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당, 징벌적 손해배상 규정한 언론중재법 입법 강행 추진
“언론개혁 탈 쓴 언론 통제” 비판 속출
KBS노조, 릴레이 1인시위 통해 법 개정 부당성 공론화
“살아 있는 권력 향한 의혹 제기 가로막으려는 시도”
“단식, 농성, 서명운동 등 모든 수단 동원해 반드시 막아내겠다”
허성권 KBS노동조합 위원장은 “언론중재법이 통과되면 살아 있는 권력자에게 절대적으로 유리한 언론 환경이 조성될 것”이라고 우려했다. [조영철 기자]
허성권(43) KBS노동조합(KBS노조) 위원장이 한 얘기다. KBS노조는 국내 주요 언론 관련 단체 가운데 가장 먼저 언론중재법 개정안 반대 운동을 시작했다. 허 위원장을 비롯한 조합원들은 8월 2일부터 국회 앞에서 릴레이 1인 시위를 이어가고 있다. 이 시위엔 KBS 기자뿐 아니라 PD, 아나운서, 경영·기술직종 종사자까지 자발적으로 참여하고 있다는 게 노조 측 설명이다. 허 위원장은 그 이유에 대해 “이 법이 제정되면 언론 자유가 심각하게 위축되고 국민의 알권리가 침해된다는 데 많은 조합원이 공감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민주당은 7월 27일 국회 문화체육관광위원회(문체위) 법안심사소위원회(법안소위)에서 언론중재법 개정안을 단독 처리했다. 언론사에 최대 5배에 이르는 징벌적 손해배상책임을 물리는 게 골자다.
개정안에는 이외에도 △취재 과정에서 법을 위반하거나 △정정보도 청구를 받은 기사를 검증 없이 인용 보도하거나 △기사 내용과 다른 사진·삽화·제목 등을 사용한 경우 언론사에 고의·중과실이 있는 것으로 추정하는 등의 내용이 포함됐다. 징벌적 손해배상액을 정할 때 언론사 전년도 매출액을 고려하도록 하는 조항도 있다.
전문가들은 이 법이 제정되면 언론 자유를 크게 위축시킬 것이라고 우려한다. 친여 성향의 전국언론노동조합조차 “일반 시민 피해 구제보다는 권력과 재벌이 자신들 입맛에 맞게 악용할 소지가 농후하다. 언론개혁의 탈을 쓴 ‘언론 통제’이자 ‘언론 유린’”이라고 비판했을 정도다. 그동안 여러 의제에서 민주당과 보조를 맞춰온 정의당은 당론으로 반대의견을 밝혔고, 관훈클럽·한국기자협회·한국신문협회 등 6개 언론 단체는 개정안 철회를 요구하는 서명운동을 진행하고 있다.
한국신문협회는 8월 12일 세계신문협회가 “(민주당이 추진하는 언론중재법 개정안은) 비판 언론을 침묵시키고 대한민국의 민주주의 전통을 훼손시킬 우려가 있다”며 “한국 정부와 여당 등 관계기관은 성급히 마련된 언론중재법 개정안을 즉각 철회할 것을 촉구한다”는 내용의 공식 성명을 보내왔다고 밝혔다. 세계신문협회는 60여 개국, 1만5000여 언론사가 가입한 세계 최대 규모 언론 단체다.
논란이 확산하자 민주당은 8월 12일로 예정한 문체위 전체회의를 취소하고 법안 수정 의견을 내놓는 등 숨고르기에 들어갔다. 문체위 소속 박정 민주당 의원은 이날 김의겸 열린민주당 의원과 함께 기자회견을 열고 △‘고위 공직자 및 선출직 공무원, 대기업 임원 등 대통령령으로 정한 사람’의 경우 언론에 징벌적 손해배상을 청구할 수 없도록 하는 등의 수정안을 발표했다. 하지만 민주당이 징벌적 손해배상제 골격을 유지하기로 한 데다 8월 중 국회 처리 의사도 굽히지 않아 진통이 예상된다. 허 위원장은 “조문 몇 개를 수정한다고 이 법의 문제점이 사라지지는 않는다”라며 “언론중재법 개정안은 언론 보도에 명확한 기준 없이 ‘허위·조작’ 낙인을 찍고 언론사가 무분별한 소송에 노출될 수 있게 한다는 점에서 출발부터 잘못된 법”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언론개혁’ 탈 쓴 언론통제법”
- ‘징벌손배법 NO’라고 적힌 종이판을 들고 국회 앞에서 1인 시위하는 모습을 봤다. 언론중재법을 ‘징벌손배법’이라고 하는 이유가 있나.“이 법안의 대표적 독소 조항이 ‘징벌적 손해배상제’라고 보기 때문이다. 7월 27일 민주당이 언론중재법 개정안을 강행 처리할 당시 문체위 법안소위 회의록을 보면, 정부를 대표해 참석한 오영우 문체부 차관조차 징벌적 손배제에 대해 ‘전례가 없다’고 말한다. 언론사 매출을 기준으로 징벌적 손배액의 하한을 정하는 규정에 대해서도 ‘정말 이것은 다른 입법례도 없고 너무 과도한 그런 것’이라고 했다. 국회입법조사처 또한 회의에 앞서 야당 의원에게 ‘해외 주요국에서 언론에 대한 징벌적 손배제를 별도 규정한 사례는 찾지 못했다’고 보고한 바 있다. 징벌적 손배제는 기본적으로 영미법계 나라 법원이 판결을 통해 형성한 시스템이다. 여당이 왜 언론만 타깃으로 한 법률을 별도로 만들겠다고 나서는지 이해하기 어렵다. 그 배경엔 언론보도를 위축시켜 권력 비판 기사 생산을 막겠다는 의도가 있다고 볼 수밖에 없다. 그래서 1인 시위를 하며 ‘대선을 앞두고 언론에 재갈을 물리지 마라’ ‘언론 자유를 죽이지 마라’고 요구하는 것이다.”
