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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버트 김 심경 고백 “손자들이 늙고 낯선 내게 안기지 않아요. 그게 너무 슬퍼”

로버트 김 심경 고백 “손자들이 늙고 낯선 내게 안기지 않아요. 그게 너무 슬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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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소하신 후 공교롭게도 개인적으로는 어머님의 죽음을 맞아야 했고 사회적으로는 레이건 전 대통령의 죽음이라는 소식을 접하셨습니다. 수감 생활중에 수양을 많이 하셨을텐데요, 본인에게 죽음이란 어떤 것입니까?

“바른 자세로 살다가 죽을 때가 되면 죽는 거죠. 거기에 별다른 감흥은 없습니다. 저는 아주 건조한 사람이거든요.”

-1980년대 초·중반, 미 해군정보국에서 한창 일할 때 레이건은 현직 대통령이었습니다. 직간접적으로 접촉한 일이 있었습니까?

“저 같은 프로젝트 매니저가 대통령을 직접 접촉할 일은 없었습니다. 제가 한 업무가 레이건 대통령에게 전달됐을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전 그를 개인적으로 좋아하진 않습니다. 월급이 오르질 않았거든요. 카터 행정부 시절엔 1년에 9%까지 오르곤 했는데 레이건 행정부에서는 겨우 2% 올랐죠(웃음).”

-대충 어떤 정보가 레이건 대통령에게 전달됐을까요?



그는 웃었다. 대답을 회피하는 것이다. 사실 그는 이 인터뷰를 몹시 껄끄러워했다. ‘신동아’ 2003년 5월호에 실렸던 백동일 전 주미대사관 해군무관의 글을 읽은 그가 ‘신동아’에 대해 가지는 애정과는 무관한 이유에서였다. 7월27일까지 가택연금 상태에 놓여있고, 나머지 3년 형기(刑期)에 대한 사면 추이를 미 정부가 지켜보고 있으며, 지금 발목에는 전자발찌를 차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전화에 예민하게 반응했다. 모니터링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 듯했다.

-검거되기 전 마지막으로 맡은 프로젝트가 무엇이었습니까.

“불법이민과 마약의 유통경로를 추적하는 일이었습니다. 물론 바다를 통해 유입되는 사람과 마약이죠. 그 무렵 특히 중국에서 컨테이너에 불법이민자나 마약을 숨겨 서부해안을 통해 들어오곤 했습니다. 이 루트를 추적했습니다. 알만한 사건이 많았죠.”

-백동일 대령은 선생님이 한국군의 지휘통제 계통과 통신, 컴퓨터 및 정보의 능력과 수준에 대해 궁금해하셨다고 말했습니다. 이것이 직접적인 업무였습니까?

“그런 게 사실 돈이 많이 드는 건 아니에요. 그렇게 큰 기술이 필요한 것도 아니고요.”

-한국정부가 필요로 하는 사업이라면 한국정부를 위해 일하실 의향이 있나요.

“아뇨, 절대로…. 저보다 잘하는 사람이 많을 겁니다.”

한국정부가 노력한다고 듣긴 했으나…

로버트 김은 1996년 3월 백동일 전 해군무관의 주선으로 한미해군 고위급 회담 참석차 워싱턴을 방문했던 한국 해군 실무장교들을 만났다. 그는 이 자리에서 나눈 이야기에 대해 밝히지 않았다. ‘별로 중요한 얘기가 아니었다’는 말로 얼버무렸다. 다만 “회고록을 정리하고 있다”고 언급할 뿐이었다.

-교도소에서는 집필이 허용되지 않나요?

“여건이 좋지 않았습니다. 연필만 사용할 수 있는데 편지 한 장만 써도 연필심이 다 닳습니다. 연필 한번 깎으려면 연필깎이 기계 앞에 줄을 서서 기다려야 했죠. 또 감옥 안이 어수선해 내게서 무슨 글이 나올 지도 겁났습니다.”

필자가 “백동일 대령이 ‘신동아’에 쓴 글에서 본인과 연관된 부분이 모두 사실이냐”고 묻자 그는 대답을 망설였다.

“눈물을 흘리면서 감동적으로 읽었습니다. 백 대령과는 사실 인간적인 교류를 했다고 할 순 없습니다. 거의 만난 적이 없으니까요. 하지만 글에서 그의 진실이 느껴졌습니다.”

-백 대령은 선생님께서 준 정보를 ‘독이 든 사과’라고 표현했습니다. 자신은 서서히 선생님으로부터 받는 정보에 중독되었으며 이 사실이 알려진다면 선생님이 위험해질 수도 있음을 알았다고 말했습니다. 결국 선생님만 이용당한 셈이라고 생각하진 않는지….

“누가 누굴 이용했다는 말은 적당하지 않습니다. 백 대령도 이 일로 큰 고통을 겪었어요. 전 재판받을 때까지 제가 10년이나 감옥살이를 할 정도로 큰 죄를 지었다고는 생각지 않았습니다.”

필자는 로버트 김으로부터 강렬한 인상을 받은 적이 있다. 1996년 9월24일, 국군의 날을 앞두고 주미 한국대사관 리셉션 행사장에서 로버트 김이 막 체포됐을 때다. 그는 양복을 입은 채 죄수 기록판을 들고 사진을 찍었는데 그 표정이 성자(聖者)처럼 평화로워 보였다. 앞으로 벌어질 자신의 운명에 대해서 전혀 감지하지 못한 듯이. 그는 “당시에는 조사받고 금방 풀려날 줄로만 알았다”고 말했다.

-결과적으로 한국과 미국 두 나라 모두에게 배신당한 셈이 됐습니다. 억울하지 않습니까?

“억울함도 반감도 없습니다. 내가 잘못해서 받은 벌이니까요. 내가 이민 온 나라의 법을 어겼으니까요. 억울한 게 있다면 딱 하나입니다. 형량이 과했다는 점이죠. 판사는 앞으로 시민권을 받게 될 사람들에게 시민권 선서가 형식적 절차가 아니라는 본보기를 보이기 위해 내게 중형(重刑)을 내렸습니다. 내가 이민자가 아니라 미국에서 태어난 사람이었다면 21개월의 형을 덜 받았을 겁니다. 그게 억울해서 항소했지요. 법원이 판결을 유보해 논의할 기회를 얻지 못했지만.”

-한국정부가 소극적으로 대응한 데 대해 서운한 감정이 없습니까?

“정부의 사정이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한국정부가 노력했다고 들은 바는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한국정부의 태도에 대해 모순된 감정을 가진 듯했다. 그는 “‘노력한다’는 말처럼 모호한 표현이 없다”고 말했다. 그저 정부가 자신이 처한 상황을 알아보는 것 정도도 ‘노력했다’고 할 수 있으니까. 그는 “확실한 동사로 표현해주었다면 이해하기 쉬웠을 텐데…”라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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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김옥채 재미언론인 tutuu@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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