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11월호

“이건희 회장은 거짓말‧변명하는 사람을 제일 싫어했어요” [+영상]

[경제사상가 이건희 탐구㊶] 이건희 회장 별세 3년, 김인 前 삼성SDS 사장 증언㊦

  • 허문명 기자 angelhuh@donga.com

    입력2023-11-13 09: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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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누가 만드는가’가 중요한 시대

    • ‘양적 국제화’는 한계 봉착, ‘질적 국제화’가 갈 길

    • 1인당 1억 원, 지역전문가 제도가 낳은 것

    • 삼성 국제화 비밀 병기 ‘미래전략그룹’

    • 메이드 인이 아니라 ‘메이드 바이’

    [+영상] 김인 전 삼성SDS 사장 "이건희 회장은 내게 스승이자 멘토였다"



    [+영상] 반도체 전쟁 중인 지금은 '이건희' 다시 읽을 때



    2005년 경북 구미시 휴대전화 공장 방문. [동아DB]

    2005년 경북 구미시 휴대전화 공장 방문. [동아DB]

    ‘국제화, 현지화’는 ‘복합화’ 개념과 함께 이건희 회장이 신경영 선언에서도 매우 강조한 개념이다.

    당시 이 회장은 앞으로 삼성뿐 아니라 국내 다른 업체들의 생산기지가 계속 해외로 이전하는 상황이 올 것이라고 내다봤다. 이 과정에서 가장 필요한 것이 국제화에 대한 이해였다. 프랑크푸르트에서 이 회장이 육성으로 남긴 말이다.

    “냉장고를 개발할 때에도 동남아에도 같이 팔 수 있는 금형을 만든다면 금형 50만 개 한 것을 나중에 동남아로 옮겨 30만 개 돌려도 된다.



    현지 외국인들에게도 삼성 정신을 심어라, 정보 정치 동향 모두 모아라. 세계 모든 지점을 통해 업종별로 자료를 모아 피드백시켜라, 전자·중공업·전기·전관·항공 등은 한 회사다. 서로 벽 치지 마라. 삼성맨은 삼성 아래 하나다. 이것이 국제화 시대에 필요한 의식이다.”

    2005년 태국 사업장 방문. [동아DB]

    2005년 태국 사업장 방문. [동아DB]

    책 ‘생각 좀 하며 세상을 보자’에 수록된 ‘이제는 지구촌 경영’이란 글에는 국제화, 세계화에 대한 이 회장의 철학이 잘 담겨 있다.

    지금은 세계화의 패러다임이 바뀌어 글로벌 분업체계가 흔들리는 세상이라 격세지감이 느껴지지만 우리가 세계화를 막 시작하던 시점인 1990년 초반 그의 눈에 보인 새로운 세상이 이후 그대로 맞아떨어졌다는 것을 깨닫는다면 새삼 그 통찰력에 놀라게 된다. 그리고 앞으로 세상은 또 어떻게 펼쳐질까 질문을 갖게 된다. 그런 점에서 의미가 있어 보여 전문을 인용해본다.

    “과거 우리는 국산 제품의 경쟁력을 높이는 것을 지상 과제로 알고 노력해 왔다. 우리 자본으로, 우리 손으로 우리나라 공장에서 생산한 국산품이 일제, 미제와 경쟁해 세계시장에 당당히 진입했을 때 너나 할 것 없이 기뻐했다. 이는 경제발전 초기 단계에 국내 생산 기반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이제 나라별로 경쟁력이 차별화되고 사람, 자본, 정보가 국경을 넘어 자유롭게 이동하면서 범세계적인 분업이 일반화되고 있다. 예를 들어 GM의 이름으로 미국에서 판매되고 있는 자동차들의 내용을 들여다보면 미국 상표가 붙어 있는 게 이상할 정도로 여러 나라가 관련돼 있음을 알 수 있다.

