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9월호

전설의 여기자 오리아나 팔라치

그녀가 촛불시위 봤다면 뭐라고 했을까?

  • 허문명 동아일보 논설위원 angelhuh@donga.com

    입력2008-09-02 17:1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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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지난 두 달 동안 글을 쓴다는 게 무력한 일임을 느꼈다. 왜곡과 오역으로 나라를 뒤흔드는 영상매체의 힘 앞에서 인쇄매체 종사자로서 느낀 좌절감도 컸다. 과연 ‘글’은 이 혼돈의 세상에서 얼마나 힘을 가질 수 있는가. “‘문자로 남겨진 글’은 폭탄 이상으로 사람의 정신과 행동에 영향을 줄 수 있다고 믿는다.” 의기소침해 있던 기자에게 2년 전 작고한 이탈리아의 전설적 여기자 오리아나 팔라치(Oriana Fallaci·1929. 6. 29 ~ 2006. 9. 14)의 말은 가뭄의 단비와도 같은 힘을 주었다.
    전설의 여기자 오리아나 팔라치
    성난 시위대가 언론사를 공격하고 기자를 폭행하는 사태가 벌어져도 시민들은 분노하지 않았다. 이제는 군부독재가 아니라 ‘군중 독재’와 싸워야 한다는 것을 깨닫는 일은 처참했다. 자유민주주의 사회에서 자신과 생각이 다르다는 이유로 상대를 폭력으로 제압하려 드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언론 자유는 단지 기자나 신문사의 자유가 아니라 민주사회 시민이 누리는 기본권이다.

    포탄이 날아드는 전장(戰場)은 물론 ‘이념 싸움의 전장’에서 우파 여전사로 살아온 오리아나 팔라치. 그는 싸움에 지치고 지쳐, 70대에 암 투병으로 망가진 노구를 이끌고 뉴욕으로 망명해 여생을 살면서도 ‘지금, 말해야 한다’고 생각할 때 분연히 펜을 들었다.

    팔라치는 이슬람에 대한 독설 어린 비판을 한 탓에 생명조차 안전하게 보장받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런데도 9·11테러를 일으킨 오사마 빈 라덴을 향해 독설을 퍼부었다. 문자 그대로 ‘세기의 철녀(鐵女)’다. 그는 “인생에서 의견을 밝히는 일이 의무가 되는 경우도 있다. 그것은 우리가 피해갈 수 없는 공민(公民)으로서의 의무이자 도덕적으로 당연히 요구되는 지상명령”이라고 선언했다.

    싸움의 내용은 다를지라도 늘 전장에 서 있다는 느낌이 드는 요즘이다. 이 대단한 여전사(女戰士)의 삶을 소개해야겠다는 생각이 든 것은 그 때문이다.

    나의 분노, 나의 자긍심



    오리아나 팔라치는 1929년 이탈리아 피렌체에서 태어났다. 르네상스 시대의 중심도시에서 태어난 덕분에 레오나르도 다빈치, 미켈란젤로 같은 거장의 걸작을 매일 접하며 살았다. 무엇보다 그녀는 부모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그들은 대학에 다닌 적이 없었지만 빠듯한 살림에도 탐욕스러울 정도로 책을 사들여 읽었다. 어린 딸 오리아나에게도 독서를 권했다. ‘글’로 먹고살아갈 그의 평생 자산이 이때 쌓였다.

    그가 담대한 내면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은 파시즘 반대 운동에 적극 참여한 아버지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의 아버지는 운동의 단순 가담자가 아니라 체포당한 후 심한 고문을 당하고 사형을 선고받을 정도로 극렬한 레지스탕스 지도자였다. 아버지는 어린 오리아나에게 레지스탕스 교육을 시켰고 총 쏘는 법, 사냥하는 법을 가르치면서 독립심을 키워주었다.

    이런 일도 있었다. 1949년 9월25일 토요일. 연합군이 피렌체에 처음으로 폭격을 가해 숱한 오폭의 기록을 남긴 날이다. 연합군은 무기와 병력을 수송하는 독일군 선로(線路)를 파괴한다는 명목으로 마을과 광장 유적을 마구 폭격했다. 오리아나는 아버지와 함께 광장에서 300m 떨어진 교회에 있었다. 폭탄이 소나기처럼 퍼부었고 부녀(父女)는 지진이라도 난 듯 흔들리는 건물 안에서 손을 꼭 잡고 “주여 살려주소서”라는 간절한 기도를 올렸다. 갑자기 오리아나가 울음을 터뜨렸다. 펑펑 운 것도 아니었다. 소녀답지 않게 딸꾹질 같은 소리도 내지 않고 감정을 억제하는 그런 흐느낌이었다. 놀라운 것은 이런 딸의 모습을 본 아버지의 냉정한 반응이었다. 아버지는 어린 그녀를 껴안고 다독이거나 위로의 말을 건네는 대신 따귀를 세차게 후려쳤다. 그러면서 이렇게 혼냈다.

    “여자애는 울 수도 없고 울지도 말아야 해.”

    보통 딸 같으면 이런 아버지를 원망할 만도 하건만, 오리아나가 훗날 “나를 엄하게 키운 아버지에게 감사한다”고 말한 걸 보면 역시 그 아버지에 그 딸이다.

