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2월호

한국처럼 두 동강 난 국가를 헌신으로 통합한 지도자

[누가 위대한 지도자인가] 미국인이 가장 존경하는 대통령 에이브러햄 링컨

  • 최광 전 보건복지부 장관·대구대 석좌교수

    입력2025-02-05 09: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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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노예보다 못한, 끔찍하게 가난했던 어린 시절

    • 삶의 이정표를 제시한 두 명의 위대한 어머니

    • 책벌레 링컨, ‘천로역정’ 읽은 날 잠 못 이뤄

    • 연설문 한 줄, 단어 하나까지 직접 쓴 명연설가

    • 더글러스 토론 이후 공화당의 간판스타로 등극

    • 1861년 취임식서 “우리는 적 아닌 친구” 호소

    • 남북전쟁 직후 전쟁 책임 누구에게도 묻지 않아

    • 한국엔 대통령병에 눈먼 사람들만…

    미국 워싱턴DC 링컨기념관 안에 있는 링컨 대통령의 조각상. [링컨기념관 홈페이지]

    미국 워싱턴DC 링컨기념관 안에 있는 링컨 대통령의 조각상. [링컨기념관 홈페이지]

    인디애나 오두막에서 살던 에이브러햄 링컨의 어린 시절 삶은 자신이 해방시킨 노예들보다도 더 끔찍한 가난으로 뒤덮여 있었다. 순회 교사에게 받은 공교육은 학창 시절 전체를 합쳐서 12개월에 불과했을 정도로 그는 보잘것없는 흙수저 출신이었다. 링컨은 주 의원이 되고 변호사가 되기 전까지 가게 점원, 뱃사공, 장사꾼, 측량기사, 프로레슬러, 편지 나르는 우체국장 등 여러 직업을 전전했다.

    링컨 대통령은 위대한 지도자로서, 더는 찬사를 찾기가 어려운 인물이다. 인격적 훌륭함에 더해 국정 과제에 대한 통찰력과 사람을 보는 안목으로 험난한 남북전쟁을 승리로 이끌고, 분열된 나라를 미합중국으로 통합했다. 링컨의 삶을 통해 우리 모두는 진지하고 성실한 노력이야말로 시련을 넘어서게 하는 가장 강력한 자산이라는 점을 새삼 깨닫게 된다.

    링컨 대통령은 미국인들이 가장 존경하는 지도자다. 미국에는 역대 대통령 모두에 대해 평가하고 순위를 매겨 발표하는 여론조사 기관이 다수 있다. 갤럽(Gallup), 케이블 TV사 C-SPAN, 라이딩스-맥아이버(Ridings-McIver), 퓨리서치(Pew Research) 등의 대표적 기관들이 2020년 이후 발표한 모든 조사에서 링컨 대통령은 역대 46명의 대통령 중 인기도 순위에서 언제나 단연 1위를 차지했다.

    링컨의 세 가지 자산, 어머니·성경·독서

    흙수저 링컨은 어떻게 위대한 지도자로 성장했을까. 세 가지 요인이 작용했다. 어머니, 성경(신앙), 그리고 수불석권(手不釋卷·손에서 책을 놓지 않고 늘 글을 읽다)은 링컨이 위대한 지도자가 되는 기초였다.

    링컨에게는 참으로 훌륭한 어머니 두 사람이 있었다. 친모(親母) 낸시 행크스는 기독교적 신념이 매우 깊어 어린 링컨에게 성경을 읽어주고, 글을 읽고 쓰는 법을 가르쳤으며, 진심 어린 사랑으로 링컨을 돌본 현명하고 자애로운 어머니였다. 그의 독서는 어머니의 지도에 따른 것이었다. 부잣집에 일하러 간 어머니는 주인집의 책을 빌려와 아들 링컨에게 건넸고, 그는 그 책들을 마구 읽었다. 책은 링컨이 한 번도 꿈꾸지 못했던 미지의 세상으로 나가는 문을 열어 그를 변화시켰을 뿐 아니라, 시야를 넓혀줬으며, 비전을 가져다줬다.

