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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물萬事

쑹메이링의 ‘판다 외교’에 미국 몸 달다!

판다는 어떻게 중국 최고 외교관이 됐나

  • 이강원 동물칼럼니스트 powerranger7@hanmail.net

쑹메이링의 ‘판다 외교’에 미국 몸 달다!

  • ●‘공산당 판다’보다 31년 앞선 ‘국민당 판다’
    ●‘쿵푸팬더’ ‘판다 익스프레스’로 이어져
    ●中현대사 女傑 ‘쑹자매’와 판다
    ●‘권력의 화신’ ‘탁월한 정무 감각’ 쑹메이링
[GettyImage]

[GettyImage]

1945년 4월 30일 아돌프 히틀러는 연인 에바 브라운과 베를린의 지하 벙커에서 극단적 선택을 한다. 절망적 전황이 두 사람을 죽음으로 내몰았다. 그로부터 일주일 후(5월 7일) 독일은 항복하고 만다. 유럽을 불태운, 기나긴 전쟁의 화마는 이렇게 걷힌다. 

같은 시각 아시아의 전황은 달랐다. 대동아공영권(大東亞共榮圈)이라는 황당무계한 구호로 아시아와 태평양을 쑥대밭으로 만든 일본 제국주의자들의 저항은 거칠었다. 전세는 연합군 쪽으로 기운 지 오래였으나 일제는 패배를 인정하지 않았다. 

미국은 선택의 기로에 섰다. 지상군을 상륙시켜 대규모 살육전을 펼치거나 원자폭탄을 투하해 항복을 받아내야 했다. 선택은 원폭이었다. 히로시마(廣島)와 나가사키(長崎)에 투하된 신형 무기의 위력은 대단했다. 전쟁은 일본의 무조건 항복으로 마무리된다.


제2차 국공내전, 압도적 우세 지키지 못한 국민당

중국 대륙의 상당 부분을 반(半)식민지로 경영하던 일제가 물러나자 장제스(蔣介石) 국민당 총통과 마오쩌둥(毛澤東) 공산당 주석은 자의 반 타의 반 협상에 나선다. 미국의 중재로 시작된 이 협상의 목적은 국공(國共) 공동정부 수립이었다. 

협상 테이블에 마주 앉은 양측은 처음부터 서로에 대한 신뢰가 전혀 없었다, 급변한 국제 정세와 미국의 압박으로 어쩔 수 없이 자리에 앉았을 뿐이었다. 결국 협상이 깨지고 제2차 국공내전(國共內戰)이 발발한다. 



1946년 6월 국민당의 당군(黨軍)인 국민혁명군(國民革命軍)이 일제히 공산당 지구(地區)에 대한 선제공격에 나선다. 국민당 측이 먼저 공세를 편 것은 무력으로 상대를 제압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가졌기 때문이었다. 

개전 초기 국공 양측의 군사력 격차는 컸다. 미국 지원을 받은 국민혁명군은 질적·양적으로 공산당의 홍군(紅軍)을 압도했다. 국민혁명군은 370개 사단, 430만 대군을 보유한 반면 홍군은 병력이 100만에 그쳤다. 질적으로도 홍군이 현저하게 열세였다. 

국민혁명군의 우위는 오래가지 못했다. 홍군은 단일 지휘 체계 아래 한 몸처럼 일사불란하게 움직였으나 국민혁명군은 군벌 연합체와 비슷한 성격이었다. 수뇌부가 여럿인 느슨한 지휘 체계는 효율적 전투 수행에 결정적 장애가 됐다. 

1948년 후반기부터 홍군이 전쟁의 주도권을 쥔다. 국민혁명군은 연전연패하며 주요 거점을 차례로 상실했다. 홍군은 1949년 1월 청조(淸朝)의 수도 베이징(北京), 5월 최대 도시 상하이(上海)를 점령한다. 11월 국민당 임시수도 충칭(重慶), 12월 국민당 최후 거점 청두(成都)까지 함락한다. 국민당은 결국 대한민국 면적 96배에 달하는 중국 대륙을 모두 잃고 경상도 면적보다 약간 큰 타이완(臺灣)으로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미국, 소련 견제하고자 중국과 손잡다

공산당은 중국을 무력으로 통일한 후 경제 부흥에 나선다. 개혁·개방이 아닌 자력갱생 모델을 채택했다. 대약진운동(大躍進運動), 문화대혁명(文化大革命)은 폐쇄 지향적 정책의 사례다. 조선의 흥선대원군이 재림한 것 같은 중국의 폐쇄 정책은 ‘죽의 장막(bamboo curtain)’이라는 표현으로 압축됐다. 