    ‘인생은 어차피 힘겨운 모험이다. 그 사실을 빨리 알아차릴수록 좋다. 나는 약한 사람들에게 관대하지 않다. 내 본성과도, 내 성격과도 맞지 않는다. 우리 부모님도 약한 사람들에게 관대하지 않으셨다. 난 그때 아버지가 내 뺨을 때린 것을 결코 잊지 않았다. 그것은 마치 키스 같았다.’

    그렇지만 그날의 경험은 어린 그에게 큰 정신적 충격으로 남았다. 그날 이후 눈물을 흘리지 못하는 ‘감정적 불구자’가 된 것이다. 오리아나는 책 ‘나의 분노 나의 자긍심’에서 “어른이 되어 큰 슬픔을 당해도, 또 베트남전쟁 취재 때 폭탄으로 목숨을 잃을 뻔했던 때나 멕시코혁명 취재 때 총격을 당해 마치 칼날이 몸 안을 휘젓는 듯한 육체적 고통을 느낄 때도 펑펑 울고 싶었지만 눈에 눈물이 고이지 않았다”고 고백한다.

    ‘양심에 따라 살겠다’

    ‘물론 살면서 (어쩌다) 신의 은총(?)으로 두 눈이 촉촉해지고 약간 목이 메는 경우가 없지는 않았다. 그래도 눈물은 흐르지 않았다. 일종의 신경증적 기능장애이거나 생리적 불구라고도 할 만한 증상이었다. 그렇다고 내가 냉혈한이라고 생각하지는 말아달라. 슬플 때 마음껏 우는 그 어떤 사람보다도 나에겐 더 고통스러운 내면의 울음이 있었다. 내 글이 곧 내 눈물인 경우도 있었다.’

    그는 자신의 기사와 글을 ‘목 놓아 우는 통곡’이라고 말하곤 했다. 이런 말을 들으니 같은 일을 하는 사람으로서 모골이 송연해질 정도로 정신이 번쩍 난다. 하기야 그녀는 총탄이 날아드는 전쟁과 혁명 현장이 주 취재영역이었고, 일반 사람에게는 존경과 두려움의 대상인 유명인사들을 인터뷰할 때도 그들의 권위에 대한 냉소를 무기 삼아 뜨거운 불덩이들을 쏟아내듯 펜으로 옮겨 적었으니 이런 말을 할 자격이 있고도 남는다.

    “(내 글은) 살아남은 자들과 죽은 자들, 살아 있는 듯 보이지만 이미 죽은 것이나 다름없는 자들에 대한 통곡이나 마찬가지다. ‘살아 있지만 죽은 자들’이란 대통령, 황제 같은 존경받을 만한 자리에 있으면서도 자신은 물론 타인을 변화시킬 용기를 갖지 못한 자들을 일컫는다.”

    오리아나는 열다섯 어린 나이 때 직접 레지스탕스 활동을 하기도 했다. 레지스탕스들의 명단을 갖고 있다가 발각될까 두려워 씹어 삼키려고 한 적도 있다.

    이런 청소년기의 경험들이 오리아나로 하여금 평생 지켜야 할 가치가 무엇인지에 대해 확고한 신념을 갖게 했다고 볼 수 있다. 그녀는 평생 ‘글’을 무기 삼아 독재와 모든 형태의 전체주의에 대해 확고한 반대 입장을 지켰다. 책과 기사를 통해 전쟁 때 겪었던 많은 일을 기억하면서 전쟁반대론을 펼쳤다.

    그는 어린 나이에 전체주의적인 정권과 점령군에 맞선 용감한 사람들과 작가 미술가 역사가 교수들을 만나면서 자신도 어른이 되면 ‘양심에 따라 살겠다’고 결심한다. 한편으로는 저항운동을 억압하는 자들이 사리사욕을 위해 지위를 이용하는 권력자들이라는 사실을 일찍이 깨달으면서 사람을 겉으로 드러난 지위나 직업으로만 볼 일이 아니라는 것도 자각한다. 기자가 된 후 자유롭고 민주적인 사회의 개인주의에 대한 애정을 단 한 번도 저버리지 않으면서, 부패에 무릎 꿇은 권력자들을 고집스럽게 혐오한 것은 이 때문이었다.

    드디어 기자가 되다

    그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작가가 되고 싶었으나 ‘생계가 안 된다’는 부모의 만류로 피렌체 의대에 진학한다. 그러나 기계적인 암기 위주인 의학공부는 그에게 맞지 않았다. 그는 추론과 비판적인 생각을 할 수 있는 공부를 하고 싶었다.

    고민이 깊어갈 무렵, 갑자기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돈을 벌어야 하는 상황에 몰리게 된다. 아버지가 교통사고로 두개골이 골절되는 중상을 입은 것이다. 그녀는 1학년도 채 마치지 못하고 자퇴하고 만다. 그리고 과감하게 신문사 문을 두드린다.

    열여섯 어린 나이였다. 당시 피렌체의 유력지 ‘나지오네 디 피렌체’를 찾아간다는 게 그만 이름도 없는 ‘일 마티노 델리탈리아 센트랄레’라는 신문사를 찾아갈 정도로 세상물정에 어두웠던 시기였다.

