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8월호

한국전 호주 소년병 론 캐시맨의 인생유전

“나는 자랑스런 ‘가평대대’ 용사, 내 삶은 무너졌지만 후회는 없다”

  • 글: 윤필립 재(在)호주 시인 phillipsyd@naver.com

    입력2004-07-29 14:1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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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국전쟁에 뛰어든 열여덟 살 호주 소년 론 캐시맨. 2년 동안 치열한 전투를 치러낸 그는 참혹한 전장의 기억을 떨쳐내지 못해 40년을 폐인처럼 살았다. 정신병원을 드나들며 인생의 대부분을 보낸 그는, 아픈 기억을 마령산 안개 너머로 내던지는 최면요법을 통해 정상인으로 돌아왔다. 2003년, 꼭 50년 만에 한국을 찾은 그는 옛 전우들과 마령산에 올라 가슴 가득 아침 안개를 들이마셨다.
    한국전 호주 소년병 론 캐시맨의 인생유전

    1951년 10월 마령산전투에 투입된 론 캐시맨.

    50여년 전, 전쟁영웅을 꿈꾸며 자란 호주 소년이 있었다. 당시는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즈음이라 전쟁터에서 돌아온 귀환병사들이 온갖 무용담을 퍼뜨리고 있었다. 멜버른의 노동자마을에서 가난한 노동자의 아들로 태어난 소년은 명문교인 멜버른 보이스 하이스쿨에 입학해 공부했다. 소년은 전쟁영웅이 되는 것만이 진정한 남자가 되는 길이라는 생각으로 때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던 1950년 6월25일, 17세 소년은 나라 이름도 처음 듣는 ‘코리아’에서 전쟁이 터졌다는 라디오 뉴스를 들었다. 얼마 후 자유민주주의 국가인 한국을 침략한 공산세력을 물리치기 위해 한국에 파병할 병사를 모집한다는 소식을 접한 소년은 그 길로 달려가 지원서를 냈다.

    그러나 나이 제한에 걸리고 말았다. 만 18세 이상이라야 입대가 가능했다. 소년은 나이를 채우려 4개월을 더 기다린 끝에 군에 입대했고, 다시 1년 가까이 강도 높은 군사훈련을 받았다.

    전쟁영웅이 되겠다는 열망 때문이었을까. 소년은 군사학교를 1등으로 졸업했고 마침내 꿈에 그리던 전쟁터로 떠났다. 멜버른→시드니→다윈→괌→마닐라→하라무라 군사학교(일본)→김포→연천→마령산으로 이어지는 대장정이었다. 전쟁터로 향하는 소년의 포부는 아주 단순했다.

    한국전 호주 소년병 론 캐시맨의 인생유전

    그로부터 53년 후인 지난 7월, 자택 서재에서 포즈를 취한 론.

    “내가 원하는 바는 소총수가 되어 한국에서 공산주의자들과 싸우는 것이다(All I wanted to be was a rifleman fighting the Communists in Korea).”



    전쟁터에서 정신병동으로

    1951년 9월, 소년이 도착한 경기도 연천 북방의 마령산에는 호주 육군 제3대대가 주둔해 중공군과 대치하고 있었다. 소년은 부대에 배치된 바로 다음날, B중대 6소대 소총수로 마령산에서 약 3㎞ 떨어진 고왕산(355고지)전투에 투입됐다. 소년은 아직 열아홉 살에서 몇달이 모자란 틴에이저였다.

    전투는 주로 밤에 벌어졌다. 낮에는 제공권을 장악한 미군 때문에 중공군이 움직이지 않았다. 한국의 지형에 익숙하지 않은 소년 신병은 캄캄한 소로를 걸어가면서 몇 번이나 계곡 아래로 굴러떨어졌다.

    그후 휴전이 될 때까지 2년 동안 그는 수많은 전투를 치렀다. 세 번이나 큰 부상을 당해 후송됐고, 죽을 고비도 여러 번 넘겼다. 대원이 60여명인 6소대에서 2년간 전사 또는 실종자 수가 꼭 60명이었으니 살아남은 것 자체가 기적 같은 일이었다.

    1953년 7월27일, 종전도 아닌 휴전으로 전쟁은 끝났다. 그는 절체절명에 빠진 전우들을 목숨걸고 구해낸 공적으로 사병이 받을 수 있는 최고의 서훈인 무공훈장(Military Medal)을 받았다. 마침내 그토록 소망하던 전쟁영웅이 되어 돌아온 것이다.

    시드니 공항에 도착했을 때 소년은 20세 청년으로 변해 있었다. 그러나 지난 2년 동안 수없이 맞닥뜨린 삶과 죽음의 기로는 그후 무려 40년 동안 그의 곁을 떠나지 않고 그의 정신세계를 파괴했다.

    정신적 외상후 스트레스성 장애(post-traumatic stress disorder). 주로 참혹한 전쟁을 겪은 참전용사들에게 나타나는 일종의 정신질환이다. 죄의식과 공포감이 시도 때도 없이 악몽처럼 나타나는 마음의 병이다. 그는 이 병 때문에 인생의 대부분을 정신병동을 드나들며 보냈다.