    링컨의 어머니에 대한 존경은 대단했는데 그는 “내가 이룬 모든 것, 그리고 앞으로 내가 이룰 수 있는 모든 것이 다 어머니 덕분”이라고 했다. 사실 미국의 초대 대통령 조지 워싱턴도 독실한 기독교 신자로 강인한 성격의 어머니 메리 볼 워싱턴에 대해 “나의 과거나 현재, 미래 등 나의 운명은 어머니로부터 물려받은 것”이라고 말했다.

    링컨의 친어머니는 전염병으로 향년 35세, 링컨의 나이 12세 때 타계했다. 링컨은 새어머니를 맞이하는데 다행히도 새어머니 세라 부시 존스턴은 링컨을 친자식처럼 사랑하며 그의 재능을 알아보고 제대로 가르치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했다. 새어머니는 시집올 때 상당수의 책을 가지고 왔고, 링컨이 지쳐 스스로 그만둘 때까지 계속 책을 읽을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어줬다. 그래서 공교육을 거의 받지 못했음에도 링컨은 독서광, 책벌레가 됐다.

    새어머니가 가지고 온 책은 ‘성경’ ‘이솝우화’ ‘로빈슨 크루소’ ‘천로역정’ ‘아라비안나이트’ ‘신밧드의 모험’ 등이었는데 링컨은 이 책들을 읽고 또 읽었다. 존 버니언의 ‘천로역정’을 손에 든 그의 눈은 반짝거렸고, 그날 낮에는 먹지 못하고 밤에는 잠들지 못했다고 한다. 그는 특히 성경을 늘 가까이 두고 틈나는 대로 펼쳐 보았다. 그의 수많은 연설과 글 속에서 성경 구절과 사상이 자주 인용됐다. 그는 이솝우화를 통해 도덕적 교훈을 배웠으며, 이야기의 힘을 이해하게 됐다. 이 두 권의 책은 링컨의 문체와 대화 방식, 상대를 설득하는 방법 등에 깊은 영향을 끼쳤다.

    ‘워싱턴 전기’에 완전히 매료된 링컨은 늦은 밤까지 이 책을 탐독했다. 고대 로마의 연설과 셰익스피어 작품에 나오는 연설 등을 모아놓은 책 ‘스콧(William Scott)의 웅변술 교습서’만큼 그가 실제적 도움을 받은 책은 없다. 링컨은 일을 하러 들판으로 나갈 때도 항상 ‘스콧의 웅변술 교습서’를 가지고 가 연설을 연습했다.

    링컨은 스코틀랜드 시인 로버트 번스의 작품, ‘로버트 번스의 시’를 즐겨 읽었으며, 그의 시에서 인간의 감정과 사회적 이슈에 대한 통찰을 얻었다. 지역 경찰관에게서 ‘인디애나의 개정 법령집’을 빌렸는데 독립선언서와 헌법, 1787년 북서부 조례가 담긴 이 책은 훗날 그의 철학과 정치사상의 초석이 됐다. ‘벤저민 프랭클린의 자서전’을 통해 자수성가의 정신과 실용적 지혜를 배웠고, 토머스 페인의 ‘상식’은 독립과 민주주의에 대한 링컨의 생각에 큰 영향을 줬다. 조지프 애디슨의 ‘카토의 비극’은 링컨에게 고전적 공화국의 가치와 도덕적 용기를 상기시켰고, ‘콜럼버스의 생애와 항해’를 통해 탐험과 발견의 정신을 존경하게 됐다.

    링컨을 압도한 건 셰익스피어의 작품이었다. 특히 ‘햄릿’ ‘맥베스’ ‘리어왕’ 등을 자주 읽었다. 그는 셰익스피어의 언어와 인물 묘사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 링컨은 다른 모든 작가들의 작품을 합친 것보다 셰익스피어의 작품을 더 많이 읽었다. 링컨이 가장 즐겨한 토론 주제는 셰익스피어였으며, 시간이 나면 사람들 앞에서 셰익스피어의 작품을 직접 낭독하기까지 했다. 백악관에 입성한 후 남북전쟁으로 인한 심적 부담과 고민이 이마에 깊은 고랑을 남길 때마다 링컨은 셰익스피어에 몰두했다고 한다. 그의 우수한 영어 산문체는 독서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링컨은 명석하고 화술이 능한 연설가였다. 미사여구는 사용하지 않았고 가벼운 유머를 즐기는 것은 그가 좋아하는 이솝 이야기를 닮았다. 그의 또 다른 애독서는 유클리드(Euclid)의 ‘기하학 원론’이었는데 그의 글이나 연설 논조가 간단명료하고 정확한 것은 이 책을 읽은 덕분이었다.

