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윤채근 단국대 교수가 우리 고전에 기록된 서사를 현대 감성으로 각색한 짧은 이야기를 연재한다. 역사와 소설, 과거와 현대가 어우러져 독자의 상상력을 자극할 것이다.
“우리 마지막으로 저포 놀이나 한판 더 합시다.”
주사위를 공중으로 던지려다 멈칫한 그가 빙그레 웃으며 덧붙였다.
“당신이 이기면 떠들썩하게 법회 한 자리 열어드리겠소! 하지만 내가 이기면 이 쓸쓸한 삶을 끝내기 전에 재미난 동반자 한 명 보내주시구려.”
구령은 한참 동안 주사위 던지기를 반복했다. 홀수 번째는 자기를 위해, 짝수 번째는 부처를 위해 그는 나름대로 공평한 마음으로 주사위를 던져 각자의 말을 움직였다. 마침내 자신의 모든 말이 부처의 말을 잡고 관문을 통과해 행마 도판의 종점에 도착했다. 그가 입술을 뒤틀며 비시시 웃었다.
“부처! 이번에도 꼭 약속을 지켜주셔야 하오?”
날벼락처럼 찾아온 큰 깨달음
어린 나이에 부모를 잃은 구령은 삼남 지역을 두루 떠돌다 스무 살이 훌쩍 넘어서야 고향인 남원으로 돌아왔다. 조선 천지에 일가붙이 하나 없던 그는 만복사 객방에 얹혀살며 가끔 귀동냥으로 불경을 외우곤 했다. 그런 그에게 날벼락처럼 큰 깨달음이 찾아온 건 당간지주 옆 배나무 아래에서 홀로 서성이던 어느 봄밤이었다. 당나라 선불교의 여섯 번째 종사 육조 혜능이 금강경 독경 소리에 느닷없이 대각을 이루었듯, 그는 어떤 전조도 없이 일거에 파천황의 득도를 이루었다.부처가 성불 과정에서 거쳤다는 멸진정의 깨달음이란 실은 영겁의 고독을 받아들이는 과정에 지나지 않았다. 그는 뜨거운 불길 같은 극한의 외로움 앞에 마주해야 했다. 삶은 덧없어졌고 인간으로서 누릴 세상 즐거움은 소멸했으며 타인과 어울려 이룰 보람마저 연기처럼 스러졌다. 심지어 자신이 겪는 깨달음의 신열을 나눌 동지를 만날 수도 없었다. 만복사 주지를 찾아가 속내를 밝혀봤지만 주지로부터 돌아온 답은 예상대로였다.
“구령아. 그건 가짜 깨달음이다. 진정한 성불이란 곧 자비이니라. 너의 눈 속엔 분노와 무지뿐이로구나. 우선 율법을 익힌 뒤 구족계를 받고 비구가 되어라.”
구령은 비구가 될 마음이 눈곱만큼도 없었다. 남원 땅은 남해안으로 침입한 왜구가 육지로 북상할 수 있는 최종점이었다. 왜구는 걸핏하면 남원성까지 쳐들어와 양민을 학살하고 식량을 약탈해 갔다. 주변의 많은 절은 어떤 도움도 되지 못했고, 고작해야 피신한 백성을 달래주는 게 전부였다. 신심 깊은 일부 왜구는 절을 건드리지 않았지만 대부분은 법당까지 침범해 숨어 있는 여자와 아이들을 노예로 잡아가기 일쑤였다. 구령은 주지에게 이렇게 대답했다.
“제 비록 절에서 기식하는 처지입니다만, 어린 나이에 부모를 살리려 왜구와 싸웠던 몸입니다. 살생까지 했습니다. 가족을 지키진 못했으나 언젠가 지킬 게 생긴다면 또 칼을 들 것입니다.”
주지는 벽력같이 화를 내며 그를 법당에서 쫓아냈다. 허탈한 마음에 달을 보며 울던 그는 혹시 자신이 얻은 깨달음이 거짓일지 모른다고 생각하게 됐다. 번민하던 그는 묘수를 하나 발견하곤 기쁨에 겨워 밤잠을 설쳤다.