    그는 ‘열일곱’이라고 나이를 속인 뒤 무작정 편집장을 찾아가 “리포터가 되고 싶다”고 말했다. 시작부터 남달랐다.

    전설의 여기자 오리아나 팔라치

    문학적 저널리즘의 지평을 연 오리아나 팔라치.

    편집장은 어린 그를 미심쩍어 하면서도 그 당돌함을 높이 사 기회를 주기로 한다. 새로 문을 연 나이트클럽 취재를 맡기며 12시간 안에 기사를 써내라고 한 것. 처음 들어가본 나이트클럽에서 작성한 기사였건만 그는 천재 저널리스트로서의 싹을 보였다. 간단한 스케치 기사에 전쟁 후 여름을 맞은 이탈리아 사회의 단면을 끼워 넣은 것이다. 결국 그는 경찰과 병원담당(지금말로 하면 사회부 사건팀) 기자로 채용된다.

    오리아나는 초창기 남이 무심히 지나치는 사람, 풍경을 그 특유의 시선으로 글에 담아 호평을 받았다. 낡은 수녀원 건물에 대한 기사를 쓸 때는 뜰의 벚나무를 주인공으로 내세워 수녀원의 과거와 현재를 조명했고, 피렌체의 비둘기 기사에서는 한때 번영을 누리다가 몰락한 피렌체의 역사에 비둘기의 운명을 빗댔다. 오리아나 특유의 문학적 저널리즘이 시작되는 순간이다.

    그의 기사는 단순한 정보전달이 아니었다. 생생한 아이디어, 문화적인 사안에 대한 지적인 논의, 예술성이 살아 숨쉬었다. 그는 한마디로 기사를 소설의 반열로 올린 문학적인 저널리스트였다고 할 수 있다. 사건을 보고 쓰는 단순한 형태에 그친 게 아니라 운치와 인간미를 더해 문학의 영역으로 끌어올렸다.

    그의 글쓰기는 객관적 사실의 요약이 아니라 철저히 주관적 관찰에 의한 글쓰기였다. 기자 초년병 시절, 감옥에 갇힌 죄수의 모습을 묘사한 다음 글에서 잘 묻어난다.

    ‘세르지오 반지니는 법정 바로 옆 감방에 있었다. 그는 격자무늬 상의와 회색바지를 입고 있었는데 옷차림에 전혀 신경을 쓰지 않은 것 같으면서도 우아한 모습이었다. 그는 신문을 읽고 담배를 피웠다. 그리 멀지 않은 곳에 놓인 긴 의자에는 차(茶)가 가득 담긴 보온병이 있었다. 내가 작은 창가에서 ‘안녕하세요’라고 인사를 하자 그는 군인처럼 기다란 몸을 벌떡 일으키면서 신문과 담배를 던져버리고 창살에 얼굴을 갖다댔다. 묘하게 금욕적(禁慾的)으로 보이는 얼굴이었다. 그의 뺨은 홀쭉했고 눈은 매우 검었으며 메피스토펠레스를 연상시키는 짧은 검은색 턱수염이 귓불이 있는 곳까지 이어져 있었다. 그것은 그냥 얼굴이 아니라 아주 긴 쉼표 같았다. 그리고 그 중간부분에 표정이 있었다.’

    단순한 묘사를 하더라도 그녀가 말이나 사물에 얼마나 집중하는지를 단적으로 드러내주는 기사다.

    ‘마릴린 먼로’ 찾기

    그는 기자 일에 자신감이 붙자 당시 이탈리아에서 명성이 가장 높던 시사잡지 ‘에우로페오’에 투고하기도 했고, 1면에 기사가 실리는 행운을 누리기도 했다. 그리고 유명인사들을 인터뷰하면서 차츰 ‘인터뷰 전문기자’로서 경력도 쌓아나갔다.

    승승장구하던 오리아나는 입사 6년 만이던 1952년 갑작스레 해고를 당한다. 편집장이 어느 날 공산당 지도자가 주최한 정치집회 기사를 쓰라고 지시한 것이다. 편집장은 있지도 않은 내용으로 작성하도록 종용했고, 그는 “거짓 기사를 쓸 수는 없다”고 버텼다.

    편집장은 “기자란 급료 값을 해야 하는 글쟁이로서의 의무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거짓 기사를 쓰는 것도 해내야 한다” “자기 밥그릇에 침 뱉는 일은 하지 말아야 하는 것 아니냐”라고 악을 써댔다. 그러나 오리아나는 호락호락 넘어가지 않았다. “그런 밥그릇은 당신이나 실컷 챙기라” “엉터리 기사를 쓰느니 차라리 굶어 죽겠노라”고 당돌하게 맞대응을 했다. 물론 즉석에서 해고당했다.

    그러나 이탈리아의 언론계 사람들은 이미 그의 흥미로운 문체에 주목하고 있었다. 그는 당대 영향력 있는 언론인이던 삼촌이 경영하는 잡지 ‘에포카’에서 1년 반가량 일한 뒤 마침내 이탈리아 대표 잡지 ‘에우로페오’로 스카웃된다. 첫 작품으로 당시 많은 이탈리아인이 20세기의 엘도라도라고 생각한 할리우드 스타들을 집중 인터뷰하는 기사를 연재하면서 바야흐로 인터뷰 전문기자로서 명성을 얻게 된다.

