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10월호

신성미의 달콤쌉쌀한 스위스

알프스의 하이디는 보조금을 먹고산다

아름답고 풍요로운 농촌의 비밀

  • 글·사진 신성미 | 在스위스 교민 ssm0321@hanmail.net

    입력2016-09-22 11:03: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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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해 봄 스위스에 온 지 얼마 안 됐을 때다. 남편의 사촌 다니엘이 만 30세 생일을 맞아 친지들을 서른 명쯤 초대했다. 스위스에서는 환갑, 칠순, 팔순뿐 아니라 스물, 서른, 마흔, 쉰 살 생일까지 특별히 여겨 파티를 연다. 친지들에게 저녁식사로 신선한 타조고기를 대접한다기에 타조고기로 유명한 식당에서 파티를 하나보다 했는데, 우리가 도착한 곳은 들판 한가운데 있는 타조농장이었다. 추적추적 비까지 내려 땅이 질퍽거렸다. 이럴 줄 알았으면 구두가 아니라 운동화를 신고 오는 건데!



    결혼식이냐, 농업박람회냐

    이 농장의 농부가 가이드가 돼 농장 이곳저곳을 보여주며 타조가 어떤 동물인지 설명해줬다. 이윽고 농장의 한 건물에 마련된 소박한 연회장에서 농부네 가족이 준비한 타조고기 스테이크를 먹으며 생일파티를 즐겼다. 연회장의 유리벽을 사이에 두고 외양간의 타조들을 보면서 타조고기를 먹는 것은 특별한 경험이었다(타조들에겐 미안하지만!).

    서울에서 나고 자라 도시의 생활방식에 익숙한 나는 스위스인들의 삶에 농업이 무척 가깝고 친숙하게 자리 잡은 것을 보고 신선한 충격을 받았다. 한국에서는 도시와 농촌의 경계가 뚜렷하지만, 스위스에선 가장 큰 도시인 취리히에서도 조금만 벗어나면 금세 푸른 들판에서 소들이 한가롭게 풀을 뜯는 전원 풍경이 펼쳐진다.

    나는 인구 1만8000명의 소도시에서 사는데, 기차로 8분이면 스위스 동부에서 가장 큰 도시 장크트갈렌(St.Gallen)에 갈 수 있다. 그러면서도 우리 집 창문 밖으로는 저 멀리 들에서 풀 뜯는 소들이 보인다. 도시와 농촌, 문명과 자연이 조화롭게 어우러진 것이다. 이런 환경은 스위스인들의 생활방식과 문화에도 자연스럽게 녹아들었다.

    지난해 스위스에서 결혼식을 준비할 때 나는 “날씨가 추워지기 전에 10월 중순쯤 결혼식을 치르자”고 예비 남편에게 말했다. 그는 어렵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10월 중순은 곤란해. ‘올마(OLMA)’가 열리는 기간이잖아.”

    “올마? 그게 뭔데?”

    “매년 장크트갈렌에서 열리는 스위스 농업식품박람회.”

    “농업박람회랑 우리 결혼식이랑 무슨 상관이야? 자긴 농부도 아니잖아.”

    “우리 결혼식 하객의 상당수가 이미 올마에 가기로 계획하고 있을 거야. 그리고 그 기간에는 교통체증이 빚어질 테니 결혼식에 지장이 생길 수도 있어.”

    “우리 하객들 중엔 농부가 없는데?”

    “농부가 아니라도 장크트갈렌의 수많은 시민이 매년 올마에 간다고.”

    이건 또 무슨 소리인가. 납득이 제대로 안 됐지만 어쨌든 예비 남편의 의견을 따랐고, 우리는 농업박람회가 끝나고 10월 말에 결혼식을 올렸다.