    엔진과 전자부품은 일본 회사에서 조달하고 디자인은 독일 회사가 맡는다. 기타 일반 부품은 대만 회사 제품이다. 마케팅은 영국 회사에 맡기고 마케팅 전략은 GM과 뉴욕주 변호사가 담당한다. 미국 자동차 회사가 담당하는 것은 일부 조립 생산뿐이다. 이 자동차는 과연 어느 나라 자동차일까.

    이제 제품 경쟁은 국가 간 경쟁을 의미하지 않는다. 가장 좋고 싸게 그리고 가장 많이 팔 수 만 있다면 한 제품의 생산·판매를 위해 여러 국가의 자원을 활용해야 한다.

    한국 기업들도 임금이 올라가는 등 국내 입지 조건이 한계를 나타내자 해외 생산의 이점을 찾아 나서기 시작했다. 중국·동남아의 값싼 노동력, 유럽연합(EU)의 적극적인 정부 지원 등 더 나은 경영 여건을 찾아 쉴 새 없이 이동하고 있다.

    이제는 어느 나라에서 만드는가(made in)는 의미가 없어지고 누가 만드는가(made by)가 중요한 시대다. 예전에 국산 제품 만들기가 우리의 지상 과제였던 것처럼 이제는 세계 분업에 능동적으로 참여해 세계적인 경쟁력을 갖추는 것이 새로운 시대의 과제가 된 것이다.”

    그러면서 국제화도 ‘양이 아닌 질’로 승부를 내야 한다고 말한다.

    “무국적 상품을 만들게 하는 경영 환경을 우리는 초국적 기업의 번창에서 실감한다. 초국적 경영은 기업의 국제화에서 진일보한 또 다른 형태의 기업 경영이라고 할 수 있다.

    기업에 있어서 지금까지의 국제화는 단지 해외시장에서 물건을 잘 팔기만 하면 되는 경제적 이유에서 이루어져 왔다. 원가를 줄이기 위해 노동비가 싼 지역에 현지 공장을 건설하고 물건이 팔리는 지역에 판매 거점을 세우는 식이었다.

    그러나 ‘양적 국제화’는 어느 사이엔가 한계에 봉착하고 말았다. 그 나라에 뿌리를 내리지 않은 기업은 그 나라 소비자로부터 사랑받을 수 없다는 단순한 이유에서다. 세계 유수의 선진 기업들은 양적 국제화에서 한발 전진해 ‘질적 국제화’를 추진하고 있다. 바로 초국적 경영이 질적 국제화의 실체라 하겠다.

    기관차, 발전 설비, 로봇을 만드는 중전(重電) 분야의 초일류 기업인 ABB는 세계 140여 개국에 1300여 개의 자회사를 갖고 있다. 본사는 취리히에 있지만 본사를 비롯한 모든 자회사가 영어를 공용어로 쓰고 있고, 자회사의 경영 활동은 현지인 경영자가 책임지고 결정한다. 우리도 모든 것을 국내에서 결정하겠다는 우물 안 개구리식의 발상을 버릴 때가 왔다.”

    삼성그룹 인사 달인의 증언

    삼성그룹에서 30년 넘게 인사관리를 해온 노인식 전 삼성구조조정본부 인사팀장은 이 회장이 지역전문가 제도를 정착시키기 위해 얼마나 심혈을 기울였는지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저는 회장님을 이야기할 때 빠뜨릴 수 없는 것이 지역전문가 제도라고 생각합니다. 1년간 업무에서 완전히 벗어나 해외시장(국가)을 연구하도록 한 이 제도는 정말 파격적이었습니다. 회사 입장에서는 업무 공백까지 감안하면 엄청난 투자였지요.