    배우들을 만나며 동류의식을 갖게 된 것이 큰 동인(動因)이기도 했다. 할리우드 배우들은 겉의 화려함으로 주목받는 게 아니라 내면의 투철한 프로의식으로 똘똘 뭉친 사람들이었다.

    “그 사람들은 내가 자기들의 일을 존경한다는 걸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 일에 얼마나 많은 헌신이 필요한지, 나는 안다. 그 일에는 작가들과 비슷한 감수성이 필요하다.”

    버트 랭커스터를 만나고 쓴 기사에서는 브루클린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그가 국제적인 명성을 얻게 된 과정이, 킴 노박과의 인터뷰에서는 진지한 성공담이 인기를 끌었다.

    마릴린 먼로 기사에서는 ‘실패한 인터뷰’를 기사화해 유명해지기도 했다. 오리아나는 마릴린이 드나드는 식당 12곳, 나이트클럽 18곳, 영화관 8곳, 극장 14곳을 돌아다녔다며 마침내 주소를 알아내 갖은 고생을 해 찾아갔건만 그녀가 이미 다른 곳으로 이사가버려 결국 만나지 못한 전 과정을 소상히 소개했다.

    그녀는 ‘마릴린 인터뷰 기사’가 아닌 ‘마릴린 찾기 기사’를 통해 자신의 피눈물 나는 노력에 독자의 시선을 집중시켜 기사의 주인공을 인터뷰이가 아닌 기자 자신으로 만들어버렸다. “마릴린씨, 언제든 시간이 나면 밀라노로 저를 만나러 와달라”고 말미를 장식한 그의 빈정거림조차 기사에 활기를 불어넣었다.

    기사는 객관적으로 쓸 수 없다

    우리에게 ‘길’이라는 흑백영화로 잘 알려진 이탈리아 거장 영화감독 페데리코 펠리니에 대한 혹평기사가 너무 당돌해 화제가 되기도 했다. 예술가적 투철함이 부족하다는 주관적인(?) 견해를 서슴없이 기사에 썼기 때문이다.

    ‘나는 옛날에 그를 진심으로 좋아했다. 그러나 그와의 비극적인 만남(인터뷰) 이후 나는 그를 덜 좋아하게 되었다. … 영광은 힘겨운 짐이며 사람을 죽이는 독(毒)이다. 그 짐을 감당하는 게 예술이지만 그런 예술적 재능을 가진 사람은 아쉽게도, 드물다.’

    그러나 오리아나의 경쟁력은 이렇게 단지 비판을 위한 비판이 아니라 그동안 알려지지 않은 새로운 뉴스를 발굴하는 기자적 능력에서 나왔다. 인터뷰 대상자들은 그와 이야기하면서 남에게는 말하지 않은 새로운 사실들을 밝혔다.

    예를 들어 앨프리드 히치콕은 그토록 많은 스릴러 영화를 찍은 것에 대해 뜻밖에도 이런 이유를 댔다.

    “예수회에서 3년 동안 공부할 때 때로 그곳의 엄격한 생활은 나를 겁에 질리게 했다. 그래서 아마 나는 지금 다른 사람들을 겁에 질리게 하는 영화를 만들면서 복수를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오리아나는 인터뷰 기사에서 단지 인터뷰 대상자의 말을 그대로 옮기는 게 아니라 자신이 그 혹은 그녀에게 어떻게 시간 약속을 얻어냈으며 인터뷰가 어떻게 진행되고 어떻게 끝났는지에 대한 전 과정을 소상히 담았다. 그리고 개인적인 판단, 편견, 결론을 밝혔다.

    흔히 기자는 편견이 없는 공평무사한 태도를 지녀야 한다고 말하지만 그는 이른바 객관성이라는 것이 ‘위선’이거나 ‘주제넘은 가정’이라고 반박했다.

    ‘사람이 누군가의 프로필을 쓸 때 믿을 것이라고는 그 글을 쓰는 사람의 정직성밖에 없다.’

    그는 인터뷰 기사를 쓸 때마다 너무나 정직하게 써서(?) ‘심장에서 무거운 짐을 덜어내듯 정화되는 기분이었다’고 (과장)할 정도였다.

    할리우드 스타 인터뷰를 묶어 펴낸 ‘할리우드의 일곱 가지 죄악’이란 책은 공전의 히트를 한다. 이탈리아 독자들은 그의 말과 행동에 홀린 듯 매료되어 그의 여정을 따라가며 아서 밀러와 커피를 마시거나 제인 폰다와 이야기하는 기분으로 글을 읽었다.

    할리우드 취재를 시작으로 전세계를 무대로 한 그의 본격적인 취재 역정이 시작된다. 1960년 사진기자와 함께 사진기 10대와 타자기 1대를 들고 파키스탄 인도 홍콩 일본 하와이 미국을 차례로 돌아다니며 여행기를 쓰기 시작한 것이다.

    남편은 내 사전에 없다!