    그러던 어느 날, 최면요법을 사용하는 노(老)의사를 만나 아주 특별한 치료를 받게 됐다. 그리고 기적처럼 회복됐다. 완치됐을 때 그의 나이는 예순을 넘어서 있었다.

    그처럼 고통스런 삶을 살았지만 그는 결코 절망하지 않았다. 40년 동안 소식이 끊겼던 옛 3대대 전우들을 만났고, 50년 만에 한국을 방문해 함께 전투를 치른 한국인 전우들도 만났다. 중국으로 날아가 한국전쟁 당시 적으로 총부리를 겨누던 이들과도 화해의 악수를 나눴다. 또한 무너져내린 생의 잔해들을 주워모아 개인적인 전사(戰史)를 기록했고, 투병기를 써 아직도 질곡을 헤매고 있는 전우들에게 들려줬다.

    로널드 케네스 캐시맨(Ronald Ke- nneth Cashman). 대개 론 캐시맨으로 불리는 상처받은 전쟁영웅의 정식 이름이다.

    필자는 해마다 4월23일에 열리는 ‘가평 퍼레이드’를 참관하기 위해 시드니 근교에 위치한 호주 육군 제3대대(일명 가평대대)를 찾았다. 가평 퍼레이드는 1951년 4월23∼24일 이틀 동안 인해전술로 밀어붙이는 중공군의 춘계 대공세를 막아낸 가평전투를 기념하는 행사로 지난 50여년 동안 이어졌다.

    “죽창과 곡괭이를 든 중공군들이 우리 참호를 향해 달려옵니다. 나는 총을 쏘면서 달아나려 하지만 다리가 움직이질 않아요. 마구 소리지르다 땀에 흠뻑 젖어 잠을 깨면 아내가 물 한잔을 가져다 줍니다.”

    악몽에서 깨어나는 시간은 대개 새벽 2~3시경. 아내가 가져온 물을 마시고 프랭크는 거실로 나가 밤을 지새운다. 이틀밤을 꼬박 지새우며 싸운 가평전투에서처럼.

    참전용사 프랭크가 이렇게 고통을 털어놓자 고개를 끄덕이면서 얘기를 듣고 있던 에디 라이트(71)씨가 “그런 증상이 아직도 계속되면 곤란한데…. 빨리 치료를 받아야 해. 혹시 론 캐시맨 얘기 못 들었냐?”며 최근 소식을 전했다. 론 캐시맨의 이야기는 ‘능선에서 얼쩡대지 마(Keep off The Skyline)’라는 제목의 책으로 출간됐고, TV 다큐멘터리로도 만들어져 곧 방영될 예정이라고 했다. 방송에는 50년 만에 만난 한국인 전우들의 얘기도 나온다고 했다.

    한국전 호주 소년병 론 캐시맨의 인생유전

    한국전 참전용사 론 캐시맨(왼쪽)과 에디 라이트. 1952년과 2004년의 모습이다.

    귀가 번쩍 뜨인 것은 참전용사 프랭크가 아니라 필자였다. 에디에게 당장 론 캐시맨을 만나게 해달라고 부탁했다. 그러나 에디는 “론은 지금 출판기념회와 방송시사회 등으로 무척 분주하기 때문에 좀 기다려야 될 것”이라고 했다.

    가평전투 對 마령산전투

    1951년 4월. 중공군은 춘계 대공세를 펼치며 파죽지세로 남하를 거듭했다. 특히 한국군 6사단을 격파한 중공군 118사단은 23일과 24일 이틀 동안 비교적 기동이 용이한 가평천 골짜기를 통해 서울-춘천간 도로를 차단함으로써 연합군의 전선을 갈라놓으려 했다.

    그러나 중공군은 가평 북방 8km 지점의 목동리 504고지에 배치된 호주 3대대의 강력한 공격을 받고 혼비백산해 후퇴했다. 4월23일 밤 10시경, 6사단을 추격하던 중공군 118사단 선두 연대는 가평을 신속히 점령할 목적으로 종대 대형을 유지한 채 도로와 계곡을 따라 진격하던 중 호주군의 기습공격을 받았다. 호주 3대대가 배치된 사정을 전혀 몰랐던 것.

    일단 후퇴한 중공군은 이튿날인 24일 새벽 1시경 연합군 전차부대가 재보급을 위해 잠시 철수하자 즉시 반격을 가해왔다. 그후 3대대와 중공군의 일진일퇴 공방은 24일 아침녘까지 이어졌다. 날이 밝아 연합군의 항공폭격과 포병사격이 집중되자 중공군은 산더미 같은 시체를 남기고 급히 철수했다. 호주군 1개 대대가 인해전술로 밀어붙이던 중공군 1개 사단을 이틀간의 치열한 전투 끝에 물리치는, 믿기 어려운 전과를 올린 것이다.

    중공군은 가평전투에서 1만명 이상이 전사하는 큰 피해를 당했다. 4월26일 중공군 사령관 펑더화이(彭德懷)는 춘계 대공세의 실패를 자인하면서 마오쩌둥(毛澤東)에게 작전상황을 보고했다.

