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씨는 “이 피라미드의 정점에 4명의 전주가 있다”고 말했다. A씨가 모시던 박OO 회장(68)을 비롯, 이OO 회장(62), 황OO 회장(70), 방OO 회장(59)이 그들이다. 이들은 일반인에겐 전혀 알려져 있지 않으며 수사기관이나 금융기관도 이들의 신상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고 한다. 명동의 사채업자라도 초보이거나 영세한 업자는 이들 4인방의 실체를 모른다. 수년에 걸쳐 빈번하게 제휴를 하게 된 재력 있는 사채업자들만 이들의 존재를 알고 있다고 한다. 그만큼 이들은 철저하게 베일 속에서 활동한다.
명동 사채시장은 4명의 전주 아래 중간 규모의 전주 수십여 명이 있고 그들 각자가 수십여 명의 사채업자를 거느리고 있는 구조다. 4인방은 명동을 무대로 활동하는 명동 토박이들이지만, 중간 규모의 전주들 중엔 명동이 아닌 강남 등지에 사무실을 내고 활동하는 사람도 많다.
다음은 A씨의 말이다.
“강남의 신사동 일대, 강남역 부근이 최근 새로운 사채시장으로 부상했다. 김대중 정부 시절 벤처열풍이 일면서 사채업자들 사이에선 각종 정부지원 자금이 유통되는 벤처기업이 자금을 세탁하는 창구로 각광받았다. 이 때문에 사채업자들이 벤처기업가 밀집해 있는 강남에 회사를 차리는 경우가 많았다. 강북의 종로, 충무로 등은 전통적인 사채시장의 맥을 잇고 있지만 사실상 명동 사채시장에 종속적 관계라고 봐야 한다. 사채시장에선 뭐니뭐니 해도 현금동원력이 가장 중요한데 그 점에서 명동을 따라갈 만한 곳이 아직 없다. 명동 시장에서 4인방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재력을 갖고 있다.”
명동에서 사채업소 ‘OO캐피탈’을 운영하고 있는 B씨도 “서울의 사채시장에서 명동은 규모나 활동 면에서 여전히 부동의 1위를 차지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명동 4인방의 자금 동원력은 어느 정도이며 이들은 구체적으로 어떤 활동을 해왔을까.
A씨는 “4인방 중에서도 박 회장과 이 회장이 두드러진다. 박 회장과 이 회장의 재산은 조 단위이며 채무는 거의 없다”고 말했다. 공식적으로 드러나지 않아서 그렇지 한국 최대 재벌의 총수급과 맞먹는 규모라는 것. 박 회장과 이 회장은 전화 한 통이면 자신이 보유하고 있는 돈으로만 수천억 원을 움직일 수 있는 정도의 자금동원력을 갖고 있다는 게 A씨의 설명이다. 두 사람에는 못미치지만 황 회장과 방 회장도 수천억 원대 재산가로 알려져 있다.
지하 주차장과 연결된 금고
명동의 사채업자들은 서로 연대해 여러 이권(利權) 사업에 개입한다. 그중 자금동원 규모가 큰 것은 대부분 4인방이 관여한다. 4인방은 사업의 실무는 자신의 측근이나 중간 단계 전주들에게 시킬 뿐 전면에 나서는 일은 없다고 한다.
그러나 사업 과정에서의 중요한 결정은 4인방이 직접 내린다. 사업의 전체적인 흐름도 대개는 정점에 위치한 4인방만이 아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4인방 사이에도 희미하게 서열이 매겨져 있는데 이들 간에는 불문율처럼 ‘한도액’이 정해져 있다고 한다. 500억~1000억원 이상 이권이 걸린 사업은 박, 이 회장이 맡고 100억~500억원 대 이권사업은 황 회장이, 30억~200억원대는 방 회장이 주로 맡는다는 것이다.
사채업자들은 금융실명제 등 공식적인 방식으로는 잡히지 않는 한국의 지하경제 규모를 100조원대로 추산한다(2001년 4월 LG경제연구원은 지하경제규모를 59조원 정도라고 밝혔다). A씨는 “한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 박 회장의 지시로 그가 실질적으로 소유하고 있던 500억원짜리 자기앞수표 7장을 배달한 적이 있다. 4인방을 포함한 명동의 큰손들은 본인 또는 주변의 자금을 동원해 이권사업을 벌여나가는데 여기서 파생되는 자금의 흐름은 상상을 초월한다”고 말했다.
이들 4인방 대부분은 경제성장기를 지나 80~90년대를 거치면서 현재의 위치에 오르게 됐다고 한다. 이들의 활동은 한국 현대사의 흐름과도 맥이 이어진다.
박OO 회장이 대표적 경우다. 박 회장은 서울시내 소재 문화재급의 전통한옥을 자택으로 쓰고 있다. A씨는 “겉으로는 고풍스러운 한옥인데 특이한 것은 지하에 있는 주차장이 워낙 커서 탑차가 그대로 들어간다. 이 주차장이 지하의 금고와 바로 연결되어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박 회장이 처음부터 돈이 많았던 것은 아니다. 시골에서 부모로부터 받은 약간의 사업밑천을 갖고 상경한 그는 명동 중국대사관 옆에 사무실을 내고 채권할인 장사를 하면서 사채업을 시작했다. 명동 시장에선 박 회장이 1970~80년대 일본 야쿠자가 가지고 들어온 일본 채권을 큰 폭의 수수료를 떼고 달러로 환전해주는 장사를 하면서 갑부가 됐다는 얘기가 있다.
박 회장은 정·관계에도 폭넓은 인맥을 구축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A씨는 “박 회장으로부터 ‘모 전직 대통령이 어려움에 처했을 때 아들의 학비와 생활비를 대주면서 전직 대통령 일가와 친분을 쌓았다’는 얘기를 들었다. 박 회장이 몇몇 전직 대통령의 측근과도 자금거래를 해온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박 회장의 아들들은 모두 벤츠를 타고 다니는데 박 회장은 자신이 자수성가했다는 점을 강조하며 자녀들을 엄격히 대한다고 한다. 돈의 흐름에 대해선 가족들에게 전혀 얘기하지 않는다고 한다. 다음은 A씨가 말하는 박 회장의 스타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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