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명 잡기 위해 시작된 ‘적통 논쟁’
‘노무현 탄핵 문제’로 맞불 놓는가 싶었지만
김경수 실각에 ‘친문 적자’ 경쟁으로 비화
친문 후계세습 갈등 접고, 정책 경쟁 돼야
‘민주(民主)’ 참칭 ‘86 운동권’, 조선 후기와 다르지 않아
정세균 전 국무총리와 이광재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7월 5일 서울 여의도 국회소통관에서 대통령 후보단일화 합의를 발표하고 있다. 이날 이후 정 전 총리는 민주당 ‘적통’임을 자임하며 적통 경쟁에 불을 붙였다. [동아DB]
최근에는 적통을 구분하는 기준이 하나 더 생겼다. 바로 노무현 전 대통령과의 관계다. 특히 2004년 노 전 대통령의 탄핵 정국에서 어떤 모습을 보였는지가 중요해졌다. 적통 논쟁이 ‘노무현 적통 논쟁’으로 비화한 셈이다.
적자, 서자 하며 벌이는 적통 논쟁은 현대 민주주의 정체성과 부합하지 않는다. 특히 진보세력을 자칭하는 민주당 내에서라면 더욱 그렇다. 하지만 여권 후보들은 적통 논쟁을 상대를 공격하는 네거티브로 즐겨 쓰고 있다. 왜 자칭 ‘민주화운동 경력자’들이 모인 정당에서 조선시대에나 벌어질 법한 적통 논쟁을 벌어는 것일까.
적통 논쟁 시작은 ‘이재명 죽이기’
가장 먼저 ‘적통’이라는 표현을 꺼낸 건 정세균 전 국무총리와 이광재 더불어민주당 의원이었다. 6월 28일 정세균-이광재 단일화 기자회견에서 이 의원은 “저희 둘이 하나가 되고 민주당 ‘적통’ 후보 만들기의 장정을 이어가 국민과 당원, 지지자 여러분의 염원에 부응하겠다”고 말했다.이어 정 전 총리는 7월 13일 기자간담회에서 ‘이 지사와 비교했을 때 대선후보로서의 강점이 무엇이냐’는 질문을 받고 “제가 보기에 소위 (민주당의) 적통은 이광재 후보와 저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다른 분들도 훌륭하지만, 순도가 가장 높은 민주당원은 저와 이광재라고 생각한다”고 밝히면서 논쟁에 불을 지폈다.
불씨 키우기에 이낙연 전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동참했다. 7월 5일 대통령 선거 출마 의사를 밝힌 그는 자신이 ‘적통’이라고 표명했다. 그는 CBS 라디오에 나와서 “다른 분도 그렇겠지만 김대중, 노무현, 문재인 정부와 함께 성장했다는 것”이라면서 “세 분 대통령의 철학이 몸에 이미 배어 있다는 건 틀림없는 일”이라고 하면서 ‘민주당의 적통’임을 선언했다.
정 전 총리와 이 전 당대표가 ‘민주당 적통론’을 들고 나온 이유는 이 지사를 따라잡기 위해서다. 정통성을 중시하는 당원 표심을 집중 공략해 당내 비주류인 이재명 지사를 따라잡고 역전하는 데 ‘민주당 적통론’ 만 한 최상의 비밀병기는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김경수 실각에 격렬해진 왕위 다툼
‘드루킹 댓글 여론조작 사건’으로 대법원에서 징역 2년이 확정된 김경수 전 경남지사가 7월 25일 경남 창원시 창원교도소 앞에서 재수감되기 전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동아DB]
이 지사 측은 한 발짝 더 나갔다. 더 적극적인 공세로 전환하고자 “노무현 탄핵 표결 찬반론”을 꺼내 들었다. 7월 21일 CBS 라디오에 출연한 이 지사의 대선후보 캠프 상황실장인 김영진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본인이 여권의 적통이라고 하는데) 2004년에 노 전 대통령 탄핵 당시 찬성했는지, 반대했는지부터 분명히 밝혀야 한다”고 이 전 대표를 공격했다. 이날, 이 전 대표는 KBS 뉴스9에 출연해 탄핵 표결에 대한 질문을 받고 “(노 전 대통령 탄핵에) 반대했다”고 밝혔다.