    이때 주로 관심을 가진 것은 ‘여성’이었다. 중국과 동남아 여성들을 통해서는 가부장제를 공격했고, 자이푸르의 지도자를 방문했을 때에는 왕 옆에서 춤을 추는 무용수 이야기를 통해 왕실의 풍요를 지탱하는 빈곤한 여성의 삶에 주목했다. 일본에서는 자유롭게 살지만 낙태와 피임을 하면서 성형수술에 광적인 여자들의 삶을 취재했다.

    마지막 목적지인 하와이와 뉴욕에 내린 뒤 그녀는 “전세계 여성들이 너무 불행하고 우울한 인생을 살고 있다” “남자들에게 경제적 인종적 사회적 문제가 있다면 여자들은 성적인 차별 때문에 고통 받고 있다”고 결론지었다. 당시의 기사들도 ‘쓸모없는 성(性)’이란 제목을 단 책으로 묶여 나온다.

    그는 물론 페미니스트였다. 그러나 전통적 페미니스트는 아니었다.

    “페미니즘이야말로 현대 최대의 혁명이다. 하지만 여자를 희생자나 피해자로 전락시키는 페미니스트들은 지긋지긋하다. 자신과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을 무시한다는 측면에서 독재자나 마찬가지다.” “여자는 특별한 동물이 아니다. 여자들이 왜 별도의 이슈로 취급되어야 하는지, 이유를 모르겠다. 여자들을 마치 단성생식으로 태어난 존재처럼 취급하는 것은 비논리적이다.”

    그는 평생 “주부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다”고 말했다. 가정 대신 직업을 갖는 것이 중요하다는 생각이 어릴 때부터 뇌리에 뿌리박힌 그다. 무엇보다 어머니가 결정적 영향을 미쳤다. 어머니는 오리아나가 어릴 적부터 바느질을 하고 옷을 빨아 다리고 살림을 하기보다 여행을 할 수 있는 직업을 갖는 것이 중요하다고 입버릇처럼 말했다.

    “(그런 엄마를 보면서) 나는 철이 들어 결혼적령기가 되자 ‘남편’이란 존재를 떠올리면 귀찮고 겁이 났다. 아마도 흐느끼면서 “넌 일을 가져야 해”라고 말하며 내게 옷을 입혀주던 어머니의 모습이 잠재의식 속에 남았기 때문이리라.”

    그렇다고 오리아나에게 남자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는 오히려 결혼이라는 ‘제도’를 포기한 탓에 더 자유로운 연애를 한 것으로 알려졌다. 여러 남자를 사랑했으며 그 남자들 각자에게 충실했다고 그의 전기를 쓴 산토 아리코는 전한다. 철저히 비밀에 부쳐진 그의 연애담 중 세상을 시끌벅적하게 만들며 공개된 것이 있는데, 바로 한 그리스 혁명가와의 사랑이었다. 영화에나 나올 법한 두 사람의 극적인 스토리는 그가 소설 형식을 빌려 세상에 공표함으로써 알려졌다.

    한 남자

    그의 연인은 그리스의 시인이자 반독재 운동의 영웅인 알렉산드로스 파나고울리스다. 첫 만남은 인터뷰에서 시작됐다. 그는 1968년 그리스의 독재자를 암살하려고 했다는 이유로 사형선고를 받고 고문을 당하며 사방 1.5m도 안 되는 무덤 같은 독방에 42개월 동안 감금됐다. 그러다 미국 대통령을 비롯한 정치인들이 석방탄원을 내 ‘국외 추방’ 조건으로 석방됐다. 오리아나는 세계적 저항인사가 된 그의 석방에 맞춰 인터뷰를 하러 갔다.

    1973년 8월 어느 날, 그는 감옥에서 고통을 겪으면서도 군사정권에 협력하지 않은 강인한 파나고울리스의 내면에 압도됐다. 그 후로도 몇 번 다시 만나 그의 시와 그를 끊임없이 괴롭히던 정부 기관원들의 행태를 고발하는 기사를 썼다. 그리고 그의 연인이 되었다. 파나고울리스는 서너살 연하였다. 연인이 석방된 뒤 그들은 이탈리아에서 함께 살았다. 남자는 망명객 신세였지만 비밀조직을 결성해 활동을 이어나갔다. 그리고 1974년 여름, 그리스 독재정권이 무너지고 민간정부가 세워지자 파나고울리스는 고향 아테네로 돌아가 국회의원이 된다.

    이후에도 그는 새로운 민간정부의 부패를 추적하며 감시의 끈을 놓지 않았고, 그러던 중 1976년 의문의 교통사고로 사망한다. 비리 추적의 대상이던 한 장관의 짓이라는 게 분명했지만 물증이 없었기 때문에 사건은 의문사(疑問死)로 묻힌다.

    당시 어머니까지 암 투병 중이어서 오리아나는 심적으로 힘들었다. 설상가상으로 에우로페오지(誌)와의 불화까지 겹치자 돌연 사표를 쓰고 고향으로 내려간다. 심한 우울증에 사로잡히지만 역시 그답게 ‘일’로 극복한다. 반정부 운동의 영웅과 나눴던 은밀한 사랑을 시간 순서대로 기록하기로 한 것이다.

