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1월호

보수의 장자방 윤여준 “‘광기’로 공천한 한국당 초선의원 대폭 바꿔야”

“매번 같은 類만 충원하니 당이 저 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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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재석 기자

    jayko@donga.com

    입력2019-12-21 10: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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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7대 총선 ‘탄핵 역풍’ 당시 수준의 비호감도

    • 탄핵 입장 정리에 엉거주춤하니 지지도가 저 모양

    • 평생 검사만 한 黃, 종로 지역구 출마 엄두도 못 낼 것

    • 유승민, 독자 노선 깃발 들면 젊은 층 호응 상당할 것

    • 영원히 박근혜에 묶여서 당에 무슨 장래 있겠나

    • 文, 스스로 지지 기반 축소해 곤경…자업자득

    [조영철 기자]

    [조영철 기자]

    “모르겠어요. 제가 눈이 어두워서 안 보이는지는 모르겠으나…” 

    보수의 장자방(張子房) 윤여준(81) 전 환경부 장관이 ‘모르겠다’는 단어를 연거푸 뱉었다. 차기 대선에서 여당 후보와 호각지세(互角之勢)로 맞설 보수야당 후보가 보이느냐는 질문을 했을 때였다. 그는 ‘이해할 수 없다’는 표현도 연신 쏟아냈다. 불가해(不可解)의 대상은 마찬가지로 보수다. 장자방의 할아버지가 와도 ‘모른다’ ‘이해 못 한다’만 반복하다 말끝을 흐리게 만든 세력. 한국 정치의 시곗바늘을 거꾸로 돌려버린 주류 보수. 바로 자유한국당이다. 

    역주행한 한국당과 달리 윤 전 장관은 팔순의 나이에도 정주행하고 있다. 그는 2019년 인터뷰 전문잡지 ‘IVE(아이브)’ 창간에 관여했다. 몇 년 전 “79세와 79년생이 같이 일하면 재밌지 않겠느냐”는 말을 듣고 “그거 재밌겠다” 싶어 시작했단다. 창간호에 직접 인터뷰어로도 나섰을 정도니 그의 열정도 보통은 아니다. 지금도 1주일에 두 번 서울 강남구에 있는 IVE 사무실에 들러 자문에 응한다. 

    덕분에 윤 전 장관은 구중궁궐에서 알 수 없는 밑바닥 민심에 여전히 밝다. 이런 일화도 있었단다. 

    “‘조국 사태’ 당시 젊은 친구들에게 문재인 대통령과 더불어민주당을 두고 비판적 이야기를 했어요. 그랬더니 그 친구들이 ‘장관님 말씀 다 맞는데요, 한국당은 더한 세력 아니에요?’ 이래요. 뭐라더라. ‘부패의 저작권을 가진 정당’이라던가.(헛웃음)” 



    수십 년 전부터 그의 업(業)은 민심을 읽는 것이었다. 그는 1966년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로 사회생활을 시작해 국회의장 공보관, 대통령비서실 공보비서관, 공보수석, 정무장관 보좌관(차관급), 환경부 장관, 한나라당 여의도연구원장 등을 지냈다. 권력의 심층에서 민심에 대한 예민한 감각을 키워온 보수 원로가 30~40대와 부대끼며 벼려낸 감수성이 궁금했다. 2019년 12월 9일 서울 서대문구 동아일보 충정로사옥에서 그를 만났다.

    한국당 비호감도 65%

    -한국당에 대한 비호감도가 65%에 달합니다.(한국갤럽 11월 조사 기준) 총선에서 도리어 ‘한국당 심판론’이 제기될 것이라는 분석까지 나오는데요. 역대 제1야당 중 이 정도로 ‘거부반응’을 일으키는 경우가 있었습니까? 

