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호

“도대체 반도체가 뭐꼬”라던 호암이 마음 바꾼 이유 [경제사상가 이건희 탐구㉘]

“‘치아라’ 하다가도 설명 드리면 ‘해봐라’ 하더라”

  • 허문명 기자

    angelhuh@donga.com

    입력2022-04-16 10: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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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미국의 몰락과 일본의 부상

    • 이건희 부회장이 이끈 미국 출장길

    • 누군가는 이 불가능한 일 해야 한다

    •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라

    • D램이 유리하다는 결론에 도달

    한국반도체 부천공장을 찾은 호암 이병철 회장이 뭔가를 보면서 지시하고 있다. 오른쪽 옆은 강진구 전 삼성전자 회장. [삼성전자]

    한국반도체 부천공장을 찾은 호암 이병철 회장이 뭔가를 보면서 지시하고 있다. 오른쪽 옆은 강진구 전 삼성전자 회장. [삼성전자]

    호암은 어떻게 반도체에 관심을 갖게 됐을까. 김광호 전 삼성전자 부회장은 호암이 반도체에 본격적으로 관심을 가진 시기를 1979년 말에서 1980년 초로 기억했다. 이건희 회장이 1976년에 사재를 털어 한국반도체 지분을 완전히 인수하고 나서다. 그의 말이다.

    “처음 삼성전자가 흑자를 낸 뒤 이병철 회장이 직접 오셔서 트랜지스터 라인을 보시더니 한심하다는 듯 ‘이거 한 달에 몇 개 만드느냐?’고 하세요. ‘1억 개 만듭니다’ 했는데 사실 1억 개면 엄청난 것 같지만 개당 1센트, 2센트이다 보니 매출이 20만 달러(현재 환율로 약 24억 원)인가 밖에 안됐어요.

    호암은 ‘야야, 치아라 치아, 스물네 시간 1년 내내 쉬지도 못하고 공장 돌리면서 그것밖에 못 팔면 그걸 장사라고 하고 있냐!’ 하시는 거예요. 그래서 ‘돈도 중요하지만 이게 전자기기의 아주 기초입니다. 오디오고 뭐고 다 들어가기 때문에 값은 싸도 절대 죽지 않습니다’ 했죠. 호암은 ‘치아라 치아’ 하다가도 조목조목 설명을 드리면 ‘좋다 해봐라’ 이런 면이 있으셨습니다. 반도체에 본격적으로 관심을 가지신 게 그 무렵이었던 것 같아요. 일본에서 막 메모리 반도체를 시작했을 때였습니다. 일본통이셔서 일본에서 새로운 산업 동향을 듣게 된 것이 계기였다고 보입니다.”

    이바나 박사를 만나다

    호암은 1980년 이른 봄, 일본 도쿄에서 요시다 시게루 총리 밑에서 경제계획 수립을 담당하던 이바나 박사를 통해 일본 산업에서 이뤄지는 일대 방향 전환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큰 감명을 받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호암 자전’에 나오는 말이다.

    “이바나 박사는 일본이 1973년 오일쇼크 이후 정책을 바꿔 기간산업(제철·조선·석유화학·시멘트·섬유) 생산규모를 20%내지 50%까지 대폭 억제하기로 했다고 했다.



    ‘그렇다면 일본 산업의 살 길은 무엇인가’ 물었더니 이미 반도체, 컴퓨터, 신소재, 광통신, 유전공학, 우주 해양공학 등 자원 절약형에 부가가치가 높은 첨단기술 분야, 그중에서도 반도체 및 기계 공업에 치중하고 있다는 거였다. 정부도 적극 뒷받침해 전략산업으로 육성한 결과 수출이 획기적으로 늘었다고 했다. 일본은 이미 경박단소 첨단기술 산업에 매진하고 있었다. 그의 말은 참으로 감명 깊었다.”

    고(故) 강진구 전 삼성전자 회장도 회고록에서 비슷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어느 날 호암이 ‘도대체 반도체는 몇 가지 종류나 되는가? 말하는 사람마다 다르니 도시 종잡을 수가 있어야지’라고 물었다. 나는 ‘그건 사람이 몇 종류나 되느냐 물으신 거나 마찬가지입니다. 사람을 성별, 인종, 나이로 각각 나눌 수 있듯이 반도체도 어떻게 구분하느냐에 따라 종류와 수가 다르기 때문에 딱 몇 종류라고 말씀드릴 수가 없습니다’라고 답했다.