개인, 국가 공히 문 닫고 한없이 살 수는 없다. 1956년 소련공산당 제20차 대회 이후 중국과 소련의 갈등이 시작됐다. 중소분쟁(中蘇紛爭)은 사회주의 내부 이념 갈등으로 출발했으나 시간이 흐르며 경제·외교·안보 전 분야로 확대됐다. 배고픈 동지가 요구하면 언제든 밥을 챙겨주던 연대가 막을 내린 것이다. 

중국 경제는 스스로 일어나기에는 지나치게 낙후돼 있었다. 키다리 아저씨(Daddy-Long-Legs)의 도움이 필요했다. 중국은 그동안 경원시하던 서방에 손을 내민다. 이 같은 중국의 행동 변화에서 알 수 있듯 이념보다는 실리가 중요한 것은 만고불변의 진리다. 

미국은 중국이 문을 열고 밖으로 나올 때 촉진자(facilitator) 구실을 했다. 미국이 소련과 열전(hot war·熱戰)보다 더 날카롭고 차가운 냉전(cold war·冷戰)을 펼칠 때다. 소련의 팽창을 함께 견제할 파트너가 필요했는데 중국은 최적의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이념이나 정치체제는 문제 되지 않았다. 소련 견제만 잘해 주면 그만이었다. 

사업에서 성공하려면 거래(deal)를 잘해야 한다. 거래는 일방만 이익을 보는 구조에서는 성사되지 않는다. 양쪽 이익이 만나야 한다. 미국과 중국 사이 거래도 그랬다. 양국 이익이 맞아떨어지자 두 거인은 주춤거리지 않고 움직였다.


최고의 중국 외교관 판다

1971년 미·중은 의견을 조율하는 회담을 베이징에서 개최한다. 이듬해 역사적 미·중 정상회담이 베이징에서 열렸다. 통상의 정상회담은 합의의 전체 혹은 대강이 완료된 채 시작되고 회담을 마친 후 가시적 성과를 언론 앞에 공개한다. 2019년 하노이 북·미 정상회담처럼 노딜(no deal)로 끝나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1972년 리처드 닉슨 대통령과 마오쩌둥 주석은 그동안의 적대(敵對)를 청산하고 관계를 정상화하는 데 합의했다. 두 나라는 6·25전쟁에서 적으로 싸웠으나 그것은 친구가 되는 데 장애가 되지 않았다. 

미·중 데탕트 덕분에 스포트라이트가 베이징에 집중됐다. 닉슨과 마오는 물론 헨리 키신저 백악관 안보보좌관, 저우언라이(周恩來) 총리도 주목받았다. ‘독특하기 그지없는 중국 외교관들’도 당시 큰 이목을 끌었다. 이들은 미·중 수교뿐 아니라 중국이 서방과 관계를 개선할 때마다 중요한 구실을 했다. 

1972년 ‘중국 외교관’들이 워싱턴 미국국립동물원(National Zoo)을 방문한다. ‘이들’은 영국과 일본 등 미국의 우방국을 방문하며 그 나라들과도 관계 개선에 나섰다. ‘그들’은 가는 곳마다 극진한 환대를 받았다. 적대시한 나라는 단 한 곳도 없었다. 이 ‘외교관들’의 활동 덕분에 중국의 국가 이미지도 크게 개선됐다. 

이 ‘외교관들’은 중국인이 아니었다. 중국에만 사는 동물 판다(Panda·大熊猫)다. 판다는 턱시도를 입고 뿔테안경을 쓴 것 같은 귀여운 외모를 가진 곰과 동물이다. 인간을 포함한 대부분의 동물은 성체가 되면 어릴 적 귀여움을 잃는다. 판다는 그렇지 않다. ‘어른’이 돼도 여전히 귀엽다.


곰과 친척들과 달리 채식주의자

판다는 육식을 즐기는 곰과에 속한 다른 친척들과 달리 채식주의자다. 칼로리가 낮은 대나무 잎을 하루 종일 먹는다. 체구를 유지하려면 먹고 또 먹어야 한다. 외모, 행동, 식성을 보면 중국이 왜 판다를 공공외교 수단으로 활용했는지 이해할 수 있다. 자신이 원하는 이미지를 상대에게 각인하는 것을 이미지 메이킹(image making)이라고 하는데, 판다가 가진 평화 이미지를 중국이라는 나라에 덧씌우길 희망한 것이다. 

중국이 해외 동물원에 파견한 판다는 많은 관람객을 모으며 그 동물원을 상징하는 마스코트가 됐다. ‘판다 외교(panda diplomacy)’라는 신조어가 등장할 만큼 중국의 시도는 대단한 성공을 거뒀다. 판다가 20세기 중국 외교사에 큰 획을 그은 것이다. 

원 히트 원더(one-hit wonder)는 히트곡 하나를 남기고 사라지는 가수를 가리키는 말이다. 판다는 떠돌이 반짝 인기 가수가 아니었다. 1972년보다 지금의 인기가 더 높다. 판다라는 동물 자체의 매력에서 비롯한 인기가 문화 산업으로 확산했다. 