    나는 올마에 직접 가보고서야 남편의 말을 이해하게 되었다. 올마는 1943년부터 매년 10월 중순에 11일간 장크트갈렌의 올마 박람회장에서 열리는데, 농업·식품 관련업종 종사자뿐 아니라 이 지역의 시민들, 나아가 관광객들까지 찾아오는 큰 축제다. 지난해에는 무려 37만5000명이 올마를 보러 왔다. 성인 기준으로 하루 17스위스프랑(약 2만 원)의 입장료를 내야 하는데도 박람회 기간 중 여러 차례 올마를 찾는 시민도 많다. 그러니 올마는 가족, 친구 등과 함께 온 시민들로 연일 발 디딜 틈이 없다.



    비싸도 身土不二!

    올마에서는 이 지역의 건강하고 잘생긴 소들을 비롯해 돼지, 양 등 가축들을 전시하고 농업 관련 제품뿐 아니라 다양한 가전제품, 생활용품 부스도 마련돼 일반 관람객들은 이것저것 구경하며 살림을 장만한다. 음식 파는 부스에서 요기를 하고 가축들을 구경하며 다니다 보면 아는 사람도 여럿 마주친다. 수많은 장크트갈렌 시민이 이곳을 찾으니 친구, 친척, 오래도록 못 본 학교 동창들까지 마주치고 얘기를 나누는 건 흔한 풍경이다. 서울처럼 인구밀도가 높지 않기에 가능한 일이다. 이런 재미를 위해 많은 시민이 올마를 찾는다. 농업박람회가 농업 종사자들만의 박람회를 넘어 20, 30대 젊은이들까지 손꼽아 기다리며 찾는 축제라는 게 신선하게 느껴졌다.

    스위스 국민의 삶에 농업이 이렇게 친숙하게 자리하고 있음을 수시로 목격하면서 나 역시 자연스럽게 농업에 관심을 갖게 됐다. 스위스는 국토 면적이 한국의 40% 정도로 작은 데다 그마저 평지는 적고 대부분이 험준한 산과 호수로 이뤄져 농업에는 매우 열악한 여건이다. 흔히 ‘스위스’ 하면 떠올리는 푸른 전원 풍경과 세계적으로 유명한 스위스 치즈 때문에 스위스가 농업국가일 거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스위스 국내총생산(GDP)에서 농업이 차지하는 비중은 1%에 불과하다. 농장의 대다수는 가족 단위의 소규모 농가다.


    ‘하이디 환상’을 상품으로

    내 시아버님의 반려자인 프레니 아주머니는 4대째 내려오는 식당을 운영한다. 400년 넘은 전형적인 스위스풍의 목재 건물 식당 주위로는 다른 건물은 없이 푸른 잔디밭이 드넓게 펼쳐져 있다. 이곳에 올 때마다 자연의 한가운데서 식사를 하는 듯 즐거워진다.

    그녀의 아버지는 농부였는데, 이 땅에서 젖소와 양을 방목했다고 한다. 프레니는 어머니가 운영하던 식당을 물려받았고, 농사를 지을 사람이 없으니 22ha(6만6550평)에 이르는 농지는 놀리고 있다. 이 땅은 농지로만 사용해야 하며 건물을 짓거나 다른 용도로 쓰는 건 불법이다. 이웃 마을에서 소를 키우는 농부들이 이곳에서 소 먹이로 쓸 풀을 베어가고 땅 주인 프레니에게 약간의 돈을 낼 뿐이다. 자기 땅이지만 자기 마음대로 변형해 사용할 수 없다. 이런 엄격한 법 덕분에 그림 같은 풍광이 유지되는 것이다.

    스위스의 아름답고 청정한 전원 풍경은 곧 스위스의 막강한 관광자원이 된다. 책과 만화영화로 ‘알프스 소녀 하이디’를 접한 사람들에게 스위스는 귀여운 소녀 하이디와 목동 페터가 뛰노는 동화 같고 평화로운 나라라는 환상이 있다. 수많은 외국인이 천혜의 자연을 즐기기 위해 스위스로 여행을 오고, 스위스가 관광산업으로 벌어들인 돈은 농업을 지원하는 데 흘러들어가니 선순환이 일어난다.

