美 인텔·대만 TSMC와의 반도체 삼국지
“삼성전자, 현재 주가 빼고는 다 좋다”
“비전이나 전략, 변화 그 무언가가 부족”
수년째 메모리 반도체 의존 수익 모델
8년간 매출 성장률, GDP 성장률보다 ↓
“이재용 가석방으로 투자 불확실성 해소”
광복절 가석방으로 풀려난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8월 13일 오전 경기 의왕 서울구치소에서 나와 이동하고 있다. [뉴스1]
자유를 얻은 이 부회장의 앞에는 고난도 시험대가 놓여 있다. 새로운 먹거리를 찾아 회사에 다시 활기를 불어넣는 거다. 삼성전자의 ‘정체(停滯)’는 한국 경제의 경쟁력과도 직결되는 이슈다. 이야기는 삼성전자의 캐시카우(cash cow·현금 창출원)인 반도체로 시작된다.
JY 석방에도 반등 기미 없는 주가
반도체업계는 정글이다. 패권을 쥐기 위해 막대한 돈이 투여되고 온갖 병법이 활용된다. 어제의 제왕이 내일은 성 밖으로 쫓겨난다. ‘영원한 제국’ 인텔은 삼성전자에 추월당하고 말았는데, 십수 년 전이라면 상상도 못 할 드라마다. 그런 인텔이 도전자의 자세로 재역전을 노리고 있으니 드라마는 아직 종영 전이다.미국 ‘월스트리트저널(WSJ)’은 8월 1일(현지 시간) “삼성전자와 인텔이 투자를 놓고 쇼다운(마지막 대결)을 벌일 것”이라고 보도했다. 여기다 묵직한 내공을 쌓아온 대만 반도체 전문기업 TSMC가 조용히 순항 중이다. 삼성전자는 냉혹한 삼국지에서 생존부터 해야 한다.
총수가 있건 없건 삼성전자는 전 세계에서 돈을 가장 잘 버는 회사다. 성적표만 보면 삼성전자는 전성기를 구가하고 있다. 삼성전자는 지난 2분기(4~6월)에 매출 63조6716억 원, 영업이익 12조5667억 원, 순이익 9조6345억 원을 벌어들였다. 지난해 같은 기간과 비교하면 매출 20.21%, 영업이익 54.26%, 순이익 73.44%가 늘었다. 특히 영업이익은 반도체 초호황기로 불린 2018년 3분기(17조5700억 원) 이후 가장 높은 수치를 기록했다. 매출은 1분기에 이어 또 60조 원을 넘겼는데, 이로써 상반기 매출액만 128조 원에 달했다.
이 중 반도체 부문 매출과 영업이익은 각각 22조7400억 원, 6조9300억 원으로 집계됐다. WSJ는 이 매출을 달러로 환산한 뒤 “삼성전자의 2분기 반도체 부문 매출이 197억 달러를 기록해 같은 기간 196억 달러의 매출을 기록한 인텔을 제쳤다”(앞선 보도)고 썼다. 그 뒤 국내 유수 언론이 WSJ를 인용해 “삼성전자가 인텔을 이겼다”는 보도를 쏟아냈다.
그런데도 주가가 좀체 8만 원 안팎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8월 4일에는 8만2900원에 마감하면서 ‘8만 전자’에 대한 기대감을 키우더니 이 부회장 석방날에는 7만4400원으로 폭락했다. 외국인 투자자들이 대대적으로 매도했기 때문이다. 시장에서는 “삼성전자, 현재 주가 빼고는 다 좋은 상황”(어규진 DB금융투자 연구원)이라는 표현까지 나왔다. 이 부회장 가석방이라는 호재가 있었음에도 반등 기미가 없다. 현재 440조~480조 원 사이를 오가며 시가총액 1위를 지키고 있긴 하나, 어디까지나 코스피 순위다. 글로벌 기업들과 비교하면 삼성전자의 시총은 저평가돼 있다는 게 중론이다.
애플의 시총은 약 2780조 원, 아마존의 시총은 약 1944조 원이다. TSMC는 2분기에 매출 15조1600억 원, 영업이익 5조9300억 원을 벌어 같은 기간 삼성전자 반도체 부문(매출 22조7400억 원, 영업이익 6조9300억 원)에 크게 밀렸다. 그런데도 시총은 700조 원 안팎을 오가며 삼성전자를 압도한다. 2분기에 처음으로 분기 순이익 10억 달러를 넘긴 테슬라(11억4000만 달러, 약 1조3100억 원)의 시총은 약 812조 원으로 삼성전자 시총의 두 배에 육박한다.
이승우 유진투자증권 리서치센터장은 “전 세계 기업 중 매출과 이익이 모두 10위권 안에 드는 곳은 삼성전자를 포함해 애플, 아람코, 아마존 등 4개 업체에 불과한데, 삼성전자에 대한 시장의 평가는 너무나 박해 보인다”고 했다.