애니메이션 ‘쿵푸팬더(Kung Fu Panda)’는 판다의 인기를 한 단계 격상하는 데 기여했다. 판다 애호가들은 잭 블랙이 목소리를 더빙한 주인공 ‘포’를 잊지 못한다. 미국 고속도로 주변이나 대학가에는 ‘판다 익스프레스(Panda Express)’라는 중국요리 체인점이 있다. 이 체인의 특징은 햄버거나 샌드위치처럼 음식을 빠르게 내놓으면서도 중국요리 특유의 맛을 내는 것이다. 1972년 판다를 미국에 보낸 중국 지도자들은 판다가 이렇듯 대중의 사랑을 받으리라고 예상했을까. 

판다라는 동물이 세계 곳곳에 널리 알려진 계기는 1972년 미·중 정상회담이었으나 ‘판다 외교’는 잘 알려지지 않았을 뿐 이전에도 존재했다. 

1957년 중국은 사회주의 맹방인 소련에 판다를 보냈다. 북한을 포함한 다른 사회주의 국가들도 ‘판다 동맹’에 포함돼 있었으나 판다 외교는 소련에 판다를 보낸 1957년보다도 더 일찍 시작됐다.


쑹 시스터스

쑹칭링, 쑹메이링, 쑹아이링(왼쪽부터) 세 자매. [GettyImage]

쑹칭링, 쑹메이링, 쑹아이링(왼쪽부터) 세 자매. [GettyImage]

20세기 중국 역사는 파란만장(波瀾萬丈)하다. 난세에 영웅이 등장하는 법. 권력을 차지하고자 굵직한 인물들이 자웅을 겨뤘다. 능력, 영향력에서 남성을 압도하고도 남는 걸출한 여성들도 있었다. 이들을 빼고 중국 현대사를 설명하기 어려울 정도다. 공교롭게도 ‘그녀’들은 같은 부모를 가진 친자매였다. 

3인의 여걸(女傑)은 사업가 쑹자수(宋嘉澍)의 딸로 세간은 ‘쑹자매(Soong sisters)’라고 칭했다. 쑹자수는 딸들을 영어에 능통하며 국제 감감을 갖춘 인재로 키우고자 미국 웨슬리대로 유학 보냈다. 자매는 부친의 희망처럼 역량을 갖춘 인재로 성장했다. 그러곤 자신들 눈높이에 맞는 남편들을 만난다. 

장녀 쑹아이링(宋靄齡)은 세 자매 중 가장 현실적 선택을 한다. 대학 졸업 후 청나라를 무너뜨린 신해혁명(辛亥革命)의 주역 쑨원(孫文)의 비서로 일했다. 결혼을 위해 그 일을 그만두면서 그 자리를 동생인 쑹칭링(宋慶齡)에게 물려준다. 쑹아이링은 1914년 당대의 갑부인 쿵샹시(孔祥熙)와 결혼해 1940년대 미국으로 생활 터전을 옮겼다. 부잣집에서 태어나 갑부와 결혼한 그를 두고 중국인들은 돈을 사랑한 여인(一個愛錢)이라고 한다. 

쿵샹시는 자본가 출신의 관료였다. 쑨원의 일을 돕다가 훗날 중화민국 재무부 장관, 중앙은행 총재, 총리로 일했다. 국민당이 대만으로 패주하자 아내 쑹아이링과 함께 미국에 정주해 그곳에서 여생을 보냈다. 

쑹자매의 둘째 쑹칭링은 언니인 쑹아이링의 뒤를 이어 쑨원의 비서로 일했다. 쑨원과의 인연이 인생을 송두리째 바꿔놓는다. 언니가 결혼한 이듬해인 1915년 쑹칭링은 쑨원과 결혼했다. 26세나 연상인 쑨원과의 결혼 생활은 10년 만에 끝났다. 1925년 쑨원이 60세의 나이에 간암으로 급서(急逝)하기 때문이다. 

쑹칭링은 국민당에서 핵심 역할을 한 가족들과 전혀 다른 선택을 한다. 쑹칭링은 중국이 공산화된 이후 중화인민공화국에서 권력의 최상부에 올랐다. 1959년 중국 제2대 부주석으로 취임하며 권력 서열 2위를 차지했다.


31세 퍼스트레이디, 쑹메이링

쑹메이링의 1943년 미국 하원 연설. [GettyImage]

쑹메이링의 1943년 미국 하원 연설. [GettyImage]

쑹자매 중 가장 유명한 인물은 쑹칭링이 아닌 막내 쑹메이링(宋美齡)이다. 쑹메이링은 1927년 열 살이나 많은 국민당 실력자 장제스와 결혼했다. 장제스는 결혼 이듬해인 1928년 난징(南京)에서 국가주석으로 취임한다. 쑹메이링이 31세에 퍼스트레이디(first lady)가 된 것이다. 