    “17대(2004년) 총선 앞두고 한나라당이 ‘탄핵 역풍’을 맞아 거의 빈사 상태에 빠졌어요. 수치는 정확히 기억 안 나는데, 그때 한나라당에 대한 국민의 비호감도가 이보다 높으면 높았지 낮지 않았을 거예요. 그것 말고는 다른 전례는 못 찾아보겠어요.” 

    그는 17대 총선 당시 한나라당 선거대책본부 부본부장이었다. 참패가 예상되던 한나라당은 121석을 확보해 기사회생했다. ‘천막당사’를 꾸려 선거를 이끈 박근혜 당시 한나라당 대표는 일약 ‘선거의 여왕’으로 떠올랐다. 

    -당시 천막당사가 효과를 내 기대보다 선전했죠. 

    “김형오 사무총장이 선거대책본부장이었는데, 지역구 판세가 어려웠어요. 부본부장인 제가 대리해서 선거를 치렀죠. 주무국장이 여론조사 결과를 토대로 보고하기를 ‘비례대표 포함 51석밖에 못 얻는다’고 그래요. 앞이 컴컴했죠. 메신저를 거부하는 상황에서는 어떤 메시지를 내놔도 거부합니다. 박 대표에게 ‘이번 선거는 전략 없이 치러야겠습니다’라고 했죠.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다시는 안 그러겠습니다’ ‘한 번만 기회를 주십시오’ 이렇게 세 마디만 하시라 말씀드렸어요. 

    박 대표가 씩 웃더니 ‘짤막하게 얘기할 수 있다면 시간을 절약해 한 군데라도 더 갈 수 있겠네요’ 하더라고요. 그래서 매일 아침 유세 일정을 아주 과할 만큼 짜서 드렸어요. 그런데도 (박 대표가) 한 번도 힘들다는 얘기 없이 일정을 다 소화했지요. 선거 막판에 가서는 박 대표에게 ‘개헌 저지선을 달라’는 메시지를 추가하시라고 했어요. 아니나 다를까 이게 먹혔는지 121석을 얻었죠.” 

    2004년 5월 16대 국회 임기 종료 후 윤 전 장관은 박 대표의 만류에도 탈당계를 제출하고 당을 떠났다. 윤 전 장관에 따르면 그해 여름 박 대표가 다시 연락해 와 서울 마포에서 점심 식사를 했다고 한다. 그 뒤로 두 사람의 인연은 좋은 모양새로 이어지지 않았다. 

    “박 대표가 대통령 후보가 되기 전 당 대표로 보여준 모습에 너무 실망해 언론을 통해 공개적으로 비판했어요. 지나치게 수직적이고 폐쇄적인 리더십이라 대통령이 되면 개인도 나라도 불행해질 거라고 했죠. 선거 끝난 후 가까운 의원들이 전화해 농담으로 ‘장관님 이민 가셔야 할 것 같다’고 그랬죠(웃음).” 

    -지금 박 전 대통령이 처한 상황을 개인적으로는 안타깝게 보시겠습니다. 

    “인간적으로는 안됐죠. 그러나 대통령으로서 범한 과오는 씻을 수 없는 것이고, 그에 대한 대가는 당연히 지불해야죠. 어쩔 수 없는 일이에요.”

    탄핵 정권의 국무총리

    자유한국당을 제외한 여야 ‘4+1’ 협의체가 2019년 12월 13일 국회 본회의에서 패스트트랙으로 지정된 공직선거법 개정안 상정을 예고했다. 같은 날 국회 로텐더홀에서 황교안 한국당 대표는 “좌파독재 완성을 위한 의회 쿠데타가 임박했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안철민 동아일보 기자]

    자유한국당을 제외한 여야 ‘4+1’ 협의체가 2019년 12월 13일 국회 본회의에서 패스트트랙으로 지정된 공직선거법 개정안 상정을 예고했다. 같은 날 국회 로텐더홀에서 황교안 한국당 대표는 “좌파독재 완성을 위한 의회 쿠데타가 임박했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안철민 동아일보 기자]

    -최근 한국당에서도 수직적 리더십 논란이 있습니다. ‘절대황정(絶對黃政)’이라는 말까지 도는데요. 

