “ㅇㄴㄷ” “ㄴㄱㄴ” 등의 댓글을 우르르 달았다. 도통 의미를 알기 어려운 글자의 연속이다. 대체 무슨 뜻일까.

    ‘ㅇㅈ’은 ‘이응 지읒’ 아닌 ‘인정’

    젊은 누리꾼은 ‘ㅇㅈ’을 ‘이응 지읒’이 아닌 ‘인정’으로 읽는다. ‘ㅁㅊㄷ ㅁㅊㅇ’는 ‘미쳤다 미쳤어’, ‘ㄱㅇㄷ’은 ‘개이득’이다. ‘개-’와 ‘이득’을 합쳐 만든 말로, ‘매우 크게 이득을 보았다’는 뜻이다. 여기서 ‘개-’는 다른 단어에 붙어 부정적인 뜻을 강조하는 접두사로 쓰이지만 요즘 젊은이들 사이에는 매우, 정말을 뜻하는 말로 사용된다. 

    댓글에 등장한 글자도 살펴보자. ‘ㅇㅇㅈ’은 ‘어, 인정’, ‘ㅇㄷㄱ’은 ‘어, 동감’이다. ‘ㅇㄴㄷ’는 ‘야’와 ‘나두(나도)’의 합성어로, ‘나도 그렇다’는 뜻이다. ‘ㄴㄱㄴ’는 ‘너의 의견이 곧 나의 의견이다(너곧나)’의 줄임말로, ‘네 말에 동의한다’는 의미다. 요즘 인터넷 공간에서 상대 의견이나 제안에 동의할 때 자주 쓰이는 표현이다. 이처럼 단어의 초성만 표기하는 인터넷 어투를 ‘초성체’라고 한다. 



    과거에도 축약어가 유행하지 않은 건 아니다. ‘옥상에서 떨어진 메주’를 줄여 ‘옥떨메’라고 하고, ‘아니꼽고 더럽고 메스껍고 치사하다’를 ‘아더메치’라고 했다. 지금도 아이돌 그룹의 잘생긴 멤버를 ‘비담(비주얼 담당)’이라고 하는 등 긴 표현을 두세 음절로 압축하는 줄임말이 널리 쓰인다. ‘싸강(사이버강의)’ ‘라방(라이브 방송)’ ‘영끌(영혼까지 끌어모으다)’ ‘주린이(주식+어린이, 초보 주식투자자)’ 등 이 부류에 속하는 유행어도 많다. 초성체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간 방식이다. 

    인터넷 공간에 초성체가 처음 등장한 건 온라인 게임이 유행하던 2000년대 이후부터다. 온라인 게임을 할 때는 보통 오른손으로 마우스를 조작한다. 그러면서 왼손으로 채팅창에 글자를 빠르게 입력해야 하므로 ‘ㄱㄱ(고고·GoGo)’를 비롯해 ‘ㄹㄷ(레디·게임 준비 마쳤다)’ ‘ㅈㄱ(즐겜·즐겁게 게임하자)’ 등 간단하고 의미 전달이 빠른 초성체가 유행했다. 웃긴다는 감정을 표현하는 ‘ㅋㅋ’ ‘ㅎㅎ’ 등의 표현이 나타난 것도 이 무렵부터다. 

    스마트폰이 대중화한 2010년을 전후해 초성체는 한 단계 더 발전했다. 모바일 메신저와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등을 기반으로 한 의사소통이 활발해지면서 초성체가 일상 대화의 영역까지 진출한 것이다. 처음 만들어진 건 ‘ㅊㅋ(축하)’ ‘ㄱㅅ(감사)’ ‘ㅈㅅ(죄송)’ 등의 인사말이었다. 이후 ‘ㅎㄷㄷ(후덜덜·몹시 놀랍거나 무서워함)’ ‘ㅂㄷㅂㄷ(부들부들·몸을 부르르 떨 정도로 분노함)’ 같은 의태어가 태어났다.

    핵심만 남기고 생략·압축… 편리함·보안성이 장점

    최근 초성체의 쓰임은 더욱 다채롭다. ‘극혐(극도로 혐오스럽다)’의 초성만 모은 ‘ㄱㅎ’, ‘극대노(극한의 큰 분노)’의 초성을 모은 ‘ㄱㄷㄴ’, ‘어그로(aggro·분쟁)’의 초성인 ‘ㅇㄱㄹ’ 등 암호 같은 초성체가 크게 늘었다. 

    ‘ㅂㅁㄱ’ 같은 단어는 유래를 알기 전엔 도무지 이해하기 어렵다. 찬찬히 살펴보자. MZ세대(밀레니얼 세대+Z세대)는 인터넷 공간에서 상대를 도발해 적의를 갖게 만드는 행동을 하는 걸 ‘어그로를 끈다’고 표현한다. 어그로를 끄는 사람 가운데 상당수는 어떻게든 대중의 관심을 받기 원하는, 이른바 ‘관심병자’다. 자신의 ‘어그로성’ 발언에 누군가 반응을 보이면 점점 수위를 높여가며 게시판을 난잡하게 만드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누리꾼들은 인터넷 커뮤니티에 누군가 말도 안 되는 글을 올리면 괜한 분쟁에 휩쓸리지 말자는 의미에서 ‘관심병자에게 먹이를 주지 말자’는 내용의 댓글을 단다. 이 말의 축약어가 ‘병먹금’이고, 초성만 따면 ‘ㅂㅁㄱ’이다. 이 초성체는 요즘 MZ세대 사이에서 널리 쓰인다. 