부처와의 저포 놀이
구령은 매일 저녁 대웅전에 숨어들어 부처와 저포 놀이를 벌였다. 처음엔 다음 날 해야 할 일을 내기로 걸었다. 자신이 이기면 그날까지 모은 품삯을 들고 저자에 나가 도박을 벌이고, 지게 되면 법당 헌금함에 시주하는 식이었다. 내기 판돈은 점점 커졌고 내용도 갈수록 대범해져 갔다. 구령은 마침내 자기 신체 일부를 내기로 걸고 저포를 던졌다. 처음으로 손가락 하나를 잃던 날엔 작두를 움켜쥔 손이 망설임과 두려움으로 사정없이 떨리기도 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내기에 중독된 그는 물불을 가리지 않고 놀이에 몰두했다.얼마 지나지 않아 그나마 있던 재산을 모조리 탕진한 그는 손가락 세 개는 물론 발가락 둘마저 잃게 됐다. 절뚝발이에 술주정뱅이로 전락한 그의 몰골을 본 주지는 혀를 끌끌 차며 승방으로 불러 이렇게 물었다.
“네놈 하는 짓을 도대체 이해할 수가 없다. 언제는 성불하겠다고 큰소리를 치더니 요즘 하는 해괴한 행각은 또 뭐냐? 몸뚱이가 전부인 녀석이 제 몸은 왜 그리 험하게 다루느냐?”
고개를 숙인 채 키득거리며 웃던 구령이 고개를 번쩍 쳐들며 느리게 말했다.
“당나라 혜가 스님을 아시지요?”
눈썹을 꿈틀대던 주지가 노기 띤 목소리로 대답했다.
“물 긷는 말단 비구조차 못 되는 놈이 어디 감히 내게 모욕을 주는 게냐? 보리달마 대사로부터 불법을 전수받은 혜가 스님을 누가 모른다더냐?”
기름기 가득한 끈적끈적한 음성으로 구령이 느긋하게 말했다.
“과연 제대로 아시기는 합니까? 달마 앞에서 한쪽 팔을 잘라낸 그 마음 말입니다.”
분기탱천해 벌떡 일어선 주지가 노여움으로 부들부들 떨며 대답했다.
“혜가는 달마로부터 인정받기 위해 팔을 자른 게 아니다.”
“그럼 왜 자른 걸까요?”
“자신의 번뇌를 자른 것이다. 그래서 달마가 그 뛰어난 법력을 인정했던 것이야! 내가 왜 너 같은 천한 놈과 이런 얘길 해야만 하는 것이냐? 썩 물러가거라!”
술기운에 비틀대며 일어선 구령은 절뚝대며 방을 벗어나려다 문득 뒤돌아보며 말했다.
“웃기는 말씀! 그건 그냥 팔을 잘라낸 겁니다. 지루하고 적막한 삶에 그만한 재미가 어디 있겠소? 대자유를 얻었으니 뭐든 해보는 거지요. 노는 놈들끼리는 서로를 알아본다고, 달마도 그걸 재깍 눈치챈 게 아님 뭐겠소?”
부처와 마지막 저포 놀이를 마친 구령은 무언가 재미있는 인연이 생기기를 바라면서도 다른 한편으론 그저 덧없는 이번 생을 빨리 끝내고 싶기도 했다. 그가 부처를 올려다보며 혼잣말처럼 속삭였다.
“이번 세상 미련 없이 떠나려다 부처께 그동안 고마웠다 인사나 하려 했소. 동반자는 무슨? 세상 살 흥미를 죄 잃었으니 이제 떠나갈밖에. 당간지주 옆 배나무에 목이나 매려오.”
