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라면 CF로 스타덤에 오른 황보라. 올해 부산국제영화제 영화평론가상 신인여우상을 타내며 연기력을 인정받은 그는 지금까지 보여주던 엉뚱한 이미지와는 달리, 여리지만 속이 꽉 찬 배우였다. 하지만 카메라 앞에서는 한없이 자유로웠다.
툭 튀어나온 커다란 눈, 크고 두툼한 입술이 묘한 매력을 내뿜는 황보라(24)는 그 후 각종 CF와 청춘 시트콤, 드라마에서 엉뚱하고 톡톡 튀는 이미지를 발산하며 신세대 스타로 자리 잡았다. 그가 영화 ‘좋지 아니한가(家)’로 10월5일 부산영화제 기간에 열린 부산영평상 시상식에서 신인여우상을 수상했다.
“어, 무슨 이야길 하고 있었지?”
동아일보 스튜디오로 들어오는 그의 발걸음이 경쾌하다. 리듬에 맞춰 몸을 살랑거리는가 하면 노래를 흥얼거리기도 했다. 귀에 이어폰이 끼워져 있었다. 기자를 보곤 고개를 끄덕이며 인사를 하더니 이내 다시 음악에 빠져들었다. 일렉트로 라운지 음악인 듯했다. 매니저는 “늘 저렇게 혼자 잘 논다”고 했다. 사진 촬영이 시작되자 그는 언제 음악에 빠져 있었느냐는 듯 이번엔 촬영에 푹 빠져들었다. 번쩍번쩍 터지는 플래시와 카메라 셔터소리에 오르가슴을 느끼는 것 같았다면 지나친 표현일까. 포즈를 취하는 그의 얼굴에선 한순간도 열정이 식지 않았다.
광화문 이마(imA)미술관 로비엔 샌드백과 글러브가 설치미술작품으로 전시되어 있다. 사진기자는 글러브를 끼고 장난스럽게 샌드백을 치라고 주문했지만 “열심히 치면 안 돼요? 저 정말 권투선수처럼 할 수 있어요”라며 샌드백을 세차게 두들겼다. 아주 재미있다는 듯 깔깔거리는 웃음소리가 미술관 가득 울려 퍼졌다.
그의 휴대전화가 눈에 들어왔다. 출시된 지 2년도 넘은 제품이었다. 그가 “너무 오래돼서 딱꿍도 없어졌어요” 하며 휴대전화를 들어 보인다. 배터리를 감싸는 뚜껑이 없다. ‘딱꿍’은 뚜껑, 마개를 뜻하는 경상도 사투리. 고향이 부산이란다.
저렇게 자기 세계에 빠져 있어서야 어디 인터뷰가 제대로 되겠나 싶었는데, 그는 자신의 생각을 조리 있게 들려주었다. 속이 꽉 찬 배우란 생각이 들었다. 가끔 얘기를 하다 말고 “어? 내가 무슨 이야기하고 있었지? 까먹었어요. 뭘 물어보셨죠?” 할 때만 빼고는.
▼ 신인상 수상 축하부터 해야겠네요.
“솔직히 흥행이 안 되었기 때문에 상을 받을 거란 기대는 전혀 하지 않았어요. 신인상이란 게 있는지도 몰랐고요.”
그에게 신인상을 안겨준 영화 ‘좋지 아니한가’는 평범한 것 같지만 결코 평범하다고 할 수 없는 한 가족의 일상을 통해 가족애의 진정한 의미를 되짚어보게 하는 휴먼드라마다. 깊이 있는 주제를 코믹하게 다뤄 개봉 당시 평론가들로부터 호평을 받았다. 황보라는 ‘뵈요’가 맞는지 ‘봬요’가 맞는지, 사람이 쪽팔리면 죽을 수도 있는지, 왜 사람들은 자기 집으로만 가야 하는지, 옆집으로 들어가면 안 되는지 같은 것을 궁금해 하는 엉뚱한 여고생 용선 역을 천연덕스럽게 연기했다.
“제가 너무너무 좋아하는 스타일의 영화였어요. 보고 또 봐도 후회되는 장면이 한 군데도 없을 만큼, 너무 일찍 만난 게 아쉬울 정도로 제 인생 최고의 작품이 될 것 같아요. 무엇보다 이 작품은 제게 가슴으로 연기한다는 게 뭔지를 일깨워줬어요. 연기는 테크닉으로 하는 게 아니라 진정성을 가지고 가슴으로 해야 한다는 걸 말이죠.”
속상했던 부산영화제
▼ 그런데 흥행엔 실패했죠.