    링컨의 독서 목록은 그가 얼마나 다양한 주제에 관심을 가졌는지, 그리고 독서를 통해 얼마나 많은 것을 배웠는지를 보여준다. 링컨은 그의 세대에서, 아니 어쩌면 모든 세대에서 최고의 문장가였다. 그가 읽은 몇 권의 유명한 고전이 완전히 그의 피와 살이 됐기 때문이었다. 그는 책을 읽지 않은 사람들을 빗대어 “나는 어제보다 오늘 좀 더 현명하지 않은 사람은 존경하지 않는다”라고까지 말했다.

    그는 매우 많은 글을 남겼다. 편지, 연설문, 정부 공문서 등을 특별히 공들여 썼고, 단어 하나 문구 하나까지 다듬고 손보기를 거듭해서 자신의 뜻을 가장 올바로 나타내게끔 했다고 한다. 그 유명한 게티즈버그(Gettysburg) 추모 연설문도 링컨이 직접 작성한 것이다. 링컨은 자수성가한 명연설가였고, 매일 저녁 유머책을 보며 잠자리에 들었는데 이는 다른 사람에게 재미있는 이야기를 선사하려는 노력의 일환이었다.

    미국 펜실베니아주 게티즈버그에서 연설하는 링컨 대통령. [위키피디아]

    미국 펜실베니아주 게티즈버그에서 연설하는 링컨 대통령. [위키피디아]

    불우한 사람 돕기 위해 시작한 정치 여정

    사회적으로 불우한 사람들의 처지를 잘 알고 있으며, 성실하고 정직한 링컨에게 주위 사람들은 정치를 권유했다. 링컨은 정치가 불우한 사람을 도울 수 있는 가장 좋은 수단이라고 판단하고 정치인이 되기로 결심했다. 링컨은 9번 선거에 출마했는데 3번 낙선했다. 1832년 링컨은 23세의 나이로 첫 출마인 일리노이주 하원의원 선거에서 낙선했다. 2년 후 다시 출마해 당선되면서 정계에 입문했다. 25세부터 32세까지 8년 동안 일리노이주 하원의원으로 활동했다. 이때 링컨이 모범으로 삼은 인물은 미국의 3대 대통령 토머스 제퍼슨이었다.

    링컨은 주 의원으로 일하면서 세상이 강자에게만 유리하다는 사실을 깨닫고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을 돕기 위해서 변호사가 되기로 했다. 명문대 출신도 합격하기 어려운 변호사 시험을 독학으로 공부해 1837년 28세에 합격했다. 변호사가 된 링컨은 많은 사람을 도울 수 있었으나 볼품없는 학벌, 흙수저인 집안 배경으로는 정치인으로 성공할 수 있는 여건이 되지 않아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1846년에 링컨은 연방하원 의원에 당선돼 1847년부터 2년간 하원의원으로 활동했다. 하원의원 선거가 끝난 뒤 공화당에서 받은 선거자금 200달러에서 199달러 25센트를 반납했다. 링컨은 말을 타고 선거운동을 하고 식사는 친구 집에서 했기에 선거비용이 필요없었다. 선거비용으로 지출한 것은 어느 농부가 마실 것을 사달라고 간청해서 선거비용 중에서 75센트를 주고 사이다를 사준 것이 유일하다. 하지만 링컨은 약소국인 멕시코와 전쟁을 벌인 정부를 비난하자 보수 세력으로부터 미움을 받아 재선에서 실패했다.

    1854년 노예제도를 반대하던 사람들이 모여서 공화당을 창당했는데, 링컨도 참여해 노예해방을 위해 본격적으로 활동했다. 링컨은 1855년 일리노이주 연방 상원위원에 출마해 낙선하고, 1858년 연방 상원의원에 재도전했는데, 당시 작은 거인으로 알려진 민주당의 거물인 스티븐 더글러스와 맞붙었다. 선거에서는 실패했으나 정치 거물 스티븐 더글러스와 벌인 토론에서 링컨은 일약 유명 정치인으로 부각됐다. ‘링컨-더글러스 토론’으로 회자된 두 사람이 7회에 걸쳐 노예제와 연방 권리에 대해 벌인 수준 높은 토론이 전국적으로 화제를 모으면서 링컨은 공화당의 간판스타가 됐다.