    이로써 중공군의 연합군 전선 분할 기도는 저지됐고, 연합군은 북한강 남쪽에 새로운 방어선을 구축할 수 있는 시간적 여유를 갖게 됐다. 전사에는 당시 호주군 3대대가 중공군을 막지 못했다면 한국전쟁의 양상이 많이 달라졌을 것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3대대는 그 공로로 미국의 트루먼 대통령으로부터 부대 표창을 받았고 ‘가평대대’라는 별칭을 얻게 됐다. 호주 육군은 가히 기적이라고 할 만한 가평전투를 기념하기 위해 4월24일을 ‘가평의 날’로 정했으며, 가평 퍼레이드 같은 행사를 통해 호주 군인의 용맹스런 정신을 기리고 있다.

    같은 3대대 출신이라도 가평전투를 치른 용사들은 이 전투를 치르지 않은 참전용사들을 한 수 아래로 본다. 가평전투는 그만큼 치열했고 대대원들은 호주 전사에 기록될 만큼 혁혁한 공을 세웠기 때문이다.

    그러나 3대대 전우 중에서도 마령산전투를 치른 용사들의 생각은 전혀 다르다. 가평전투의 빛나는 전과를 인정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막강한 전력의 중공군을 공격해 진지를 탈환한 마령산전투가 방어전투였던 가평전투보다 높이 평가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1951년 10월7∼8일 이틀간 벌어진 마령산전투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호주 육군이 벌인 최대 규모의 전투다. 3대대 병사들은 이 전투에서 90만발의 총탄을 발사했고 1만2000개의 수류탄을 투척했다. 치열한 전투 끝에 3대대 병사들은 중공군 2개 대대 병력 2000여명을 궤멸시키는 전과를 올렸다. 반면 3대대의 희생은 전사 20명, 부상 89명에 그쳤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3대대의 마령산전투 출신 용사들이 가평전투 출신 용사들의 기세에 순순히 물러날 리 없다.

    더욱이 마령산전투의 승리로, 중공군의 동태를 자세히 살필 수 있는 마령산 317고지를 탈환함으로써 중공군이 집중된 서부전선을 지켜내는 데 결정적인 공헌을 했다. 마령산은 경사가 급한 지형으로 파노라마의 전망을 지닌 요충.

    그런 요지인 만큼 마령산을 차지하기 위해 미군과 캐나다군, 그리고 한국군이 각각 중공군과 맞서 싸웠지만 모두 패하고 말았다. 그런데 이 전장에 마지막으로 투입된 호주군이 중공군을 격퇴시킨 것이다.

    론 캐시맨씨도 마령산전투 출신의 전쟁영웅이다. 그를 만나고 싶어 에디 라이트씨에게 부탁한 지 두 달이 넘었는데 아무런 소식이 없었다. 그러던 지난 7월 초 에디로부터 “론을 만나러 가자”는 전화가 왔다.

    기찻길 옆 오두막집

    시드니의 7월은 겨울이다. 아열대성 기후에 속하는 시드니는 한겨울이라고 해봐야 기온이 10℃ 아래로 내려가는 날이 아주 드물다. 그러나 론 캐시맨을 만나러 가는 7월4일은 뼛속까지 스며드는 한기가 느껴질 정도로 날씨가 쌀쌀했다.

    갑자기 추워진 날씨 탓인지 문득 그의 신산(辛酸)했던 삶이 떠올랐지만 애써 생각을 돌렸다. 아무런 선입견 없이 그가 살아온 얘기를 듣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살을 에는 찬바람 때문에 옷깃을 세워야 했다.

    론의 집은 2000년 시드니올림픽 주경기장이 있는 홈부시에 있었다. 한인 밀집 거주지역인 스트라스필드에서 자동차로 5분 거리에 위치한 ‘기찻길 옆 오두막집’이다. 홈부시는 오래 전부터 철도 노동자가 많이 살았다. 론이 그곳에 정착한 것은 참전 상이용사 전용병원이던 콩코드 병원(지금은 상이용사가 많지 않아 일반병원으로 바뀌었다)과 가까웠기 때문이다.

    가스난로가 피워진 작은 거실엔 오전 햇살이 가득했다. 그가 마시다 말았을 잔엔 커피가 절반쯤 담겨 있었다. 그는 졸고 있었다. 아니, 깊은 생각에 잠겨 있는 것 같았다.

    함께 간 에디가 “좀 기다리면서 집안이나 둘러보자”고 했다. 거실과 서재, 하물며 침실에까지 한국전쟁과 관련된 사진이 붙어 있었다. 한국인 전우 김흥규와 찍은 사진은 큰 족자로 만들어서 걸어뒀고, 전쟁 때 사용했다는 지도까지 붙여놓았다.

    그의 전쟁은 아직도 계속되고 있는 것일까. 부인 베티가 다가가 어깨를 감싸안자 론은 잔잔한 미소를 지으며 눈을 떴다. 주름진 눈가엔 눈물자국 같은 것이 남아 있고….