    “황교안 대표는 탄핵당한 대통령 밑에서 법무장관과 국무총리를 지낸, 태생적인 한계가 있지요. 그러면 대표가 되는 과정에서나 취임 이후에라도 정말 혁신적인 변화를 보였어야 해요. 그런데 박 전 대통령 탄핵에 대한 입장 정리를 당도 안 하고 대표도 안 하잖아요. 엉거주춤 넘어가려는 것처럼 보이니까 국민들이 좋게 받아들일 리가 없죠. 그러니 지지도가 항상 저 모양이지.” 

    -그런데도 황 대표는 친정체제를 확립하고 있는 모양새인데요. 

    “황 대표는 일생을 공안검사로 보냈으니 엄격한 수직적 질서에서 잔뼈가 굵은 사람이잖아요. 평상시 민주주의적 소양을 쌓을 수 있는 환경에 있질 않았지요. 그렇게 체질이 굳어 있는 상황에서 민주화 시대에 정당의 대표로 왔단 말이에요. 환골탈태가 금방 되겠습니까? 본인은 본인대로 힘들 거고, 당은 당대로 피차 힘들겠죠.” 

    -황 대표가 취임 후 보여준 대부분의 승부수가 장외투쟁이었습니다. 그건 어떻게 보세요? 

    “황 대표가 꼭 장외투쟁을 하려고 마음먹어서라기보다는, 원내가 아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원외 활동에 치중할 수밖에 없는 이유도 있겠죠. 또 양대 정당이 극한적으로 부딪쳤잖아요. 국회는 마비됐고. 그러니 장외투쟁을 황 대표의 리더십 문제라고만 하기는 어려워요.” 

    -과거 이회창 총재도 여러 차례 장외투쟁에 나섰죠. 

    “아휴, 장외투쟁 말도 마세요. 제가 집회에 매번 참여하면서 시민들의 반응을 유심히 살폈어요. 그러고 나서 이 총재한테 ‘당원 동원해 집회하는 것 아무 의미 없습니다. 돈 들고 힘만 들지. 지나가는 어떤 시민도 눈길 안 줍니다. 시대가 바뀌었기 때문에 야당도 투쟁 방식을 바꿔야 합니다’라고 말씀드렸죠. 그래도 안 바뀌더라고요.” 

    -20년 전에도 시민 반응이 좋지 않았네요. 

    “지금은 더 말할 것도 없죠. 안 먹혀요. 장외투쟁하고 심지어 대표가 초겨울 날씨에 천막 치고 비장한 각오로 단식까지 했는데 지지율 올라갔습니까?” 

    -젊은 친구들은 한국당이 판·검사, 장·차관, 장군만 많은 ‘웰빙 정당’ 같은데 밖에서 투쟁하니 더 이상해 보인다고 하더군요. 

    “어색하죠. 그게 몸에 밴 사람들이 아니거든요. 민주당에 있는 소위 민주투사들은 그 투쟁이 몸에 익은 사람들이에요. 그러니 기획도 잘하죠. 여기(한국당)는 (장외투쟁이) 체질에 안 맞아요.” 

    -군부정권 시절 ‘육법당(陸法黨)’이라는 말이 있었잖습니까. 지금 한국당 인적 구성이 육법당에 고시 출신 관료만 더한 수준으로 보이는데요. 

    “제가 이회창 총재 계실 때도 같은 문제를 제기했어요. 그런데 자기랑 같은 문화를 가진 사람이 편하잖아요. 그렇게 서로 좋아하게 돼 있어요. 국민으로부터는 점점 멀어지는 거고.” 

    -야당 지도자들의 언어가 너무 빈곤한 건 아닐까요? ‘좌파독재’라는 표현이 21세기형 야당에 맞는 슬로건이냐는 지적도 나옵니다만. 