“1주일 만에 극장에서 간판이 내려졌어요. 울기도 많이 울었죠. 이렇게 좋은 작품을 어떻게 외면할 수 있을까, 우리 관객 수준이 이 정도밖에 안 되나, 원망도 많이 했어요. 그때 감독님이 ‘우린 10년, 20년이 지나도 질리지 않을 따뜻한 영화를 만들었다. 거기에 자부심을 갖자’고 위로해주셨는데, 그 말이 조금은 위안이 됐어요.”
▼ 스크린쿼터제가 축소되면서 조기 종영되는 우리 영화가 많아졌다고 하더군요.
“그걸 알고 더 화가 났어요. 스크린쿼터제 축소 이후 조기 종영뿐 아니라 촬영에 들어가지도 못하는 좋은 영화가 늘었다는 이야기도 들었어요. 영화제에 참가한 건 이번이 처음이었어요. 그래서 큰 기대를 걸었어요. 제가 존경하는 영화계 선배들은 어떤 연기관을 갖고 있는지, 지금 한국 영화의 위기에 대해 어떤 생각을 하는지, 그런 이야기를 많이 들을 수 있을 거라고 기대했는데 막상 가보니 마냥 즐거운 파티 분위기더라고요. 한국 영화 현실은 답답하기만 한데 말이죠. 그래서 속이 많이 상했어요.”
그는 스크린쿼터뿐 아니라 일본의 조선인학교 탄압이나 역사왜곡에도 관심이 많다. 원래 시사에 관심이 많으냐고 물었더니 그렇지 않다고 한다. 그가 관심을 갖는 주제들은 모두 영화를 보면서 느낀 것이라는 데, 영화라는 창을 통해 세상을 보는 셈이다.
▼ ‘좋지 아니한가’ 찍으면서 살을 많이 찌웠다던데요.
“5kg 정도 쪘는데, 일부러 찌운 건 아니고 저절로 쪘어요. 이상하게 막 입맛이 돌더라고요. 술을 안 마셔서 그런가?(웃음) 그 영화 찍을 때 마음만 고등학생으로 돌아간 게 아니라 실제로 고등학교에서 하루 종일 수업을 듣는 등 철저하게 고등학생으로 생활했어요. 원래 그 나이 때엔 먹는 게 당기나 봐요. 많이 먹다 보니까 자연스럽게 살이 쪘어요. 지금은 도로 다 빠졌고요.”
“목에서 피가 안 나와요”
그는 지금 영화 ‘라듸오 데이즈’를 촬영 중이다. 지난 7월부터 시작해 현재 90% 정도 촬영이 끝났다며 내년 설날 즈음에 관객과 만나게 될 것 같다고 했다. ‘라듸오 데이즈’는 1930년대 우리나라 최초의 라디오 방송국인 경성방송국을 배경으로 벌어지는 해프닝을 그린 코믹영화다. 라디오에 나와 창(唱)을 하는 권번 기생 출신 ‘명월’역을 맡았는데, 지금까지 보여준 엉뚱한 이미지와 달리 요염한 매력을 선보일 예정이다.
“시나리오가 재미있었어요. 우디 앨런의 영화 스타일을 좋아하는데 딱 그런 느낌이었어요. 영화가 방송국 스튜디오라는 한 공간에서 진행되기에 연극적인 요소도 강하고요. 이런 영화는 배경이 약하기 때문에 그만큼 배우가 끌고 가는 힘이 중요해요. 도전하고 싶은 욕심이 생기더라고요.”
▼ 영화를 위해 창도 배웠다던데요.
“목에서 피를 토한 후에야 창을 제대로 할 수 있다고 하잖아요. 그래서 감독님께 시켜만 주신다면 피를 토할 때까지 연습하겠다고 했어요. 석 달 동안 죽어라 연습했는데, 그걸로는 턱도 없는 모양이에요. 목에서 피 한 방울 안 나왔어요(웃음).”
▼ 다른 작품을 할 때도 그렇게 사전 준비를 철저하게 하나요.
“‘좋지 아니한가’를 처음 찍을 때는 캐릭터가 안 잡혀 고생했어요. 제가 예쁘게만 보이고 싶었던 모양이에요. 고민 끝에 촬영을 중단하고 고등학생 느낌을 익히러 1주일 동안 진짜로 고등학교에 다녔어요. 열일곱 살 아이들이랑 똑같이 생활하는 게 얼마나 힘든지 아세요? 아침 8시까지 학교 가는 게 제일 힘들었어요. 처음엔 저를 쳐다보는 학생들 시선을 무시할 수 없어 자세도 바로하고 그랬는데, 3일째 되니까 애들이랑 똑같아지더라고요. 수업시간에 졸고, 애들이랑 쪽지도 주고받고…. 감독님이 왜 학교에 가라고 했는지 알겠더라고요. 그 덕에 용선이의 풋풋한 모습을 살릴 수 있었던 것 같아요.”