법당에 들어온 하심은과의 만남
법당을 나온 그는 헛간에서 튼튼한 밧줄을 찾아 두 손에 움켜쥐고 배나무를 향해 절뚝대며 걸어갔다. 흐드러지게 핀 하얀 배꽃이 5월의 달빛을 받아 찬란한 은빛으로 빛나고 있었다. 밧줄을 던져 큰 가지에 건 구령이 목을 맬 매듭을 만들려는 찰라, 법당 쪽을 향하는 낯선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숨겨진 쪽문을 통해 법당으로 먼저 숨어든 구령은 불상 옆 탁자 아래 몸을 숨겼다. 잠시 후 법당 안에 들어선 건 10대 후반으로 보이는 호리호리한 소녀였다. 그녀가 속삭였다.
“소녀 부처께 하소연하러 왔어요. 성은 하고 이름은 심은이랍니다. 얼마 전 왜구한테 개죽음당한 게 바로 저예요. 정말 억울합니다. 부모님 사랑이야 실컷 맛보았으나 지아비와 살뜰한 정 한번 못 누린 채 청상과부 신세가 된 셈 아닌가요? 이대로 구천을 떠도느니 원귀라도 되어 한을 풀고 싶어요.”
심은은 계속 주저리주저리 신세한탄을 늘어놓았다. 그걸 엿듣던 구령이 갑자기 탁자 밑에서 튀어나오며 말했다.
“심은 낭자! 내 법당에 먼저 와 있다 불가피 억울한 사정을 엿듣게 되었소. 그 한을 내가 풀어주면 어떻겠소?”
놀란 기색 전혀 없이 구령을 쏘아보던 심은이 대답했다.
“제 비록 외로움에 복받쳤다고는 하나 어엿한 사람입니다. 여염집 규수에게 너무 당돌하신 것 아닌가요?”
심은의 두 손을 꽉 움켜쥔 구령이 대답했다.
“내 언제 그대가 사람이 아니라 했소? 나도 막 세상이 재미없어 귀신이나 돼볼까 하던 차요.”
“소녀 사람이라고 분명 말했을 텐데요?”
“낭자가 사람이든 귀신이든 그게 뭔 상관이오? 그대는 부처께서 보내준 선물인 것을. 내가 내기에서 땄소!”
한숨을 내쉰 심은이 팔짱을 낀 채 구령을 오래 노려보았다. 구령이 다시 말했다.
“말이 좀 심했소? 실은 내 인생이 너무 밋밋하고도 헛헛하오. 좋은 동지가 되어 서로 잠시 즐깁시다. 그게 그리 어려운 일이오?”
상대에게 천천히 다가간 심은이 구령의 손을 잡고 왜구의 습격으로 폐허가 된 채 버려져 있던 승사 한구석을 향했다. 둘은 그곳에서 한 몸이 되어 욕망의 불을 껐다. 사랑을 나누고 난 뒤 옷깃을 여민 심은이 구령의 귓불에 대고 속삭였다.
“혹시 오해하실까 다짐해 두는데, 소녀는 진정 사람입니다.”
구령이 고개를 끄덕이자 심은이 다시 입을 열었다.
“이제 부부의 연도 맺었으니 서로 거리낄 것도 없겠고, 슬슬 말이나 놓읍시다?”
놀란 표정이 된 구령이 몸을 일으켜 세우며 물었다.
“말을 서로 놓자? 진짜 벗처럼?”
크게 고개를 끄덕인 그녀가 대답했다.
“그래야 벗 아닌가? 날도 점점 밝아오는데 내 집으로 가지?”
깨달은 자들의 사랑
심은의 손을 잡고 새벽녘 남원 저자를 걸을 동안, 구령을 알아보고 인사한 성민 중 누구도 심은의 존재를 눈치채지 못했다. 아무도 그녀를 보지 못하는 것 같았다. 심은이 농담조로 말했다.“다들 날 사람 취급하질 않네?”
빙글빙글 웃던 구령이 화답했다.
“내 눈에만 보이니 나는 좋네그려. 그 고운 얼굴 혼자만 독차지할 수 있잖아?”