    “소대장님! 오늘 행군 중에 아무 이상 없었습니닷!”

    에디가 느닷없이 부동자세로 론에게 거수경례를 붙이더니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보고를 했다.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난 론은 낮은 목소리로 “쉬어!”라고 하더니 에디를 얼싸안았다.

    두 사람은 동갑내기로 고왕산 355고지에서 2년 동안 생사고락을 함께한 전우였다. 어느 날 소대장이 중상을 입어 소대원을 지휘하지 못하게 되자 전투력과 통솔력이 강한 론에게 소대장 임무를 맡겨 에디가 론의 부하가 된 것.

    “Where do I start?”

    필자는 론에게 “아무것도 묻지 않고 당신의 얘기를 듣기만 하겠다”고 했다. 그에 관한 책 ‘Keep Off The Skyline’과 TV 다큐멘터리 ‘Korean ANZAC’는 진작에 입수했지만, 그를 직접 만나보기 전에 보면 선입견이 생길까봐 미루고 있던 터였다.

    몇 번 고개를 끄덕이던 론이 한동안 눈을 감고 침묵 속으로 빠져들었다. 그가 눈치채지 않도록 소형 녹음기를 작동시키고는 커피를 마시고 있는데, 그가 마치 유령의 음성처럼 “Where do I start?”라고 말하고는 쓸쓸하게 웃었다.

    “사랑 얘기도 아닌데 영화 ‘러브스토리’ 첫 대사처럼 시작하네, 허허. 기왕 말이 나왔으니, 러브스토리는 아니지만 자네 마닐라에서 길거리 여자에게 동정을 바친 얘기부터 시작하면 어때?”

    착 가라앉은 분위기를 띄우려고 에디가 한마디 하고는 껄껄 웃어댔다. 사내들의 얘기를 듣고 있던 베티가 슬그머니 자리에서 일어나 뒤뜰로 나갔다. 같이 앉아 듣다보면 무슨 얘기가 튀어나올지 모르겠다는 눈치였다.

    베티는 늘 그런 식이었다고 한다. 론이 참전 1년 후 시드니로 휴가를 나왔을 때 우연히 만난 두 사람은 그후 1년 동안 편지로 교제하다가 론이 호주로 돌아온 지 한 달 만에 결혼했다.

    두 사람은 딸만 넷을 낳았다. 론에게서 정신질환 증상이 나타난 것은 결혼 초기였지만, 상태가 그리 심하지 않아 병원에 다니면서 가정과 직장생활을 영위할 수 있었다. 그러나 막내가 태어날 때쯤부터 병세가 악화되어 모든 게 엉망이 됐다.

    소대장 출신의 론 대신 베티가 소대장이 되어 집안 살림을 꾸리면서 론의 병 수발도 해야 했다. 베티는 강한 여자였다. 론의 증상이 나타나면 그녀는 조용히 아이들을 론에게서 격리시키고 자신도 먼발치에서 지켜보다가 상황이 급박해지면 앰뷸런스를 부르곤 했다.

    몇 마디 말하곤 또다시 생각에 잠겨드는 론에게 에디가 제안했다.

    “클론커리(Cloncurry) 작전부터 얘기하는 게 어떨까? 자네를 40년 동안이나 잠 못 들게 했던 전투였으니….”

    론은 클론커리 작전을 회상하기 시작했다. 그는 천천히 말을 이어가면서 서너 번 몸서리를 쳤다. 목이 메는지 말을 제대로 잇지 못했다. 그때마다 에디의 눈시울도 붉게 물들고.

    작전이 있던 밤엔 산 아래로 임진강의 한 줄기인 사미천이 흐르고 그믐달이지만 은은한 달빛까지 함께 흘렀다고 했다. 그 아름다운 산하에서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기에 두 사람은 아직도 악몽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것일까. 론의 얘기를 들어보자.

    함께 싸우지만 혼자 죽는다

    1952년 5월13일. 내가 소속된 제6소대는 호주군 3대대와 중공군 진지의 중간지점인 클론커리 지역을 정찰하라는 명령을 받았어. 중공군이 15명 정도 출몰했다는 정보가 입수됐기 때문이지.

    신참소위인 소대장은 소대원 중 16명을 차출해 정찰에 나섰어. 달빛조차 없는 캄캄한 밤이었지. 막 정찰을 떠나려는데 같은 소대의 존 케네디 일병(나중에 론 캐시맨의 용맹스런 전투를 보고해 훈장을 받게 한 전우)이 내게 오더니 “오후에 정찰을 나갔을 때 능선 쪽으로 중공군 50∼60명이 보였다”고 했어.

    정찰을 시작한 지 1시간쯤 흘렀을까. 갑자기 중공군들의 함성과 함께 여기저기서 수류탄이 터졌어. 나를 포함한 대부분의 소대원이 부상을 입었지. 나는 중공군이 수류탄을 내 쪽으로 던지는 것을 보고 무작정 계곡 아래로 굴렀어.

    한국전 호주 소년병 론 캐시맨의 인생유전

    론 캐시맨이 소속된 제3대대 6소대원들이 정찰에 나서고 있다.

