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말이 없다고 냉랭한 건 천만 아니다. 아무 말 없어도 정다운 훈김이 전달된다. 은근하고 미쁘고 뿌듯한 침묵이다. 뭐든 말로 분명하고 명확하게 전달하지 않으면 안심이 되지 않고, 성에 차지 않는 우리의 소통방식을 되돌아보게 만드는 침묵이다.
태안 시외버스 정류장 앞엔 ‘햇살 가득한 약국’과 ‘뜰에 봄 약국’이란 이름의 약국 둘이 서로 마주보고 있다. 태안반도 앉은굿의 맥을 잇는, 저토록 말없이 웃기만 하는 장세일 법사가 보여주는 평화와 고요가 그대로 녹아 있는 이름이라 나도 혼자 웃는다.
‘앉은굿’과 ‘선굿’
‘앉은굿’은 말 그대로 앉아 하는 굿이다. 무당이 맡아 하는 ‘선굿’과 대비되는 말이다. 한강을 기준으로 이남은 대개 앉은굿을, 이북은 선굿을 행해왔다는 게 일반적 분류다. 앉은굿은 앉아서 경문이나 불경을 외며 혼자 북과 양판이란 악기를 두드리며 귀신을 쫓는다. 전에는 전국적으로 행해지던 굿이었으나 지금은 충청도를 중심으로 명맥이 유지되고 있으며, 그중에서도 태안·서산·보령·서천 같은 충남 서북부 해안지방에 그 형태가 가장 많이 남아 있다.
앉은굿은 악귀를 몰아내고 수복을 기원하기 위해 낭송하는 설경(說經)과 종이를 접고 오려 여러 신의 그림이나 글씨를 새겨 굿판 주변에 걸어두는 설위(設位)가 함께한다. 그래서 굿이란 이름대신 ‘설위설경’이라 부르며, 굿을 주도하는 이의 칭호도 무당이 아니라 법사라고 한다. ‘송경법사(誦經法師)’를 줄인 말이다. 충청도 사투리로는 ‘정 읽는다’고도 했다.
병원이 멀던 시절, 집에 우환이 생기면 굿보다 한결 점잖은 방법으로 집에 법사를 불러 경을 읽었다. 귀신을 겁주고 얼러 쫓아내는 내용의 경문을 밤새 읽으면 병을 불러온 악귀들이 맥없이 물러난다. 경만 읽는 걸로는 부족하니 사방에 울타리를 둘러치고 귀신을 위협하는 물건을 만들어 걸었다. 종이를 접고 오려 만든 장치들이었다.
나는 장세일 법사가 굿을 할 때 사방에 걸어둔다는, 조선종이를 칼로 오려낸 설위작품들을 찬탄하며 들여다봤다. 1㎜도 안 될 정교한 선을 잇댄 각종 문양들, 이 다양하고 정밀한 문양들은 몇 번의 칼질만으로 한지 위에 주르륵 나타난다. 펼친 모양은 오직 머릿속에 들어 있고 눈에는 보이지 않다가 칼질이 끝난 후 접은 종이를 펼칠 때라야 비로소 드러난다. 이를 종이 ‘까순다’고 하는데 물감으로 그린 회화와도, 덩어리에 형태를 새겨 넣는 조각과도 다르다. 그러나 분명 종이 ‘까수기’는 그 자체로 독립된 장르의 예술이 될 만큼 아름답고 신비하고 독특하다. 게다가 오랫동안 이 땅의 민간에서 행해져온 전승예술이다. 그래서 충청남도는 몇 해 전 설위설경을 충청남도의 무형문화재 24호로 지정했다.
서해와 연한 태안반도는 산이 낮은 구릉지이지만 숲이 울창하고 경치가 아름다워 예로부터 ‘검은산 안’이라 불렸다. 바다를 삶의 터전으로 삼는 어촌이 많으니 무속신앙이 성행했고, 아직도 태안을 중심으로 80여 명의 무속인이 활동하는데 종이 ‘까수는’ 솜씨로도, 경 읽는 솜씨로도, 몸에 밴 역사로도 으뜸가는 이가 바로 장세일 법사였다.
그는 이 일을 스물셋에 배우기 시작했는데, 지금껏 50년 동안 오려낸 종이만도 트럭으로 열 트럭 분량은 될 거라 하니 솜씨도 솜씨지만 앉은굿이 태안에서 얼마나 자주 행해졌는지 짐작할 만하다. 종이 오려 설치하는 설위는 경을 읽는 설경이 끝나면 대개 불살라 없애버린다. 아무리 정교하고 아름다워도 살아남지 못하는 운명이다.
설위가 그 자체로 훌륭한 그림이라는 걸 사람들이 깨달은 뒤부터 장 법사는 굿을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미를 음미하고 후세에 남기기 위해 종이를 접고 오린다. 그걸 배우는 전수생들을 위해 그가 오려내는 그림의 종류는 기본형이 서른 가지쯤 된다. 그렇지만 온갖 변형이 가능하니 거의 숫자를 셀 수 없는 만큼 다양하다. 창을 든 사람도 사천왕상도, 鬼 壽 福 皇帝 같은 각종 한자도, 나비와 꽃과 새들도 그는 칼질 서너 번에 자유자재로 오려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