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근 정부가 잇달아 발표하는 국정과제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적어도 수백조 원의 재원이 투입되어야 할 형편이다.
잘라서 말해보자. 수출 덕분에 어느 정도 성장은 유지하지만 기업이 투자하지 않는 경제의 미래는 밝을 수 없다. 이것을 부인한다면 경제를 논할 자격조차 없다. 세월이 지나며 강둑이 조금씩 허물어지는 데도 당장 비가 오지 않는다고 내버려둘 수는 없는 일이다. 생산적 투자의 침체는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라 외환위기 이후 일관되게 진행되는 추세다. 단기적 경기 순환의 문제가 아니라 구조적 문제점을 내포하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이러다 보니 금리나 세금 인하와 같은 가격유인이 별 효과가 없는 것은 당연하다. 비용 문제라기보다는 미래의 수익에 대한 확신이 없기 때문에 장기 투자가 힘든 것이다. 투자결정에 따른 기대 이익이 아무리 크다 하더라도 이에 따른 위험 부담이 크다면 기업은 움츠릴 수밖에 없다. 한마디로 모든 것이 너무 불확실하다.
그런데 놀랍게도 지난 몇 년 동안의 정부 정책이나 국회 논의를 보면 우리 경제가 당면한 가장 시급한 문제인 투자 위축, 나아가 성장잠재력 잠식에 대한 논의는 외면되어 왔음을 알 수 있다. 물론 이런저런 투자유인도 제공됐고 노사갈등 해소나 규제완화와 같은 원론적 제안도 없지 않았지만 문제의 핵심인 시장의 불확실성을 줄이기 위한 근본적인 대안과 체계적인 노력이 있었다고 보기는 힘들다. 오히려 김대중 정부 후반부로 들어서면 금융구조조정이나 기업투명성 확보를 위한 정책 의지는 약해지고 대신 신용카드 남발과 같은 대증요법으로 ‘반짝 경기’를 유지하는 어이없는 일이 벌어진다. 덕분에 신용불량자가 양산되고 안정되는 듯했던 금융시장은 또다시 흔들렸다.
노무현 정부가 들어선 이후 시장제도 정립을 위한 제대로 된 개혁에 대한 기대가 컸다. 세계경제의 회복세에 힘입어 수출에 탄성이 붙으며 경제 내부의 구조적 부실에 다시 손댈 수 있는 거시적 여건도 성숙했다. 결국 시장의 구조적 불확실성을 줄여야 투자가 살아나고 일자리도 생기고 소비심리도 회복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정권 초기부터 끊이지 않는 정쟁(政爭)의 소용돌이에서 참여정부는 새 정권이 누릴 수 있는 추진력의 상당부분을 소진했다. 야당이 개혁 과제에 협조하지 않은 것이야 어느 정도 예상한 일이지만 ‘동북아 중심국가’나 ‘국민소득 2만달러’와 같이 현실과 동떨어진 구호를 비전으로 내세운 것은 정권 초기의 정책능력 부재를 스스로 드러낸 일이었다.
건설적 비판도 ‘개혁 흔들기’취급
무릇 정부가 제대로 일을 하려면 정책의 비전이 뚜렷해야 하고 전략이 현실적이어야 한다. 멋진 구호나 원론적 방법론보다는 실제 정부가 쓸 수 있는 자원이 얼마인지부터 파악하고, 이를 바탕으로 정책목표의 우선순위를 분명히 해야 한다. 주어진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최선의 수단을 선택하기 위해서는 특정 정책이 초래할 편익과 비용에 대한 엄밀한 분석이 선행되어야 한다. 또 정책의 내용 못지않게 집행 가능성도 고려해야 한다. 아무리 좋은 정책이라도 경제주체가 수용하지 않으면 제 효과를 낼 수 없는 일이다. 또한 정책담당자는 환경의 변화에 따라 정책 수단을 수정하고 보완할 수 있는 순발력과 기동력을 갖추어야 한다. 최선의 선택이란 고정된 것이 아니라 주어진 현실 여건에 바탕을 두는 것이다.
이런 점들을 고려할 때 참여정부 첫 해의 경제정책은 정권 초기의 적응 기간이라는 점을 고려하더라도 무척 실망스러웠다. 무엇보다 개혁 정당성 확보와 정책 우선순위의 조정이라는 차원에서 실기(失機)와 실책이 적지 않았다. 기득권 세력의 지원을 받지 못하는 소수 정권으로서는 한편으로 지지 기반의 확대를 꾀하고 다른 한편으로 몇 개의 핵심 정책에 초점을 맞추어 정책 자원의 낭비를 피해야 했다. 그러나 개혁 성향의 학자들이 제시하는 건설적인 비판조차 ‘개혁 흔들기’라 외면하고, 이념 중립적인 학문적 견해인 데도 정부와 견해가 다르면 편견으로 치부해버리는 식의 자기방어적인 태도를 보이면서 논리가 앞서야 할 경제 분야에 감정이 지배하는 현상이 두드러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