    ‌‌1846년 연방 하원의원 선거에 출마해 당선돼 한 번의 2년 임기를 수행했으나 1848년 재선에 실패했다. 1855년과 1858년에는 연방 상원의원에 출마했으나 거푸 낙선했다. 링컨은 수많은 실패와 좌절, 파란만장한 삶을 살면서도 희망의 끈을 놓지 않고 불굴의 의지로 대통령이 됐다. 1860년 대통령선거에 공화당 후보로 출마해 당선돼 제16대 대통령이 됐다. 1864년 재선됐으나 1865년 재임 시작 3개월 만에 암살당했다.

    링컨 대통령 암살 당시 모습을 그린 삽화. [위키피디아]

    링컨 대통령 암살 당시 모습을 그린 삽화. [위키피디아]

    ‌링컨은 미국의 운명을 바꾼 위대한 대통령이다. 링컨이 아니었으면 오늘날의 미합중국이 존재하지 않고, 두 개로 분단된 나라가 존재할 뻔했다.

    분열 위기의 미합중국을 구한 링컨

    링컨은 1861년 3월 4일에 대통령에 취임했다. 그의 첫 취임사는 남북전쟁을 예견하고 노예해방 관련 원칙도 천명했다. “남부에도 북부에도 나중은 어떻게 되든 연방을 탈퇴하려고 기회를 엿보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에 대해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겠습니다. … 불만을 품고 있는 동포 여러분! 내란 발발의 열쇠는 내 손에 있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의 손에 있습니다. … 여러분은 하나님께 연방정부를 파괴하겠다는 선서를 하지 않았지만 나는 하나님께 ‘정부를 유지하고 수호하고 방위하겠다’는 선서를 한 사람입니다. … 우리는 적이 아니라 친구입니다. 우리가 적이 돼서는 안 됩니다. 격분이 끓어오르는 일이 있더라도 애정의 유대를 끊어서는 안 됩니다”라고 진심으로 호소했다. 취임사가 아니라 호소문이었다.

    하지만 노예를 많이 소유하고 있었던 남부의 주들은 위기감을 느끼기 시작했다. 남캐롤라이나주를 시작으로 6개 주가 연방에서 탈퇴해 1861년 2월에 남부연합을 결성하고, 미연합국(Confederate States of America)이라는 이름으로 독립국가를 선포했다. 그리고 상원의원이자 노예제도를 옹호한 데이비스(J. F. Davis)를 대통령으로 선출했다. 마침내 미국은 건국된 지 84년 만에 두 국가로 분열될 위기에 처했다.

    링컨 대통령은 미국의 분열을 막기 위해 자신의 최고 목적은 연방을 유지하는 것이지 노예제도 문제는 아니라고 설득했으나 허사였다. 링컨은 남부 주들의 연방 탈퇴를 내란(內亂)으로 규정짓고 연방을 유지하기 위해 남부연합에 무력 사용도 불사하겠다고 경고했으나 소용이 없었다. 링컨에 맞서 국가까지 세운 남부연합은 링컨을 거부하고 그들만의 국가를 원했다. 남부연합은 군대를 조직해 1861년 4월 12일 남캐롤라이나주에 있는 연방정부군의 진지인 섬터 요새(Fort Sumpter)를 공격하면서 남북전쟁이 시작됐다.

    남북전쟁 초기에 북부군은 전쟁 준비가 제대로 되지 않았고 전술도 부족해 남부군에 밀렸다. 남부군이 연달아 승리하면서 파죽지세로 북부를 점령하기 시작했으나 군수물자가 부족해 계속 공격하지 못했다. 그 후 북부는 모든 시설을 총동원해 군수물자를 대량으로 생산했고, 200만 명이 넘는 군대를 보충했다. 게다가 링컨은 노예제도 폐지에 불만을 가진 남부의 여러 주 대표들을 만나 연방에 남아주기를 호소하는 등 솔직하고 탁월한 설득력을 보여줬다. 링컨의 솔직담백한 호소에 미주리주, 서(西) 버지니아주, 켄터키주 등은 노예제를 찬성하는 남부에 있으면서도 연방을 탈퇴하지 않았다. 링컨은 남부의 주들이 연방에서 탈퇴하지 않도록 하는 뛰어난 위기관리 능력을 발휘했다.