    다음날 인도군 야전병원에 후송돼 치료를 받았는데 수류탄 파편이 17군데나 박혀 있더라고. 그런 몸으로도 적진을 향해 총을 쏘아대야 했지.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우린 전투를 계속하면서 계곡을 빠져나갔어. 중공군도 피해가 컸던지 잠시 소강상태로 접어들었지.

    그런데 인원을 점검해보니 4명이 비는 거야. 소대장에게 “계곡으로 돌아가 4명의 전우를 구해오자”고 했지. 그러나 소대장의 생각은 달랐어. 수적으로 우세한 중공군에게 전멸당할 수도 있다며 철수명령을 내린 거야.

    군대는 명령에 살고 죽는 조직이잖아. 하는 수 없이 소대장의 명령에 따라야 했어. 진지로 빠르게 철수하는 동안 뒤쪽에선 호주군의 개인화기인 오잉건을 발사하는 소리가 들렸어. 전우들이 아직도 살아남아서 싸우고 있다는 증거였지.

    그런데 그 오잉건 소리가 왜 그렇게 외롭고 처절하게 들리던지…. 마치 위험에 처한 자신들을 두고 떠나는 전우들에게 원망의 소리를 퍼붓는 것 같았어. 아니나다를까, 잠시 후 몇 발의 수류탄이 터지는 소리가 들려왔고 계곡은 정적에 휩싸였지. 난 그때껏 그렇게 처연한 정적을 경험한 적이 없어. 그리고 나는 생각했지. 전투는 함께하지만 죽을 때는 혼자라는 것을.

    난 한동안 지휘관의 리더십과 도덕성을 의심했지. 살아있는 대원의 목숨을 지키기 위해, 용감하게 싸우다가 낙오한 전우를 버린다? 그건 겁쟁이나 하는 비겁한 짓이야. 진정한 호주 군인이라면 이렇게 말할 거야.

    “전우를 절대로 버리지 말라!(Never abandon a mate!)”

    참호로 돌아오는 길엔 안개가 깔리고 있었어….

    이 대목까지 말하고는 한동안 침묵을 지키던 론이 뜬금없이 “나는 그놈의 안개 속에 갇혀 40년 동안이나 헤맸어”라고 하더니 연극배우가 독백하듯 말을 이어갔다.

    나는 엿 같은 GI가 아니야

    아주 추운 밤이다. 밤이 깊을수록 살을 에는 듯한 추위는 더욱 맹위를 떨쳐 나중엔 정신까지 혼미하게 만든다. 한국의 겨울이 춥다는 얘기는 들었지만 이렇게까지 추울 줄은 상상도 못 했다.

    계곡 또한 깊다. 내려갈 때는 미끄럼을 타야 하고, 올라갈 때는 풀포기나 돌부리라도 붙잡아야 한다. 그러나 깊은 계곡과 짙은 어둠은 마음을 편안하게 만들어준다. 적에게 노출될 가능성이 그만큼 낮기 때문이다.

    매복 작전에서 가장 위험한 시간은 해뜨기 전후다. 밤이 지나갔다는 안도감에 빠지는 순간을 적이 역이용하기 때문이다. 그 사실을 잘 알고 있는 나는 일종의 패닉상태에 빠지곤 한다.

    해뜰 무렵 한국의 산하는 특히 아름답다. 어둠 속에서 빛나는 첫 햇살은 맥박을 고동치게 한다. 동쪽에서 해가 천천히 떠오르면서 짙은 안개가 계곡 가득히 깔린다. 바람조차 숨죽이고…. 그래서 이곳을 일컬어 ‘조용한 아침의 나라’라고 했다.

    그러나 아름다움은 안개가 걷히기 전까지다. 지난밤의 매복위치를 확인한 중공군이 우리 소대의 철수통로를 지키고 있다가 부서지는 안개와 함께 나타나서 빽빽 소리를 질러댄다.

    “총을 내려놔라. 그러면 목숨만은 살려준다.”

    그러나 그것은 거짓말이다. 나팔소리가 계곡의 정적을 찢으면서 셀 수 없이 많은 중공군이 출몰한다. 그들은 또 소리지른다.

    “꺼져라 미군놈, 너 무섭지(Go back GI, Afraid GI)?”

    계곡을 타고 오르던 안개도 중공군과 함께 소리를 질러대는 것 같다. 나 또한 소리 지르고 싶어진다.

    “나는 엿 같은 GI가 아니야. 난 호주 사람이란 말이야(I’m not a fucking GI. I’m an Australian)!”

    그러나 그 소리는 목구멍 안에서만 울릴 뿐이다. 호주 군인은, 후퇴할 방도부터 챙기고 나서 전투하는 미군으로 오인받는 것을 아주 싫어한다. 태생적으로 뒷걸음 치지 못하는 캥거루나 이뮤처럼.

    중공군이 잠시 주의를 게을리하는 동안 나는 숲 속으로 달아나기 시작한다. 그런데 계곡을 타고 오르던 안개가 내 발목을 붙잡는다. 나를 뒤쫓던 중공군이 나를 쓰러뜨린다. 나는 소리를 지르며 그에게 저항한다.

