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동아는 인문학재단 플라톤아카데미와 함께 ‘삶이 묻는 것들에 답하다’ 시리즈를 진행한다. 플라톤아카데미는 2010년 11월 설립된 국내 최초 인문학 지원 재단으로 인류의 오랜 지식과 지혜를 바탕으로 삶의 근원적 물음을 새롭게 전한다는 취지로 연구 지원, 대중 강연, 온라인 포털 등 다양한 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새로 선보이는 ‘삶이 묻는 것들에 답하다’는 코로나19 이후 많은 것이 바뀌고 있는 세상에서 삶의 나침반을 잃어버린 듯 공허감을 겪는 우리에게 새로운 정신적 가치를 모색하는 사람들의 인터뷰로 진행한다. <편집자 주>

전군표 전 국세청장이 낸 첫 소설 ‘효옥’이 출판가에서 화제다. 요즘 같은 출판 불황기에 출간 한 달 만에 5쇄를 찍은 것. 무명작가의 첫 소설이지만 완성도가 높다는 평을 듣고 있다. 실제 소설을 읽어보니 단단하면서도 힘이 있는 문체와 스피디하고 영상적인 구성, 단어 구사, 역사 고증이 탄탄했다. 은퇴 이후 삶을 고민하는 사람들이 많은 요즘, 공직의 삶을 내려놓고 작가로서 제2의 삶의 시작한 그를 만났다. 그에게 ‘글쓰기’는 어떤 의미였을까.

단종의 기구한 삶, 사육신의 올곧은 삶이 와닿다

‘효옥’의 시간적 무대는 조선 초기 계유정난 때다. 효옥은 조카 단종을 몰아내고 임금이 된 수양대군 세조에 맞서다 참혹한 죽임을 당하는 사육신(死六臣) 중 한 명인 성삼문의 딸 이름이다. 소설은 효옥을 중심으로 성삼문과 사육신, 효옥을 지켜주는 노비 바우, 수양대군의 둘째 아들이자 훗날 세조에 이어 왕위를 이어받은 8대 임금 예종의 인연이 얽히고설키면서 펼쳐진다. 그는 어떤 인연으로 효옥에게 빠져들었을까.

“본래 사육신에 대해 관심이 많았다. 이유는 운명적이라고밖에 설명이 안 되는데 30여 년 전인가 강원도 영월 세무서장으로 일하는 동료를 만나러 갔다가 영월 청령포에 들른 적이 있다. 전생에 무슨 인연이 있어서였는지 처음 가본 곳이었는데 가슴이 떨릴 정도로 인상이 깊었다. 단종의 기구한 운명이 너무 아프게 다가와 며칠 밤잠을 설치기까지 했다. 그때부터 틈만 나면 단종, 사육신, 수양대군, 한명회, 신숙주가 등장하는 조선 초기 역사를 뒤적이곤 했다.”

- 청령포라고 하면 삼촌 수양대군에게 내쫓긴 단종이 죽임을 당한 곳인데.

“그렇다. 단종이 묻힌 장릉이 있는 곳이다. 그런 사연을 모르는 사람이라도 그곳에 가면 이상하게 슬픈 기운이 서려 있음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당시 나는 공직에 있긴 했지만 군사독재 정권에 대한 반감이 컸다. 1980년대 초반의 폭압적 시대 상황이 그로부터 거의 600년 전인 1453년 계유정난 때와 닮은 점이 많다고 느꼈다. 그러다 공직에서 물러나고 어느 날 ‘조선왕조실록’을 읽다가 두 개의 문장에 꽂혔다.”

그가 언급한 두 개의 문장이란 “난신(亂臣) 성삼문의 아내 차산과 딸 효옥은 운성부원군 박종우에게 노비로 주고”(실록 세조 2년 1456년 9월 7일)란 구절과 그로부터 20년 만인 성종 6년 1475년 5월 7일의 “차산과 딸 효옥을 석방해 주었다”는 구절을 말한다. 다시 작가의 말이다.



“효옥은 사육신 여섯 명 집안 중 유일하게 살아남은 후손이다. 아들이 아니라 딸이다 보니 살아남은 거다. 성삼문에게 어린 딸이 있었고 노비가 됐다는 이야기는 야사(野史)나 소설을 통해 스치듯 읽은 적은 있는데 과연 실존 인물이었는지는 잘 몰랐다. 그러다 실록에서 실재한 인물이었음을 확인하는 순간, 어린 나이에 예기치 못한 인생의 나락으로 빠진 효옥의 운명이 그려져 며칠 동안 가슴앓이를 했을 정도였다.”