    “상대방을 프레임에 묶으려고 규정해서 던지는 말인데, ‘좌파독재’라는 말은 이미 국민에게 식상하지요. 그렇게 규정할 테면 그 나름의 논리가 있어야 해요. 왜 좌파라 하는 것이며 왜 독재라고 하는 것이냐. 논리는 없고 규정만 해버리면 누가 승복하려 하겠습니까.”

    광기의 공천

    윤 전 장관은 1998년 이회창 총재의 정무특보로 임명됐다. 이후 2000년 16대 총선에서 총선기획단장과 선대위 종합조정실장을 맡아 개혁 공천의 밑그림을 그렸다. 이때 각 계파 보스인 김윤환, 이기택, 신상우 씨가 모두 공천에서 탈락했다. 당시 일간지에는 공천 발표가 있던 날에 빗대 윤 전 장관을 두고 ‘금요대학살의 원흉’이라는 표현이 등장했다. 

    -2000년 16대 총선 때 ‘공천 물갈이’를 주도하셨잖아요. 

    “제가 주도한 건 아니고 이 총재가 결심해서 하신 거니 그분 작품이죠.” 

    -지금의 한국당 구조상 그와 같은 ‘공천 물갈이’가 가능하겠습니까? 

    “황 대표가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말 한 마디 나눠본 일이 없어 판단하기가 어려워요. (다만) 20대 총선 때 이한구 당시 공천관리위원장이 했던 공천은 저는 말이 안 되는 공천이었다고 생각해요. 그 당시 이 의원이 보여준 모습은 광기였어요. 이 의원이 평소에 그런 사람이 아니었어요.” 

    -그분이 그 뒤에 공직을 또 한 것도 아니고 대체 왜 그랬을까요? 

    “그건 모르겠어요. 박 대통령에게 대체 무슨 소리를 들었길래 저렇게 광기를 부리는지 정말 납득이 안 가더라고요. 그때 공천을 새로 받은 사람들이 지금 다 초선이잖아요.” 

    -지금은 ‘친황 초선 그룹’이라고 불리죠. 

    “그 사람들 대폭 바꿔야 해요.” 

    그러면서도 윤 전 장관은 “야당은 수적으로 많이 바꾸기가 어렵다. 자칫 밖으로 나가 당을 만들 수 있기 때문”이라면서도 이렇게 부연했다. 

    “16대 총선 공천 때 양대 파벌 보스를 다 쳤으니 난리가 났죠. 당을 나간 분들이 민국당 만들어 총선에 나섰지만 지역구에서 단 한 명의 당선자도 못 냈어요. 정말 국민이 무섭고 한편으로 고맙구나 생각했지요. 이회창이라는 사람이 정치개혁 하겠다는 약속을 지키기 위해 그 힘든 걸 했고 국민이 인정한 겁니다. 수도권 40대가 전폭적 지지를 했어요. 그 덕에 DJ(김대중 전 대통령) 취임 2년 만에 치른 선거였는데도 한나라당이 제1당이 된 겁니다.” 

    -그래도 한국당은 현역의원 33% 이상을 컷오프(공천심사 전 탈락)하고 경선 때 17%를 교체하는 등 현역의원 절반을 바꾸겠다고 발표했는데요. 

    “수치가 적은 건 아닙니다만, 대개 선거 때마다 40%대의 교체율을 보였어요. 문제는 교체율이 아니에요. 어떤 사람을 충원하느냐가 핵심이지요. 그동안 40%씩 여러 번에 걸쳐 사람을 바꿨는데도 왜 당이 전혀 안 바뀌었습니까. 똑같은 유의 사람을 충원해서 그래요. 가치관과 사고방식이 같으면 행동양식도 같아진다고요. 그래도 과거에는 원희룡, 남경필, 정병국처럼 개혁적 목소리를 내려고 하는 의원들이 있었죠. 물론 그들도 (한나라당이) 여당이 된 후에는 민심을 반영한 소리를 했다가 청와대가 언짢은 기색을 하면 쏙 들어가 버리고 몇 번 그랬다고요. 제가 한번 그들(남원정)이 하는 조찬모임에 가서 대놓고 이야기한 적도 있어요. ‘당신들이 무슨 개혁 세력이냐.’ 그랬더니 ‘그 말 인정한다’ 그러대요. 그런데 이후에는 그나마도 싹 다 없어졌잖아요.” 