    남북전쟁은 1861년 4월 12일부터 1865년 4월 9일까지 미합중국(북부연방)과 미연합국(남부연맹) 간에 벌어진 전쟁이었다, 미국의 독립전쟁 이후 벌어진 내전으로 미국 최대의 위기였으며 엄청나게 많은 사상자를 냈다. 미국의 북부와 남부는 식민지 시절부터 경제·사회 등이 여러 면에서 서로 달랐다. 북부가 이민에 개방적이고 상공업 중심으로 발전하고 있었다면, 남부는 보수적이며 대농장을 기반으로 하는 농업이 주요 산업이었다. 남부에서 노예는 중요한 생산요소였으나, 북부의 여러 주에서는 이미 노예제도를 폐지한 상태였다. 남북전쟁은 남부와 북부 간 정치적 견해, 노예제도, 지역감정 등이 빚어낸 처절한 동족상잔의 비극이었다.

    남북전쟁 당시 북부의 인구는 2250만 명(흑인 노예 5만 명, 자유 흑인 25만 명), 남부는 백인 550만 명, 흑인 노예 400만 명이었다. 전쟁에 참가한 인원은 남군은 106만 명, 북군은 280만 명으로 모두 386만 명이 48개월간 교전했다. 전쟁 중 사망한 사람은 남군 20만 명, 북군 36만 명, 합계 56만 명이었다. 부상자 수는 남군 14만 명, 북군, 28만 명, 합계 42만 명이었다. 남북전쟁에서 전사한 사람은 56만 명인데, 이는 제1, 2차 세계대전 미군 전사자 53만 명보다 더 많은 숫자다.

    링컨은 남북전쟁 도중 총사령관 문제로 계속 어려움을 겪었다. 장군 6명을 차례로 해임한 끝에 1864년 그랜트(U. S. Grant) 장군을 총사령관으로 임명해 남부군 리(R. E. Lee) 장군의 항복을 받아내고 승리했다. 4년간 이어진 남북전쟁은 1865년 4월에 남부의 수도 리치먼드(Richmond)가 함락되자 남부군이 항복함으로써 종결됐다. 링컨 대통령과 그랜트 장군은 패장 남부 사령관 리 장군을 깍듯이 대하고 자존심을 지켜줬다.



    반대 무릅쓰고 그랜트 장군 총사련관으로 발탁한 혜안

    링컨 대통령이 남북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었던 것은 그랜트 장군 발탁, 링컨 대통령과 그랜트 장군 두 사람이 헌신한 결과였다. 남북전쟁 초기에는 전세가 남군이 더 우세했다. 사실 전쟁 초기 링컨은 리 장군에게 북군의 총사령관이 돼달라고 정중히 요청하기도 했으나 거절당했다.

    링컨 대통령은 그랜트 장군의 전략적 능력과 과감한 결단력을 바탕으로 한 지휘와 전투 능력을 높이 평가해 그랜트 장군을 당시 최고의 계급인 중장으로 진급시켜 북군 총사령관으로 임명했다. 링컨은 조직적 사고력의 소유자로 디테일에 강했고, 군사에도 밝아 작전을 직접 지휘하기도 했다. 하지만 링컨은 그랜트 장군을 임명한 후 작전에 일절 간섭하지 않았다. 링컨은 노예해방을 선언해 도덕적 우위를 확보했는데, 이는 남부와 경제적 윈윈 관계에 있었던 최강국 영국이 남부 편에 서지 못하도록 발을 묶는 데 커다란 역할을 했다. 이 무형적 해상봉쇄 조치는 북군의 남북전쟁 승리에 결정적 역할을 했다.