    나중에 들은 얘기지만 호암은 ‘반도체’라는 번역어를 만들어낸 것으로 유명한 일본 최고 반도체 연구자인 산켄전기(産硏電氣) 오타니 다이묘 회장(공학박사)과 기술본부장이던 덴다 쇼이치 상무(공학박사) 두 사람에게도 비슷한 질문을 했던 것 같다. 이외에도 호암은 수많은 학자와 사업가들의 조언을 들었지만 무엇보다 이바나 박사 말에 크게 영향을 받았다.”

    이 무렵 호암의 고민은 깊었던 것으로 보인다. 무엇보다 일본이 저렇게 일대 방향 전환을 하고 있는데 한국의 상황을 보면 답답했다. 그렇다고 혼자 나설 수도 없는 일, ‘호암 자전’에는 그 고민의 일단이 이렇게 표현돼 있다.

    “일본과 마찬가지로 자원이 없고 무역입국 길밖에 없는 한국으로서는 산업의 재편성을 서둘러 추진하고 첨단기술 산업을 시급히 개발 육성해야 한다. 그러나 한국은 일본과 사정이 다르고 갑자기 한 사람의 힘으로 가능하지도 않을 것이다.”

    위축된 미국 경제를 보고 놀라다

    반도체와 컴퓨터가 이끌어갈 미래 세상이 어렴풋하게 보이기는 하는데, 그것이 과연 무엇일지 호암의 눈에는 아직 선명하지 않았다. 그런 호암이 구체적인 미래상을 볼 결정적 계기가 생기는데 다름 아닌 1982년 미국 방문이었다.

    여간해선 비행기를 잘 타지 않던 호암은 미국 보스턴대에서 명예 경영학 박사학위를 준다는 청은 거절할 수 없었다. 그런데 오랜만에 밟아본 미국 땅에서 뜻밖에 위축된 미국 경제를 확인하고 놀란다. 사실 1970년대 중반부터 1980년대 말까지 미국 경제는 끝이 보이지 않는 침체의 터널 안에 갇혀 있었다. 재정적자가 눈덩이처럼 불어났고 국제수지까지 적자로 돌아서자 미국의 경제적 패권 시대는 완전히 끝난 게 아니냐는 아우성이 터져 나왔다. 호암은 미국에서 느낀 세상의 변화를 실감하며 이런 토로를 한다.

    “신문이나 잡지를 통해 미국을 잘 알고 있다고 자부했다. 그러나 막상 가보고는 놀랐다. 세계 최고 강국이 고난을 겪고 있는 것을 직접 눈으로 보았다.

    군사적으로는 소련을 누르지 못하고 있었고 국민들 사이에는 욕구불만이 고조되고 있는 한편, 철강이나 자동차 산업 같은 전통산업의 가동률은 저하되고 실업 사태가 일어나고 있었다. 제2차 오일쇼크 후의 불황에 합리적으로 제때에 대응하지 못했던 것이다. 일본의 철강과 자동차가 미국 시장을 휩쓸고 있었지만 이에 맞설 경쟁력을 잃고 있었다.

    미국이 설계한 생산설비를 수입해서 양산 및 공정을 개발한 일본 반도체마저 미국 시장을 침식하고 있었다. IBM 등 소수 대기업을 제외하면 대부분이 벤처 캐피털이어서 일본 제품의 대량 공세에 밀려 경영난을 겪고 있었다. 정치·군사적으로는 물론 경제적으로도 강대한 미국이 왜 이렇게 되었을까.”

    호암은 당시 미국 방문길에 들른 IBM이나 휴렛 팩커드의 무인공장을 돌아보며 큰 인상을 받았다고 한다. 이와 관련해 이윤우 전 삼성전자 부회장은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당시 출장 일정은 이건희 부회장이 모두 어레인지(arrange) 한 것으로 알고 있다”며 “물론 호암 스스로가 일본의 각계 전문가들로부터 전자산업이란 게 반도체가 없이는 ‘껍데기 사업’이라는 것을 확실히 알게 되지만 이 부회장이 상당히 오랫동안 준비를 해서 선대 회장님을 반도체 사업으로 이끌었다고 생각한다”고 했다.

