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호

나는 시장 통해 평등 추구하는 진보우파다

[함운경의 생업전선]

  • 함운경 네모선장 대표·前 서울대 삼민투 위원장

    입력2024-02-27 09: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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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박정희 정책이야말로 좌파경제 전형

    • 북한에 강경하면 보수, 유화적이면 진보?

    • 진보우파란 따뜻한 아이스크림 계속 추구하겠다

    2023년 6월 28일 국회에서 열린 국민의힘 공부 모임 ‘국민공감’ 행사에서 함운경 네모선장 대표가 특강을 하고 있다. [뉴시스]

    2023년 6월 28일 국회에서 열린 국민의힘 공부 모임 ‘국민공감’ 행사에서 함운경 네모선장 대표가 특강을 하고 있다. [뉴시스]

    2023년에 ‘국민공감’이란 국민의힘 의원 모임에서 후쿠시마 오염수 처리 문제에 관한 내 입장을 듣겠다고 해서 연설을 했다. 오염수 처리 방법 중에 희석하는 방법이 최선이란 당연한 이야기를 했고, 이걸 문제 삼는 것은 반일몰이를 위한 정치 선동에 불과하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6개월만 지나면 이 난리법석은 언제 그랬냐는 듯이 조용히 사라질 것이라는 이야기도 했다.

    후쿠시마 오염수 처리 문제가 잠잠해지는 6개월이 지나기 전에 나는 운동권 정치 설거지를 위한 ‘민주화운동동지회’란 조직을 만들고 회장이 됐다. 여기저기 오라는 곳에 나가서 강연도 하고 글도 쓰기 시작했다. 내 인생에 예상하지 못한 갑작스러운 변화였다.

    강연이나 토론회가 끝나고 편하게 뒤풀이하는 자리에 가면 가장 많이 듣는 이야기가 “언제, 어떻게 전향했냐”는 것이다. ‘전향(轉向)’이란 말을 들을 때마다 신경이 곤두서 날카롭게 된다. 제일 심한 말은 귀순(歸順)이란 단어를 사용하는 경우다. “언제 이쪽으로 귀순했느냐”는 것이다. 술과 음식이 오고가는 어수선한 자리에서 자주 등장하는 좌파 우파란 말도 그렇고, 보수 진보란 말도 그렇고, 너무나 익숙하지 않은 자리를 자주 경험했다. 오래 앉아 있을수록 머리가 아팠다. 무슨 뜻으로 좌파·우파, 보수파·진보파 이런 말을 쓰는가. 내가 아는 뜻과는 참으로 다른 의미로 사용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갈등의 골은 너무나 깊었고 적의에 찬 단어로 사용하고 있었다.

    국가중심경제, 비효율과 부패로 파국

    내게 전향이란 말은 고문이란 말로 들렸다. 1972년에 감옥에서는 실제로 전향공작이란 것이 있었다. 7·4남북공동선언과 10월 유신을 앞두고 남파 간첩 등 흔히 말하는 장기수에 대한 전향공작이 있었다. 감옥 안에서 벌어지는 일이었고, 가족이 없거나 외면한 사람이 많은 장기수들이라 밖으로 알려지지 않았다. 구타와 고문으로 자신이 가진 신념을 바꾸라고 강요하는 일이 전향공작이었다. 한 인간의 정신을 파괴하고 굴복시키는 일이었다. 교도관이 직접 하거나 재소자를 시켜 구타와 고문을 하기도 했다. 안양교도소에서 두 번째로 징역을 살 때 교도소 사동 복도에 있는 연탄난로 앞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전향공작을 자신이 했다고 이야기하는 재소자를 만났다. 순간 난로 뚜껑을 들어 때리고 싶다는 충동을 참아야 했다.

    나는 좌파에서 우파로 생각이, 생각하는 방향이 바뀐 것이 맞다. 경제 영역에서 국가가 더 많은 역할을 해야 한다는 좌파 사상에서 시장을 중시해야 한다는 우파 사상으로 바뀌었으니 말이다. 이걸 전향이라고 한다. 그렇다. 나는 전향한 것이 맞다. 내가 세상을 경험하면서 바뀐 것이다. 여러 가지 경험이 있었고, 반성과 성찰의 과정이 있었다. 그런데 생각이 바뀌는 것을 누가 강요할 수 있는가. 나는 스스로 20대에 사회주의 공산주의라는 좌파에서 50대에 철저한 시장주의자로 완전히 바뀌었다.



    뒤풀이 자리에서 자신이 우파라는 사람들은 대부분 박정희 대통령을 존경한다는 것을 숨기지 않는다. 그런데 박정희 대통령이 행한 것이야말로 좌파경제의 전형이다. 국가 주도 경제개발이란 것이 국영기업을 세우거나 국가가 주도해서 정책을 짜고 차관으로 들여온 자금을 적당한 기업인들에게 나눠줬다. 국가중심경제, 즉 좌파경제는 비효율과 부패로 파국을 맞이하게 마련이다. 그게 1979년이다. 박정희 경제의 파산이었다.