    링컨 대통령이 그랜트 장군을 총사령관으로 임명하려고 하자 주위에서 반대가 심했다. 그는 153cm의 단신이고 볼품도 없고 술주정꾼이고 정실에 약해 아는 사람들만 쓰는 등 문제가 많은 장군이었다. 그랜트 장군은 흠이 많은 인물이었지만, 링컨은 그랜트 장군이 중대한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는 것을 직접 보아왔기에 총사령관으로 임명했다. 링컨은 그랜트 장군의 강점을 높이 평가하고 발탁했다. 링컨은 “그랜트 장군의 위대한 점은 침착하면서도 목표에 집요하게 매달린다는 점이다. 그는 쉽게 흥분하지 않으면서도 불독처럼 용맹스럽고 끈질기다. 그의 이빨에 한번 물리면 누구도 끄집어낼 수가 없다”고 말했다. 링컨 대통령의 인물을 알아보는 혜안이 빛을 크게 발했다.

    링컨 대통령(오른쪽 두 번째)이 게티즈버그 전투에서 승리한 후 참모들과 대화하고 있다. [위키피디아]

    링컨 대통령(오른쪽 두 번째)이 게티즈버그 전투에서 승리한 후 참모들과 대화하고 있다. [위키피디아]

    ‌링컨의 위대함은 남북전쟁에서 승리한 후 단 한 명도 남부의 군인 또는 주민을 전범으로 몰아 투옥하거나 처형하지 않았다는 데 있다. 미국 연방의 보존과 보호가 가장 큰 책무였기에 링컨 대통령은 패배한 남부에 대해 어떠한 질책도 하지 않았다. 남부 각 주가 주민의 10%만 미국 연방에 대해 충성을 서약하면 미국 연방에 복귀하도록 조치했다. 링컨 대통령이 남북의 분단 방지와 미국 연방의 존속을 얼마나 염원했는지를 읽을 수 있는 내용이다.

    링컨 대통령은 남북전쟁에서 북부를 이끌어 승리해 하마터면 분단국가가 될 뻔한 미국을 통합하고 노예제도를 폐지했다. 하지만 대통령 임기 내내 그는 인고의 시간을 보내야만 했다. 대통령 취임 후 3개월 만인 1861년 4월 남북전쟁이 시작돼 끝날 때까지 4년 동안 온갖 내우외환을 겪었다. 남북전쟁을 둘러싼 정치·사회·경제적 갈등 외에도 흙수저 출신이라는 질시와 조롱, 내각 장관들의 불복종, 무능하고 충성심 없는 장군들, 연방의회 의원들의 복잡한 이해관계 등으로 많은 어려움에 시달려야만 했다.

    하지만 그는 꿈을 실현하기 위해서 물러설 줄 알고 기다릴 줄도 아는 현명한 지도자였다. 링컨은 분열 직전의 나라를 미합중국이라는 거대한 국가로 통합시켰다. 특히 1863년 11월 게티즈버그 국립묘지 설립 기념식에서 한 연설은 2분의 짧은 연설이었으나, 미국의 전통인 자유주의 곧 자유·평등·민주주의에 대한 상징이 됐다.

    ‌‌링컨 대통령이 오늘날에도 많은 미국인으로부터 존경받는 것은 극심한 가난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았으며, 굳은 의지로 수많은 실패를 극복해 자신의 꿈을 이루었다는 점 때문이다. 게다가 링컨 대통령의 리더십이 오늘날에도 널리 회자(膾炙)되는 것은, 링컨은 진실하며 도덕성을 갖추었고 정직했으며, 진정성과 탁월한 소통 능력을 갖춰 반대파를 자신의 사람으로 만들 줄 아는 포용력을 지녔으며, 국민에게 노예해방이라는 확실한 비전을 제시하고 투철한 사명감을 지녔기 때문이다.

    링컨은 대통령으로서 자신의 자세와 주장을 대통령으로서 “단순하지만 오직 한 가지 책임”은 미국인들이 만들어온 연방을 “보존하고, 보호하며, 방어하는 것”이라고 밝혔다. 미연방이야말로 “세계에서 유사하거나 더 나은 것”이 없는 미국인들의 자부심이라고 강조하며 그는 노예 문제가 도덕 이전에 미국의 정체성에 관한 문제라고 확신했기에 대통령에 출마했고, 이러한 자신의 자세와 주장을 지키고 관철하기 위해 온갖 어려움을 감내했다.