    그때 어디선가 친숙한 목소리가 들려온다. 눈을 떠보니 창백한 얼굴의 베티가 “Are you all right?”이라고 묻는다. 나는 입을 벌려 “Yes!”라고 말하고 싶지만 소리가 나오지 않는다. 동시에 나의 뇌는 아우성치기 시작한다. “No, No, No!”

    론 캐시맨의 첫 발작증세는 호주로 귀환해서 몇 년이 지난 어느 날 아침에 일어났다. 어머니가 찻잔을 쟁반에 받쳐 들고 자신에게 다가오는 소리를 듣는 순간, 중공군이 기습할 때 들려오던 발걸음 소리를 떠올리면서 발작을 일으켰다.

    그는 갑자기 마당에 있던 막대기를 집어들고 어머니와 아내를 향해 총 쏘는 자세를 취했다. 시늉이 아니었다. 정신병의 일종인 정신적 외상 후 스트레스성 장애 증상이 나타난 것이다.

    그후로도 발작은 계속됐고 전쟁의 상흔은 그의 인생을 통째로 파괴해버리는 듯했다. 론의 발작을 견디지 못한 아내는 아이들을 데리고 몇 차례나 집을 나갔고, 아버지의 정신병에 절망한 큰딸은 비뚤어진 삶을 살다가 결국 병을 얻어서 죽었다. 론은 무려 일곱 차례나 자살을 기도했으나 번번이 마지막 순간에 발견되어 절명 직전에 살아났다.

    그러나 론은 정확한 병명도 모른 채 40년이라는 긴 세월을 허송했다. 병원마다 정신장애를 호소하는 참전용사들이 넘쳐났으나 호주의 정신과 의사들은 마땅한 치료법을 몰라 기껏해야 아스피린이나 처방했기 때문이다.

    그의 삶은 한없이 무너져내렸고, 앞날에 대한 희망은 그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정신병동을 들락거리며 자살 기도를 반복하던 1994년 어느 날, 이미 은퇴한 정신과 의사 피터 맨지 박사가 그의 딱한 소식을 듣고 찾아왔다. 그는 아주 신중하면서도 동정심이 많은 사람이었다. 군의관 출신인 맨지 박사는 전쟁 후에 정신질환을 앓는 참전용사들을 치료하기 위해 외과에서 정신과로 전공을 바꾼 인도주의자였다.

    맨지 박사가 아주 특이한 치료법을 제안했다. 의학적으로 증명된 치료법은 아니지만 최면술을 이용해서 치료해보자는 것이다. 물에 빠진 사람은 지푸라기라도 잡는 법. 고통에 시달리던 론은 두 말 하지 않고 동의했다.

    그후 두 사람은 실패와 성공을 거듭하면서 3개월 동안 최면술을 이용한 치료에 몰두했다. 치료라기보다는 한 편의 사이코드라마를 연기했다는 편이 더 적절한 표현일 것이다. 론의 얘기를 계속 들어보자.

    안개 저 너머로 기억을 던지다

    맨지 박사와 나는 아침마다 마주앉아 대화를 나눈다. 주로 전쟁에 관한 얘기를 한다. 그 중에서도 전쟁터에서 일어나는 가벼운 에피소드 위주로 대화를 나누다 보면 마음이 편안해진다. 그런 마음의 상태를 이용해서 나는 최면상태에 빠져들고 맨지 박사는 치료를 시작한다.

    그는 먼저 내가 지금까지 봐온 풍경 중에 가장 아름다웠던 곳을 떠올려보라고 말한다. 그러면 바로 내 앞에 한국 가을의 산꼭대기 풍경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마령산 근처의 산봉우리다.

    참호에서 밤을 지새고 새벽에 밖을 내다보니 안개가 자욱하다. 산봉우리들만 조금씩 보이는 풍경인 데도 황홀할 정도로 아름답다. 그렇게 아름다운 풍경을 어떻게 언어로 표현할 수 있단 말인가.

    안개 자욱한 풍경에 매혹된 내게 햇살 한 줄기가 다가와서 나를 눈부시게 한다. 햇살은 다시 하얀 바다를 가로질러 안개를 데우기 시작한다. 안개가 천천히 부서지면서 산기슭을 타고 올라간다. 산기슭에 숨어 있던 작은 섬들이 모습을 드러내고….

    그때 맨지 박사가 내 손을 잡고 안개가 피어오르는 계곡 아래쪽으로 내려가기 시작한다. 천천히, 아주 천천히…. 그렇게 한참을 내려가던 나는 문득 수상한 나무 한 그루를 발견한다. 나무 뒤에 중공군이 숨어있는 게 틀림없다.

    우리는 꼼짝없이 걸려들었다. 나는 소리지른다.

    “저 놈을 쏴버려!”

    순간 맨지 박사는 나를 재빨리 산꼭대기의 안전한 참호 안으로 데려간다.