    “지역전문가 여성 비율을 30%로 늘려라” “5년, 10년 후를 내다보고 지역전문가를 전략적으로 키워야 한다”고 말하는 이건희 회장. 2012년 4월 모습이다. 이 회장은 “지역전문가 제도에 대해 특별히 애착이 있다”며 “1987년 회장이 되자마자 추진한 것이 지역전문가와 탁아소 제도였는데 당시 반대가 많아 앞을 내다보지 않는 회사가 답답했다”고 말했다. [동아DB]

    “지역전문가 여성 비율을 30%로 늘려라” “5년, 10년 후를 내다보고 지역전문가를 전략적으로 키워야 한다”고 말하는 이건희 회장. 2012년 4월 모습이다. 이 회장은 “지역전문가 제도에 대해 특별히 애착이 있다”며 “1987년 회장이 되자마자 추진한 것이 지역전문가와 탁아소 제도였는데 당시 반대가 많아 앞을 내다보지 않는 회사가 답답했다”고 말했다. [동아DB]

    회사 이익이 몇백억 정도 나던 시절인데 ‘1년에 1인당 1억 원을 투자하는 것은 비용이 너무 많이 듭니다’라고 말씀드리면 ‘말귀를 못 알아듣는다’고 야단을 치셨어요. 지역도 초창기에 선진국 중심으로 보낸다고 혼난 적이 있어요. 미래에 삼성이 진출할 제3세계 쪽으로 많이 보내라고 하시면서 말이죠.

    한번은 지역전문가로 파견된 직원이 현지 고위층 자녀와 결혼해서 귀국하지 않은 경우가 있었습니다. 혼날 각오를 하고 보고 드렸더니 ‘그게 진짜 지역전문가다. 다시 돌아오고 말고는 중요한 게 아니다. 돌아오지 않는 사람들은 현지에서 한국에 대해 좋게 말하게 돼 있다. 그러니 꼭 우리 회사에 있을 필요가 없다. 우리가 아직 국제화가 되어 있지 않으니 대한민국을 위해서도 그런 사람들이 자산이 되지 않겠느냐’ 하셨습니다. 회장님은 이렇게 삼성만 생각하지 않으셨어요. 그리고 아주 세세한 부분까지 챙기셨습니다. 공부를 마치고 돌아온 지역전문가들을 상대로 어학 테스트를 했다고 보고드렸더니 ‘아니, 그 나라 말만 잘하면 되지 필기시험까지 봐서 왜 사기를 떨어 뜨리냐’는 질책도 하셨죠.

    지역전문가로 양성된 인력들은 10년 후 주재원 등으로 파견돼 제대로 된 실력을 발휘했습니다. 그런 파격적인 인재 양성 제도가 결국 삼성이 글로벌 초일류 기업으로 발전할 수 있었던 동인이 됐다고 생각합니다.”

    이처럼 삼성의 전직 임원들이 평하는 지역전문가 제도는 대부분 긍정적이었다.

    “처음에 실시할 때는 너무 파격적이어서 반대도 있었지만 훗날 현지에서 공부한 사람들이 실력을 갈고닦아 법인장으로 나가 현지 문화에 녹아드는 업무를 잘해 선순환이 이뤄지는 체계로 자리 잡히는 데 기여했다고 본다.”(손욱 전 원장)

    “처음 제도가 생길 때 반도체에서만 300명을 내보내라고 하시는데, 아니 사람이 없어 일을 못 해 죽겠는데 무슨 말씀인가 했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그때 키워진 지역전문가들이 세계 각지의 삼성전자 ‘법인장’이 돼 실적을 내는 데 혁혁한 공을 세웠다.”(진대제 전 삼성전자 사장)

    “내가 중국에 있을 때에는 많이 올 때 한 해 100명씩 왔다. 정말 상상도 못 할 정도로 어마어마했다. 훗날 이 사람들이 중국 시장 개척에 엄청난 힘이 됐다.”(박근희 전 삼성생명 부회장·전 대한통운 부회장)

    “적을 알고 싸우는 것과 모르고 싸우는 것은 차원이 다르지 않나. 지역전문가를 거친 직원을 해당 국가로 다시 내보내면 본사와 해외 지사의 상황을 두루 이해하고 현지에 실전 투입되는 것이었기 때문에 현지 적응 시간을 대폭 단축하고 기회를 선점할 수 있었다.”(배동만 전 사장)

    한편 ‘하버드 비즈니스 리뷰’는 지역전문가 제도를 삼성이 글로벌 기업으로 발돋움할 수 있었던 전략으로 꼽기도 했다.

