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11월호

문화유산 조선총독부의 ‘맨홀 뚜껑’이 사라진다

‘부(負)의 유산’도 보존·기록해야

  • 김영준 ‘서울의현대를찾아서’ 운영자 journey.to.modern.seoul@gmail.com

    입력2021-11-16 10:0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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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지하 문명 통로’ 맨홀, 서울 시내에만 59만여 개

    • 경성부 휘장 ‘뫼 산(山)’자가 새겨진 예지동 맨홀

    • 중일전쟁의 흔적 ‘방공수조(防空水曹)’ 맨홀

    • 영등포 맨홀, 전진기지였던 공업단지 보여줘

    • 한강변에 위치한 88올림픽 토건사업 흔적

    • 도시계획유산 가치 있지만 인정받지 못해

    [GettyIm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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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맨홀은 도시를 거닐다 보면 한 번쯤 밟고 지나가게 되는 아주 흔하디흔한 존재다. 무심코 지나치기 쉬운 맨홀 덮개는 다양한 시기와 주체에 의해 제작됐고, 시대상과 도시계획 의도를 반영했다는 점에서 일종의 도시계획유산(urban planning heritage)으로 볼 수 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현재 맨홀 덮개에 대한 체계적인 연구와 기록 및 보존은 이뤄지고 있지 않다.

    이 글을 통해 맨홀이 어떻게 서울의 과거를 보여주는지, 또한 이러한 맨홀 덮개가 하나 둘씩 사라져가는 현실에 대해 얘기해 보고자 한다. 우선 예지동에 이어 삼각지와 영등포, 한강변에 이르기까지, 서울 곳곳에 세월을 버티며 남아 있는 맨홀 덮개를 소개한다.

    식민지 시절 정서를 엿볼 수 있는 맨홀

    서울 예지동 경성부 맨홀 덮개에 새겨진 경성부 2기 휘장(왼쪽). 예지동 경성부 맨홀 덮개의 전면. [김영준 제공]

    서울 예지동 경성부 맨홀 덮개에 새겨진 경성부 2기 휘장(왼쪽). 예지동 경성부 맨홀 덮개의 전면. [김영준 제공]

    서울 종로구 예지동 시계골목. 이곳을 걷다 보면 생소한 모양의 휘장이 새겨진 콘크리트 맨홀 덮개를 발견할 수 있다. 동그란 원을 위아래로 뫼 산(山)자가 감싸고 있는 이 무늬는 일제강점기 서울을 관할하던 경성부(京城府)가 1926년 9월부터 사용하던 제2기 공식 휘장이다.

    1926년 9월 26일자 ‘동아일보’에서는 새로이 제정된 휘장에 대한 다음과 같은 상세한 설명을 확인할 수 있다.

    “一, 경성부의 京자를 그림으로 표시한 것이며, 二, 상부의 山은 북한산이요, 하부의 山은 남산이며, 중앙의 원(圓)은 경성 시가를 의미하는 것인데, 장래에는 남산을 관악산이나 남한산으로 하면 그만이다 (중략) 六, 마크의 형상은 방사형으로 이는 현대의 이상적 도시구조를 표현한 것…”



    요약하자면 이 휘장은 경성(京城)의 경(京)자에 맞추어 서울의 지형을 형상화한 것이다. 나아가 근대적인 도시계획에 근거해 팽창하게 될 경성의 미래까지 맨홀 위에 담았다고 볼 수 있다.

    예지동의 경성부 맨홀 덮개는 1920년대 후반부터 급속도로 진행된 청계천 이북 상·하수도 설치 과정에 놓인 것으로 추정된다. 수도망 정비를 통한 도시 위생 개선은 근대 도시계획에 필수 과제였다. 식민도시에서는 이러한 도시 위생 개선책이 종종 식민자의 피식민자를 대상으로 한 통치력 과시 수단으로 쓰였다. 일제강점기 서울 또한 예외가 아니다. 경성부 일본인 관료들은 도쿄와 타이베이에서 그랬듯 ‘근대적인’ 도시행정을 서울에 도입해 자신들 문명의 우월함을 과시하고자 했다.