유진투자증권이 미국 블룸버그가 내놓은 2021년 예상 실적치를 근거로 작성한 그래프. 주요 글로벌 기업들의 매출, 영업이익, 시가총액의 상관관계를 파악할 수 있다. 삼성전자의 경우 매출액과 영업이익에서 공히 상위 10위 안에 들지만, 시가총액을 나타내는 ‘윙크기’는 매우 작다는 걸 알 수 있다. [유진투자증권]
“갈증은 여전히 해소되지 못해”
이유가 뭘까. 이어지는 이 센터장의 설명에 해답이 있다. 그는 국내 대표적인 반도체 전문 애널리스트로 꼽힌다.“투자자들이 듣고 싶어 했던 그 무언가에 대한 갈증은 여전히 해소되지 못했다. 어닝(수입)은 차고 넘쳤지만 비전이나 전략, 변화 등 그 무언가는 부족해 보였다. (실적발표 콘퍼런스 콜에서) 애널리스트들의 질문에 대해 시장 상황에 따라 적절히 대응해 나가겠다는 회사 측 답변은 분명 모범답안이다. 하지만 일명 잘나가는 회사들이 그리고 있는 빅픽처가 삼성전자에서는 보이지 않았다. 시장은 삼성에도 뭔가 다 계획이 있지 않을까라고 믿고 싶은데 말이다.”
흔히 증권가에서는 “주가는 숫자보다 꿈을 먹고 자란다”는 말이 회자된다. 주가는 현재 실적의 단순한 반영물이 아니다. 현재와 미래 실적의 2차 함수다. 테슬라 시총이 고공 행진하는 까닭도 여기 있다. 국내에서는 총자산 29조 원에 불과한 카카오뱅크가 코스피에서 포스코와 LG전자를 제쳤고, 현대자동차를 턱밑에서 위협했다. 네이버와 카카오는 시총 4강에 뿌리내린 지 오래다. 시총 경쟁에서 TSMC가 삼성전자를 압도하고 있는 점은, 투자자들이 미래의 승자로 TSMC를 꼽고 있다는 방증이다. 즉 투자자들은 삼성전자의 성장이 멈췄다고 본다.
삼성전자의 성장세가 꺾인 까닭은 메모리 반도체에만 의존하는 비즈니스 모델에 있다. 반도체는 메모리와 비메모리(시스템)로 나뉜다. 메모리 반도체에는 정보를 읽고 수정할 수 있는 램(RAM)과 정보를 읽을 수만 있는 롬(ROM)이 있다. 램(RAM)은 정보 저장 방식에 따라 D램과 S램으로 나뉜다. 롬(ROM)의 일종인 플래시메모리(Flash Memory)는 칩 내부의 전자회로 형태에 따라 낸드플래시(Nand Flash)와 노어플래시(Nor Flash)로 또 갈린다.
용어가 어렵지만 핵심은 D램과 낸드플래시다. D램은 데이터를 빨리 쓰고 지우는 역할을 한다. 낸드플래시는 한번 저장된 정보를 전원이 꺼져도 최장 10년간 유지한다. 즉 PC와 스마트폰에서 D램은 속도를, 낸드플래시는 기억을 책임지는 부품이다. 삼성전자는 두 부문에서 견고한 세계 1위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은 예기치 못한 비즈니스 호재로 작용했다. 재택근무, 온라인 교육, 동영상 서비스 등 PC와 스마트폰 수요가 증가하면서 메모리 반도체가 ‘금값’이 된 덕이다.
애플은 물론 현대차보다 못하다?
문제는 “메모리 반도체 말고 무엇?”이라는 질문에 마땅한 답을 내놓기 어렵다는 것이다. 지난 2분기 반도체부문 영업이익은 삼성전자 전체 영업이익의 55.1%를 차지했다. D램 고정가격이 1분기와 비교해 26% 넘게 올랐기 때문이다. 이는 2017년 이래 최대 상승폭이다. 하지만 삼성전자의 또 다른 기둥인 스마트폰 부문 2분기 영업이익(3조2400억 원)은 1분기(4조4000억 원)보다 1조 원 넘게 줄었다. 달리 말하면 삼성전자의 실적이 D램과 낸드플래시 가격에 따라 좌우되고 있다는 뜻이다.영업이익에 비해 매출액 성장률이 더딘 까닭도 여기 있다. 삼성전자는 지난 2012년 처음으로 매출 200조 원을 돌파했다. 그런데 8년이 지난 지난해 매출액은 236조 원이다. 8년간 성장률이 18%인데, 같은 기간 명목 GDP(국내총생산) 성장률(34%)을 크게 밑돈다. 국가대표 기업이라는 별명이 무색한 대목이다.
