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부모의 묘 옆에 초막을 짓고 3년 동안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보살피는 ‘삼년시묘(三年侍墓)’를 21세기에도 이어가는 종가가 있다. 충남 아산 외암리에 자리잡은 예안 이씨 종가가 그 주인공이다.
외암리 마을 뒤로는 세 개의 산봉우리가 병풍처럼 둘러쳐져 있고, 마을 앞으로는 좌우에서 흘러내려온 계곡 물이 합쳐져 삼산양수지지(三山兩水之地)의 모습을 띤다. 배산임수, 그야말로 명당이다.
예안 이씨들은 조선 명종 때 장사랑(將仕郞) 벼슬을 지낸 이정(李珽) 선생 때부터 외암리 마을에 정착해 살아왔다. 그 중에서도 이정의 6대손인 외암(巍巖) 이간(李柬·1677∼1727)은 집안을 두드러지게 빛낸 인물로, 우암 송시열의 여덟 제자인 강문팔학사(江門八學士)의 한 사람이다.
유교의 관혼상제 가운데 가장 ‘고난도’의 의례로 삼년시묘(三年侍墓)가 꼽힌다. 이는 돌아가신 부모의 묘 옆에 초막을 짓고 비가 오나 눈이 오나 3년 동안 생활하는 것. 예안 이씨 종손 이득선(李得善·62)씨는 한학자로 평생을 살다 가신 부친에 대한 추모의 염을 간직하며 삼년시묘를 행했다. 굳이 3년을 부친의 묘 곁에서 지내지 않는대도 손가락질할 사람은 없을 시대에 삼년시묘를 고집한 이유를 묻자 그는 “네 가지 이유가 있다”고 했다.
①② 100년이 넘은 갖가지 생활유물들.<br>③ 예안 이씨의 전통 가양주인 연엽주. 종가 살림이 워낙 빠듯해 일반인에게 판매하고 있다.
“첫째는 부모님이 나를 길러준 은혜에 대한 보답이요, 둘째는 부친께서 삼년시묘를 하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요, 셋째는 부친에 대한 특별한 사랑과 감정 때문이요, 그리고 넷째는 선비 집안의 전통을 이어가겠다는 자긍심의 발로입니다.”
이득선씨는 매일 해 뜨기 전 짚신을 신고 머리에는 굴건(屈巾)과 삿갓을 쓴 제복(祭服) 차림으로 부친의 묘소까지 3km에 이르는 거리를 걸어갔다. 묘소에 이르면 먼저 아버지 생각을 하며 절을 하고 묘소 옆에 세운 가로 세로 2m 정도의 초막으로 들어가 집에서 싸간 누룽지와 옹달샘 물로 요기하고 서산에 저녁 해가 넘어갈 무렵 집으로 돌아왔다.
삼년시묘를 몸으로 보여준 이득선씨는 ‘걸어다니는 민속학 사전’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제사, 다도, 의복, 고건축, 굿, 음식, 묘 자리, 족보, 부적 등 전통 문화 전반에 대해 해박한 지식과 체험을 갖고 있다. 그러다 보니 국내에서는 물론이고 미국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등지의 외국인들까지 한국의 전통문화를 배우러 희성당을 찾아온다. 일년 내내 희성당이 시끌벅적한 것은 그런 이유에서다.
충효(忠孝)의 정신이 변절된 시대, 우리의 전통문화가 지닌 격조와 풍류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이득선씨는 분명 이 시대의 선비이자, ‘가전충효세수인경(家傳忠孝世守仁敬)’ 정신의 수호자라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