    이 대목에서 윤 전 장관은 “전략도 없고 정책도 없고 어젠다도 없고 이슈도 못 만들면서 뭣 하러 야당 하나”라며 혀를 차듯 덧붙였다. 

    “국민에게 지지할 동기를 못 주면서 그냥 ‘반(反)문재인 뭉치자’고만. 권위주의 시절에야 국가를 폭력이라고 생각했으니 무조건 반대만 하면 인정해줬죠. 지금은 그런 시대가 아니잖아요. 그런데도 여전히 그런 식이니….”

    종로의 황교안과 대구의 유승민?

    -황 대표가 총선에서 종로에 나가느냐 마느냐로 말이 많습니다. 

    “황 대표의 종로 출마가 현실성이 있을까요? 선거는 안 해본 사람에겐 정말 어려운 일이에요. 게다가 평생 행정부에만 있던 사람이 국회의원 지역구 선거에 나간다는 건 엄두 내기가 어려울 거예요. 당 대표니까 총선 전체를 지휘해야 한다는 명분도 있고. 또 종로에 나가더라도 당선이 쉽지 않을 걸요? 현역인 정세균 의원이 없더라도 지금 종로 지역 유권자들이 황 대표에게 그렇게 절대적인 지지를 보낼 것이냐에 대해서는 의문이에요.” 

    -유승민 의원은 대구 출마 의사를 밝혔는데요. 

    “글쎄요. 대구를 고집하는 모습이 국민 입장에서 그리 좋아 보이지는 않습니다만, 대구도 선거가 굉장히 어렵다는 거잖아요. 본인은 아마 어려우니 도망갔다는 인식을 주는 게 죽기보다 싫겠죠. 그건 이해해요. 그런 인식이 많이 작용하지 않았나 싶어요.” 

    -2016년 총선의 경우, 호남 기반의 국민의당이 출현했음에도 민주당이 중도 표심을 공략해 수도권 압승을 거둬 제1당이 됐습니다. 한국당을 두고도 영남에 얽매이기보다는 수도권에 승부를 걸어야 하는 것 아니냐는 조언이 많은데요. 

    “수도권 승부를 하려면 수도권 유권자에게 지지받을 수 있는 후보를 내세우고 당의 모습부터 바뀌어야죠. 지금 모습으로 수도권에서 어떻게 이기겠어요?” 

    -2016년 민주당은 김종인 대표를 전격적으로 영입해 승리했잖습니까. 그런 구도를 그려볼 수 있지 않을까요? 

    “물론 당시 민주당의 승리는 김종인 효과라고 봐야죠. 극적인 드라마였고. 그런데 한국당은 생래적으로 그런 드라마를 못 만드는 체질이에요. 늘 현실에 안주하려 하니까요. 정기국회 끝나면 바로 선거 치를 판인데 아직도 당의 모습을 보면 선거에서 이기겠단 생각이 있는 건지 없는 건지…. 정권이 민심을 잃어 자신들이 반사이익 볼 거라는 편한 계산을 하고 있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총선 앞둔 야당치고는 정말 태평해 보여요.” 

    -유승민 의원은 신당을 만들어 보수의 새집을 짓자고 합니다. 