    생전의 연인이 겪었던 것과 똑같이 그의 감금 생활을 기억하며 방이 10개가 넘는 자신의 대저택에서 가장 작은 골방을 골라 그 안에서 꼼짝 않고 3년 반을 틀어박혀 작품에 매진한다. ‘전화도 받지 않았다. 어떤 땐 벨 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나는 나 자신 속에 고립되어 계속 글만 썼다. 먹지도 않고 잠도 자지 않고 말도 하지 않고 말이다.’

    하루에 담배를 두 갑씩 피워대다 보니 식욕도 사라졌다. 죽은 애인을 옆에 두고 그 넋 속을 헤매면서 영혼과 육체가 한덩이가 되어 대화하듯 숨 막히게 써내려갔다. 그것은 ‘흔히 말하는 사랑 소설이 아니라 하나의 엄청난 기록이며 엄숙한 고발이고 쓰디쓴 체험’(‘한 남자’의 번역자 김범경)이었다.

    전설의 여기자 오리아나 팔라치

    팔라치가 만난 사람들은 중국의 덩샤오핑, 미국의 키신저, 에티오피아의 셀라시에, 리비아의 카다피, 인도의 간디, 이란의 호메이니 등 세계 정치를 주름잡았던 명사들이다.

    무려 네 번이나 고쳐 쓰며 완성했다는 이 책은 ‘한 남자’라는 제목으로 출판됐다. 그는 소설 형식을 빌려 권력의 도구가 되기를 거부하고, 진실과 자유를 위해 외롭고도 끈질기게 싸운 한 혁명가의 삶을 복원했다. 독자들은 현대영웅의 초상을 통해 폭정을 고발하면서도 문학적이고 저널리즘적인 방식으로 진실을 구현했다는 평가를 내렸다.

    오리아나는 평소 남녀 간의 ‘사랑’이란 것에 대해 냉소적이었다. 사랑이란 희생자를 집어삼키는 덫이며 불행한 사람들을 달래기 위해 만들어진 거짓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정작 연인이 비극적인 죽음을 맞은 후 사랑의 힘이 어떤 것인지 깨달았다고 고백한다.

    “그가 살아 있을 때 나는 내가 가진 모든 것을 주었지만 집착하지는 않았다고 자부했다. 그러나 그가 없는 지금 그는 내 머릿속 유령이 되었다. … 사랑은 분명히 존재하는 것 같다. 나는 거기에 붙들려 꼼짝할 수 없게 되었다.”

    글을 쓰던 3년 동안 그를 지탱해준 것은 자신이 사랑했던 남자가 세상 사람들에 의해 잊히게 해서는 안 된다는 결의였다. “그는 패배한 것이 아니다. 내가 그 사람 대신 말할 것이다.” 이것이 세계를 누비던 그를 무려 3년이나 칩거하게 만든 동기였다.

    ‘만일 사망해도 뒷말은 하지 않겠다’

    그가 베트남에 가겠다고 자원한 것은 38세 때인 1967년이었다. 사전에 ‘만일 사망해도 뒷말은 하지 않겠다’는 각서까지 쓰고 미군 수송기 편으로 전선에 뛰어들었다. 1967년과 68년 1년간 현장을 뛰면서 병사들과 인터뷰했고 목숨을 잃을 뻔했다. 그 후로도 7년간 간헐적으로 베트남을 찾았다.

    그는 단순히 여성 종군기자가 아니라 남녀를 통틀어 자기만의 독특한 전쟁보도 스타일을 확립한 기자였다. 병사가 적을 죽일 때의 생각과 느낌을 알고 싶다는 욕망에 이끌려 전쟁터에 직접 뛰어들기도 했고, 병사들과 함께 순찰을 했으며, 심지어 베트콩들이 있는 곳에 폭격을 퍼붓는 현장에 달려가기도 했다. 이렇게 모든 일에 직접 참여하는 보도 스타일에 사회적 리얼리즘이라는 문학적 장식을 입힌 글 덕분에 독자는 마치 전쟁 다큐멘터리를 보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무엇보다 그는 베트남에서 자유로웠다. ‘있는 그대로’ 쓰려고 했기 때문이다. 처음엔 베트남의 어린 혁명가들을 인터뷰해 그들의 대의를 숭고한 것으로 만들어 미군을 곤혹스럽게 만들었다. 그러나 이런 생각은 차츰 바뀌어갔다. 그는 그런 때에도 “혼돈스럽다”고 솔직하게 기사에 썼다.

    “판단을 내린다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인가. 선과 악을 구분하는 것은 또 얼마나 힘든가. 내가 베트남 혁명가들을 위해 눈물을 흘린 게 잘못이었을까?”

    협조를 거부한 동족을 무참히 즉결 처형하는 베트콩을 보면서 서서히 변해가던 그는 사이공 전투 중 포로로 잡힌 기자들까지 처형되는 현장을 보고 걷잡을 수 없는 충격과 분노에 휩싸였다. 한때 베트콩을 자유의 투사로까지 보았던 자신의 생각이 이상이었음을 깨달으면서 ‘그들(베트콩) 역시 짐승이었다’고 토로한다.

    사람들은 그를 ‘줏대 없다’고 비난했다. 그러자 그는 이렇게 반박했다.