뽐내듯 두 팔을 휘저으며 앞서 걷던 심은이 뒤돌아보며 물었다.
“이 고운 얼굴 애초 임자가 없던 것이라도?”
눈을 휘둥그레 뜬 구령이 놀란 목소리로 되물었다.
“그게 네 것이 아님 누구 것인가?”
사람 발길이 닿은 흔적이 전혀 없는 풀숲으로 들어서며 심은이 대답했다.
“빌린 몸이야. 넋을 잃은 몸을 탈것으로 삼아 돌아다니고 있는 거지.”
“사람이라며?”
“그러니까 사람이지! 귀신이 세상에 어디 있어? 다 헛소리야. 다만 넋이 나간 몸에 깃들게 되면 보통 사람 눈엔 안 보여.”
“내 눈엔 보이는데?”
몸을 휙 돌려 구령 앞으로 다가선 심은이 주변을 향해 빙 손가락질하며 천천히 속삭였다.
“너도 이 놀이판의 진상을 보고만 거 아냐? 이 세상 말이야. 넌 깨달았잖아?”
당황한 구령이 뭐라고 말하려다 멈추고 상대를 그윽이 바라만 봤다. 그녀가 다시 말했다.
“너 초짜구나? 그치?”
구령은 대답하지 않았다. 심은이 새벽이슬에 흠씬 젖은 풀을 헤치며 앞서 걸어가기 시작했다. 그녀의 뒷모습을 오래 응시하던 구령이 따라 걸었다. 옷의 허리 아랫부분이 헹구지 않은 빨래처럼 젖어버리자 중간에 멈춘 심은이 치마를 걷어 올려 비틀어 짰다. 뒤처졌던 구령이 자신 앞에 이르자 환하게 미소 띤 그녀가 말했다.
“난 사람이야! 얼굴 펴. 우리 즐겁게 지내자며?”
구령이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다시 말했다.
“설마 부처가 네 말을 듣고 날 보내줬다고 믿은 거야?”
씁쓸한 표정의 구령이 다시 고개만 끄덕이자 깔깔대며 박장대소한 그녀가 말했다.
“바보! 그럼 법당에서 한 내 연기에 완전 속은 거네? 난 너도 다 알면서 넉살 좋게 놀아주는 줄 알았지? 부처가 세상에 따로 있겠니? 깨달으면 부처고 못 깨달으면 대중이지. 이 시공간을 지나가다 널 우연히 발견했을 뿐이야. 나처럼 깨달은 자를 만나면 한번 놀고 싶어지거든, 어서 가자.”
구령은 심은이 만든 가상공간에서 꿈같은 세월을 보냈다. 그녀는 따뜻하고 쾌활하고 친절하며 씩씩했다. 심은과 매일 격렬한 사랑을 나누던 그는 자신의 몸이 곧 부서져버릴 것만 같았다. 그런 그를 향해 심은은 이렇게 말하곤 했다.
“몸은 원래 닳아 없어질 때까지 쓰는 거야.”
그리고 이런 말을 덧붙이곤 했다.
“그러다 느닷없는 성불이 찾아오기도 하는 거고.”
시공간을 유영하는 영혼
[GettyImage]
소스라치게 놀라며 잠이 깬 구령은 자신이 꿈을 꿨다고 생각했다. 다시 눕지 못한 채 당간지주 옆 배나무 아래에서 서성이던 그는 너무 혼란스러웠다. 그저 악몽이려니 여겼어도 좋았으련만, 그는 집요하게 한 번 더 몸에서 분리돼 보고자 시도했다. 그리고 어느 순간, 마치 아무 일도 아니란 듯이, 그의 영혼이 몸을 벗어나 배나무 가지들 사이로 솟아올랐다.
“아주 우아하게 빠져나왔네? 난 절벽에서 떨어지다 처음 분리됐는데.”
구령의 경험담을 들은 심은은 이렇게 말했다. 그리고 자신의 경험담도 털어놓았다.