    링컨 특유의 포용력과 통합의 리더십

    많은 사람은 자신과 생각이 다르거나 비난하는 사람들을 무시하거나 배제하려고 한다. 그런 연유로 지도자들은 가끔 자신의 정적들을 무참하게 제거하기도 한다. 하지만 비범한 지도자들은 그것을 생각의 차이, 다양성으로 받아들이고 조직을 더욱 발전시킬 수 있는 기회로 인식하고 잘 활용한다. 링컨은 인재를 등용하고 정책을 추진하는 데 고정관념, 특정 정파, 충성심 등에 얽매이지 않고, 정책을 성공적으로 수행하는 데 누가 가장 적합한지를 판단 기준으로 삼았다. 링컨은 국정을 운영하는 데 반드시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인재는 출신 배경이나 사회계급, 정당이나 파벌에 관계없이 등용했다.

    링컨은 현대의 지도자들이 본받아야 할 리더십을 모두 갖춘 보기 드문 대통령이었다. 그가 위대한 지도자인 이유는 다섯 가지다. 첫째, 링컨은 대통령이 되기 훨씬 전부터 윤리적이고 정직했다. 링컨은 “정직한 에이브(Honest Abe)”라는 별명이 붙을 만큼 정직했다. 링컨의 정직성은 그를 정치인으로 성공할 수 있게 했고, 지도자로서 인정받게 했다.

    둘째, 링컨의 카리스마는 잘 알려져 있다. 링컨 대통령은 그동안의 이념과 생각을 완전히 바꾸고, 정치적·윤리적 카리스마로 무장한 채 노예해방 선언을 직접 발표했다. 이것은 누구에게 물어서 해답을 구할 문제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링컨은 사람들이 하고 싶어 하지 않는 일이라 하더라도, 반드시 해야 할 일이라면 자신의 카리스마를 발휘해 추진했다.

    셋째, 한 인간으로서, 한 지도자로서 링컨의 위대함은 남북전쟁에서 승리한 후 그가 보여준 자비롭고 지혜로운 행동이다. 그는 관용과 자비가 가장 빠르고 가장 효과적인 치유책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링컨은 책임 있는 리더십을 몸소 실천했다. 링컨이 평생 실천한 언행일치는 바로 책임을 지는 것이었다. 노예해방 선언을 실행하겠다는 책임 의식으로 야당은 물론 여당 의원을 끈질기게 설득해 1865년 1월 수정헌법 13조를 간신히 통과시켜 노예제도를 폐지했다.

    넷째, 링컨 대통령은 소통의 달인이었다. 링컨은 백악관에서 거의 하루 종일 시민들을 만났다. 그리고 시간이 나면 병원에 들렀고, 또 시간이 조금이라도 남으면 워싱턴을 떠나는 군인들을 배웅했다. 미국 대통령 중에 가장 많은 사람을 허물없이 만난 인물이 링컨이었다. 그는 만나는 사람들의 눈높이에 맞춰서 소통하려고 노력했다.

    다섯째, 링컨은 사사로운 이해관계보다는 국정 운영이라는 대의를 위해 특유의 포용력과 통합의 리더십을 보여주었다. 금수저 에드윈 스탠턴(E. M. Stanton)은 공화당 대통령 후보 경선에서 링컨의 경쟁자로 경선 기간 내내 링컨을 공개적으로 비난하고 무시했다. 스탠턴은 링컨이 정규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해 모든 것이 미숙하다고 무시하면서, 만약 링컨이 공화당 후보로 대통령이 된다면 이는 국가적 재난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하지만 링컨은 대통령에 당선되자 스탠턴을 국방장관으로 임명했다. 스탠턴은 링컨이 자신을 국방장관으로 임명하자, 그가 자신을 모욕하기 위해서라고 생각했지만, 나라를 구하겠다는 일념으로 받아들였고 스탠턴은 링컨에게 충성심을 보이며 자신의 능력을 최대한 발휘해 링컨의 강력한 지지자로 남았다. 훗날 스탠턴은 링컨이 피격당해 후송되자 한달음에 달려와 그의 곁을 끝까지 지켰고, 그가 사망하자 “이곳에 가장 위대한 사람이 누워 있습니다. 그는 이제 역사로 남으려 합니다”라고 유명한 말을 남기며 그를 끌어안고 대성통곡했다.