- 역사 기록에 문학적 상상력을 입히는 역사소설을 쓰는 게 쉬운 작업은 아닌데.

“너무 힘들었다. 인물의 내면 탐구뿐 아니라 시대 배경까지 함께 넣어야 하는 작업이라 만만치 않았다. 역사적 기록에 충실하면 논픽션이 되고 허구만 쓰면 판타지나 동화에 가까워졌다. 앞으로 역사소설은 다시 쓰기 어려울 것 같다(웃음). ‘효옥’이 실존 인물이긴 하나 묻혀 있던 인물이다 보니 자료를 찾기가 쉽지 않았다. 게다가 역사라는 게 이긴 자들 편에서 기록된 것이 많기 때문에 균형감각을 찾으려면 백성 사이에 전하는 야사나 구전도 찾아 읽어야 하는데 남아 있는 것이 별로 없었다. ‘조선왕조실록’ ‘연려실기술’ ‘추강집’ ‘용재총화’ 같은 책을 읽으며 그 시대에도 충분히 가능했을 상황을 상상하며 실제 사건과 결합해 소설에 녹이려 노력했다. 이번에 ‘효옥’을 쓰기 전에 사육신과 단종, 세조에 관련된 자료를 토대로 두 권 분량의 책을 정리해놓은 것이 도움이 됐다.”

선악 기준이 무너지기는 그때나 지금이나…

- 사육신의 죽음은 제법 알려진 사실이라 새로울 것은 없는데 조선 왕 중에서 존재감이 별로 없는 예종이 매우 개혁적인 군주로 그려진 것이 특이했다. 이 역시 역사적 사실인가.

“그렇다. 예종은 큰형인 도원군 의경세자가 요절하는 바람에 세조를 이어 8대 임금이 된다. 나도 그랬지만 그에 대해 사람들이 잘 모르는 것은 갑작스러운 돌연사로 재위 기간이 13개월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비운의 임금이었지만 당시로서는 놀라울 정도로 매우 파격적인 개혁을 추진하던 군주였다.

예종의 개혁 대상은 아버지 수양대군과 함께 쿠데타로 집권한 공신 권력이었다. 이들은 자신들의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해 각종 계급적 특권을 갖고 있었다. 관직을 사고파는 분경(奔競)에서부터 살인죄를 지어도 처벌받지 않는 면죄(免罪), 땅을 세습할 수 있는 공신전(功臣田), 세금 납부를 상인들이 대행해 주는 대납권(代納權)까지 있었다. 예종은 과감하게 이런 적폐 청산에 손을 댄다. 분경을 금지하고 나라 땅을 백성들이 경작할 수 있는 직전수조법, 대납 금지에서부터 노비 면천까지 추진한다.”

- 노비 면천 조치에 따라 ‘효옥’도 20년 만에 노비 신세를 면하게 되는 건가.

“그렇다. 노비 면천은 사육신의 후손들을 의식한 조치이기도 했다. 억울하게 죽은 사육신에 대한 명예회복을 의식한 것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예종의 개혁은 공신들의 격렬한 반발과 본인의 갑작스러운 사망으로 물거품이 된다. 뒤이어 왕위를 물려받은 성종은 한명회의 사위였으니 결국 공신들이 이긴 셈이 됐다.”

- 책을 읽다 보면 참혹한 고통 속에서도 삶에 대한 희망을 잃지 않고 단단하게 우뚝 서는 효옥의 드라마틱한 삶에 매료된 작가의 마음이 읽히기도 하던데, 특히 어떤 부분에 매료됐나.

“선악의 기준이 혼돈스러운 난세이기는 그때나 지금이나 마찬가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효옥은 최고 명문가에서 태어났지만 자신의 신념을 위해 죽음을 선택한 아버지로 인해 한순간에 노비로 전락한다. 요새 말로 금수저로 태어났지만 하루아침에 부모를 잃은 것은 물론 자신의 처지도 가루처럼 부서져버린 상황이 된 거랄까. 삶이란 게 정말 예측 불가능하고 자칫 참혹한 지경에 빠질 수도 있지 않나. 그런 처지에 굴하지 않고 자기 길을 찾아 자립해 가는 한 인간을 효옥을 통해 그려보고 싶었다.”

- 효옥이 왕비가 돼달라는 예종의 청을 거절한다든지, 그 시대로는 드물게 은(銀)세공업에 뛰어들어 성공한 자본가(?)가 된다는 설정도 특이했다.

