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단과 극단으로 통하는 화법
민주화 성취는 오롯이 운동권 몫인가
與 이재명, ‘아니었으면’ 역사관
惡鬼 몰아내자는 사고 품어서야…
野 최재형 “이승만 헌법가치 잘 지켜”
‘점령군’ 대응 논리가 ‘이승만’이라니
실질 숭상하는 대통령 기다리며
더불어민주당 대선주자인 이재명 경기지사(왼쪽)와 국민의힘 대선주자인 최재형 전 감사원장(오른쪽). [동아DB]
서울 광화문광장은 우리 사회의 극단과 극단을 모두 만날 수 있는 곳이다. 한번은 그곳을 지나다 양쪽 진영이 서로 삿대질하며 싸우는 광경을 봤다. 역사 문제를 놓고 다투는 것 같았는데, 태극기와 성조기를 어깨에 두른 분이 소리를 버럭 지르며 하시는 말씀. “박정희 대통령님 아니었으면 지금 너희가 밥이나 먹고 살 수 있을 것 같아?”
‘학생운동 아니었으면 아직 전두환 치하에 살 것’이란 주장과 ‘박정희 아니었으면 아직 후진국으로 살 것’이란 주장은 어찌나 정교한 데칼코마니 같은지. ‘〇〇이 아니었으면’ 화법은 극단과 극단으로 통한다.
‘〇〇 아니었으면’ 식의 상상
말이 나온 김에 생각해 보자. 학생운동이 아니었으면 우리는 여전히 전두환 치하에 살고 있을까? 학생운동이 아니었더라도 1987년 6월항쟁을 비롯한 민주화는 성취됐을 것이다. 그 항쟁이 온전히 학생운동의 몫만은 아니기 때문이다. 경제성장의 여파로 중산층이 빠르게 성장했고, 생활에 여유를 느낀 중산층은 정치적 민주화까지 요구했다. 어느 나라든 나타나는 사회발전 수순이다. 물론 ‘좀 더 빠르게’라는 측면은 있으리라.그러나 역학 관계를 보자면 88서울올림픽이라는 국제적인 시선(視線)의 역할이 컸고, 불상사가 생기기 전에 민주화를 받아들이라는 미국의 조언도 있던 것으로 알려진다. 심하게 비약하자면, 그걸 또 고분고분 받아들인 전두환의 결단을 언급하는 사람도 있으리라. 이를 두고 한국의 민주화는 올림픽 덕, 미국의 덕, 심지어 전두환 덕이라고 말할 수 없는 것처럼 각계의 노력으로 이룩한 민주화 성과를 오롯이 운동권의 역할로 한정할 수는 없다. 일부러 깎아내리자는 말이 아니다. 지나치게 우상화할 필요는 없으며, 역사는 다양한 층위 사람들이 자기 역할을 주고받으며 만드는 것이지 어느 한쪽의 공로라고 간단히 추앙할 수 없다는 말이다.
이것은 박정희 시대 경제개발에도 똑같이 적용된다. 박정희가 아니었으면 우리는 아직 가난한 후진국으로 살고 있을까? 여전히 국민소득 100달러, 200달러 국가로 남아 있을까?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한국인의 높은 교육열, 잘살아 보려는 의지와 열정으로 볼 때, 박정희 정권이 아니었더라도 경제성장은 어느 정도 이루었을 테다.
물론 이 모든 것은 증명할 수 없는 일이다. 역사에 가정(假定)이란 없다. 역사는 사실로써 인과관계를 정리할 따름이지 ‘〇〇이 아니었으면’ 식의 상상은 별 의미가 없다. 학술이나 문학 차원에서 의미가 있을지 모르지만, 과거는 과거대로 남겨두고, 현재와 미래를 바라볼 일이다. 그것이 정치의 몫이다.
‘점령군’ ‘해방군’…어설픈 말장난
차기 대통령선거를 8개월쯤 남겨둔 가운데 난데없는 역사 논쟁이 어지럽다. 시작은 이재명 경기지사가 열었다. 민주당 유력 대선 예비후보인 그는 7월 1일 경북 안동에 있는 이육사문학관을 찾은 자리에서 “대한민국이 다른 나라 정부 수립 단계와는 좀 달라 친일 청산을 못 하고 친일 세력들이 미 점령군과 합작해 그 지배체제를 그대로 유지하지 않았는가”라고 말했다. 여기서 미군을 ‘점령군’이라고 표현한 대목이 문제가 됐다.야권 후보들은 즉각 “황당무계한 망언”(윤석열), “대한민국의 출발을 부정하는 역사 인식”(유승민), “충격을 넘어 경악스럽다”(원희룡)라고 비판했다. 이 지사는 이에 페이스북을 통해 “해방 후 미군이 38선 이남을 점령했다는 건 역사적 사실”이라며 “미국과 이승만 대통령도 썼던 표현”이라고 반박했다. 이 논쟁은 ‘미군은 점령군, 소련군은 해방군’이라는 광복회장의 발언과 맞물려 때 아닌 역사-이념 논쟁으로 이어졌다.