    미국의 5달러 화폐에 들어가 있는 링컨 대통령 초상화. [위키피디아]

    미국의 5달러 화폐에 들어가 있는 링컨 대통령 초상화. [위키피디아]

    링컨 리더십의 세 가지 요체

    링컨 대통령의 두 번째 취임사의 마지막 부분은 인간의 입에서 나온 말 중에서 가장 훌륭하고 아름다운 발언이었다. “누구에게도 원한을 품지 말고, 만인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하느님이 우리에게 보여주신 그 정의로움에 대한 굳은 확신으로, 우리에게 주어진 일을 완수하기 위해 노력합시다. 우리들 사이와 모든 국가 사이에 정의롭고 영구적인 평화를 이루어 소중히 지켜나가기 위해 매진합시다.” 이 연설문은 스프링필드에서 거행된 링컨의 장례식에서 다시 낭독되기도 했다.

    링컨 대통령이 남부 출신의 지독한 인종차별주의자의 총에 맞아 사망할 때의 나이는 56세로 대통령 재선 3개월 만이었다. 세상의 위대한 지도자 가운데 누구를 가장 존경하느냐고 물으면 필자는 망설임 없이 에이브러햄 링컨이라 할 것이다. 두 가지 이유에서다. 하나는 링컨 대통령이 두 나라로 쪼개질 뻔한 미국을 남북전쟁을 치르면서 그대로 미합중국으로 존속시킨 국가적으로 참으로 큰일을 한 것이다. 다른 하나는 매우 열악한 환경에서 12개월의 공교육밖에 못받았는데도 스스로 학습해 금수저 명문대 선배 정치인들을 실력으로 제압하며 남북전쟁을 승리로 이끌고 노예해방을 완성해 내는 그의 개인적 능력과 매력 때문이다.

    링컨의 사적 삶에서 우리 모두가 얻는 교훈은 어릴 적의 가정교육이 중요하다는 것과 학벌이나 대학 교육보다 독서가 중요하다는 것이다. 4년 3개월간 미국 대통령으로서 링컨이 발휘한 리더십의 요체는 ‘국정 운영 성공의 핵심은 소통이다’ ‘신념과 소신으로 국민을 선도(lead)하다’ ‘훌륭한 참모를 찾아 적극 활용하다’ 등 세 가지다. 리더십의 세 가지 요체는 누구나 다 알고 모두가 강조하는 것이지만 링컨의 위대함은 어떤 지도자보다 세 가지 모두를 모범적으로 실천한 데 있다.

    독일 통일을 이룬 철혈(鐵血) 재상 비스마르크(Otto von Bismarck)는 “신(神)이 역사 속을 지나갈 때, 그 옷자락을 놓치지 않고 잡아채는 것이 지도자의 임무다”라고 했다. 달리 표현하면 ‘신’은 아무 때, 누구에게나 옷자락을 허락하지 않는다. 지도자 대다수는 신의 미세한 움직임을 낌새조차 알아채지 못한다. 링컨은 분명히 신의 옷자락을 잡아챈 위대한 지도자였다.

    아일랜드의 극작가, 평론가, 정치운동가 조지 버나드 쇼(G. B. Shaw)는 지도자의 어려움과 자격을 두고 “세상에서 가장 거창하고 어려운 일은 무엇일까? 바로 현대 민주주의 국가를 조직하고 운영하는 일이다. 어떤 일이든 타고난 적성을 지닌 사람들이 해야 잘할 수 있다”라고 말했다.

    세상에서 ‘가장 거창하고 어려운 그 일’을 너도나도 하겠다고 설치는 현실이 오늘의 대한민국이다. 타고난 적성이 없음은 물론 기본적 훈련과 준비도 안 한 사람들이 정치지도자가 되겠단다. 어쩌다 대통령이 되고 아무나 대통령이 되겠다고 설치고 있다. 성인이 돼 서점에 가서 책을 몇 권이나 사서 읽었을까. 가정에서 부모로부터 반듯한 시민교육을 받은 정치 지망생이 과연 있기나 할까. 국가와 국민에게 몸 바쳐 희생하겠다는 결의는 보이지 않고, 대통령병에 눈이 먼 사람들의 도토리 키 재기의 추한 모습만이 난무하고 있다. 쿠오바디스(Quo vadis)! 이 나라가 어디로 가나이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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