    우리 두 사람은 매일 아침 안개 속을 걸어 계곡 쪽으로 내려간다. 어제는 그저께보다 조금 더 아래로 내려갔고 오늘은 어제보다 조금 더 내려간다. 중공군에 대한 공포와 수류탄 터지는 소리, 동료를 버리고 떠난 죄의식과 분노가 아직도 꿈틀대고 있는 저 산 아래로.

    그렇게 내려가다가 내가 겁에 질리는 듯하면 맨지 박사는 즉시 나를 산꼭대기로 옮겨준다. 그렇게 하기를 석 달. 짙은 안개 속 같은 내 무의식 안에 잠겨 있던 모든 과거가 아침햇살에 부서지는 안개처럼 걷히는 게 느껴졌다.

    오늘은 유난히 마음이 가볍다. 마침내 계곡 맨 아래로까지 내려왔기 때문이다. 우리 둘은 계곡 아래로 흐르는 사미천의 물로 손을 씻고 얼굴을 씻는다. 그리고 다시 산꼭대기로 올라간다.

    산꼭대기에 올라가서 맨지 박사는 내게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가장 나쁜 기억들은 무엇이냐”고 묻는다. 나는 중공군의 기습을 받았을 때와 절친했던 전우 두 명이 어느 날 갑자기 실종된 일이라고 대답한다. 그리고 몇 차례 중공군에게 포위됐는데, 그때마다 죽음을 각오해야 했다는 말도 한다.

    고개를 끄덕이면서 내 말을 듣던 맨지 박사가 말한다.

    “이젠 됐습니다. 지금부터 당신의 나쁜 기억들을 전쟁터에서 쓰던 군용 더플백에 죄다 집어넣으세요. 그리고 가방 입구를 단단히 묶은 다음에 저 지긋지긋한 안개 너머로 던져버리면 됩니다.”

    나는 대답한다.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한국전 호주 소년병 론 캐시맨의 인생유전

    엽서로 제작된 론 캐시맨과 전우 김흥구의 사진. 론은 이 사진을 족자로 만들어 서재에 걸어놓았다.

    최면술 치료를 받은 론 캐시맨은 마침내 참혹한 기억들을 다 털어낼 수 있었다. 가위눌림과 같은 악몽은 사라졌고 중공군의 발자국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의 발목을 잡아당기던 짙은 안개도 그날 이후론 보이지 않았다.

    “40년 만에, 내 인생은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나는 거의 정상인에 가깝게 살기 시작했습니다.”

    론이 완치된 것을 자기 일처럼 기뻐하던 맨지 박사는 론에게 한국을 방문하라고 권유했다. 상상으로만 던진 더플백을 마령산 근처의 산에 올라 실제로 던져보라는 것.

    2003년은 한국전쟁 휴전 50주년이었다. 론은 에디 등의 전우들과 함께 50년 만에 처음으로 한국을 방문했다. 맨 먼저 부산으로 달려가 유엔군 묘지에 잠든 전우들에게 참배했다. 그리고는 마령산 근처로 가서 전쟁의 상흔을 담은 더플백을 산 아래로 집어던졌다. 그 현장엔 전쟁 당시 3대대에 파견되어 론 캐시맨에게 훈련받았던 한국인 이민방·김흥구씨도 함께 있었다.

    1952년 말, 한국인 두 명이 3대대 6소대로 배치됐다. 이민방·김흥구씨가 그들이다. 지금으로 치면 카투사와 같은 군인들이었는데, 당시엔 그들을 ‘캐트콤스(KATCOMs·Korean Augment- ation to the Commonwealth troops)’라고 불렀다.

    그들은 말이 군인이지 기초적인 훈련조차 제대로 받지 못한 상태였다. 뿐만 아니라 말이 전혀 통하지 않아 6소대에서 허드레꾼 취급을 받는 천덕꾸러기 신세였다. 론은 그런 두 사람을 안타깝게 여겼다. 제 나라에서 말도 통하지 않는 외국인들에 둘러싸여 고통 당하는 그들의 처지가 아이러니라고 생각했다.

    론은 두 사람이 제대로 대접받으려면 무엇보다 군인의 직분을 다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들을 훈련시키기 시작했다. 말은 통하지 않았지만 두 사람의 훈련성과는 빠르게 나타났다. 그들은 곧바로 작전에 투입됐고 임무 또한 훌륭하게 수행했다. 6소대 소대원들이 그들을 전우로 여기게 된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론 캐시맨은 이민방과 김흥구에게 전우 이상의 우정을 느꼈다. 말이 아닌 마음과 마음으로 통하는 진정한 친구가 된 것이다.

    지긋지긋한 전쟁이 끝나가고 있었다. 7월27일 밤 10시를 기점으로 휴전이 된다는 소식을 듣고 이민방과 김흥구는 매복근무를 나갔다. 그들은 10시까지만 살아남으면 된다는 생각 때문에 평소보다 더 가슴을 졸였다.

    드디어 밤 10시가 됐다. 전선에서 울려오던 총소리가 거짓말처럼 딱 그쳤다. 그리고 모깃소리. 앵∼하는 모깃소리를 들으면서 두 사람은 전쟁이 끝났다는 사실을 실감했다.