    “내 나이 73세, 비록 인생의 晩期이지만…”

    호암은 “노심초사하면서 미국 여행길에 올랐지만 막상 미국에서 각 분야 유수 기업들의 생산현장을 자세히 구경도 하고 경영 수뇌들의 고충을 직접 들으니 한국의 살 길은 첨단기술 산업의 시급한 개발밖에 없다는 것을 새삼 확인했다”고 말한다. 실행은 쉽지 않았다. 다시 그의 말이다.

    “언제나 삼성은 새 사업을 선택할 때는 항상 그 기준이 명확했다. 국가적 필요성이 무엇이냐, 국민의 이해가 어떻게 되느냐, 세계시장에서 경쟁할 수 있느냐 등이 그것이다. 이 기준에 견주어 현 단계의 국가적 과제는 ‘산업의 쌀’이며 21세기를 개척할 산업 혁신의 핵인 반도체를 개발하는 것이라고 판단했다.

    그러나 난제가 워낙 크고 많다. 미국과 일본이 점유한 세계시장에 뒤늦게 뛰어들어 그들의 기술을 따라잡을 수 있을까. 막대한 투자 재원은 또 어떻게 마련할 수 있을까. 혁신 속도가 워낙 빨라 제품 사이클이 기껏해야 2~3년인데 그 리스크를 제대로 감당해낼 수 있을까. 고도의 기술두뇌와 기술 인력의 확보, 훈련은 가능할 것인가….”

    무엇보다 호암도 인간이었다. 그는 이로부터 수년 전 위암 수술을 하면서 생과 사의 기로에 섰다. 언제 재발할지 모르는 상황이기도 했고, 당시로서는 평균수명을 훌쩍 넘긴 73세라는 고령에 접어들었다.

    새로운 일을 벌이기보다 마무리를 생각할 시점임에도 아무도 걷지 않은 전인미답의 길에 도전하려는 그의 고민은 깊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그의 마음은 ‘한다’ 쪽으로 기울었다. 고민의 내용도 공장 입지 선정에서부터 구조 및 형태까지 더욱 구체화했다. 다시 호암의 육성이다.

    “반도체 공장의 경우 입지조건도 까다롭지만 무엇보다도 서울에서 1시간 이내의 거리여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세계 정상급의 고도 기술 인력의 취업이 곤란하다. 그런데 서울은 인구집중 지역이므로 넓은 부지는 좀처럼 구하기 어려운 실정이다. 공장 구조도 아주 특수해야 할 터인데 소요시설과 전문건설 용역을 어떻게 확보하느냐도 큰 문제이다. 생각하면 할수록 난제는 산적해 있다. 그러나 누군가가 만난(萬難·갖은 고난)을 무릅쓰고 반드시 성취해야 하는 프로젝트이다.”

    그러면서 이렇게 말을 잇고 있다.

    “수많은 미국 일본 전문가를 비롯하여 국내 전문가들의 의견을 거의 다 들었다. 관계 자료는 손닿는 대로 섭렵했고, 반도체와 컴퓨터에 관한 최고의 자료를 얻고자 무한히 애를 썼다. 그 결과 전혀 가능성이 없지 않다는 점을 알았다. 정부의 적극적인 뒷받침만 있으면 성공의 가능성이 있다는 결론을 얻었다. 내 나이 73세, 비록 인생의 만기(晩期)이지만 이 나라의 백년대계를 위해서 어렵더라도 전력투구를 해야 할 때가 왔다. 이처럼 반도체 개발의 결의를 굳히면서 나는 스스로 다짐했다.”

    1982년 5월이었다.

    태평로 본관 28층 회장실

    호암은 미국에서 돌아오자마자 반도체 사업 추진 태스크포스팀을 만들어 반도체 사업에 대한 전면 재평가를 지시한다. 자료 수집과 함께 철저한 시장조사를 통한 사업성 분석을 다시 하고 장·단기 계획을 세우라는 거였다. 그러면서 직접 매일매일 점검에 들어갔다. 당시 추진팀장이 반도체 사업본부장이었던 김광호 전 부회장이다. 그의 말이다.