    한글학자인 김슬옹 세종국어문화원장은 “요즘 젊은 세대는 모바일 기기 사용에 익숙한 데다 간단하고 간결한 ‘인스턴트식’ 대화를 지향한다. 인터넷 공간에서 자기들만 알아볼 수 있도록 글자를 줄이고 생략한 표현을 씀으로써 또래 간 유대감과 결속력을 강화하는 것 같다”고 분석했다. 

    직장인 김세영(27) 씨도 초성체를 쓰는 이유로 속도와 보안성을 꼽았다. 김씨는 “친구들과 소통하거나 커뮤니티에 댓글을 달 때 초성체를 쓰면 빠르고 간편하다. 부모님이나 직장 상사가 내용을 봐도 무슨 뜻인지 전혀 알 수 없는 점도 좋다”고 말했다. 


    ‘대통령’ 대신 ‘머통령’, ‘동묘’ 대신 ‘동豆’

    MZ세대가 즐겨 쓰는 신조어는 초성체만이 아니다. 기존 단어를 비슷한 모양 글자로 변형해 표현하는 ‘야민정음’도 인기다. ‘귀엽다’ 대신 ‘커엽다’, ‘대구광역시’ 대신 ‘머구팡역시’라고 쓰는 식이다. 한글을 자소(字素·글자를 표시하는 최소 단위) 단위로 해체한 뒤 재조합하는 방식의 야민정음을 처음 만든 곳은 온라인 커뮤니티 ‘디시인사이드 야구갤러리’로 알려졌다. 여기서 ‘야구’와 ‘훈민정음’을 합친 ‘야민정음’이라는 명칭이 유래했다. 

    야민정음의 출발점은 ‘모양이 유사한 글자 찾기’다. 예를 들어 누리꾼들은 ‘대’를 ‘머’로 자주 바꿔 쓴다. ‘대통령’은 ‘머통령’, ‘대한민국’은 ‘머한민국’, ‘대머리’는 ‘머머리’다. 

    한글을 모양이 유사한 한자 또는 영어로 바꾸는 것도 인기다. 상당수 누리꾼이 ‘동묘’를 ‘동豆’라고 쓴다. 한자 ‘豆(콩 두)’의 모양이 한글 ‘묘’자와 닮은 데서 착안한 것이다. 과일 ‘배’는 영어 알파벳 ‘I’ ‘d’ ‘H’를 조합한 것처럼 보인다고 해 ‘IdH’라고 표기한다. 

    인터넷 커뮤니티를 돌아다니다 보면 한글을 90도 또는 180도 돌려 표기한 야민정음도 쉽게 볼 수 있다. ‘폭풍 눈물’을 각각 위아래로 뒤집어 옾높 롬곡’이라고 쓰는 식이다. “오늘 댕댕이 아파서 병원 다녀옴. 완전 옾높 롬곡 흘림.” 이 문장을 해석하면 “오늘 멍멍이(강아지)가 아파서 병원 다녀옴. 완전 폭풍 눈물 흘림”이다. 

    젊은 세대 가운데 이런 말을 쓰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여론조사기관 ‘한국리서치’가 10월 7일 전국 만 18세 이상 성인 남녀 1000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조사 결과를 봤다. ‘야민정음을 실제로 사용한 경험이 있느냐’는 질문에 20대 응답자 10명 중 6명(62%)이 ‘그렇다’고 답했다. 30대의 야민정음 사용 경험은 34%로 나타났다. 이 조사 결과 40대(57%)와 50대(62%)는 야민정음 같은 한글 변용을 ‘언어폭력’으로 인식하는 반면, 20대(70%)와 30대(48%)는 ‘언어유희’로 여기는 것으로 나타났다.

    “언어 체계 해체·독창적 재구성, 짜릿함·즐거움 느껴”

    ‘팔도 비빔면’ 출시 35주년을 기념해 2019년 출시된 한정판 ‘괄도 네넴띤’.(왼쪽) 
농심의 ‘앵그리 RtA 라면’. 라면 봉지에 흘림체로 쓴 ‘너구리’ 글씨를 180도 회전하면 알파벳 RtA처럼 보이는 데서 착안해 제품명을 지었다. [동아DB, 농심 제공]

    ‘팔도 비빔면’ 출시 35주년을 기념해 2019년 출시된 한정판 ‘괄도 네넴띤’.(왼쪽) 농심의 ‘앵그리 RtA 라면’. 라면 봉지에 흘림체로 쓴 ‘너구리’ 글씨를 180도 회전하면 알파벳 RtA처럼 보이는 데서 착안해 제품명을 지었다. [동아DB, 농심 제공]

    야민정음을 즐겨 사용하는 대학생 한소라(24) 씨는 “야민정음을 볼 때마다 한글을 독창적으로 재구성하는 누리꾼의 상상력과 기발함에 감탄한다”며 “기존 언어 체계를 해체하는 순간 느껴지는 짜릿함과 즐거움이 크다”고 말했다. ‘대박’ 대신 ‘머박’, ‘명작’ 대신 ‘띵작’이라고 쓰는 건 한글 파괴가 아니라 유쾌한 놀이라는 게 한씨 생각이다. 