    “내가 사이공에서 쓴 기사가 나간 후 미국인들은 나를 공산주의자로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내가 하노이에서 쓴 기사가 보도된 후에는 공산주의자들이 나더러 미국을 위해 일하는 반동이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자신의 양심을 따르는 모든 사람의 운명입니다. 나는 이 운명을 자랑스럽게 받아들입니다.”

    기자는 이 대목을 읽으며 문득 지난 6월의 ‘촛불시위’를 떠올렸다. 촛불시위 현장을 보면서 기자 역시 생각이 변해갔기 때문이다. 처음 여중고생들이 촛불을 들었을 때 기자는 “철없는 학생들”을 나무랐다. 그러나 정부와 대통령이 계속 말실수와 실책을 하면서 촛불민심은 삽시간에 확산됐고, 급기야 6월10일 100만 인파로 불어났다. 이후 촛불은 광기와 이념투쟁으로 변질됐다.

    전설의 여기자 오리아나 팔라치

    미국 미시시피 대학 교수인 산토 아리코가 오랜 시간 팔라치를 인터뷰해 평전을 냈다.

    이런 급변하는 상황에서 ‘촛불’을 보는 기자의 눈은 바뀌어갔고, 그때 기자 역시 ‘줏대 없다’는 말을 들어야 했다. 그러나 그런 사람들에게 기자 역시 오리아나 팔라치의 말을 전하고 싶다.

    ‘내가 부상한 유혈의 밤’

    어쨌든, 오리아나는 베트남전쟁 르포로 이탈리아 기자가 아니라 세계적인 기자의 반열에 오른다. ‘역사의 현장을 목격하기 위해서라면 목숨조차 아깝게 생각하지 않은 진정한 저널리스트’로 부상하며 슈퍼스타가 된 것이다.

    그가 진실을 알리기 위해 투쟁하는 숭고한 투사의 이미지를 한번 더 강조한 사건이 있었으니 다름 아닌 1968년 9월 말 멕시코올림픽 대회 취재였다. 당시 멕시코 정부는 수많은 국민이 비참한 가난 속에 허덕이고 있는데 올림픽 준비에는 엄청난 돈을 쏟아 붓고 있었다. 분노한 시민들과 학생들은 연일 반정부 데모로 저항했다.

    오리아나는 멕시코 군대와 경찰이 잔인하게 진압하는 집회현장을 취재하다가 등과 다리에 두 발이나 총상을 입는다. 그는 정신이 들자 병상에서 구술로 ‘내가 부상한 유혈의 밤’이라는 제목으로 기사를 송고했다.

    ‘멕시코는 베트남보다 더했다. 내가 전선(戰線)에서 보아온 어떠한 대량 학살보다도 더 잔인했다. 전쟁은 무장한 인간이 무장한 인간에게 발포한다는 공평한 전제 아래 성립된다. 그러나 대량학살은 상대방을 죽이면 그걸로 끝이었다.’

    오리아나 팔라치가 총격을 당했고 병원 침대에 누워서까지 체포된 학생 1500여 명과 사망자 150여 명에 대해 강력한 지지를 표명하는 기사를 썼다는 소식이 알려지자 멕시코 시민들의 지지는 열화와 같았다. 이탈리아에서도 수백통의 전보가 날아들었다.

    오리아나의 활약으로 세계인의 관심 밖이었던 멕시코 저항운동은 비로소 세계의 주목을 받게 된다. 펜의 힘과 기자의 힘은 이렇게 세상을 변화시키는 것이다.

    인터뷰는 섹스

    인터뷰 전문기자인 그녀는 인터뷰를 섹스에 비유했다. “내가 벗지 않는 한 상대방도 벗길 수 없다”는 것이다.

    ‘뜨겁고 치열한(?)’ 용어인 섹스를 인터뷰에 비유했다는 것은 단지 듣기 좋은 수사가 아니다. 그만큼 팔라치가 인터뷰 상대에 몰입했다는 뜻이다.

    만나는 상대마다 섹스를 하듯, 상대를 완전하게 이해하려고 하는 집착에 가까운 열망, 상대를 알려면 나부터 벗어던져야 한다는 전략적인, 그러나 전적으로 타당한 생각을 드러낸 말이다. 인터뷰가 섹스의 경지에까지 이를 수 있음에 동의한다.

    팔라치가 만난 사람들은 중국의 덩샤오핑, 미국의 키신저, 에티오피아의 셀라시에, 리비아의 카다피, 베트남의 구엔 반 티우, 인도의 간디, 이란의 호메이니, 서독의 브란트 등 세계 정치를 주름잡았던 명사들이다.

    누구에게도 겁내지 않는 그는 인터뷰 때마다 숱한 에피소드를 남겼다.

    에티오피아의 황제 셀라시에를 인터뷰할 때는 ‘가난한 국민들의 참상을 보실 때에는 감상이 어떠시냐’는 질문을 던져 이탈리아 주재 에티오피아대사가 본국으로 돌아가는 소동을 빚기도 했다. 미국의 국무장관 헨리 키신저는 얼마나 당했던지 “그와의 인터뷰는 내 인생 최대의 실수”였다고 혀를 내둘렀다. 권투선수 무하마드 알리 인터뷰 때는 알리가 수박을 먹으며 트림을 세 번이나 하자 마이크를 그의 얼굴에 던져버리기도 했다고 한다. 리비아 혁명회의 의장인 카다피가 인터뷰 약속 시각을 넘겨 두 시간 만에 나타났을 때에는 읽던 책을 비서에게 내동댕이치는 방식으로 분풀이를 했다.