이승우 유진투자증권 리서치센터장은 “삼성전자가 9개 분기 연속으로 시장 추정치를 상회하는 실적을 내다보니 어닝 서프라이즈(기대 이상의 실적)는 당연한 정례 행사가 됐다”면서 “파운드리나 M&A(인수합병) 등, 그동안 삼성이 잘했다고 할 수 없는 분야에서 의미 있는 성과나 전략이 나와야 할 것”이라고 설명했다.
정례 행사는 사고 없이 잘 치러야 한다. 한데 거기에는 눈과 귀를 잡아끌 스토리가 부재하니 감동이 없다. 삼성전자가 처한 현실이 그렇다. 그사이 경쟁사들은 색다른 스토리를 만들어가고 있다. 애플은 전기차 시장에 뛰어들었고, 페이스북은 5년 내에 메타버스 분야로 사업을 전환하겠다고 선언했다. OTT(온라인 스트리밍 서비스)의 제왕 넷플릭스는 추격자가 많아지자 아예 이커머스 시장에 진출했다. 전자상거래 업체 아마존은 최근 디지털 화폐와 블록체인 전문가 채용에 나서면서 다른 영토에 발을 들일 준비를 하고 있다.
국내의 경우 현대차는 모빌리티 기업으로 변모 중이고, 지난해 12월에는 로봇 개발업체 보스턴 다이내믹스를 1조 원에 사들였다. LG전자는 스마트폰 사업에서 과감히 철수한 뒤 전장부품·배터리를 육성하고 있다. 카카오와 네이버는 검색 포털에 더해 핀테크와 전자상거래, 콘텐츠를 사업 포트폴리오에 넣어둔 상태다.
반면 삼성전자는 2016년 11월 오디오 분야 전문기업 하만(Harman)을 9조3700억 원에 인수한 뒤 별다른 M&A 행보를 보이지 않았다. 이때를 기점으로 이재용 부회장이 국정농단 재판 등 ‘사법 리스크’에 휘말린 탓이다. 그간 반도체 호황으로 돈만 계속 쓸어담다 보니 순 현금은 100조 원 넘게 쌓였다. 실탄을 써야 할 결단을 내리지 못했을 뿐이다. 평시 사업이야 총수의 존재 유무가 별다른 변수가 아니다. 하지만 신사업 진출은 얘기가 다르다. 책임을 지고 리스크를 감수할 수 있는 사람이 나설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파운드리 추격전에 나서나
이 부회장이 돌아오면서 상황은 급반전됐다. 삼성전자는 8월 24일 “향후 3년간 투자 규모를 총 240조원으로 확대하고, 이 가운데 180조원을 국내에 투자하기로 했다”면서 “과감한 M&A를 통해 기술·시장 리더십 강화에도 나설 방침”이라고 발표했다.일단 재계에서는 성장성이 큰 시스템 반도체 시장에 주목한다. 시스템 반도체는 설계를 전문으로 하는 팹리스와 위탁 생산을 맡는 파운드리로 나뉜다. 파운드리 분야의 패권을 쥔 TSMC는 향후 3년간 110조가 넘는 돈을 투자하기로 했고, 최근 파운드리 시장 재진출을 위해 인텔 역시 약 22조 원을 들여 미국 애리조나주에 신규 공장 2개를 짓겠다고 발표했다. 삼성전자 역시 지난 5월 미국에 20조 원 규모로 파운드리 공장을 짓기로 발표했는데, 이 부회장의 복귀로 곧 구체적 계획이 나올 전망이다. 이와 관련해 삼성전자는 8월 24일 발표에서 “시스템 반도체는 선단공정 적기 개발과 과감한 투자를 통해 혁신제품 경쟁력을 확보함으로써 글로벌 1위 도약을 위한 기반을 마련할 계획”이라고 밝힌 바 있다.
또 인공지능(AI)이나 5G(5세대 이동통신), 바이오 등 아예 다른 분야에서 초대형 M&A가 전격 단행될 가능성도 주목된다. 특히 바이오는 삼성전자가 미래 먹거리로 담금질하는 업종이다. 현재 삼성전자는 “바이오를 제2의 반도체로 육성”, “차세대 통신기술 선행연구 주도”, “AI, 로봇 등 미래 신기술·신사업 역량 강화” 등의 청사진을 공개한 상황이다.
반도체업계 관계자는 “그간 삼성전자가 M&A나 투자 등과 관련해 결정이 지연되고 있다는 우려가 있었는데, 이 부회장이 석방되면서 불확실성이 해소돼 우려가 불식되지 않겠느냐는 기대감이 있다”면서 “반도체 사업의 경우 라인 하나를 증설하는 데도 수십조 원이 든다. 이 부회장 석방이 분명 경영 정상화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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