    “유 의원이 지금까지 해온 행보를 보면 조금 이해를 못 하겠어요. 왜 한국당과 그렇게 합치려고 애를 써요? 독자적으로 갈 생각을 해야지. 그 재주와 지식을 갖고 한국 현실을 보면 국민에게 호소하고 싶은 이야기가 굉장히 많을 텐데요. 거대한 전환기를 맞아 자신이 생각하는 국가의 미래를 제시하고, 지지하는 사람들을 모아 나서면 상당한 호응을 받으리라 기대했는데 끝끝내 안하더라고요. 신문 보면 늘 ‘칩거한다’ ‘전화 안 된다’고 나와요. 

    그랬다가 현안 있을 때 잠깐 나와 현안에 대한 멘트만 하고 또 들어가고. 아니, 정치를 안 할 생각이면 몰라도 할 생각이면 왜 저렇게 하는지 이해 못하겠다는 생각을 여러 번 했어요. 근래 와서 독자 노선을 가겠다고 말은 해서 두고 볼 일이지만, 사람들은 그걸 안 믿더라고요.” 

    윤 전 장관과 인터뷰하고 사흘 뒤인 2019년 12월 12일, 유승민 의원을 비롯한 바른미래당 비당권파 의원들은 신당명을 ‘새로운보수당’으로 확정했다.

    보수통합이냐 유승민 독자 깃발이냐

    -보수통합이 이루어지리라 보시는 것 같네요. 

    “요새 겉으로 드러나는 황 대표의 모습을 보면 통합에 썩 열의가 있어 보이지는 않아요. 패스트트랙이 어떻게 결론 나느냐 두고 볼 생각이겠죠. 정기국회 끝난 후 통합 여부를 결정해도 늦지 않겠다는 생각일 수도 있고. 심지연 경남대 정외과 명예교수가 쓴 ‘한국정당정치사’라는 책이 있어요. 거기에 ‘위기와 통합의 정치’는 한국 정치의 특징으로 구조화돼 있다고 나와요. 이게 세계적으로 유례가 없는 현상이에요. 정치권이 자기쇄신과 반성, 변화된 시대 상황에 부합하는 정책의 제시를 통해 지지를 획득하려 하기보다는 이합집산이라는 정치적 담합을 통해 손쉽게 지지를 동원하려 하기 때문이라는 거죠. 심 교수는 이런 현상이 상당 기간 지속되리라 봤어요. 그렇게 보면 보수통합 가능성이 크죠.” 

    -보수통합보다는 유승민계가 개혁보수 깃발을 내걸고 독자노선을 추구하는 게 장기적으로는 한국 보수에 더 좋은 것 아닌가요? 

    “물론이죠. 흔히 중도라고 불리는 카테고리에 이른바 개혁보수 성향 유권자가 상당히 있어요. 그 지지를 확보할 수 있으면 바람을 일으킬 수 있지요. 물론 외마디 구호 갖고 될 일은 아니지만 학계나 정치권에서 도움 받으면 되잖아요. 큰 방향은 다 나와 있다시피 하니 깃발 들고 호소하면 젊은 층의 상당한 호응이 따르리라 봐요. 총선에서 제1당은 못 되더라도 굉장히 중요한 정치적 기반을 형성할 수 있지요. 이를 발판으로 대권에 도전하면 저는 승산이 충분하다고 봐요. 그런데 이유는 모르겠으나 안하는 거죠.” 

    -전에 없는 새로운 사람이 나올 수 있다고 보시나요? 

    “저는 완전히 새로운 사람이 나와야 한다고 봐요.” 

    -전례가 없지 않습니까. 

    “요즘 시대 특성을 과거와 같이 보면 안 되죠. 지금 눈앞에 보이는 가상현실(VR)이 전에 생각했던 일이 아니잖아요. 제 욕심 같아서는 40대 중에서 IT(정보기술) 관련 창업을 해본 경험이 있는 사람들을 중심으로, 정치 관련 분야에서 일해본 비교적 젊은 세대가 결합하고 그 뒤에 김종인 씨 같은 정치원로가 울타리 노릇을 하는 방식이었으면 좋겠어요. 그런 세력이 만들어진다면 폭발적인 인기를 끌 거예요.”