“어려웠던 구상이다. 그녀의 삶을 비극으로 마무리하기에는 너무 마음이 아팠고 해피엔딩으로 하고 싶어 고민을 많이 했다. 다만 결혼 잘해서 남자 덕으로 신분 상승을 하는 설정이 아니라 자기의 업(業)과 길을 찾아 자신만의 세계를 일구는 여인으로 그려보고 싶었다. 그래서 착안해 낸 것이 은세공업이었다.”

- 왜 하필 은세공업인가.

“파리 목숨(?)인 벼슬살이로 성공하기보다 여성 기업인으로 성공하는 설정을 해봤다. 효옥에게 어떤 업을 주어야 가능할까 골몰했다. 조선시대 여성이 경제적 자립을 이룰 수 있는 방법이라는 게 마땅치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공신들 마나님들이 명품 장신구로 온갖 치장을 했다는 기록을 읽다가 ‘이거다’ 싶어 무릎을 탁 쳤다. 금속공예를 전공한 조카에게 도움을 청해 이 분야에 대한 책과 자료를 탐독하면서 상상력을 펼쳐나갔다.

예종과의 러브라인도 독립적인 여성으로 그리기 위해 넣은 설정이다. 노비가 된 역적의 딸과 세자의 인연이란 게 좀 억지스러울 수도 있지만 그 시절도 사람 사는 세상이니 남녀 간의 사랑이 없을 수 없지 않았겠나. 실록과 각종 야사 자료 등을 뒤적이다 보니 효옥과 바우, 예종의 고통과 번민이 어떠했을지 짐작도 되고 한편으로는 서로 간의 연민과 애증도 깊었으리라는 생각도 들어 나름대로 연결고리를 만들어보았다. 나중엔 왕비가 돼달라는 청을 거절할 정도로 효옥을 독립적인 여성으로 표현하고 싶었다.”

- 개인적으로 매력을 느끼는 인물을 꼽는다면.

“김시습이다. 기록에 따르면 사육신은 군기감, 지금의 서울 광화문 프레스센터 앞에서 사지가 찢기는 거열형에 처해지는데, 이들의 몸뚱이를 수습해 노량진에 묻어준 이가 바로 조선 최고 천재 승려 김시습이었다. 그는 일찌감치 벼슬을 버리고 스님이 됐는데, 수양대군이 임금이 됐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불경을 불사른 뒤 파계승이 돼 ‘금오신화’를 남겼다. 기회가 된다면 전기를 써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정말 매력적인 인물로 다가왔다.”
그는 이 대목에서 책을 펼치더니 김시습의 이름을 빌려 독자에게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었다고 했다.

- 그게 뭔가.

“왜 선(善)은 악(惡)에 질까 하는 것이었다. 내가 한때 세상에 묻고 싶은 것이기도 했다. 그걸 효옥이 묻고 김시습이 대답하는 식으로 쓴 거다.”

그가 책을 펼치더니 “왜 하늘은 옳은 자를 돕지 않느냐”는 효옥의 절규에 답하는 김시습의 말을 낮은 목소리로 읽었다.

“이기고 지는 것은 이 세상의 시간으로는 판단할 수 없다. 우주 만물은 영원하고 세세대대 생명은 이어진다. 그 긴 시간 속에서야 이기고 지는 걸 판별할 수 있다. 또 세상살이에서 정의가 꼭 불의를 이기는 것이 아니다. 사바세계에서 짧은 시간으로 보면 선이 악에게 질 때가 더 많다. 악은 이기기 위해 선택하는 방법조차도 교활하고 부도덕하지만 선은 그리할 수 없기 때문에 판판이 악에게 지고 만다. 그런데 긴 시간을 두고 보면 이긴다는 것도 진다는 것도 별 의미 없다. 죽음과 삶이 하나이듯 이 모든 것이 형체가 없어 무라고밖에 할 수 없다.”(171쪽)

“시간이 멈춰 있는 것 같아도 매 순간 우리는 죽음으로 향해 가지 않더냐. 그들도 얼마 안 가 제 운명 속에서 죽음을 맞이할 것이다. 아무리 용을 쓴들 세조도 한명회도 머잖아 죽을 것이다. 남는 건 이름뿐이다. 짧도다. 부질없도다. 악이 찰나라면 선은 영원한 것… 너는 어떤 사람이고자 함이냐.”(172쪽)

충절, 믿음, 의리는 버려도 좋은 것인가

- 집필 기간이 길었다고 들었다.

“꼬박 6, 7년이 걸렸다. 탈고하고도 출판까지 또 2년이 걸렸다. 책이 원래 500쪽 분량이었는데 344쪽으로 줄인 거다. 퇴고를 한 스무 번 정도 한 것 같다. 이만하면 됐다 싶다가도 두세 달 지나 다시 보면 맘에 들지 않는 대목이 보여 시간이 오래 걸렸다.”