- KBS노조는 8월 2일 국회 앞 1인 시위를 시작하며 언론중재법 문제를 공론화했다. 왜 거리에 나섰나.
“민주당이 다수의 힘을 앞세워 법안 처리를 강행하려는 모습을 보였기 때문이다. 앞서 언급한 7월 27일 문체위 법안소위 회의록을 보면 야당 소속 위원들이 ‘법안을 미리 나눠주지도 않고 회의를 하면 되느냐’고 따진다. 표결 때까지 같은 항의를 반복하는데도 수적 열세 때문에 법안 처리를 막지 못한다. 언론이 국민 삶에 미치는 영향이 얼마나 큰가. 그 문제와 직결된 법안을 만들려면 적어도 여야가 심도 있는 논의 정도는 해야 하지 않나. 그런데 민주당은 스스로 정해 놓은 시간표에 맞춰 일방적으로 법 개정을 몰아붙이고 있다. 민주사회에서 용납할 수 없는 일이다. 문체위 법안소위 처리 과정을 본 뒤 조합원들과 논의해 1인 시위를 시작했다. 이 법안의 문제점과 위험성을 널리 알려야겠다는 생각에서다.”
- 민주당은 언론의 허위·조작 보도로 피해를 본 국민을 구제하고자 법 개정을 추진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 의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언론계에서 악의적 오보, 이른바 ‘가짜 뉴스’를 퇴출해야 한다는 데는 동의한다. 그러나 빈대를 잡겠다고 초가삼간을 태워서는 안 된다. 앞서 언급했듯 세계 대다수 국가가 민사법의 손해배상 제도를 통해 오보에 대응한다. 또 우리 형법엔 ‘사실의 적시’도 명예훼손으로 처벌할 수 있는 조항이 있다. 민·형사법과 언론중재위원회 제도 등을 갖고 있는 우리나라에서 왜 언론만을 규제하는 별도의 법을 또 만들어야 하나. 심지어 개정안에서 규정하는 ‘허위·조작 보도’ 기준조차 매우 불명확하다. 살아 있는 권력이 이 조항을 악용하면 언론의 비판적 보도 기능이 사실상 마비될 수 있다. 극단적으로 말하면 앞으로는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같은 일이 벌어져도 관련 보도를 할 수 없게 될지 모른다.”
- 그 이유에 대해 좀 더 구체적으로 소개한다면.
“1987년 1월 대학생 박종철 씨가 시국사건으로 경찰 조사를 받다 숨을 거뒀다. 사건 초기 언론이 확인한 사항은 이 정도가 전부였던 걸로 안다. 경찰은 사인을 ‘쇼크사’라고 밝혔고, 여러 기자의 취재에 ‘모르쇠’로 일관했다. 그럼에도 언론은 집요하게 사건을 추적하고 의혹을 보도했다. 언론중재법이 개정돼도 이런 취재가 가능할까. ‘확실한 증거 확보’ 없이 기사를 썼다 오보로 판명될 경우 언론사뿐 아니라 기자까지 징벌적 손해배상책임을 지게 될 수 있는데 말이다. 심지어 손배액을 책정할 때 언론사 매출을 감안하게 했으니, 규모가 큰 언론사라도 위축되지 않을 도리가 없다. 한 언론이 보도한 내용을 보면 KBS의 경우 배상액이 수십억 원에 이를 수 있다고 한다. 이 위험을 피하려고 이중삼중 취재를 거듭하다 보면 보도의 적절한 타이밍을 놓칠 수 있다. ‘살아 있는 권력’이 그사이 관련 증거를 깨끗이 인멸해 버리면 사건은 덮이고, 국민의 알권리는 실종되는 것이다.”