    야민정음은 최근 일부 기업이 제품명을 짓는 데 활용하면서 더욱 널리 알려졌다. 식품기업 팔도는 2019년 2월 ‘팔도 비빔면’ 출시 35주년을 기념해 한정판 ‘괄도 네넴띤’을 선보였다. ‘팔도’와 ‘비빔면’이라는 글씨가 각각 ‘괄도’와 ‘네넴띤’으로 보이는 데 착안해 만든 이 제품은 출시 한 달 만에 준비 물량 500만 개가 완판될 만큼 큰 인기를 끌었다. SNS에는 ‘괄도 네넴띤’ 구매 인증 사진과 후기를 올린 게시물이 차고 넘쳤다. 

    식품기업 농심도 올 1월 ‘앵그리 RtA 라면’이라는 이름의 제품을 한정판으로 출시했다. ‘너구리’ 라면 봉지를 180도 돌리면 흘림체로 쓴 한글 ‘너구리’가 마치 영어 알파벳 ‘RtA’처럼 보인다. 이것을 제품명으로 삼은 라면은 SNS 등에서 큰 화제를 모았고, 많은 누리꾼이 “이번 제품 출시 이후 ‘너구리’ 라면이 더욱 젊고 친근하게 느껴진다”는 내용의 댓글을 남겼다. 

    최근 MZ세대 사이에서 유행하는 일부 신조어는 씁쓸한 사회상을 적나라하게 드러내기도 한다. 2010년대 후반 한국 사회를 강타한 ‘헬조선(한국이 지옥에 가깝다는 의미)’, ‘N포세대(사회·경제적 부담으로 연애·결혼·집 마련 등을 포기한 세대라는 뜻)’ 등의 단어가 대표적이다. ‘취업깡패(다른 학과보다 취업이 잘되는 학과나 사람)’ ‘넵병(상사의 지시에 거절하지 못하고 ‘넵’이라고 대답하는 사회초년생) 등의 단어도 힘겨운 젊은 세대의 삶을 반영하는 표현으로 널리 쓰인다. 최근엔 ‘이생망(이번 생은 망했다)’ ‘노답(노(NO)+정답)’·답이 없다)’ ‘나레기(나+쓰레기·나는 쓰레기다)’ 등 자기 비하 의미를 담은 단어도 계속 만들어지고 있다. “월급 들어온 지 일주일 만에 다 빠져나갔다. 역시 나레기는 노답이지. 어차피 이생망인 걸…” 같은 식이다.

    ‘혐생’에 치이는 MZ세대의 유일한 위안 ‘덕질’

    최근 젊은이들이 많이 쓰는 ‘혐생’이라는 단어는 앞 문장의 자조적 표현을 포괄하는 신조어로 볼 수 있다. ‘혐오스러운 인생’의 줄임말로, 청년세대는 물론 10대 사이에서도 인기다. 20대 직장인으로 추정되는 한 누리꾼은 최근 온라인 커뮤니티에 “이번 주 혐생에 치여 사느라 최애(최고로 애정하는 대상)가 출연한 예능 프로그램을 놓쳤다. 주말 동안 덕질(좋아하는 대상을 파고드는 행위)하며 기분 전환을 시도해야겠다. 덕질이 주는 즐거움과 위로를 위해서라면 존버(버티는 자가 승리한다)하는 수밖에 없다”고 썼다. ‘혐생에 치인다’는 건 일상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는다는 것을 뜻하는 관용어다. 

    전문가들은 청년세대가 널리 사용하는 자조적 신조어에는 이들이 마주하는 힘겨운 현실과 그로 인한 괴로운 심리 상태가 녹아들어 있다고 진단한다. 김슬옹 세종국어문화원장의 분석이다. 

    “현재 우리나라 2030세대는 이전 세대와 비교가 안 될 만큼 막강한 능력과 스펙을 쌓았다. 그런데도 앞날이 불투명하다. 그 어렵다는 취업 관문을 뚫고 직장을 구해도 삶이 불안정하다. 이런 현실에 좌절하며 ‘나레기’ ‘노답’ 같은 말로 자학의 감정을 표현하는 것으로 보인다. 우리 사회는 이러한 신조어가 생긴 배경을 파악하고 이해해야 한다. 또 이러한 신조어가 유행어를 넘어 시대정신이 되지 않도록 경각심을 가질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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