    CEO 돕는 세계 최고 전략 참모

    기자는 최근에 지역전문가 제도의 또 다른 축이었던 ‘글로벌 MBA’ 과정에서 시작해 법인장이 돼 유럽에서 삼성 브랜드 성공 신화를 이뤄낸 전직 삼성맨의 체험담을 접했다.

    영국과 프랑스 법인장, 유럽총괄사장을 지낸 김석필 씨가 펴낸 책 ‘삼성, 유럽에서 어떻게 명품브랜드가 되었나’에서였다. 그가 걸어온 길은 앞서 배 전 사장이 말한 생생한 사례다. 책 내용의 일부다.

    “1993년 신경영 실천 전략 가운데 하나가 국제화였다. 여러 국제화 과제 가운데 ‘지역전문가 프로그램’과 ‘글로벌 MBA 프로그램’이 있었다. ‘지역전문가 프로그램’은 대리나 과장급 직원을 해외로 내보내 1년간 현지에서 자유롭게 생활하도록 하면서 국제 경험을 체득하게 하는 방식이었다.

    이에 비해 ‘글로벌 MBA 프로그램’은 중견 간부 중에서 미래 경영자로 양성할 인재를 선발해 세계적인 MBA 교육기관에서 교육받게 하는 것이었다.

    나는 이 프로그램에 선발되어 1996년 프랑스 파리 그랑제콜에 입학해 2년 과정을 마쳤다. 미국으로 간 사람들은 하버드나 스탠퍼드 같은 명문 대학에 갔다. 나는 대학에서 프랑스어를 전공했기에 프랑스로 가게 되었다.

    프랑스에서 MBA를 이수하는 2년간 꽤 파격적인 혜택이 주어졌다. 회사에서는 월급을 그대로 다 주었고 학비와 현지 주거비, 생활비까지 주었다. 나는 그저 공부만 하면 되었다.

    내가 다닌 학교는 HEC(Ecole des hautes etudes commerciales de Paris)인데, 1881년에 설립된 경영대학원으로 프랑스 최고 명문 학교였다. 당시 글로벌 MBA 프로그램은 ‘소시오(Socio) MBA’와 ’테크노(Techno) MBA’로 나뉘었는데 이공계 출신은 테크노 MBA, 인문계 출신은 소시오 MBA로 구분해 선발했다. 선발 인원은 스무 명쯤이었고 나는 그 프로그램이 시행된 두 번째 해에 선발되었다.”

    그는 MBA를 마치고 돌아와 1997년 그룹 내에 만들어지는 새 조직인 ‘미래전략그룹’ 설립 구성원으로 들어갔다고 한다.

    “삼성에서 국제화를 위해 시행한 또 다른 조직의 하나로 ‘미래전략그룹’이란 게 있었는데, 신문 기사에는 ‘삼성 국제화의 비밀 병기’라고 언급되던 곳이다. 신경영 방침에 따라 그룹의 모든 경영자가 본격적으로 국제화를 실현해야 했지만 곧바로 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다.

    그래서 세계 최고 수준 MBA 출신들을 스카우트해서 CEO들의 전략 참모로 옆에 두는 방식을 계획한 것이었다. 하지만 외국에서 온 인재들이 언어와 문화 차이 등으로 인해 고립될 수도 있었다. 이 MBA 출신 외국인들을 한곳에 다 모아 조직화한 것이 바로 ‘미래전략그룹’이었다. 그렇게 20~30명으로 구성된 ‘인 하우스 컨설팅’ 형태의 그룹이 만들어졌다.

    프랑스에서 MBA를 마친 나는 미래전략그룹에서 전자 분야 프로젝트 매니저로 일했다. 그룹 비서실에서 만든 조직이어서 나처럼 삼성전자에서 온 사람도 있었고, 금융사업부인 삼성생명에서 온 사람도 있었다. 나는 삼성전자의 디지털 전략이나 세계화 전략 같은 미래형 프로젝트를 수행했다.”