이재명 경기지사 대선 캠프 종합상황실장을 맡고 있는 김영진 더불어민주당 의원. 김 의원은 이낙연 전 더불어민주당 대표에게 “2004년 노무현 대통령 탄핵 정국에서 어떤 선택을 했는지 밝히라”며 공세를 취했다. [동아DB]
여권의 대선후보 중 한 명인 김두관 의원도 뒤늦게 ‘노무현 적통 논쟁’에 뛰어들었다. 7월 23일 CBS ‘김현정 뉴스쇼’와 인터뷰하면서 그는 “적통 논쟁에 끼어들고 싶지 않은데 원조 논쟁을 하니까 진짜 원조 입장에서 개입하지 않을 수 없었다.”라고 언급했다. 김 의원은 탄핵 찬성 논란 당사자인 이낙연 전 당대표를 겨냥해 “노무현의 서자(庶子)는커녕 얼자(孼子)도 되기 어렵다”고 직격했다. 이어서 그는 “(이 전 당대표는) 당시 한나라당이라는 야당과 손잡고 노무현 대통령을 탄핵한 정당(새천년민주당)의 주역이다”라고 했고, 이재명 지사를 향해서도 “노무현 정부 말기 정동영 전 의원 지지 의사를 밝혔던 전력이 있다”며 공격했다.
이재명은 ‘노무현 적자 찾기’로 되치기
이 전 대표와 정 전 총리에 이어 김 의원까지 자신을 적통이라고 주장하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 이들은 친노·친문 지지자들의 표심을 자기에게 유리하게 결집해 판세를 뒤집겠다는 전략을 세운 것으로 보인다. 때마침 7월 21일 친노친문의 ‘적자(嫡子)’라고 하는 김경수 경남지사가 ‘드루킹 댓글 여론조작 혐의’로 구속됐다. 민주당 적자의 자리가 무주공산이 된 셈이다. 이 자리를 두고 세 후보가 경합을 벌이는 형국이다.이 지사의 셈법은 이들과는 다르다. 이 지사 측은 ‘노무현 탄핵 표결론’을 통해 일종의 이간계(離間計)를 시도했다고 볼 수 있다. 이 지사는 여권 지지율 2위인 이 전 대표를 견제하기 위해 이 같은 전략을 편 것으로 보인다. 17년 전 탄핵 정국의 기억을 되살리면 친노·친문 지지자들이 이 전 대표 측으로 결집되는 현상을 조금이라도 막을 수 있다. 동시에 정 전 총리와 김 의원 등 다른 후보도 친노 적자 논쟁에 참가함으로써 당원들의 지지가 세 후보에게 고루 흩어지게 할 수 있다.
미국의 저명한 정치학자 샤츠슈나이더(E. E. Schattschneider)는 저서 ‘절반의 인민주권’에서 ‘편향성의 동원(mobilization of bias)’이라는 전략을 소개한다. 이는 특정 집단이 불리한 갈등을 숨기기 위해 유리한 갈등만을 편향적으로 부각해 시민들의 참여를 동원하는 방식이다. 이 지사도 자신이 불리한 ‘민주당 적통 경쟁’에서 탈피하기 위해 ‘노무현 적통 경쟁’이라는 새 갈등을 내놓은 셈이다.