장제스는 쑹메이링과 결혼하기 전 유부남이었다. 기독교 신자인 쑹메이링과 달리 불교 신자이기도 했다. 쑹메이링을 놓치고 싶지 않던 장제스는 부인이던 천제루(陳潔如)와 이혼하고, 불교에서 기독교로 개종했다. 

젊은 나이에 퍼스트레이디가 된 쑹메이링은 다양한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화려한 외모, 뛰어난 언변, 능숙한 대인관계가 그를 국제적 스타로 만들었다. 미국 시사주간지 ‘타임’이 쑹메이링을 표지모델로 삼기도 했다. 쑹메이링은 1943년 미국 하원에서 일본과 싸우는 중국에 대한 전폭적 지원을 호소하는 연설을 했다. 중국인으로는 최초, 여성으로는 두 번째 미국 의회 연설이다. 

쑹메이링은 정치적으로도 상당한 내공을 갖추고 있었다. 특히 정무 감각이 탁월했다. 아래의 두 사건을 보면 내공을 충분히 짐작해 볼 수 있다. 

첫 번째는 시안사변(西安事變). 1936년 장제스가 홍군과의 전투를 독려하고자 시안을 방문했는데, 그곳에서 동북군총사령관 장쉐량(張學良)에게 납치된다. 국민당 내부에서 쿠데타가 일어난 것이다. 장쉐량은 부친 장쭤린(張作霖)의 대를 이은 만주 군벌. 부친이 일본군에 의해 폭살되고, 근거지 만주를 잃은 터라 일제에 대한 증오감이 컸다. 

장쉐량 처지에서는 같은 동포인 홍군과의 전투보다 일본군을 몰아내는 게 중요했다. 반면 장제스는 항일투쟁보다 홍군 토벌이 우선이었다. 결국 두 사람은 시안에서 충돌했고, 장제스는 장쉐량의 손에 사로잡힌 포로 신세가 되고 만다. 

이 사건을 해결한 사람이 쑹메이링이다. 쑹메이링은 사태를 조기에 수습하지 못하면 국민당이 분열되고, 남편 장제스의 목숨이 위태로울 것이라고 판단했다. 그래서 급히 시안으로 가 13만 동북군(東北軍)의 수장인 장쉐량을 설득했다. 남편을 살리고자 자신의 목숨을 건 대담한 행동이었다.


‘권력의 화신’ 쑹메이링

장제스(오른쪽), 쑹메이링(가운데) 부부. [GettyImage]

장제스(오른쪽), 쑹메이링(가운데) 부부. [GettyImage]

쑹메이링은 장쉐량과 담판을 통해 장제스를 석방시켰다. 더욱 놀라운 일은 장쉐량이 모든 권력을 내려놓고 국민당 수도인 난징으로 자진 출두한 것이다. 장쉐량은 평생을 국민당의 포로 신세로 살았다. 역사에 가정은 없다지만 쑹메이링이 없었다면 중국사는 다르게 흘러갔을 것이다. 

두 번째는 쑹메이링이 미국에서 펼친 ‘판다 외교’다. 쑹메이링은 1941년 12월 국민당의 최대 우군인 미국을 감동시키고자 미국인들이 좋아할 만한 선물인 판다 두 마리를 데리고 뉴욕 브롱크스 동물원(Bronx Zoo)을 방문한다. 이 판다들은 1972년 중국공산당의 판다들보다 31년 앞서 태평양을 건넜다. 

쑹메이링은 판다 증정 직전인 1941년 11월 미국인을 상대로 라디오 연설을 한다. 그 연설에서 미국인들에게 판다를 보면서 양국의 우정을 더욱 공고히 해달라고 당부한다. 미국인들은 쑹메이링과 그가 보낸 판다에 매료됐다. 1941년 쑹메이링의 판다 외교가 1972년 마오쩌둥, 저우언라이의 그것보다 덜 알려진 것은 미·중수교와 같은 큰 이슈가 없었기 때문이다. 

쑹메이링은 권력의 화신(一個愛權)이라는 비판을 듣는다. 그 비판을 다시 비판할 생각은 없다. 틀린 게 아니기 때문이다. 그는 권력욕이 누구보다도 강한 인물이었다. 그렇더라도 권력욕에 덧붙여 탁월한 정무 감각까지 가진 인물로 평가하는 게 더 객관적일 것 같다. 쑹메이링은 귀여운 판다가 미국인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다는 점을 꿰뚫고 있었다.




신동아 2020년 3월호

이강원 동물칼럼니스트 powerranger7@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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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4Opinion Leader Magazi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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