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둠 속에서 더욱 흰빛을 발하는 화선지 위를 기어다니는 검은 개미의 몸짓. 관객에겐 누군가에 의해 연출된 극적인 장면이지만, 아무것도 모르는 개미에겐 현실일 뿐이다. 잠시 후 극장 한쪽 벽면의 검은 유리창이 ‘와장창’ 깨지면서 닭 한 마리가 ‘푸드덕’거리며 날아든다.
창 밖은 바로 길거리. 깨진 창으로 들어오는 빛에 극장 안은 일순 환해지고, 관객들은 깜짝 놀란다. 무심히 거리를 지나던 행인들은 창문을 통해 극장 안을 들여다본다. 어떤 이는 피식 웃고, 어떤 이는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내뱉으며 어디론가 사라진다. 극장 안에 앉아 있던 관객들은 혼란에 빠진다. ‘연출일까 아니면 실제 상황일까….’
국내 마임1세대 유진규(柳鎭奎·52)씨가 1980년대 초반 시리즈로 발표했던 작품 ‘아름다운 사람’의 한 토막이다. 실험정신이 강했던 그는 이 작품처럼 실제적 상황을 무대에 옮기려 시도했다. 현실과 극적인 상황을 절묘하게 충돌시키며 관객에게 새로운 방식으로 메시지를 전달하려 했던 것이다.
결과는 실패였다. 정작 유씨 자신이 정신적 공황상태에 빠져버렸기 때문이다. “작품을 하면서 극적 상황보다 현실적 상황이 차지하는 비중이 점점 커졌어요. 그러다 어느 순간 공연이 무의미하다는 결론에 도달했죠. 현실이 곧 연극이고, 그러니 자기 삶을 충실히 사는 것이 더 의미 있다고 생각한 거죠. 1980년대 초 전두환 군부독재 시절의 사회적 상황도 한몫했지만 결과적으로 새로운 실험을 예술로 승화시키지 못했던 겁니다.”
1971년 건국대 수의학과를 다니다 중퇴한 후 마임에 인생을 걸었던 유씨는 1981년 5월, 10년 동안 해온 모든 걸 접고 서울을 떠나 춘천으로 향했다. 그리고 춘천시 변두리에 땅을 사서 소를 키우며 농사를 짓기 시작했다. 소설가 이외수와 ‘춘천지기’가 된 것도 그때부터다. 하지만 세상살이는 그리 녹록치 않았다. 1985년 쇠고기 수입이 허용되면서 ‘소값 파동’을 겪었고 그 와중엔 적지 않은 재산을 날린 것. 그후 친구의 권유로 자신의 작품에서 이름을 딴 ‘아름다운 사람’이라는 카페를 강원대 앞에 열었다. 그 카페는 얼마전부터는 위탁 운영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