    여기서 5년간 일한 그는 2005년 1월 영국 법인장으로 발령받아 2006년까지 런던에서 일하고 2007년부터 2010년까지 프랑스 법인장으로 파리에서 일하면서 전 세계 삼성 법인 가운데 최초로 프랑스에서 휴대전화 시장점유율 1위를 달성하는 성과를 냈다고 한다.

    이어 2011년부터 2013년까지 3년간 삼성전자 유럽총괄을 맡아 ‘유럽 시장에서 가장 선호하는 브랜드 1위’와 삼성전자에서 최고 매출 성장을 이루어내기도 했다. 이후 서울로 돌아와 삼성전자 마케팅 총책임자(Chief Marketing Officer·CMO)로 일했는데 외부 학자나 전문가가 하던 일을 내부 인사가 맡은 경우는 이례적이었다고 한다.

    대한민국 야구 역사 전설 쓴 김인

    이제 김인 전 사장 이야기를 마무리할 때가 됐다.

    그는 비서실 근무를 마치고 1995년 삼성SDI 독일 법인장(상무)으로 자리를 옮긴 뒤 영업본부장(전무), 디지털디스플레이 영업본부장(부사장)으로 7년간 일한다. 그러다 갑자기 서울 호텔신라 총지배인(부사장) 발령을 받는다. 그때 이건희 회장과 겪은 에피소드를 소개했다.

    “SDI에서 일할 때 브라질 출장 중이었는데 SDI 사장님이 갑자기 ‘지금 빨리 좀 들어와야겠다’고 해서 급히 들어오니, ‘호텔신라 감사를 했는데 이대로는 안 되겠다, 개혁이 필요하다’는 결론이 나서 저더러 가라는 겁니다.

    허태학 사장 지휘 아래 제가 서울 총지배인, 그 밖에 해외 경험이 있는 사람들로 해서 사원까지 그룹에서 총 13명이 들어갔어요. 12월에 들어가서 일이 시작됐죠.

    이건희 회장님은 호텔신라를 이익이라는 개념보다는 그룹의 프레스티지, 다시 말해 품격을 보여주는 곳이라고 생각하는 입장이셨던 거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사실 호텔이라는 곳은 먹고, 자고, 생활하고, 회의하고, 운동하고, 손님도 만나고 하는 서비스의 모든 것이 모여 있는 공간 아닙니까.

    호텔신라야말로 그런 점에서 ‘최고’라는 명성과 품격을 갖고 있어야 하는데 IMF외환위기를 거치면서 생존이 위협받다 보니 식자재에서부터 경비 절감을 했던 거죠. 그러다 보니 인력도 줄고 서비스 질은 점점 더 안 좋아지고 손님들로부터 클레임이 오는 악순환이 생긴 거죠. 그래서 감사가 있었던 거고 개혁을 위한 TF팀이 들어간 거였죠.

    회장님은 호텔신라에 대한 애정이 굉장히 강하셨어요. 저희 팀이 간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직접 일본 원서를 50여 권 보내셨어요. ‘호텔경영’ ‘총 지배인의 역할’ ‘호텔의 F&B(Food & Beverage)’ 이런 책들이었습니다.

    그걸 한 사람이 다 볼 순 없으니 팀원들이 각자 맡은 업무랑 제일 가까운 책을 골라 나눴습니다. 저도 5권을 할당받았어요.

    이걸 어떻게 읽을까 하다가 번역자를 구해 권당 30페이지 정도로 요약을 했습니다. 다섯 권 중에서 두 권의 요약본을 받아 읽고 있는데 갑자기 회장님이 저희들을 댁으로 호출하셨습니다. 그러면서 제일 먼저 물으시는 게 ‘책 읽었느냐’였습니다.

    다들 ‘아직 다 못 읽었습니다’ 했습니다. 제 순서가 왔어요. 저는 ‘아직 다 읽지는 못하고 외부에 번역을 맡겨서 요약본으로 두 권을 읽었습니다’ 했지요. 그랬더니 “내용이 뭔데?”라고 물으세요. 확인까지 하신 거죠.