    일본인 밀집 거주지인 남촌(현재 서울 회현동 부근)은 1920년대 초반부터 상당한 수준의 수도 인프라를 갖추고 있었다. 이와 달리 한국인 밀집 지역이던 예지동은 청계천이 하수구로서의 기능을 잃어버리고 우물 또한 상당히 오염된 상태였다. 근대적인 수도망이 매우 절실했다. 이러한 배경 속에 설치된 맨홀 덮개의 휘장은 행정기관의 단순한 심벌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일상 공간에 스며든 식민지 도시계획(colonial urban planning)의 상징이자, 피식민자와 식민자 간의 ‘수도 인프라 격차’를 보여주는 것이다.

    서울 삼각지의 경성부 소방수조 맨홀. 흘러간 세월에 비해 상태가 매우 좋다. 막다른 길에 부설돼 마모가 상대적으로 덜한 것으로 추정된다(왼쪽). 맨홀 덮개가 놓인 위치가 1930년대 후반 토지구획정리사업 당시 필지의 경계로 추정된다. [김영준 제공]

    서울 삼각지의 경성부 소방수조 맨홀. 흘러간 세월에 비해 상태가 매우 좋다. 막다른 길에 부설돼 마모가 상대적으로 덜한 것으로 추정된다(왼쪽). 맨홀 덮개가 놓인 위치가 1930년대 후반 토지구획정리사업 당시 필지의 경계로 추정된다. [김영준 제공]

    용산구 삼각지고가차도 인근에는 오래된 저수조 맨홀 덮개가 있다. ‘소방수조(消防水曹)’라는 글자와 함께 경성부 휘장이 새겨져 있다. 용산소방서 관할의 이 맨홀은 과거엔 소방용수 저수조로 사용됐다. 현재는 비어 있는 상태다. 흥미로운 것은 같은 용산소방서 관할 지역 내에는 동일한 서체와 무늬를 띤 ‘방공수조(防空水曹)’ 맨홀 덮개도 존재했다는 점이다.

    두 맨홀은 똑같이 저수조 덮개이지만 쓰임새가 달랐다. 1930년대 후반, 중일전쟁과 태평양전쟁을 거치며 ‘소방’에 더해 ‘방공’까지 강조하게 된 당시의 정서를 반영하고 있다. 삼각지고가차도 밑의 ‘소방수조’ 맨홀은 전쟁에 대한 공포가 자리 잡기 이전에 설치된 것으로 보인다.

    맨홀은 때로 80여 년 전 식민지 전진기지로 기능한 도시의 모습을 짐작게 하는 단서가 되기도 한다. 영등포역과 영등포시장교차로를 잇는 영중로의 양쪽 인도에는 경성부 휘장이 새겨진 콘크리트 맨홀 덮개가 일정한 간격을 두고 자리 잡고 있다. 보통 오래된 맨홀은 단일 개체로만 발견되는데, 영중로의 경우 복수의 경성부 맨홀 덮개가 도로 좌우에 위치해 있다. 나란히 위치한 맨홀 덮개는 설치 당시 도로 폭과 건물 필지 경계를 추측할 수 있는 근거가 된다.

    ‘부(負)의 유산’인 경성부 맨홀 덮개 보존될까

    영등포는 1910년대부터 공업지대로 발전하기 시작했다. 경성부는 1936년 4월 한반도를 대륙진출의 교두보로 삼고자 했고, 계획의 일환으로 ‘영등포토지구획정리사업’을 시행했다. 영등포는 이때 진행된 정리사업으로 지금과 같은 완전한 격자형 시가지로 거듭났다.

    영중로 경성부 맨홀 덮개는 정리 사업이 이루어진 1937년에서 1939년 사이 설치됐다. 이 맨홀 덮개를 통해 서울 내 ‘신시가지’가 개발될 당시의 시대상을 짐작해 볼 수 있다. 도교의 정치가와 군인의 대륙 진출에 대한 야심을 읽어낼 수도 있고, 동시에 전진기지로 기능하기 위해 대단위 공업단지로 개발될 수밖에 없었던 식민지 서울의 처지를 유추해 볼 수 있다.

    1985년에 제작된 서울 망원한강공원의 한강양안분류하수관로 맨홀 덮개. [김영준 제공]

    1985년에 제작된 서울 망원한강공원의 한강양안분류하수관로 맨홀 덮개. [김영준 제공]

    도심뿐만 아니라 한강변 맨홀 덮개를 통해서도 도시 발달의 흔적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한강변 산책로를 따라 걸어가다 보면 일정한 간격으로 눈에 띄는 거대한 ‘한강양안분류하수관로’ 덮개가 있다. 일반적인 맨홀 덮개와 차원을 달리하는 가로세로 2m 크기의 이 거대한 맨홀 덮개는 1984년에서 1986년 이루어진 한강종합개발사업 과정에서 만들어졌다.