    박근혜라는 山

    -한국당은 오랫동안 국정을 책임져온 보수정당 계보에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도 아마추어 같다는 느낌이 짙은데요. 

    “민주화 이후에도 우리 국회가 책임 있는 국정 운영을 해본 경험이 없어요. 민주화 운동의 상징적 존재인 YS와 DJ 두 분도 재임 중 제왕적 대통령이라는 평가를 받았어요. 국정은 대통령이 좌지우지하고 여당은 대통령을 추종하는 사람들만 충원해 구성했잖아요. 지금 여당이라고 다릅니까? 민주투사라고 하는 사람이 즐비하게 많은데 제 목소리 내는 사람 있어요? 다 앞장서서 대통령과 청와대만 추종하기 바쁜 모습이잖아요. 여당 의원들이 스스로 대통령 하수인 역할에 만족하다 보니 역량이 함양·배양될 여지가 없죠.” 

    그는 이 대목에서 다시 이회창 전 총재를 경유했다. 

    “이 총재가 1997년 8월 31일 전당대회에서 총재가 됐어요. 거대 정당 총재가 됐으니 저 같은 사람이 있어 뭐 하겠어요. 그래서 총재께 ‘저는 이제 제 갈 길 가겠습니다’ 했더니 ‘좀 도와달라. 어떻게 당에서 정세 분석이 됐건 대책이 됐건 종이 한 장 주는 사람이 없다’는 거예요. 국정 운영 경험이 많다고 하는 정당도 야당이 되면 종이 한 장 생산할 능력이 없는 거예요. 과거엔 늘 행정부에 신세 졌거든.” 

    -여당 때는 관료의 도움을 받다 보니…. 

    “정부가 법을 만들면 표지만 바꿔 의원 입법으로 냈단 말이에요. 그런 게 체질화됐지.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해본 일이 없거든. 그러다 졸지에 야당 되니 아무것도 못하는 거지.” 

    -보수가 박근혜라는 산(山)을 넘지 않고서야 앞으로 나아갈 수가 있겠습니까? 

    “박근혜라는 산을 피할 생각을 하면 피해지지 않죠. 다른 걸로 덮어버리면 되잖아요.” 

    -덮어버린다면? 

    “‘박근혜 탄핵’이라는 문제를 한국당이 정면으로 다룬 일이 없어요. 탄핵이 ‘공공성을 상실한 지도자에 대한 명예혁명이었던 것’이냐. 아니면 일부 사람들이 주장하듯 ‘정상적 절차로는 집권이 어려운 이른바 혁명 세력에 의해 집권의 수단으로 이용된 것’이냐. 피 터지는 논쟁을 통해서라도 당내에서 이 문제를 정리했어야죠. 그랬어야 박근혜라는 인물을 역사 속으로 보낼 수 있어요. 혁명 세력이 이용했다고 여긴다면 박근혜 명예회복을 위해 투쟁할 것인지, 공공성을 잃은 지도자에 대한 명예혁명이었다고 여긴다면 국민에게 사죄하고 참회하든지 결정해야죠. 어떤 과정도 안 거쳤단 말이에요. 그런 상황에서 탄핵 정권의 총리를 지낸 분을 전당대회에서 당원들이 선출했어요. 국민들이 그 당에 어떤 기대를 하겠습니까. 본질적인 딜레마예요. 그러면서 만날 친박 대 비박이래. 영원히 박근혜한테 묶여 있어갖고 당에 무슨 장래가 있겠어요. 쳐다보면 정말 한심해요.” 

    -보수가 2016년 총선, 2017년 대선, 2018년 지방선거까지 세 번 연속 패했는데요. 

    “그렇게 일부러 하기도 어려워요.”