미군이 점령군이냐 해방군이냐, 소련군은 또 어땠느냐. 그것을 이 자리에서 논하고 싶지는 않다. 행정 용어와 정치 용어 사이의 어설픈 말장난이다. 문제는 지금 이 시점에 그것을 따지는 일이 과연 무슨 의미가 있느냐 하는 것이다. 일본군 무장해제를 이유로 미국과 소련이 한반도 중간 지점에 수평선을 그어 각각 군대가 진주했다. 이들이 잠깐 물러난 사이 전쟁이 발발했고, 국제전 양상으로 치달았다. 전쟁을 마무리하며 한미상호방위조약이 체결돼 미군은 대한민국에 남게 됐다. 그런 주한미군의 존재로 전쟁이 억지됐는지, 오히려 위기가 고조됐는지 논란이 있지만, 어쨌든 전후 70년이 넘어가도록 전쟁은 재발하지 않고 있다. 여기까지가 역사적 사실이고, 역사적 결과다.
점령군인들 해방군인들 지금 그게 무슨 의미가 있는가. 점령군으로 왔으니 ‘나가라’는 말일까? 물론 아닐 것이다. 그런데 왜 그런 말을 했을까? 대통령이 되겠다는 사람이 적절한 장소에서 자신의 역사관을 밝히는 것은 그리 나쁜 일이 아니다. 그럼에도 오늘 이 말을 꺼내는 것이 어떤 ‘정치적’ 의미가 있는지, 정치인이라면 작은 발언 하나라도 조심하고 되돌아볼 일이다. 각설하고 이 지사의 발언은 대한민국 대통령이 되겠다는 사람으로서는 상당히 부적절한 표현이다. 국가에는 특별한 이익이 없다는 말이다.
아니, 이 지사는 정치적 이익을 노렸을 것이다. 이 지사의 발언에는 ‘〇〇이 아니었으면’이라는 역사관이 엿보인다. 친일파가 아니었으면, 이승만이 아니었으면, 미 점령군이 아니었으면, 그들의 야합이 아니었으면, 전쟁이 아니었으면, 쿠데타가 아니었으면, 박정희가 아니었으면, 민주화가 아니었으면, 외환위기가 아니었으면, 문재인이 아니었으면…. 여전히 우리 주위에는 ‘아니었으면’ 역사관이 양쪽에서 들끓는다. 이 지사는 그중 한쪽에 기대어 자기 의견을 피력한 셈이다.
‘아니었으면’ 역사관은 대체로 배제를 상정한다. ‘꼴 보기 싫은 너희들이 아니었으면’으로 시작해 ‘네가 있어 이 꼴이 돼버린 거야’로 이어진다. 그리하여 꼴 보기 싫은 그들, 애초에 존재해서는 안 됐을 모순과 악귀(惡鬼)를 몰아내는 일이 ‘역사 발전의 원동력’이라고 다짐한다. 개인이 이런 역사관을 갖는 것도 위험하지만 일국의 대통령이 되겠다는 사람이 이런 사고관을 갖고 있어서야 되겠는가. 그것도 공화주의를 표방하는 나라에서 말이다. 우리 헌법은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1조 1항)로 시작한다.
그 흑백의 상상력에 감탄할 따름
이 지사의 역사 인식만 탓하려는 게 아니다. 8월 4일 최재형 전 감사원장은 국민의힘 소속으로 대통령 후보 출마 선언을 했다. 그 자리에서 최 전 원장은 대한민국을 “법과 원칙이 살아 있는 나라, 마음껏 일할 수 있는 기회가 있는 나라, 열심히 일하면 잘살 수 있고 내 집도 마련할 수 있는 나라, 우리 아이들이 더 나은 미래에서 살 것이라는 확신이 있는 나라”로 만들겠다고 포부를 밝혔다. 여기까지는 좋다. 그런데 이어진 질의응답 시간에 그는 ‘헌법 가치를 가장 잘 지킨 역대 대통령이 누구라고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초대 대통령 이승만을 꼽았다. “공과가 있지만 대한민국이 나아갈 자유민주주의에 대한 기초를 놓았다는 점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셨다”라고 평가했다.평가는 각자의 몫이다. 그런데 대통령이 되려는 사람이 어떻게 이승만을 “헌법 가치를 가장 잘 지켰다” 말할 수 있을까? “대한민국의 기초를 놓았다”는 측면에는 그러려니 하지만, 발췌개헌, 3선 개헌, 사사오입, 의원 감금, 3·15 부정선거, 사법살인 같은 것이 ‘헌법 정신’은 아니지 않은가. 최 전 원장이 말한 공과(功過)의 비율에서 가장 과오를 대표하는 측면이다. 그러하니 최 전 원장이 동문서답했거나, 헌법 정신을 오해하고 있지 않나 의심하지 않을 수 없는 대목이다. 아마도 대한민국의 태생 자체를 부정하는 세력에 맞선 이념적 대안 후보라고 강조하기 위해 그런 것 같은데, ‘점령군’에 대응하는 논리가 ‘이승만’이라니, 둘 다 낡았다.
