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11월호

시마당

때때로 어떤 벽은 새벽 같습니다

  • 이원하

    입력2020-11-09 10:0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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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위 너머로 누군가 오는데
    바다 너머로는 아무도 오지 않습니다
    내게 오는 길 잊었는지 파도도 오지 않습니다

    사실 내게 오는 길이란 없습니다

    그저 바다의 많은 부분을 걸러내고 도려내면
    작은 부분이 남게 되는데
    그 공간이 나일 뿐이지
    애초에 내게 오는 길이란 없습니다

    저 멀리 떨어지는 노을 앞으로
    구름이 나서는 게 보입니다

    그러나
    금방 노을에 가려지고 맙니다



    노을을 봤으니 이만 가자고 말하는
    사람들 때문에 그렇습니다

    구름과 바다의 많은 부분을 걸러내다가
    저녁도 거르고 밤도 거르고 깊은 밤도 거르니
    새벽이 찾아옵니다

    지금 찾아온 이 새벽은
    새벽이 아니라
    벽입니다

    펼친 손바닥으로 쓸어보고
    털어보고 긁어보고 아무리 툭툭 쳐봐도
    먼지 한 톨 떨어지지 않는
    벽입니다

    이별 뒤에 남은 감정이 하나도 없어서
    아무리 들썩여도 말끔한
    벽입니다

    이원하
    ● 1989년 출생
    ● 2018년 한국일보 신춘문예 시 부문 등단
    ● 2020년 시집 ‘제주에서 혼자 살고 술은 약해요’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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