언론의 권력 감시 기능 사라질 위험
허 위원장은 “언론중재법이 국회를 통과하면 세상을 바꾸는 심층 고발 기사가 나오기 어려워진다. 대신 홍보성 미담 기사만 넘쳐나게 될 것”이라고 했다. 2006년 신문기자로 언론 경력을 시작한 그는 2012년 KBS로 회사를 옮겼다. 신문·방송을 합쳐 16년간 기자 생활을 하는 사이 힘든 일도 없지 않았지만, 보람을 느낀 순간이 더 많았다고 한다.“야간 당직을 서다 보면 종종 제보 전화가 걸려온다. 억울한 일을 당하고 경찰, 검찰 다 찾아갔다가 문전박대를 당한 분들이다. ‘믿을 곳이라곤 언론사밖에 없다’며 손을 내미시는 그분들 제보를 받아 취재하고, 다행히도 억울함을 풀어드리면 그렇게 뿌듯할 수가 없었다. 이게 기자 생활의 보람이다. 언론중재법이 통과되면 이런 취재가 지금보다 훨씬 어려워질 것 아닌가.”
허 위원장이 한숨을 내쉬며 한 말이다.
- 왜 그렇게 생각하나.
“제보자가 모든 증거를 완벽하게 수집해 갖고 오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고위 공무원이 성추행을 저질렀다고 해보자. 피해자의 증언과 정황 증거밖에 없을 때 기자가 뭘 할 수 있겠나, 지금까지는 합리적 추론으로 의혹을 제기해 수사기관이 움직이도록 만들 수 있었다. 언론중재법이 통과되면 그런 보도에 대해 상대방이 ‘가짜 뉴스’라고 소송을 걸기 쉬워질 것이다. 자칫 막대한 배상금을 물게 될 수도 있다. 기자와 언론사는 훨씬 위축될 것이다.”
허 위원장은 “아직 시민들은 이 상황을 잘 모를 것”이라며 “법 통과 뒤 기자들이 제보를 받는 데 조심스러운 모습을 보이면 언론에 대한 불신과 외면이 더 커지지 않을까 걱정”이라고 했다.
- 각종 여론조사를 보면 시민들 사이에선 언론중재법 개정에 찬성하는 의견이 우세하다. 민주당은 그 자료를 근거 삼아 언론중재법 개정 드라이브를 건다.
“나도 현실을 잘 알고 있다. 언론중재법 반대 1인 시위를 시작한 뒤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 관련 사진을 올린 일이 있다. 그 아래 ‘기레기’ ‘기더기’라는 비판 댓글이 여러 개 달리더라.”
허 위원장은 이 대목에서 “그동안 언론이 잘못한 부분이 많다는 걸 인정한다”고 했다. “KBS만 해도 국민을 실망시킬 만한 오보와 정권 편향적 보도를 많이 했다. 뼈저리게 반성하고, 문제를 바로잡기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고도 했다.
- 언론중재법 개정과 관련해 시민들께 하고 싶은 얘기가 있나.
“언론이 힘을 잃으면 권력을 감시하고 견제할 수단이 사라진다는 말씀을 꼭 드리고 싶다. 민주당이 주도하는 언론중재법 개정안이 국회를 통과하면 살아 있는 권력에 절대적으로 유리한 환경이 조성된다. 그것은 평범한 시민들의 삶에 결코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다. 언론이 우리 사회에서 제 구실을 할 수 있게, 또 각종 탐사보도의 싹이 사라지지 않게 언론중재법 개정을 막는 데 동참해 주시기를 부탁드린다.”
허 위원장에게 마지막으로 법안 처리 전망에 대해 물었다. 그는 “솔직히 말하면 개정 가능성이 커 보인다”고 했다. “국회에서 강력한 수적 우위를 가진 민주당이 밀어붙일 경우 막을 방법이 없다”는 이유에서다.
“그래도 마지막까지 희망을 버리지 않으려 한다. 현재 많은 전문가와 언론 관계자들이 정치 성향에 관계없이 한목소리로 개정안에 반대하고 있다. 그 힘을 모아내려고 노력하겠다. 8월 12일 서명운동을 시작했다. 단식, 농성 등 가능한 모든 방법을 더 동원할 생각이다.”
허 위원장의 말이다. 한편 KBS에는 현재 노조가 3개 있다. 허 위원장이 몸담고 있는 KBS노조는 1988년 설립된 이른바 ‘제1노조’다. 이외에 ‘전국언론노조 KBS본부’(제2노조), ‘KBS공영노조’(제3노조) 또한 현재 언론중재법 개정에 반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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