    전쟁이 끝났다는 것은 론 캐시맨이라는 친구가 어쩌면 다시는 만날 수 없는 머나먼 나라로 떠나간다는 의미기도 했다. 그들은 마령산 전선에서 작별했다. 군용차에 올라타던 론은 이민방이 눈물을 훔쳐내는 것을 보았다.

    론은 그들에게 꼭 편지를 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그는 그 약속을 50년 동안 지키지 못했다. 호주로 귀환해 한 달 만에 결혼하고 아이를 낳는 등 정신없이 지내면서 흐지부지된 것. 게다가 허구한 날 악몽에 시달리고 있었으니….

    그로부터 꼭 50년이 흐른 2003년 여름, 그들은 반세기 만에 만나서 함께 목숨 걸고 싸웠던 355고지를 방문했다. 그곳엔 아직도 강물이 흐르고, 나무가 푸르고, 계곡엔 안개가 가득했다. 죽은 전우들의 원혼이 여전히 떠도는 것 같아 돌아서는 발길이 천근만근이었다.

    나는 후회하지 않는다

    지난 4월 가평 퍼레이드를 참관하기 위해 찾아간 가평대대에선 여러 행사가 벌어지고 있었다. 부대 입구엔 정문으로 사용하는, ‘가평 라인스(Kapyong Lines)’라고 쓰인 대형 아치가 세워져 있고, 아치 바로 옆엔 가평전투 참전용사의 모형이 설치되었다. 대대본부 건물 앞에는 대형 태극기와 호주 국기가 나란히 걸려 있다.

    ‘가평의 날’을 맞아 구내매점에선 매년 포도주 공장에 의뢰해서 만드는 ‘가평 데이 와인’을 팔았다. 가평전투 전쟁기념관에 가보니 각종 자료사진과 함께 가평전투와 마령산전투 등의 전쟁일지를 열람할 수 있도록 해놓았다.

    게다가 만나는 참전용사들마다 ‘가평’ ‘마령산’ ‘임진강’ ‘사리원’ 등의 지명을 똑부러지는 한국어 발음으로 섞어가면서 한국전쟁에 관한 대화를 나누고 있어 마치 호주 속의 한국 같은 느낌이 들었다.

    가평 퍼레이드가 끝나자 연병장 여기저기서 맥주파티가 벌어졌다. 그날 한국인으로는 유일하게 참석한 호주 동포 최영길(70)씨가 가평전투 참전용사들과 술잔을 부딪치고 있었다.

    한국전 호주 소년병 론 캐시맨의 인생유전

    호주 현충일에 태극기와 호주 국기를 앞세우고 시가행진에 참가한 가평대대 참전용사들.

    론 캐시맨의 비극적인 일생을 그린 책 ‘Keep Off The Skyline’에는 호주 육군 3대대의 최연소 군인이던 최영길씨의 얘기가 많이 나온다. 가평대대 얘기를 하면서 그의 얘기를 빼놓을 순 없기 때문이다.

    평안북도 출신의 최씨는 서울에서 고등학교를 다니던 중에 전쟁을 맞았다. 그는 학업을 중단하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중공군(동네 노인들은 ‘팔로군’이라고 불렀다)이 내려오면 소년들까지 징집할 것이라는 소문에 최씨의 할아버지는 집에 막 도착한 손자를 다시 남쪽으로 내려보냈다.

    배를 곯으며 남쪽으로 내려오던 최영길은 인민군 시체에서 쌀을 꺼내다가 압록강 쪽으로 북진하던 호주군 3대대에 발견됐고, 곧 부대원으로 합류해 휴전될 때까지 3년 동안 3대대에서 의무병과 병참병으로 근무했다. 그후 가평대대의 도움으로 연세대 경제학과를 졸업한 최씨는 역시 가평대대의 초청으로 호주로 이민, 한국인 호주 이민 제1호가 됐다. 그는 호주 최대 항공사인 콴타스항공에서 근무하다가 정년퇴직했다.

    마령산의 3대대 본부에서 보급병으로 근무한 최영길은 매일 전선에서 내려오던 군용차량을 잊을 수가 없다. 운전병이 손가락을 몇 개 세워보이냐에 따라서 그날의 시체 처리를 준비해야 했기 때문이다. 보급병의 임무에는 시체 처리도 포함됐다. 차를 멈춘 운전병이 말없이 손가락 세 개를 세우면 시체 3구가 실려 있다는 얘기였다.

    최씨와 론 캐시맨은 전쟁 중엔 서로 만날 기회가 별로 없었다. 그러나 최씨가 호주로 오면서부터 교분을 터 지금까지 친밀하게 지내고 있다. 최씨가 론에게 “한국전쟁에 참전한 것을 후회하지 않느냐?”고 물었다. 론의 대답은 이랬다.



    “내 삶이 전쟁의 상흔으로 얼룩졌지만 후회는 없다. 또다시 열일곱 나이로 돌아간다 해도 같은 선택을 했을 것이다. 호주의 우방국가가 침략을 당하면 달려가서 함께 싸우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50년 만에 찾아간 한국의 발전상을 보고 내 선택이 옳았다는 것을 확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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