    어떻든 그 자리에서 그렇게라도 책을 읽은 사람은 저 혼자였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다들 회장님께서 책을 보내놓고 읽었는지 안 읽었는지 설마 확인까지 하실 줄은 상상도 못 했는데 저는 적어도 회장님이 직접 책을 보내셨을 때는 그냥 보내시지는 않았을 것이다, 더구나 일본에서 직접 구한 원서를 보내셨을 때는 깊은 생각이 있다는 것이다, 그건 다시 말해 ‘내가 이렇게 호텔신라에 관심이 많으니 개혁팀이라면 당연히 선진 호텔 서비스에 대해 공부를 좀 해야 하지 않겠느냐’ 이런 마음아니었을까 읽혀졌었습니다.

    저는 보내신 책을 보고 그 열정이 참으로 대단하시다, 이러니 내가 더 공부해서 더 알아야 되겠다는 욕심이 생겼어요. 그래서 궁여지책으로 요약본이라도 읽어보려 한 건데 그 자리에서 그나마 면피가 된 거죠(웃음).”

    그에게 “안 읽으신 분들은 혼이 많이 났나”고 물으니 미소로만 답했다.

    말씀을 듣다 보면 성공한 월급쟁이의 태도는 어때야 하냐는 가르침을 듣는 것 같습니다. 일본 원서 에피소드도 그렇지만 무엇보다 지시한 상사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는 습관이 중요한 것 같아요. 그렇다면 이 대목에서 묻고 싶은 질문이 있는데 어떤 마음으로 월급쟁이를 했나요.

    “저는 일을 맡을 때 책임감, 미션, 사명이라는 단어를 떠올렸습니다. 열심히 최선을 다하면 된다는 마음이었죠. 삼성SDS 사장을 8년 하고 나서 ‘이제는 물러날 때’라고 생각했는데 삼성라이온즈 사장 발령을 받았습니다. 야구 룰조차 제대로 몰랐는데 말이죠.”

    그런데도 사장 재직 시절 정규시리즈와 한국시리즈 우승을 합친 통합 우승을 4년 연속 이끌어냈으니 대한민국 야구사에서 커다란 기적을 이룬 건데요, 비결이 뭐였을까요.

    “원정경기 포함해서 한 경기도 빠진 적이 없습니다. 선수들과 생활을 같이 했죠. 광주 부산 대구 다니느라 운전기사가 고생 많이 했습니다.”

    더 듣고 싶었는데 그는 손사래를 쳤다. 이건희 회장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줄 때와는 사뭇 다른 모습이었다. 겸손함이 몸에 밴 듯했다.

    독실한 가톨릭 신자로 지금도 매일 묵주를 들고 산책을 하거나 성경을 읽는다는 그는 라이온즈 사장 시절에도 시합이 열리는 지역에 꼭 한 시간 전에 도착해 인근 성당에서 기도했다고 한다.

    문득 이건희 회장이 제일 싫어했던 직원은 어떤 부류였는지 궁금하네요.

    “거짓말하거나 변명하는 사람을 제일 싫어하셨습니다. 사람이 야단맞다 보면 자기도 모르게 변명이 나오잖아요. ‘잘못했습니다. 생각이 짧았습니다’하면 되는데 ‘저만 잘못한 게 아니고요. 다른 경쟁사도 마찬가지고요’ 하면서 변명이 나옵니다. 그러면 아이고, 혼쭐이 났습니다.”

    그런데 누가 일부러 감히 회장에게 거짓말을 하겠습니까?

    “제가 여기서 말하는 거짓말은 다른 게 아니라 지키기 어려운 약속을 하거나 그 자리를 당장 모면하기 위해서 이야기하는 것을 말합니다. 또 누구를 그저 감싸는 말도 거짓말입니다.

    회장님한테는 있는 그대로를 말해야 해요. 좌우간 회장님한테서는 어떤 경우도 거짓말은 안 된다, 모르면 모른다고 야단맞는 게 낫지 괜히 아는 것처럼 행동하다가는 큰일 난다 이걸 배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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