지난 수년간 우리나라 정치권을 보면 ‘저런 이야기를 도대체 왜 하나’ 싶은 일이 많다. 그런 대표적 이슈가 역사 문제다. 거칠게 표현해 ‘점령군’이 밥 먹여주는 것도 아니고 ‘이승만’이 세금을 돌려주는 것도 아닌데 왜 그러는지 모르겠다. 21세기도 벌써 20년이 흘렀는데 아직도 1945년 이야기나 하고 있다. 심지어 노론-소론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이러다 단군조선의 정통성까지 운운하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인식이 딱 그런 정도에만 박제돼 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그러는 것 아닐까 싶다. 현실을 직시하고 미래를 준비할 능력이 없으니 자꾸 과거만 들추는 것이다.
한가한 사람들의 한가한 논쟁
2019년 8월 6일 서울 중구 세종대로 일대에 태극기와 ‘노 재팬’ 배너기가 함께 걸려 있는 모습. 더불어민주당 소속 서양호 구청장이 있는 서울 중구청은 당시 서울시청과 명동, 청계천 일대에 일본 제품 불매와 일본 여행 거부의 뜻을 담은 ‘노 재팬’ 배너기를 설치했다. [동아DB]
힘이 없어 나라를 잃었고, 뼈아프게 독립운동을 했지만 어쨌든 외부의 힘을 빌려서야 해방이 됐다. 그나마 전쟁으로 모든 것을 잃었고, 폐허에서 처음부터 다시 시작했다. 성실한 국민들의 지극한 노력의 결과로 경제성장과 민주화를 함께 이뤘다. 그런데 아직껏 우리 사회에 무슨 ‘친일매국의 잔재’가 남아 있어 독버섯처럼 자라고 사회통합을 방해하며, 심지어 “자주독립국가의 면모를 훼손한다”고까지 생각하는지, 그 흑백의 상상력에 감탄할 따름이다. 오히려 그런 상상에 갇혀 있는 사람들이 언필칭 ‘사회통합’을 방해하는 것 아닐까?
작금 한국 사회의 발전을 가로막는 장애 요인을 꼽으라면 무엇보다 불신과 갈등, 사회적 대립이 아닐까 싶다. 국민 가운데 90%가 “우리 사회의 갈등 수준이 심각하다”고 인식하는 것으로 여러 여론조사에 확인되고, 국가경쟁력 지수 평가에서도 우리는 늘 사회적 통합 영역에서 최하위권에 머물러 경쟁력이 떨어지는 요인으로 작용한다. 불신, 갈등, 대립으로 소모되는 사회적 비용이 너무도 크다.
불신을 극복하자는 말은 단순히 ‘단결하자’는 말이 아니다. 서로의 존재를 인정하자는 것이다. 사회의 통합은 나와 다른 견해의 가치를 일단 인정하는 것으로 시작하지 않을까. 그것을 추구하며 갈등을 풀어나가는 영역이 바로 정치다. 그런데 우리 정치는 역사를 들고나와 쓸데없는 대립을 촉발하는 일에 오히려 앞장서고 있다. 정치가 도리어 불신과 갈등을 증폭하는 진원지 역할을 하고 있다. 그야말로 반(反)정치가 아닐 수 없다. 정치에 반하는 사람들이 정치인 행세를 한다.
서민의 입장에서 정치판의 이런 논쟁을 볼 때마다 ‘참 한가한 사람들이 한가로운 논쟁을 하고 있구나’ 하는 생각을 한다. ‘저 사람들은 먹고살기 편하니까 저런 것에 관심을 두겠지?’ 하는 뾰족한 반발마저 고개를 든다.
역사 과잉, 이념 과잉, 대결 과잉의 시대다. 바야흐로 세상은 AI(인공지능)의 시대로 깊숙이 들어가고 있는데 AI를 Anti Imperialism(반제국주의)의 축약어 정도로 아는 사람들이 대한민국을 이끌어보겠다고 큰소리를 친다. 최근에는 또 무슨 ‘능력주의’ 논쟁까지 불붙었다. 능력주의가 계급주의의 새로운 변형이라느니, 능력주의가 공정을 바라는 청년들의 최소한의 염원이라느니 하면서 갑론을박을 거듭한다.