    부실을 정리하고 시장 기능을 회복해서 경제를 정상으로 돌린 것이 전두환 대통령 때라고 이야기하면 깜짝 놀란다. 전두환 정권 때 관치경제에서 경제자유화가 이뤄졌다고 이야기하면 내 주변에 나를 아끼는 사람조차 아직은 그런 이야기할 때가 아니라고 한다. 그러나 통계와 데이터를 보면 알 수 있는 이야기다. 자연과학에서는 통계와 데이터가 맞으면 당연한 이야기인데 정치에서는 이야기해서는 안 되는 금기어처럼 여겨진다. 그래서 나는 자신을 우파라고 생각하는 국가중심 경제주의자들과 불편한 뒤풀이 자리를 하고 있다.

    운동권, 대한민국 애착심이 없다

    2023년 8월 15일 서울 성공회주교좌성당에서 민주화운동동지회가 정식 출범식을 개최했다. [민주화운동동지회]

    2023년 8월 15일 서울 성공회주교좌성당에서 민주화운동동지회가 정식 출범식을 개최했다. [민주화운동동지회]

    1988년 2월에 교도소에서 출소했다. 1985년 5월에 들어가서 3년 가까이 살다가 나왔다. 서울미문화원을 점거한 사람으로서 나는 반미투사로 알려져 있었다. 교도소 안에서는 주체사상이 뭔지 몰라 ‘학습 교육 대상’이란 이야기를 듣는 놀림감이었지만, 교도소 밖에서는 반미투쟁의 상징처럼 여겨졌다. 대학 서클 후배로 전방입소거부투쟁 때 분신한 ‘김세진 추모사업회’를 맡아 하고 있었으니 반미투사가 맞는 말이었다.

    1987년 대통령선거에서 노태우 당선이란 결과를 받아 들고 완전히 망연자실해 힘이 빠져 있던 민주화운동 세력에 난 “통일운동을 해서 일어서자”는 주장을 하던 사람이니 반미투사로 불러주는 것도 고마웠고, 나를 주사파 일원으로 생각하는 것에 대해서 아니라고 반박하지 않았다. 나는 그런 분위기에 적당히 편승해서 내가 하고자 하는 일에 활용한 셈이다,

    요즘은 진보와 보수란 말을 많이 듣는다. 세상은 변하기 마련이고 새로운 상황에 인류는 직면하게 돼 있다. 당장 인공지능에 따른 여러 가지 사회현상이 나타나고 있고, 이에 대한 윤리 문제나 철학 문제, 법적 문제가 무수히 발생하고 있다. 해답이 있는가.

    한계적 방식으로 한 걸음씩 나아가자는 것이 보수적 태도라면 한꺼번에 틀을 깨서 단계 도약을 하자고 하면 진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나는 보수적 태도를 가진 사람이다.

    그런데 “세상이 어떻게 됐으면 좋겠냐”고 물으면 나는 능력대로라기보다는 좀 더 평등한 사회를 원한다. 전자가 보수이고 후자가 진보라면 나는 진보적 입장인 셈이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 보수와 진보를 나누는 기준은 다른 데 있다. 북한에 대한 태도에서 강경한 입장을 가지면 보수이고 북한에 유화적 태도로 우리 민족끼리 뭘 하자고 하면 진보라고 한다.

    운동권 정치를 설거지하자는 입장에서 운동권이 대한민국에 애착심이 없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나는 민족은 국가 문제를 해결할 수 없고 국가는 민족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입장에서 “민족우선주의 배격! 대한민국 우선주의!” 입장을 주장하고 있다. 그래서 스스로 보수적이라고 생각하는 분들에게서 많은 박수를 받고 있다. 구체적 입장을 밝혀 내 입장과 당신 입장과 다른 점도 있다고 얘기하지 않고 박수 받는 것에 머무르고 있으니 분위기에 편승하는 셈이다.

    나는 많은 부분에서 생각이 바뀐 것이 맞는데 흔히 사람들이 생각하듯이 완벽하게 자신과 일치하는 생각만 하고 있지는 않다. 나는 지금까지 분위기에 편승해서 나에게 유리하게 활용해 온 것이고 지금도 그렇다. 이러니 내 전향을 의심 어린 눈으로 바라본다.

    흔히 자유우파에서는 전향한 좌파 출신을 신뢰하지 않는다고 한다. 그러면 어떤가. 서로 필요하고 시너지가 나면 협력하는 것이고, 필요하지 않으면 서로 무시할 것이다. 그러니 전향이라 할 때 어디에서 어디로 바뀌었는지 명확하게 밝히는 게 쉽지 않다.