    자업자득

    윤여준 전 장관은 “한국당이 ‘박근혜 탄핵’ 문제를 정면으로 다루지 않는 이상 미래를 기약할 수 없다”고 했다. [조영철 기자]

    윤여준 전 장관은 “한국당이 ‘박근혜 탄핵’ 문제를 정면으로 다루지 않는 이상 미래를 기약할 수 없다”고 했다. [조영철 기자]

    -지금 한국의 권력 질서는 ‘진보로 기울어진 운동장’이라 봐야 하는 것 아닌가요? 

    “현 집권층이 중도로 분류되던 국민 일부를 포섭해 외연을 확장한 건 사실이죠. 한국 사회 헤게모니를 일단 장악했다는 점은 인정해야죠. 그러나 정권 잡은 후 2년 반 동안 진보의 능력과 도덕성도 밑천이 드러났잖아요. 계속 진보로 기울어질지는 두고 봐야겠죠.” 

    이와 관련해 윤 전 장관은 대통령 4인의 인사 방식을 비교선상에 올렸다. 

    “제가 청와대 공보수석 할 적인데, 이회창 당시 전 총리가 (청와대를) 다녀갔어요. 제가 YS께 ‘이 전 총리가 나중에 각하 말 안 들을지도 모르는데 괜찮으시겠어요?’ 그랬더니 ‘괜찮아. 걱정하지마. 선거 치르고 보자고’ 이러시더라고요. 지금 문 대통령 같으면 어림 반 푼어치도 없는 일이죠. 박 전 대통령에게도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고. DJ도 마찬가지죠. 김중권 초대 비서실장이 6공 때 정무수석이에요. 정치는 그렇게 자기 지지 기반을 확대하는 거예요. 문 대통령은 (진영을) 반대로 딱 갈라서 축소지향적으로 가버렸잖아요. 그러니 권력 기반이 점점 취약해져 지금 저렇게 곤경에 처한 것 아닙니까? 자업자득이죠.” 

    -한국의 미래와 국제 질서에 대한 식견을 두루 갖춘 경세가가 보수 진영에 보이지 않습니다. 

    “지금은 경세가를 길러내는 시대가 아닌 것 같아요. 사회가 세분화됐고 학문 분야도 갈수록 미시적으로 쪼개져요. 또 경험이 축적되지 않고 단절돼요. 대통령 5년 하고 나가면 후임자가 전임자를 반드시 단죄하잖아요. 단절의 정치가 인물을 못 키우는 나쁜 결과를 가져온 셈이죠. 또 정당이 사람 기르는 기능을 전혀 안 해요. 정당이 늘 국민에게 혐오의 대상이 되다 보니 대선 앞두고는 참신한 인물을 어디선가 데려와요. 그러면 그 사람이 선거를 치르는데, 그조차 정당이 아닌 캠프가 치러요. 대통령 당선되고 나면 집권당은 완전히 무력화시키고 캠프 중심으로 논공행상이 이뤄지죠. 이런 구조에서는 인물이 클 수가 없지요.” 

    2020년 대한민국 보수는 무엇을 지키고 있는가. 탄핵당한 전직 대통령인가, ‘텃밭’ 지역구인가. 혼돈의 시대일수록 기본으로 돌아가야 한다. 윤 전 장관은 인터뷰 내내 “진보건 보수건 대한민국 헌정(憲政) 질서 내에 존재해야 한다”고 여러 차례 강조했다. 지켜야 할 것이 헌정과 동떨어져 있다면 그것은 보수가 아닌 반동(反動)일 뿐이다.



    고재석 기자

    고재석 기자

    1986년 제주 출생. 학부에서 역사학, 정치학을 공부했고 대학원에서 영상커뮤니케이션을 전공해 석사학위를 받았습니다. 2015년 하반기에 상아탑 바깥으로 나와 기자생활을 시작했습니다. 유통, 전자, 미디어업계와 재계를 취재하며 경제기자의 문법을 익혔습니다. 2018년 6월 동아일보에 입사해 신동아팀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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