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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우라의 파괴

아우라의 파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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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우라의 파괴
‘아우라’라는 말은 벌써 일상용어가 됐다. 루브르 박물관에서 ‘모나리자’의 원작 앞에 선 느낌은 모나리자의 복제사진을 볼 때와는 다를 것이다. 원작을 둘러싼 어떤 분위기.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것을 지금 여기서(hic et nunc) 보는 느낌. ‘아무리 멀리 있어도 어떤 먼 것의 일회적 나타남.’ 이것이 아우라 체험이다. 발터 벤야민은 사진이나 영화 같은 복제기술이 아우라를 파괴한다고 말한다. 복제기술은 원작을 수없이 복제해 언제 어디서라도 볼 수 있게 해주기 때문이다.

벤야민에 따르면 아우라 체험은 예술이 종교적 숭배의 대상이던 과거의 흔적이다. 복제기술은 아우라를 파괴함으로써 작품을 대하는 엄숙한 종교적 태도를 냉정한 세속적 태도로 바꾸어놓는다. 그래서 그는 아우라의 파괴를 진보적 현상으로 본다. 하지만 그가 모든 아우라를 비판하는 것은 아니다. 다른 종류의 아우라, 특히 생태적 성격의 아우라만은 그도 깨져서는 안 된다고 믿는 듯하다. 예를 들어 자연의 아우라 같은 것은 보존되는 편이 낫지 않은가.

초등학교 1학년 때 국립중앙박물관에 갔다가 전시된 불상의 무릎에 지폐와 동전이 수북이 쌓여 있는 것을 보고 깊은 인상을 받은 기억이 난다. 그때만 해도 한국 사람 중에는 박물관에서까지 종교적 태도를 취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벤야민이라면 아마 이런 종류의 아우라는 깨야 한다고 할 것이다. 또 하나는 초등학교 5학년 때의 기억. 처음 보는 대나무 숲에서 마치 숲 전체가 살아 숨을 쉬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아우라’라는 낱말의 원뜻은 ‘숨결’이다. 이런 자연의 아우라는 마땅히 보존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아우라는 파괴됐다. 파괴되지 말아야 할 것까지 사정없이 파괴됐다. 아우라 체험이 꼭 필요한 곳이 있다. 가령 교회와 같은 종교적 장소. 가톨릭교회에는 아직 분위기가 남아 있으나, 한국의 개신교회에서 신(神) 앞에 선 아우라 체험을 하기란 애초에 불가능하다. 예를 들어 여의도에 있는 대형 교회는 통일주체국민회의가 열리던 장충체육관을 연상시킨다. 교회 건물이 검투사의 혈투와 순교자의 처형이 이루어지던 아레나, 즉 스펙터클을 제공하던 로마의 콜로세움을 모델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언젠가 강의하러 가는 길에 청량리에서 해괴한 건물을 보았다. 이마에 ‘XXX강북성전’이라 써붙였다. 그런데 정작 건물 외관은 ‘성전’이라는 말이 무색하게 미끈한 비즈니스 빌딩과 다를 바 없다. 차라리 ‘XXX.com’이라고 써붙이는 게 낫지 않을까. 아니나다를까, 그 건물의 아래 부분은 은행과 기업이 들어서 있어, 성전 앞에서 돈놀이와 장사를 하던 이들을 채찍으로 다스렸다는 예수의 일화를 무색하게 만들고 있었다. 이렇게 성(聖)과 속(俗)의 구별을 혁파하는 것은 다른 대형 교회들도 마찬가지다. 상가에 세 들어 사는 작은 교회들은 고깔모자를 썼다. 이 알량함에는 이해할 만한 구석이 있다. 고깔모자 쓴 교회들은 낮에 보면 생일잔치하는 유치원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 위의 시뻘건 네온 십자가 때문에 낮의 유치원은 밤마다 음산한 공동묘지로 변한다. 독일에는 한 동네에 교회가 하나밖에 없으나, 한국에는 교파도 많고 교회도 많다. 동네에 하나밖에 없는 십자가라면 아우라가 있겠지만, 한눈에 열댓 개씩 보이는 십자가의 시뮬라크르에서 아우라를 기대할 수는 없을 게다.



대형 교회에서는 예배장면을 TV 카메라로 촬영하는 것을 흔히 볼 수 있다. 서울 본점에서 하는 목사의 설교를 전국에 흩어져 있는 지점들로 생중계하는 것도 흔히 본다. 성전에서 행하는 의식에 직접 참여하여 ‘지금 여기’의 체험을 하는 게 아니라, 미디어로 실현된 유비쿼터스를 통해 ‘언제 어디서라도’ 예배의 복제물을 소비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신께 드리는 예배 자체마저 원작이 아니라 복제다. 이 기술 복제된 예배에서 아우라를 기대할 수는 없다.

사찰건축의 전통 덕분에 불교에는 그래도 아우라가 남아 있다. 하지만 여기에도 아우라의 파괴가 없는 것은 아니다. 언젠가 어느 사찰에서 스님이 염불 하는 소리를 들었다. 하지만 정작 소리에 끌려 법당에 가보니 스님이 없다. 그의 빈 자리를 대신하여 녹음된 염불의 금속성 소리가 퍼런 새마을 스피커를 통해 반복적으로 흘러나오고 있었다. 염불을 하지 않을 것이라면 차라리 침묵과 고요의 시간으로 놔둘 것이지, 돈 들여가며 애써 분위기를 깨는 이유는 뭘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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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중권 / 일러스트·박진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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