    과거 같은 편이라고 생각한 다른 한쪽에서는 나를 보고 ‘변절의 아이콘’이라 말한다고 한다. 오랜 친구 상가에서 만난 후배가 “선을 넘지 말라”며 자리를 뜨면서 한 마지막 한마디가 그런 의미라고 나는 받아들인다. 나는 변절이라는 말을 들을 때마다 고개가 갸웃해진다. 절개를 지키지 않았다는 것인데 지켜야 할 절개가 무엇일까. 만일 사람이라면 나는 누구에게도 충성을 맹세한 적이 없다. 내가 단 한순간이라도 김일성과 김정일에게 충성을 맹세했다면 절개를 지키지 않았다고 할 수 있다. 북한을 조국으로 생각한 적도 없다. 변절이란 말을 하는 사람들은 자신들이 지켜야 하는 절개가 뭔지를 먼저 밝혀야 한다고 생각한다.

    1996년 한총련의 연세대 점거 사태에 대해 나는 이화여대 초청 강연에서 “정체불명의 사상에 사로잡혀 고장 난 레코드처럼 과오를 반복한다”고 했다. 2005년 12월 8일에는 북한인권국제대회에서 전 열린우리당 중앙위원 자격으로 주제발표자로 나서 이런 얘기를 하려고 했다.

    “만일 우리 사회에서 정치인의 잘못으로 나라가 거덜나고 국민들이 굶주려 죽는다면 정치인과 지도자들은 비난받아 마땅하다.” “인권은 남과 북이 따로 있는 게 아니라 보편적 기준에서 판단해야 한다.”

    그런데 당직자들 사이에 난리가 났다. 당시 집권 열린우리당이 참석을 거절한 행사에 당원교육연수센터 소장이 참석할 수 있느냐는 문제 제기가 있었고, 결국 나는 참석하지 못했다. 평소 당내 회식 자리에서도 “타도 김정일”을 해야 한다는 나였지만 말로만 혁명했을 뿐 더는 행동하기 어려웠다. 그렇지만 내 신념은 그대로였다.

    나는 변절한 적이 없다. 자신들이 보고 싶은 방식으로 나를 쳐다봤을 뿐이다. 그리고 현대사회에서 변절이나 절개라니 너무 고리타분하지 않은가. 참 봉건적이고 조선스럽다.

    두 번째 구속됐을 때 일이다. 나는 집안 문제로 정신적 갈등이 많았고 하루라도 빨리 나가 집안 문제를 해결하고 싶었다. 원래 체포된 혐의는 벗어났으니 풀어줄 법도 한데 당시 사법 당국은 1988년부터 1년 동안 전국 강연 횟수가 70여회나 되는 통일운동가를 풀어줄 생각이 없어 보였다. 기소되기 직전 검사 면담을 요청해서 검사 받으러 나갔다. 담당 검사는 반성문을 요구했다. 나는 반성문 없이 나가도록 해달라고 했다. 애초 나를 붙잡은 혐의는 나에게 없던 혐의였고, 별건으로 입건해 구속한 것이니 풀어달라고 했다. 그 정도로 1년 이상 살 일도 아니었으니 풀어줄 법도 한 것 아닌가. 내가 “앞으로 활동을 하지 않는다”고 해도 끝까지 반성문을 요구했다. 괴로운 시간이었다. 반성문 한 장 쓰면 나가는 것인데. 나는 반성문을 쓸 수 없었다. 나는 돌아다니면서 강연한 것밖에 없다. 그게 국가보안법 위반이었다. 반성문을 쓰지 않았으니 재판에 회부됐고 나에게는 이전 감옥보다 더 길게 느껴진 10개월 형을 살아야 했다.

    반성 요구는 양심의 자유 공격하는 것

    세상을 살면서 사람들은 생각이 바뀌기 마련이다. 반성을 요구하거나 전향공작을 하나 변절자라고 욕하는 것은 모두 양심의 자유를 공격하는 것이다. 그런 공격은 어떠한 경우라도 정당화될 수 없다. 이런 공격을 받으면서 내가 배운 것이 있다. “사람에게 고통보다 견디기 어려운 것은 유혹이다.” 어쩌면 유혹이 더 큰 고통일 수 있다. 사람을 고문하는 것보다 내 내면에서 속삭이는 유혹이 더 힘들었다. 자신의 생각을 돌이켜보고 성찰하는 태도 그게 스스로 반성하는 것이다. 많은 사람이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생각이 바뀌는 것이다. 나는 유혹도 이겨냈고 고통도 견뎌내면서 생각이 바뀌었다. 어느 한 순간 생각이 갑자기 바뀌었겠는가.

    많은 사람의 생각이 변하고 발전하기를 바란다. 나는 진보우파란 따뜻한 아이스크림을 추구하려고 한다. 시장이라는 방법으로 평등을 추구하는 진보우파. 나 나름대로 정립하고 계속 생각을 발전시키고 내 이야기를 설득할 방법을 찾도록 노력할 것이다. 두들겨 맞기도 하겠지만 그러면서 더욱 단단해지길 나는 계속 추구할 것이다.

    함운경
    ● 1964년 출생
    ● 서울대 물리학과 졸업
    ● 서울대 삼민투 위원장
    ● 자주평화통일민족회의 조직부장
    ● 現 네모선장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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