2003년 2월 25일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노무현 당시 대통령이 취임사를 하고 있다. [동아DB]
무주공산된 ‘친문 적자’, 다시 다툼 격화
7월 26일을 기점으로 민주당 대선 경선 후보들은 ‘적통 논쟁’ 2라운드에 들어갔다. 포문을 연 것은 김 전 지사였다. 대법원에서 유죄판결을 받은 그가 수감 직전 이 전 대표에게 “대통령을 잘 지켜달라”는 당부를 남겼다고 알려졌다. 이 전 대표는 “(김 지사의 눈물겨운 당부에) 어떠한 일이 있어도 대통령을 잘 모시겠다”고 답했다는 통화 내용을 공개했다. 이 전 대표가 김 전 지사의 ‘친문 적통’을 계승했다고 주장한 셈이다.지지율 1위인 이 지사 측은 이 같은 주장에 빠르게 반응했다. 이 지사의 수행실장인 김남국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이 전 대표가 통화 내용을 공개해 일부러 ‘문심’이 여기 있다는 식으로 오해하게 하려고 했다”고 공격했다. 결국 적통 논쟁은 ‘민주당 적통’ ‘친노 적통’을 넘어 ‘친문 적통’ 검증까지 불거지게 됐다.
송영길 민주당 대표는 내홍 진화에 나섰다. 송 대표는 7월 28일 경선 후보 6명이 참여하는 ‘원팀 협약식’을 열어 후보 간 네거티브를 멈춰달라 부탁했다. 하지만 협약식 이후 8월 4일 YTN이 주관한 2차 TV토론에서 ‘노무현 적통’ 논쟁에 다시 불이 붙었다. 이날 토론에서 정 전 총리는 고(故) 노무현 전 대통령 탄핵 당시 “이낙연 후보가 원내대표 시절인 2006년 2월 교섭단체 대표연설에서 노무현 정부를 군사독재 정권보다 빈부격차를 키운 반서민적 정권, 사회분열로 대표되는 실패 정부, 무능하고 미숙한 정부로 규정하면서 노무현 전 대통령을 아주 독하게 비판했다”고 지적했다. 이에 이 전 대표는 “당시 야당으로서 격차 확대에 대한 저 나름의 분노를 표현한 것”이라며 “그 기간에 서로 상처를 주고받은 것은 가슴 아프게 생각한다”고 고개를 숙였다.
후보 과거 두고 네거티브 일삼아선 안 돼
지금의 민주당 대선후보 경선은 누가 더 나은 민주공화국의 대통령인지를 놓고 겨루는 경선이 아니라 ‘문재인 대통령을 지킬 권리’를 두고 벌어지는 후계세습을 위한 쟁탈전처럼 보인다. 대권주자들의 반응도 실망스럽다. 하나같이 국민을 지키는 일보다는 ‘적통’을 지키는 데 관심이 많아 보인다.집권 여당의 경선이 친문주류의 간택받기용 경선으로 변질되면서 국민과의 대화는 실종돼 버렸다. ‘적통’을 두고 다투고 있는 민주당의 지금은 시대착오적인 구태에 가깝다. 민주화 세력을 자임하던 소위 ‘86 운동권’은 변했다. 지금의 민주당은 피의 순수성과 도덕적 우월성에 따라 위계 서열을 나누는 조선 후기 사람들과 다르지 않다. ‘민주(民主)’를 참칭할 뿐이다.
지금의 작태는 그들이 ‘적통’의 증거 중 하나로 삼는 ‘노무현 정신’과도 거리가 멀어 보인다. 노 전 대통령은 2003년 2월 취임사에서 “반칙과 특권 없는 기득권 타파” “상식이 통하는 사람 사는 세상”을 강조했다. 2021년 여당 대선후보 경선에서 적통 논쟁을 벌인다는 것 자체가 상식과는 거리가 멀다.
대선후보 정통성을 겨루겠다며, 각 후보가 이전 민주당 정권과 얼마나 가까웠는지를 놓고 경쟁해서는 안 된다. 민주주의사회 내의 정통성은 각 후보가 민주당이 가진 정신을 얼마나 잘 구현하느냐에 달려 있다. 마침 노 전 대통령이 적통 경쟁에 소환됐으니, 지금부터는 누가 더 노무현 정신을 잘 구현할 후보인지를 두고 다투는 것이 어떨까. 상대방의 과거를 두고 비난하는 ‘네거티브(Negative)’보다, 어떻게 한국을 바꿀 것인지에 대한 경쟁, 즉 ‘포지티브(Positive)’ 차원의 경쟁을 벌이는 방식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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