“다들 그렇게 우연히 몸에서 벗어나는 거야. 절벽에서 떨어진 난 돌아갈 육체를 잃었어. 너보다 운이 나빴지. 그래서 다른 몸뚱이를 갈아타며 이동하기 시작했어. 나오는 법만 알면 들어가는 건 쉬워. 뭐 아직 초짜지만 노력하면 너도 할 수 있어. 그러다 난 알게 된 거야. 우주의 생명체가 몸을 바꿔가며 무한히 다시 태어나고 있는데도 그걸 모르고 있다는 걸. 나와 넌 운 좋게 그걸 깨달은 거고!”
“왜 누군 깨닫고 누군 깨닫지 못하는 거지?”
구령의 질문에 고개를 갸웃한 심은이 미소를 흘린 뒤 허공을 가리키며 대답했다.
“먼지가 이렇게 떠돌 듯 영혼이 몸을 타고 시공간을 움직이는 거야. 대부분의 영혼은 다른 몸으로 출생을 거듭하며 불멸을 살아. 무지 가운데 윤회하는 거지. 너와 나처럼 그걸 느닷없이 깨닫고 자유를 얻는 경우도 있고. 그건 우연 같아.”
“시간과 공간도 선택할 수 있나?”
“물론이지! 가끔 죽은 자의 몸을 쓰기도 해, 지금 나처럼. 넋이 육신을 떠난 지 보름 안쪽인 몸이면 가능하거든.”
“역시 무한히 그렇게 해야 하나? 마음대로 끝내지도 못하고?”
구령의 얼굴을 쓰다듬으며 심은이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그래. 윤회의 참모습을 깨닫긴 했지만, 우리도 거기서 벗어날 순 없어.”
윤회의 참모습
사랑을 나누고 달콤한 낮잠에 빠져 있던 구령을 심은이 살며시 건드려 깨웠다. 기지개를 켜며 상체를 일으킨 구령을 지긋이 바라보던 그녀가 자기 몸을 가리키며 물었다.“너도 이제 슬슬 이 몸이 지겹지 않아?”
어리둥절한 표정이 된 구령이 되물었다.
“난 심은 네가 좋아. 뭐가 지겹겠어?”
구령의 가슴에 얼굴을 얹고 심은이 노래하듯 말했다.
“몸은 쉽게 물리거든. 그래서 애정은 식게 돼 있어. 우린 언젠가 서로를 지겨워하며 헤어지게 될 거야.”
“나 만나기 전에 많은 사람과 사랑을 나눴겠구나?”
“그럼! 헤아릴 수도 없어. 그나마 너처럼 깨달은 자와는 상처가 덜해. 무지한 것들과 이별하려면 너무 고통스러워. 자기가 진짜 죽는 줄 알고 난리를 치거든. 실은 다른 몸으로 이동할 거면서.”
“넌 상처받지 않는 건가?”
“응. 그런 거 전혀 없어. 어차피 이건 놀이야.”
“나랑 헤어지면 뭐 할 거지?”
“글쎄, 잘 몰라. 다른 영혼들 제치고 여자 몸에 들어가 아예 새로 태어나 볼까? 하긴 그것도 지겹네. 아기로 사는 거 너무 길고 피곤하거든. 그냥 죽은 지 얼마 안 된 몸을 타고 지금처럼 유랑할까 해.”
심은을 한참 바라보던 구령이 망설이다 물었다.
“너 원래 남자야, 아니면 여자야?”
상대의 질문을 이해하기 어려운 듯 눈만 깜박이던 심은이 마침내 폭소를 터뜨리며 대답했다.
“너 진짜 바보구나? 그걸 어떻게 알아? 깨닫기 전의 원래 내 모습이란 게 있기나 했을까? 그래도 지금의 난 분명 여자야! 다음번엔 남자 몸을 빌릴 수도 있고. 뭐 기분 따라 바꿔.”