    스위스 농부들의 전통 행사가 직접적인 관광자원으로 거듭나기도 한다. 알프스 산악지방의 농부들은 여름에 소, 양, 염소 등 가축들을 알프스의 고원지대로 데려가 몇 주를 보내고 8월 중순부터 9월 말경 다시 가축떼를 이끌고 골짜기의 마을로 돌아온다. 고원으로 올라갈 때와 내려올 때 농부와 어린 목동들은 색색의 전통 의상을 입고 가축들을 꽃과 종으로 치장해 마치 축제처럼 행렬을 한다. ‘하이디 환상’을 채워주는 절정의 행사인 것이다. 상업적이고 인위적으로 꾸며지기보다는 오래된 전통 방식 그대로 소박하게 치러진다. 이런 이색적인 행사를 보기 위해 많은 외국인이 스위스를 찾는다.

    스위스 정부가 다양한 방식으로 농업을 지원하는데도 농산물 시장 개방으로 농산물 자체에서 얻는 소득이 줄어들어 스위스의 농가 수는 매년 지속적으로 감소한다. 1996년 7만9500가구이던 농가가 2014년에는 5만5000가구로 감소했다. 이제 스위스 농부들은 수동적으로 보조금을 받으며 농사를 짓는 데서 벗어나 다양한 수익원을 찾고 있다.



    농사 플러스 ‘알파’

    우선, 비싸더라도 안전하고 건강한 먹을거리를 찾는 스위스인들의 기호에 맞춰 많은 농가가 유기농법으로 전환하고 있다. 농장 한쪽에 판매대를 만들어 농장에서 갓 생산된 신선한 채소와 과일, 달걀, 우유 등을 팔기도 한다. ‘농장가게(Hofladen)’라 불리는 이곳에선 직거래인 만큼 대형마트보다 저렴하면서도 신선한 농산물을 살 수 있다. 대기업이 아닌 지역 농가에 보탬이 되니 나도 농장가게를 지나갈 일이 있으면 꼭 이곳에 들러 장을 본다.

    농장가게는 대부분 무인 시스템이다. 손님이 알아서 판매대에 놓인 저울에 농산물의 무게를 달아 값을 계산하고 돈은 저금통처럼 생긴 상자에 넣고 온다. 손님이 거스름돈을 직접 가져갈 수 있도록 동전이 가득 담긴 통을 열어놓은 곳도 봤다. 서로 간에 정직과 신뢰가 있어야만 가능한 시스템인데, 이를 처음 봤을 때 마음이 참 따뜻해졌다. 여행 중에 들른 어느 젖소 농가의 농장가게에서 농부의 아내가 갓 짠 신선한 우유로 만든 요거트와 아이스크림을 맛보며 쉬어가기도 했다.

    프레니 아주머니를 통해 알게 된 마르쿠스는 훤칠한 키에 잘생긴 30대 젊은 농부다. 그는 투르가우 칸톤에서 크리스마스 트리로 쓰이는 전나무 농장을 운영한다. 스위스에서는 크리스마스 시즌이 되면 많은 가정과 상점에서 플라스틱으로 만든 인공 나무가 아닌 진짜 전나무로 크리스마스 트리를 꾸민다.

    주로 겨울에 바쁜 마르쿠스는 조금 한가한 시기에 맞춰 올여름 새로운 시도를 했다. 투르가우의 여러 농장에서 생산된 제철 딸기와 체리를 도매로 사서 딸기 모양으로 만든 간이 판매대에서 판 것이다. 이를 위해 그는 판매대 11개를 빌리고 장크트갈렌 칸톤 일대의 목 좋은 곳들을 찾아 주차장을 빌린 뒤 판매대를 설치했다. 여름방학을 맞은 대학생들과 주부들이 아르바이트로 판매를 하고, 마르쿠스는 수시로 신선한 딸기와 체리를 배달하며 휴가도 없이 바쁜 여름을 보냈다. 나도 마르쿠스 덕분에 이웃 지역에서 생산된 신선한 제철 딸기와 체리를 물리도록 먹었다. 이런 아이디어가 새 수익원을 찾는 지역 농가에 활력을 준다.