    “여태까지 그런 적은 없었습니다. 태평로 본관 28층 회장실 회의실에 반도체 총책임 이사였던 저를 포함해 부장, 과장들까지 불러다가 회의를 직접 주재하셨으니까요. 당시 수첩을 뒤져보니 회장님이 직접 주재한 회의가 1년(48주)에 60번 정도였으니 일주일에 한 번 이상이었지요. 사실은 그보다 더 자주 회의가 열렸습니다.

    어떻든 당시 회의는 파격적이었습니다. 회장님이 직접 말단 과장까지 불러 앉혀놓고 ‘이건 왜 이렇고 저건 왜 잘못됐느냐?’며 세세하게 지적하고 야단을 치고 독려를 했으니까요.

    특히 왜 일본한테 밀리느냐는 말씀을 많이 하셨어요. 당시는 일본에서 메모리 반도체가 막 시작된 무렵이었는데요. ‘일본 NEC하고 삼성이 반도체 사업을 거의 같이 시작했는데, 왜 우리는 맨날 요 모양 요 꼴이고 NEC는 저렇게 컸느냐, 이유가 뭐냐?’는 거였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이러 이런 거 잘못해서 그렇습니다. 기술 동향을 잘못 읽어서 그랬습니다’라면서 맨날 반성문만 쓰는 겁니다.

    회장님 말씀의 요지는 1974년에 NEC 반도체 공장을 직접 방문해 둘러본 때가 삼성이 막 한국반도체를 인수할 무렵이었는데 왜 NEC는 하는데 삼성은 안 됐나 이런 거였습니다. 그런데 일본이 반도체를 시작한 건 1974년이 아니라 1949년 반도체가 세계 처음으로 개발되고 나서부터라고 해야 해요.

    제가 어느 날 소명 자료를 만들어 조곤조곤 설명을 드렸더니 그 후부터는 그런 이야기는 일절 안 하시고 ‘자, 그러면 이제 내가 뭘 도와줘야 되느냐’ 이렇게 변하셨어요.

    회장님은 기술도입에 나서는 과정에서 모욕도 당하셨어요. 평소 친분이 있던 고바야시 NEC 회장을 직접 찾아가 ‘기술 좀 얻도록 해 주십시오’ 했다가 일언지하에 거절을 당하신 일도 있었습니다. ‘내가 그런 대접을 받았다’며 엄청 화를 내셨던 기억이 있습니다. 마음속에 반드시 일본을 이겨야겠다고 결심한 중요한 체험이었다고 할 수 있겠지요. 어떻든 그런 일이 겹치면서 직원들이 기술 도입을 하지 못해 애태우는 상황도 조금씩 이해해주기 시작하셨어요.”

    D램으로 간다

    호암은 1983년 2월 8일 삼성이 ‘VLSI(Very Large Scale Integration·초대규모 집적회로)사업에 진출한다’는 역사적인 ‘도쿄 선언’을 한다.

    그리고 한 달여 뒤인 3월 15일 중앙일보에 ‘왜 우리는 반도체 사업을 하는가’라는 발표문을 낸다. 발표문 중 일부다.

    “우리나라는 인구가 많고, 좁은 국토의 4분의 3이 산지로 덮여 있는 데다 석유, 우라늄 같은 필요한 천연자원 역시 거의 없는 형편이다. 다행히 우리에게는 교육수준이 높고 근면하고 성실한 인적자원이 풍부하여 그동안 이 인적 자원을 이용한 저가품의 대량수출 정책으로 고도성장을 해왔다. (…) 삼성은 자원이 거의 없는 우리의 자연적 조건에 적합하면서 부가가치가 높고 고도의 기술을 요하는 제품의 개발이 요구되었다. 그것만이 현재의 어려움을 타개하고 제2의 도약을 기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고 확신하여 첨단 반도체 산업을 적극 추진키로 하였다. 반도체 산업은 그 자체로서도 성장성이 클 뿐 아니라 타(他) 산업으로의 파급효과도 지대하고 기술 및 두뇌집약적인 고부가가치 산업이다. 이러한 반도체 산업을 우리 민족 특유의 강인한 정신력과 창조성을 바탕으로 추진하고자 한다.”

    지금이야 당연한 말 같지만 호암의 도쿄선언에 국내 재계는 시기상조이며 불가능한 도전이라고 일제히 반대했다. 미국, 일본도 힘들어하는 반도체 사업을 우리가 한다니 3년도 안 가 망할 것이라고 냉소했다.