▼ 영화를 끝내고 쉴 때는 뭘 하나요.
“보통은 혼자 여행을 해요. 카메라 하나, 메모지 한 권 들고요. 이번엔 중국 창춘(長春)엘 갔는데, 전에 한 번 갔던 곳이라 별로 무섭지는 않았어요. 그냥 돌아다녔어요. 걸으면서 냄새도 느껴보고, 저녁엔 혼자 술 마시고, 자고…. 우리나라 1950~60년대 느낌이 나는 곳인데, 그런 느낌, 그 냄새가 좋아요. 중국의 재래시장을 구경 다니는 것도 좋고요.”
“저도 제가 미스터리예요”
황보라는 영화 ‘좋지 아니한가’에서 엉뚱한 여고생 용선 역을 리얼하게 연기해 부산영평상 신인상을 수상했다.
“고등학교 때 영화배우 차태현 팬사인회에 갔다가 연예계 관계자의 눈에 띄었어요. 그분 제안으로 고2 때 서울로 전학을 와 동국대 영연과에 진학했죠. 정식으로 연기자가 된 건 2003년 SBS 공채 탤런트가 되면서였고요.”
▼ CF로 얼굴을 알린 게 2005년이니까 2년 정도 무명 시절이 있었는데, 포기하고 싶은 생각은 안 들던가요.
“행인1, 행인2 등 단역으로 출연했을 뿐 이름 석 자를 알릴 기회를 얻기가 쉽지 않더라고요. 그땐 매니저도 코디도 없이 촬영 스태프 차 얻어 타고 촬영장으로 가곤 했어요. 그래도 저에 대한 확신이 있어서 힘들지는 않았어요. 언제 어떤 캐스팅 제의가 들어올지 모르니까 항상 ‘준비된 연기자’여야 한다는 생각에 끊임없이 연극, 영화를 보며 캐릭터 연구를 했어요. 힙합, 재즈댄스, 탭댄스 등 안 배운 춤이 없어요.”
그의 매력은 큰 눈과 두툼한 입술이다. 어머니를 닮았다고 한다.
“외모 때문에 그동안 코믹하고 엉뚱한 이미지의 연기를 많이 했는데, ‘황보라는 원래 성격이 그렇다’ ‘엽기적이다’라는 기사를 보면 마음이 아파요. 작품에 임할 때마다 정말 고민하고 또 고민해 그 배역에 맞는 캐릭터를 만들어내요. 지금까지는 제게 주어진 배역이 그랬던 거지, 그 배역 자체가 황보라는 아니거든요. 그런데 사람들은 여전히 용선이=황보라=왕뚜껑으로 생각해요. 기존의 이미지가 제 내면의 모습은 아니라고 말하고 싶어요.”
▼ 그럼 스스로 생각하는 황보라는 어떤 사람인가요.
“정말 모르겠어요. 저도 제 자신을…. 그냥 ‘미스터리’라고 할까요(웃음).”
▼ 나이에 비해 동안(童顔)인 게 연기하는 데는 장애로 느껴집니까.
“요즘 그걸 많이 느껴요. 나이가 있으니까 이것도 해보고 싶고 저것도 해보고 싶은데 늘 어린아이 역할만 들어오니까요. 그런 고정관념을 깨려고 해요. 지금 찍고 있는 영화 ‘라듸오 데이즈’도 처음에 제안받은 역할은 어린애였어요. 그래서 감독님께 ‘작품이 좋아서 꼭 하고는 싶은데, 이번엔 무조건 어른 역을 맡고 싶다. 내 나이가 20대 중반인데 언제까지나 17세로 살 수는 없지 않으냐’고 했어요. 그러니까 ‘그럼 명월이는 어떠냐?’ 하시더군요.”
외로움이 주는 즐거움
▼ 성인 연기를 하려면 노출연기도 마다하지 않아야 할 텐데 자신 있어요?
“뭐든 다 해보고 싶어요. 팜 파탈 같은 역할도 하고, 액션도 하고, 미혼모에 지지리도 궁상인 한 많은 여인네도 하고…. ‘말아톤’이나 ‘아이엠샘’ 같은 진한 휴먼 드라마도 해보고 싶어요. 개인적으로는 몽환적인 느낌의 연기를 무척 좋아해요. 하지만 어떤 역할을 하느냐보다 어떤 연기를 하느냐가 더 중요하겠죠. 배우들 중엔 단선적인 연기자가 있는가 하면 왠지 이면에 뭔가 더 있을 것 같은 여운이 느껴지는 연기자가 있잖아요. 전도연 선배처럼 여운이 느껴지는 연기를 하고 싶어요.”