    작위적으로 행동한 것은 아니다. 물론 그는 자기현시욕이 강하고 과장하는 능력도 탁월해서 미끼(?)들을 낚아채는 실력이 대단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그처럼 공격적인 인터뷰가 가능했던 것은 ‘권력이라는 허울을 벗기고 당신의 내면을 파헤치겠다’ 의지가 있었기 때문이다. 사실 뛰어난 인터뷰어(interviewer)는 독심술사가 될 정도로 상대의 심리를 파고들어야 하지 않는가.

    생전의 오리아나 팔라치를 인터뷰하고 그의 전기를 펴낸 산토 아리코는 ‘전설의 여기자 오리아나 팔라치’에서 이렇게 전한다.

    “오리아나는 매번 인터뷰 약속이 잡힐 때마다 ‘권좌에 앉아 있거나 혹은 권력에 반대하는 사람들이 우리 운명을 어떻게 결정해버리는지 알아보겠다는 희망을 품었다’고 했다. 그런 열정이 있었기에 매번 공들여 꼼꼼하게 준비를 한 뒤 상대에게 호된 질문을 퍼부었다.”

    팔라치는 외향적인 동시에 내향적인 삶을 살았다. 죽음의 위험을 무릅쓰고 독재에 저항했고, 파시즘이나 공산주의가 유행할 때에도 이에 대한 저항과 반박의 글을 쓰며 굴복하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사색적이고 지적이었으며, 몇 년씩 방안에 틀어박혀 글쓰기에만 몰두했던 예술가이기도 했다.

    가장 큰 분노는 가장 큰 연민

    문자 그대로 불꽃처럼 살았던 이 여전사도 말년에는 ‘암’ 앞에 무릎을 꿇었다. 그는 암 수술 후 자기 몸속에서 잘라낸 암덩어리를 보여달라고 고집을 피운 ‘특별한’ 환자이기도 했다(암덩어리에다 대고 ‘네가 나를 쓰러뜨릴 수는 없다’고 소리를 질러댔다고 한다.)

    기자가 그의 삶과 글을 따라가보며 깨달은 것은 ‘분노의 미학’ 그리고 ‘독설(毒舌)의 미학’이다. 세상이 거칠고 험해지다 보니 증오와 분노가 팽배해지고 말과 글도 따라 험악해지고 있다.

    물질이 풍요로워진 현대사회에서는 전투의 영역이 ‘물질의 획득’에서 ‘정신의 영역’으로 넘어가고 있다. 정신의 싸움에서 승리하려면 양심에 기반을 둔 지식인들이 순진한 사람들을 속이는 거짓말과 위선, 비(非)과학과 전쟁을 벌여야 한다.

    거짓이 만연하면 진실과 사실이 ‘충격적’으로 들린다. 참을 말해도 ‘독설’이라는 비난이 날아오는 것은 그 때문이다. 그러나 자본주의 체제와 조국에 대한 사랑, 참과 진실에 대한 사랑이 가득하면 그만큼 거짓과 잘못된 생각들에 대한 분노도 커진다. 그 분노의 밑바닥에는 민중이 거짓에 속으면 안 된다는 강한 휴머니즘이 있다.

    그런 분노야말로 가장 큰 연민이다. 오리아나 팔라치의 삶과 글은 그런 것들을 가르쳐준다. 그의 독설과 분노가 주는 진정성이 이념 싸움이 한창인 지금 대한민국에 유효한 까닭이다.

    참고도서

    ‘전설의 여기자 오리아나 팔라치’(산토 아리코 지음, 김승욱 옮김, 아테네)=미국 미시시피 대학 교수인 저자가 오랫동안 팔라치를 인터뷰한 내용을 바탕으로 쓴 평전이다. 이 글을 쓰는 데 가장 많은 참고를 했으며, 현재 나와 있는 관련 책 중 고인의 삶을 가장 상세하게 보여준다. 중간 중간 팔라치의 작품을 분석하는 대목들은 너무 전문적이어서 몇 번씩 다시 읽어야 한다.

    ‘나의 분노 나의 자긍심’(오리아나 팔라치 지음, 박범수 옮김, 명상)=뉴욕에서 망명생활을 하며 침묵했던 팔라치가 9·11테러를 주도한 이슬람권에 대한 가차 없는 비판을 하며 내놓은 책이다. 그의 기사를 원문으로 읽어본 적이 없는 필자는 그의 거의 마지막 글모음이라고 할 수 있는 ‘나의 분노 나의 자긍심’을 읽으며 모골이 송연해질 정도로 충격을 받았다.

    ‘한 남자’(오리아나 팔라치 지음, 김범경 옮김, 한벗)=절판되어 서점에서 구할 수 없는 책을 지인에게서 얻었다. 연인에 대한 그의 지고지순한 사랑을 엿볼 수 있는 책으로 그의 또 다른 면모를 볼 수 있다. 그런데 너무 두꺼운데다가 당시 시대상황에 대한 지식이 없으면 읽어나가기 힘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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