    국내는 말할 것도 없고 미국 일본도 마찬가지였다. 일본의 한 연구소는 ‘반도체 사업은 인구 1억 명 이상, GNP(국민총생산) 1만 달러 이상, 국내 소비 50% 이상이 돼야 가능한 사업’이라며 ‘작은 내수시장, 취약한 관련 산업, 부족한 사회간접자본, 삼성전자의 열악한 규모, 빈약한 기술’ 5대 불가론이 담긴 보고서까지 냈다.

    이는 당시 현실로 보면 일부러 발목을 잡기 위한 텃세가 아니라 당연한 분석이었다. 당시 삼성의 기술력은 가전용 LSI(Large Scale Integration·대집적회로)를 겨우 만들던 수준이었는데, 그보다 몇 배 어려운 첨단기술을 요구하는 VLSI를 개발한다고 했으니 말이다. 삼성 직원들에게도 청천벽력과 같은 일이었다. 다시 김광호 전 부회장 증언이다.

    “어느 날 느닷없이 회장께서 메모리 사업에 대한 사업계획서를 작성하라는 지시를 내렸다며 비서실 기획담당 임원 몇 명이 부천 공장에 와서 5개년 계획을 잡는 거예요. 투자는 이렇게 하고 인력은 이렇게 늘리고 이렇게 공장을 짓고 차차 규모를 늘려 가면 매출은 어떻게 되고 이익이 얼마가 난다 보고서를 냈는데 나중에 보니까 5년간 매출액을 정확히 맞혔어요. 하여튼 귀신들이라고밖에 말할 수 없어요.

    사실 나는 처음에 반대를 많이 했었습니다. 반도체 기술이 그때까지 형편없는 수준인데 어떻게 당장 메모리 사업으로 갈 수 있을까 했으니까요. 일본이야 국가 프로젝트로 진행했기 때문에 미국을 넘볼 수 있었지만 일본이 우리한테 기술을 줄 리도 없었고…. 심지어 미국도 일본 기술을 돈 주고 살 때였습니다.”

    1983년 도쿄 선언 직전 반도체 사업 태스크포스팀의 보고서가 완결됐다. 보고서를 읽던 호암은 ‘메모리(기억소자)’란 항목에 동그라미를 친다. 메모리 반도체는 1982년 세계 시장규모가 30억1800만 달러로 전체 반도체 시장규모의 20.8%를 차지했다. 향후 1988년까지 연평균 28%씩 고도성장할 것으로 전망됐다.

    호암은 첨단 반도체 중에서 일본이 미국보다 유일하게 앞선 분야가 메모리라는 것에 주목했다. 세계적으로 규격이 통일돼 있고 수요가 많기 때문에 대량생산이 가능하고 한번 투자하면 투자 액수의 서너 배를 금방 뽑아낼 수 있다는 장점이 있었다.

    손톱만 한 크기 칩 위에 수백만 개의 기억 공간을 올려놓는 첨단 설계 기술도 중요하지만 대량생산을 가능케 하는 공정 기술만 갖추면 충분히 따라갈 수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이번에는 강진구 전 회장의 회고다.

    “메모리 반도체는 D램, S램, 마스크 롬, EP롬 등 다양한데 이 중 어느 걸 할 것인지도 문제였습니다. 처음에는 치열한 가격경쟁이 벌어지는 D램을 피해서 S램으로 하자는 의견 쪽으로 기울어졌는데 나중에 바뀌었습니다.

    S램은 시장규모가 D램의 3, 4분의 1 밖에 안 돼 비록 가격경쟁이 치열하고 공급 과잉이 예상된다 해도 시장규모가 큰 D램으로 가는 게 유리하다는 결론에 도달했습니다. 이런 결론을 내기까지가 쉬운 일은 아니었습니다.

    최첨단 기술 도입 없이는 메모리 사업이란 걸 추진할 수 없는 형편이었는데 우리에게 기술을 주겠다고 할 기업은 한 군데도 없었습니다.

    생각 끝에 평소 친분이 두터웠던 샤프의 사사키 부사장을 찾아갔습니다. 삼성이 메모리 사업을 하려고 하는데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고 허심탄회하게 조언을 청했죠. 그랬더니 한국인 한 사람을 소개해 주었습니다. 이임성 박사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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