뭐든 다 해보고 싶다는 그에게 “가장 안 어울리는 역은 뭐일 것 같냐”고 묻자 “사람들이 그래요. 넌 한스러운 여인이나 보호본능 자극하는 연약한 여인은 안 어울린다고. 난 그런 것도 하고 싶은데…” 하며 투덜거린다. “그런 것도 잘할 수 있을 것 같냐”고 물었더니 “진정성 있는 연기를 하느냐는 측면에서 보면 못할 것 같기는 해요” 하며 흐흐 웃는다.
▼ ‘나는 천생 배우다’라는 확신이 드나요.
“신은 제게 아름다운 외모를 주시진 않았지만, 대신 특별한 오감을 주신 것 같아요. 오감으로 느끼며 연기할 때 느껴지는 쾌감이 있어요. 저는 희망이란 모든 고통을 연장시키는 최악의 악마라고 생각해요. 미래는 최악의 고통일 뿐이죠. 그런데 그 고통을 즐기고 싶어요. 그래서 제가 변태가 아닌가 싶기도 해요(웃음).”
▼ 만약 연기자가 안 됐다면 뭘 하고 싶어요?
“국문과에 들어가 공부하고 싶어요. 제 감정 하나 하나를 글로 표현한다는 게 너무 좋아요. 남은 쉽게 스쳐가는 하루고 공기고 장소지만 그걸 아름답게든 슬프게든 잔인하게든 제 식대로 표현하고 싶어요.”
그의 싸이 미니홈피를 둘러보았다. 미니홈피 다이어리엔 그가 직접 쓴 글이 몇 편 올라 있었다. 그런데 ‘명랑’ ‘엉뚱’ 이미지와는 달리 그의 글들은 ‘우울 모드’에 가깝다.
“외로워서 그런 거겠죠. 부모님이랑 떨어져 사는데다 친구도 별로 없으니까요. 가을을 타나 봐요. 그런데 늘 외롭다고 툴툴대면서도 제게 손을 내밀며 다가오는 사람을 밀어내요. 외로운 게 아주 싫은데, 그 외로움을 은근히 즐기는 것 같기도 해요.”
▼ 혼자 있을 땐 뭘 하나요.
“책을 읽거나 글을 쓰거나 상상을 하거나…. 저는 적막한 게 좋아요. 그래서 제일 좋아하는 시간이 오후 5시에서 6시, 딱 노을이 지기 시작하는 무렵이에요. 사위가 약간 어둑해지면서 조용해지고, 뭐랄까, 마음이 차분해지면서 설레는 느낌…, 그 시간은 영원히 기억하고 싶을 만큼 아름다워요.”
자발적 왕따
▼ 학창 시절엔 어땠나요.
“요즘 아이들이 슈퍼주니어에 빠지는 것처럼 그 세대마다 공통적으로 좋아하는 게 있잖아요. 그런데 저는 또래들과 관심사가 달랐어요. ‘인간극장’ ‘병원24시’ 그런 리얼다큐가 좋았어요. 그리고 사랑을 해보진 않았지만 아픈 사랑이야기를 좋아했어요. 만날 그런 걸 읽었죠. 에쿠니 가오리의 ‘낙하하는 저녁’ 같은 소설요. 그렇다고 공상 속에 살지는 않았어요. 가장 현실적이면서도 현실과 타협하지 않는 스타일이랄까.”
“그러다 친구들에게 왕따당하지 않았냐”고 묻자 부산에선 아니었는데, 서울로 전학 와선 학교에 적응하기가 힘들었다고 고백한다.
“서울아이들은 공부에만 신경 쓰는, 정서가 메마른 애들 같았어요. 그래서 늘 저 혼자였어요. 지금도 마음을 열 친구가 부산 친구들밖에 없어요.”
그는 사랑이 그립다고 했다. 나중에 꼭 결혼을 하고 싶은 이유도 사랑이 그립기 때문이란다. 그 해소되지 않는 그리움의 목마름이 그가 연기를 갈망하는 이유가 아닐까.
그의 미니홈피에 이런 글귀가 있다. ‘세상에는 두 종류의 여자가 있다. 다이아몬드처럼 빛을 밖으로 내뿜는 여자와 진주처럼 빛을 안으로 품는 여자다.’ 그도 진주처럼 은은한 아름다움을 지닌 배우로 성장하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