    농부들이 산속의 농장에서 숙박과 아침식사를 제공하는 B&B(Bed & Breakfast)를 차리고 소젖 짜기, 가축 먹이 주기, 치즈 만들기 등 다양한 농장체험 활동을 만들어 여행자들을 끌어 모으기도 한다. 이 역시 하이디 환상을 지닌 관광객들에게 낭만적인 체험이 된다.

    매년 8월 1일 스위스 건국기념일이 되면 많은 스위스인은 ‘농장 브런치’를 먹으러 간다. 농가에서 자신과 이웃 농가들이 생산한 다양한 농산물로 갓 구운 빵, 케이크, 우유, 요거트, 치즈, 잼, 과일 등을 준비해 농장 한가운데 브런치 뷔페를 차려놓는다. 상업적이라는 느낌보다는 스위스인들이 자기가 사는 고장에서 난 신선한 농산물로 차려진 식탁을 즐기며 독특한 방식으로 건국을 축하한다는 재미가 더 커 보인다. 



    나도 ‘전원일기’ 쓰고 싶다

    스위스의 농장은 대개 가족 대대로 내려오는 것을 후세가 물려받는다. 가업을 이을 가능성을 높이기 위해서인지 스위스 농가에는 대개 자녀 수가 많다. 요즘 젊은 농부들도 아이를 서너 명씩 낳는다. 친구네 아버지인 한스는 젖소 농장을 하는데 네 자녀 중 막내아들인 루카스가 농장을 물려받을 준비를 하고 있다. 열아홉 살인 루카스는 직업고등학교에 다니면서 농업과 경영을 배우고 다른 농장에서 실습을 병행한다.

    직업에 귀천이 없는 스위스에선 농부를 비롯해 목수, 정원사 같은 육체노동자도 직업적으로 존중받고 여가를 즐기며 먹고살 만큼 돈을 번다. 그런데 많은 나라가 그렇듯 스위스에서도 이제 농부는 배우잣감으로 인기가 없다. 평일과 주말 구분 없이 일해야 하고, 다른 스위스인들처럼 한 번에 3, 4주씩 몰아서 휴가를 가기도 어렵다. 도시 생활의 편리함을 좋아하는 여자라면 농부의 아내로서 농장 일을 돕거나 농가의 정원을 가꾸는 데는 취미가 없을 것이다. 그래서 농촌 총각에게 짝을 찾아주는 TV 데이트 프로그램(‘Bauer, ledig, sucht’)이 인기다. 이런 방송이 인기를 얻는 데는 농촌에 대한 친근감도 한몫을 할 것이다.

    천생 서울 사람인 나도 이제는 집 근처의 목장으로 산책을 갈 때마다 농부의 아내들이 농가의 텃밭을 가꾸는 광경에 한눈이 팔린다. 스위스의 작은 마을에 아담한 단독주택을 장만해서 소박한 정원과 텃밭을 만들고 깻잎이며 무, 대파 같은 그리운 한국 채소를 직접 길러 먹는 게 새로운 꿈이 됐다. 나의 전원일기는 계속된다.

    신 성 미


    서울대 사회학과를 나와 동아 일보 경제부·문화부, 동아 비 즈니스리뷰 기자로 일했다.

    2015년부터 스위스인 남편과 스위스 장크트갈렌(St. Gallen) 근교에 산다. 서울에서 바쁘게 살다가 스위스에서 자연을 벗 삼아 천천히 살면서 느낀 단상과 스위스 사회, 문화에 대해 블로그(blog.naver. com/sociologicus)에 글을 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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