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안양정에서 굽어 본 부석사 경내와 소백산 전경.
6월26일 오후. 단양읍에서 대강면을 거쳐 사동리로 향했다. 태풍이 할퀴고 간 자리엔 상처가 가득했다. 나무가 뿌리째 뽑혀 있는가 하면 여기저기 돌덩이들이 길을 막아섰다. 택시기사는 비 피해보다도 이기적 세태를 꼬집었다. 그에 따르면 폭우로 인해 단양지역의 어느 양어장이 넘치면서 물고기들이 관공서 앞마당으로 쏟아졌다는 것이다. 그런데 피해복구에 앞장서야 할 공무원들이 물고기를 잡아먹고 자랑까지 했다며 육두문자를 토해냈다. 발동이 걸린 택시기사는 화살을 중앙부처 공무원에게 돌렸다. 이번엔 김선일씨 사망사건과 관련한 외교통상부 공무원들의 안일한 대응이 타깃이었다. 서울이나 지방이나 민심의 흐름은 크게 다르지 않은 듯했다.
사동리에서 도솔봉으로 올라가는 길은 매우 미끄러웠다. 도솔봉에 오르니 또다시 비구름이 몰려왔다. 이번엔 태풍이 아니라 장마전선이었다. 금방이라도 한바탕 퍼부을 것 같아 서둘러 죽령으로 향했다. 구름은 봉우리를 넘어설 때마다 드리웠다 걷히기를 되풀이했다. 장마전선이 변덕을 부리는 모양이었다.
백두대간은 1286m봉에서 서진(西進)을 멈추고 북으로 방향을 튼다. 편안한 내리막길에서 콧노래를 부르며 흥겹게 걸어가는데 중턱의 갈림길에 걸린 표지판이 발길을 붙잡았다. 뭔가 사연이 있을 법한 글귀가 적혀 있었다. ‘여기 산을 좋아하던 우리 친구 종철이가 백두대간 품으로 돌아갔습니다. 종철아 편히 쉬어라’. 잠시 걸음을 멈추고 백두대간에 묻힌 고인에게 예를 표했다.
멀리 죽령이 눈에 들어왔다. 죽령은 신라 아달라왕 5년(158년) 신라사람 죽죽(竹竹)이 길을 열었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다. 옛사람의 정취를 느끼면서 걷고 싶다면, 5번 국도가 지나는 죽령고개에 이르기 직전 오른편으로 발길을 돌리는 게 좋다.
지도상으로는 죽령을 통과하면서 중앙고속도로와 중앙선을 건너게 되는데, 모두 산을 뚫고 지나는 터널이어서 눈으로 확인할 수는 없다. 중앙선은 일제의 식민수탈정책에 따라 중일전쟁 직전인 1936년 착공돼 오랫동안 산업철도로서 기능을 수행했다. 또한 2001년 완공된 중앙고속도로는 한반도 남쪽 동부지역의 도시화를 재촉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사라진 소백산의 반딧불이
죽령에서 소백산 천문대로 올라가는 길은 지루한 시멘트 포장도로다. 엄밀하게 말하자면 백두대간 마루금은 시멘트길과 산길을 넘나들며 이어진다. 7km가 넘는 오르막길을 혼자서 걷다보니 평소보다 빨리 지치는 느낌이었다. 그래서 잠시 산길에 주저앉아 간식을 먹으며 숨을 고르는데 발밑으로 새끼 독사 두 마리가 연달아 지나갔다. 순간 머리카락이 주뼛 서는 듯했다. 독사는 언제 봐도 소름이 돋는다. 놀란 가슴을 가라앉히고 천천히 되새겨보니 산에서 뱀을 만난 지도 참 오래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소백산 천문대가 가까워질 무렵 먹구름이 몰려들기 시작했지만 다행히도 비는 내리지 않았다. 말 그대로 구름 속의 산책이다. 10m를 걷고 나서 돌아봐도 지나온 길이 보이지 않는다. 얼마 후 구름 속에서 손을 꼭 잡고 걸어 내려오는 젊은 연인들이 보였다. 이보다 더 환상적인 데이트가 있을까 싶었다. 구름으로 덮힌 천문대를 지나 연화봉(1383m)에 이르자 구름 위로 듬성듬성 솟은 산봉우리가 보였다. 연화봉은 해마다 5월이면 철쭉을 보기 위해 전국에서 관광객들이 몰려드는 곳이다.
날이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필자는 연화봉에서 희방사 쪽으로 서둘러 하산했다. 일반적으로 백두대간 종주자들은 죽령에서 끊고 다음날 고치령까지 내달린다. 소백산 주능선에서 도중에 내려서면 상대적으로 체력이 많이 소모되기 때문이다. 반면 주능선을 단번에 주파할 경우 희방사-연화봉 구간을 건너뛸 수밖에 없다. 필자는 그것이 아쉬워 남들이 마다하는 코스를 선택했다. 희방사는 신라 선덕여왕 때 두운조사가 창건한 절로 훈민정음 원판과 월인석보를 보관하던 유서 깊은 고찰이었지만, 한국전쟁 당시 화재로 문화재가 모두 소실되는 시련을 겪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