    서울에서는 198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대부분의 생활하수는 하수처리장으로 모이지 않고 그대로 한강으로 흘러들어 갔다. 한강양안분류하수관로는 이런 생활하수를 하수처리장으로 모으기 위해 지어진 직경 3.5m의 거대한 관로다. 당초 1988년 이후 완공을 목표로 장기적으로 추진될 사업이었으나, 88서울올림픽의 개최로 완공이 앞당겨진 대표적인 ‘올림픽 토목 사업’ 중 하나였다.

    1988년에 발간된 ‘한강종합개발사업 건설지’에 따르면 한강양안분류하수관로의 총 연장은 한강의 남북 양안을 따라 총 54km에 달하며, 효율적인 관리를 위해 거대한 맨홀 덮개를 포함한 총 908개의 출입구가 함께 설치됐다고 한다. 한강양안분류하수관로의 덮개에는 부설 시기(1984~1986)와 관리를 위한 일련변호가 적혀 있는데, 대부분의 맨홀이 부설 시기를 어림잡아 추정할 수밖에 없는 것과 달리 정확한 ‘신분’을 한눈에 파악할 수 있는 상당히 드문 경우다.

    철거가 확정된 서울 예지동 귀금속·시계골목 한 켠의 경성부 맨홀 덮개(왼쪽). 서울 예지동 콘크리트 맨홀 덮개보다 상태가 양호했던 영등포 경성부 맨홀 덮개. [김영준 제공]

    철거가 확정된 서울 예지동 귀금속·시계골목 한 켠의 경성부 맨홀 덮개(왼쪽). 서울 예지동 콘크리트 맨홀 덮개보다 상태가 양호했던 영등포 경성부 맨홀 덮개. [김영준 제공]

    서두에 소개한 예지동의 경성부 맨홀 덮개는 머지않아 사라질 운명에 처해있다. 맨홀이 위치한 예지동 귀금속·시계골목 일대가 세운4구역 도시환경정비사업으로 철거 예정이기 때문이다. 세운4구역은 옛길과 조선시대의 유구(遺構·옛 토목건축물의 흔적)를 최대한 보존하는 방향으로 설계가 진행되고 있다. 2000년대까지 서울 도심 재개발이 지역의 역사성과 과거의 흔적을 무시했다는 비판을 받아들이면서다. 하지만 일제강점기라는 ‘부(負)의 유산’인 경성부의 맨홀 덮개까지 보존될지는 아직 미지수다.

    영등포동4가 영중로의 경성부 맨홀 덮개는 2019년 하반기에 진행된 보행환경 개선사업을 거치면서 단 한 개도 남지 않고 모조리 철거돼 지금은 흔적조차 찾을 수 없다. 불행 중 다행으로 삼각지의 소방수조 맨홀 덮개는 관리 주체인 용산소방서가 그 의미를 파악하고 무사히 수거했다. 반면, 한강양안분류하수관로 덮개는 2000년대 후반의 한강르네상스 사업 이후 지속적으로 새것으로 교체되고 있다. 아직도 많은 경우 맨홀 덮개의 기록과 보존은 운과 호의에 기대야 하는 실정이다.

    서울시가 2017년 펴낸 ‘2016년 서울시 맨홀현황 통계 보고’에 따르면, 서울 시내에만 약 59만4000개의 맨홀이 존재한다. 이는 2017년 기준 서울의 총 건물 수(60만9000동)와 비슷한 규모다. 서울 어디를 둘러봐도 건물이 존재하는 것처럼, 도시의 지상 문명을 지탱하는 지하 문명으로 통하는 길목이 우리의 발밑에 존재하는 것이다.

    지난 세기에는 보존 대상이라고 생각조차 되지 않았던 근대건축물이 이제는 ‘문화유산’으로서 소중히 여겨지고 있다. 이제 맨홀에 대해서도 좀 더 발전된 시각으로 접근해 보면 어떨까. 맨홀 덮개를 열어보면 우리가 잊고 지낸 새로운 지하 세계가 펼쳐지듯, 맨홀은 우리 도시를 이해하는 데 지금까지의 유산과 문헌이 미처 제공해 주지 못한 새로운 시야를 열어줄 수 있다.

    #맨홀 #예지동시계골목 #조선총독부 #서울의현대를찾아서 #신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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