세상에 ‘〇〇주의자’를 표방하는 것처럼 허망한 일이 어디 있을까. 백날 민주주의자, 평화주의자라고 자랑하면 뭣하나. 집에서는 가부장적이고 처자식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위선자에 불과한데, 밤낮 페미니스트라고 내세우면 뭣하나. 홀로 사무실에 남아 여성 비서에게 음담패설 문자메시지나 보낸 성추행범들에 불과했는데. 중요한 건 표방이 아니라 실천이다. 구체적인 정책을 갖고 논하고 결과로써 증명해야 한다. 능력주의 논쟁 역시 그렇다. 이론으로 능력주의가 이렇고 저렇고 저마다 지식을 뽐낼 것이 아니라 특정한 사안을 놓고 이것이 옳은지 그른지, 과연 실익이 있는지, 그것을 집중적으로 따지면서 취할 건 취하고 버릴 건 버리면 되는 일 아닌가.
이론이나 학문이 필요 없다는 말이 결코 아니다. 이른바 ‘지식인 혐오’도 아니다. 정교하게 논리적 사고 체계를 다듬어나가는 분들을 통해 우리 사회의 지적 토대가 튼튼해진다. 다만 학문과 정치, 역사와 현실의 경계를 넘어서지는 말자는 것이다. 학문적으로 풀어야 할 과제가 정치에서 소모되고, 혹은 정치에 이용되고, 현실을 직시해야 마땅한 사안이 명분과 여론에 압도되는 사례가 최근 우리 사회에 숱하다. 점령군 해방군이 그렇고, 이승만·박정희·친일·반일(反日)이 그러하며, 능력주의와 페미니즘, 젠더 갈등 같은 것이 그렇다. 내일은 또 무슨 역사와 주의(主義)가 등장해 세상을 퀴퀴하게 갈라놓으려나.
2019년 10월 5일 사법적폐청산 범국민시민연대가 서울 서초역 인근에서 검찰개혁, 사법적폐 청산 집회를 열었다. 한편 아래쪽에서는 보수 시민단체 회원들이 조국 구속을 주장하는 집회를 열었다. [동아DB]
다음 대통령의 자격
대통령선거가 6개월 앞으로 다가왔다. 바라건대 다음 대통령은 실질을 숭상하는 사람이었으면 좋겠다. 쓸데없이 죽창가나 앞세우는 유의 인물들 말고, “내가 대통령이 되면 민생을 이렇게 나아지게 하겠다”고 속 시원히 전망과 계획을 밝혀주는 대통령 후보가 나왔으면 좋겠다. “친일매국 세력이 독버섯처럼 남아서”라고 말하지 않고 “역사의 굴곡이 있었지만 성실한 국민의 노력의 대가로 여기까지 왔다”고 지나간 흔적을 존중하면서, 거창하게 표현하자면 ‘국민통합의 시대’를 열어갈 수 있는 사람이었으면 좋겠다. 아쉽게도 그런 사람은 보이지 않고 이쪽이나 저쪽이나 ‘너희가 없어야 우리가 산다’는 식으로 특정한 진영(陣營)의 후보를 앞세우는 사람만 득세하고 있으니 대체 이런 나라에 무슨 희망이 있을까 싶다.“만일 네가 삶을 바꾸지 못하면 삶이 너를 바꿔놓을 거야.” 토니 모리슨은 소설 ‘재즈’에서 등장인물의 목소리를 빌려 이렇게 말한다. 이것은 개인뿐 아니라 사회나 국가도 마찬가지 아닐까.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태도를 바꾸지 않으면, 결국 태도가 우리를 바꿔버리게 될 것이다. 지난 수년간 한국 사회는 지나치게 으르렁거린다. 지나치게 모두 화가 나 있다. 지나치게 대결적이고 지나치게 과거와 명분, 권력과 음모론에 집착한다. 모든 것이 과잉이다. 우리 편이 정권을 잡지 않으면 마치 세상이 끝날 것처럼 싸운다. 철 지난 이념주의자들이 득세한다. 과거에는 이런 태도가 일종의 경쟁력으로 혁신과 발전을 추동하는 측면마저 있었지만 갈수록 지체의 요인이 되고 있다. 이러한 오늘이 우리의 미래를 결정하게 되지 않을까.
‘〇〇가 아니었으면’ 식의 역사관은 정작 과거가 아니라 현재와 미래에 대입할 가정법이다. 지금 갖고 있는 관점과 태도를 바꾸지 않으면 결국 후손들이 불행해질 것이라고 말이다. 토니 모리슨의 충고는 이렇게 이어진다. “그리고 그건 전부 네 잘못이 되지. 네가 그런 일이 일어나게 내버려둔 거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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