그는 “포기할까 하는 순간도 여러 번 있었지만 다듬고 또 다듬었다”며 마음에 와닿는 단어를 찾기 위해 국어사전을 처음부터 끝까지 통째로 읽기도 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문장 곳곳에는 ‘배래기’ ‘우듬지’ ‘는개’ ‘노둣돌’ ‘거미치밀다’ ‘모들뜨다’ ‘노구메’ ‘지릅뜨다’ ‘요두전목’ ‘손석풍’ ‘자빗간’ 등 생소하지만 아름다운 우리말이 눈에 많이 띈다.

- 글은 당신에게 무엇이었나.

“누구나 그렇지만 나도 마음의 소용돌이가 많았다. 숫자를 다루는 공직에서 오래 일했다는 것을 아는 주변 분들이 소설을 냈다고 하니 놀라는 분들이 많았다. 사실 학교 다닐 때 책을 너무 좋아해 기자가 되고도 싶었다. 그러다 공직을 마치고 글을 읽고 쓰면서 위로도 받고 몰입할 수 있어서 마음 속 힘든 감정들을 잊을 수 있었다. 앞으로도 나 자신이나 공동체, 사회 개개인의 정신적 삶을 지탱해 줄 수 있는 일을 역사와 문학을 통해 해보고 싶다는 꿈이 있다.”

- 결국 책에서 가장 말하고 싶은 메시지가 뭐였나.

“우선 충절이라든지 믿음과 의리 이런 돈도 안 되는 가치들은 도대체 무엇인가? 3대가 모두 죽고 집안 남자들은 모두 죽어나가고 어머니 아내 딸은 노비가 되는 참혹한 지경을 감당해야 하는데도 의리와 충절을 지킨 여섯 명의 사육신과 생육신의 삶은 이렇게 잊혀도 되는 것인가…나라도 한을 풀어주고 싶었다. 따지고 보면 현재의 우리는 지난 역사 고비 고비마다 충절을 지킨 조선 선비들, 일제 때 독립운동가들, 현대에 들어서서는 민주화를 위해 헌신한, 한마디로 보이지 않는 가치를 위해 모든 것을 내던지고 본인뿐 아니라 가족들까지 참혹한 운명으로 떨어지는 것을 견뎌낸 선인들이 계셨기 때문 아닌가. 집필 기간 내내 그들에게 진정 감사해야 한다는 마음으로 썼다.”

그는 무엇보다 젊은 세대를 향해 하고 싶은 말이 있다고 했다.

“어떤 분이 인터넷 리뷰에 “‘정의와 공정’이 공동의 중심 과제가 된 현재를 관통하는 책”이라고 평해 준 게 고마웠다. 현대가 신분제 사회는 아니지만 경제적으로는 신분제 사회에 버금갈 정도로 빈부격차에 따른 간극이 공고해지고 있다.

이런 현실에서 삶을 시작하는 젊은이들, 특히 여성들이 스스로의 빛과 길을 찾아가는 데 조금이나마 위안이 되고 힘이 됐으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썼다. 책에 ‘죽지 말고 살아남아야 한다’는 말을 세 번 썼다. 아버지 성삼문이 효옥에게, 김시습이 효옥에게, 또 예종이 노비 바우에게 하는 말이 그것이다. ‘견디고 살아남자’는 말은 나 자신뿐 아니라 인생의 어두운 터널을 통과하고 있는 힘든 분들에게 작가로서 드리고 싶은 말이기도 하다.”

그가 잠시 호흡을 고르더니 말을 이었다.

“작가 후기에 ‘낮고 어두운 곳에서, 억눌러두었던 말들이 아름다운 글로 승화되기를 기도하였다’라고 썼는데 소설 속 주인공들에게도 한 말이지만 나의 말이기도 하다. 내 마음속 억눌러두었던 말들이 아름다운 글로 승화돼 읽혔으면 하는 마음이다.

누구나 살면서 어려움을 겪는다. 큰 병에 걸릴 수도 있고, 예기치 못한 큰 우환을 당할 수도 있고 아무 잘못도 없이 억울함을 당할 수도 있다. 하지만 절대 삶을 포기하지 말았으면 좋겠다. 어떻든 길이 생기더라는 게 내 경험이다. 앞이 안 보이고 캄캄해도 어려운 일은 반드시 지나간다. 한쪽 문이 닫히면 다른 문이 열린다. 그리고 고난 속에서 삶은 더 단단해진다. 정말 그렇다.”

#효옥 #전군표 #플라톤아카데미 #신동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