심은을 바라보며 침만 꼴깍대던 구령이 크게 한숨을 내쉬고 고개를 숙였다. 그가 다시 얼굴을 들더니 심은을 가볍게 끌어안았다.
“그래. 그게 무슨 상관이람. 난 이미 너를 만났고, 이렇게 좋기만 한데.”
불멸을 건 내기
심은은 구령과 나란히 손을 잡고 뜰을 거닐었다. 바람이 고즈넉이 불어왔다. 노을이 빨갛게 타올라 심은의 얼굴을 붉게 물들이자 구령은 그녀가 갑자기 소멸할까 두려워졌다.“넌 언제 내 곁에서 사라지지?”
구령의 손을 잡고 말없이 작은 언덕에 올라 어깨를 기대고 앉은 심은이 되물었다.
“넌 이곳이 어디라고 생각해?”
주변을 둘러본 구령이 대답했다.
“남원성 남쪽 교외 아닌가?”
희미하게 미소 띤 심은이 속삭였다.
“잘 봐. 성 남쪽에 이런 황무지가 어디 있겠어? 여긴 네가 살던 때보다 수백 년 전의 남원이야. 그러니까 인적이 그렇게나 없었던 거지. 우리가 사는 집을 봐. 낡은 절터야.”
구령이 심은과 동거하던 집 쪽을 바라보자 화려하면서도 아담했던 기와집은 온데간데없고 다 쓰러져가는 폐사 한 채가 눈에 들어왔다. 그녀가 다시 속삭였다.
“너도 익숙해지면 이런 환술쯤은 쉽게 부릴 수 있어. 다음에 만날 사람한테 써봐. 난 그때가 제일 즐거웠거든. 깨달음을 얻고 만난 첫 연인을 위해 집을 지어줬을 때 말이야.”
골똘히 생각에 잠긴 듯하다 갑자기 눈물을 글썽인 구령이 심은을 끌어안으며 말했다.
“난 너와 헤어지지 않아!”
상대의 등을 토닥이며 심은이 말했다.
“처음이라 그래. 다 그렇게 슬퍼하지만 곧 이런 자유의 즐거움을 알게 돼. 집착하지 마. 그거 부질없고 상처만 남겨.”
소리 없이 눈물짓던 구령이 흐느끼듯 말했다.
“이제야 가족 비슷한 사람을 만난 것 같거든. 바로 떠나보내긴 싫다. 서로 지겨워질 때까지 살자꾸나.”
상대를 가슴에 품고 오래 침묵하던 심은이 자장가를 부르듯, 타이르듯 조용히 말했다.
“그럴게. 보살행이 어디 따로 있겠어? 대신 지겨워지면 바로 말해야 해?”
구령이 고개를 끄덕이자 그녀가 다시 말했다.
“네가 살던 세상으로 먼저 보내줄 테니까 내일 보련사 가는 길목에서 기다려. 둘이 손잡고 부처께 기도해 보자.”
“뭘?”
“글쎄. 둘이 불멸을 함께 할 수 있나 내기해 볼까?”
보련사 가는 산길 한 귀퉁이에 우두커니 선 구령은 하염없이 그녀가 오기만을 기다렸다. 기다리고 기다리다 다리가 후들거렸지만 그는 의심하지 않았다. 마침내 멀리 심은의 모습이 나타났다. 가녀린 허리를 살랑살랑 흔들며 다가온 그녀는 말없이 구령의 손을 잡았다. 두 사람은 산길을 따라 절을 향해 걸었다. 구령의 가슴은 세차게 뛰었다. 그런 그의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심은의 얼굴은 유난히 초조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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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작품은 김시습의 ‘만복사저포기’를 로버트 셰클리의 ‘불사판매주식회사’를 활용해 각색한 것이다.
윤채근
● 1965년 충북 청주 출생
● 고려대 국어국문학 박사
● 단국대 한문교육학과 교수
● 저서 : ‘소설적 주체, 그 탄생과 전변’ ‘한문소설과 욕망의 구조’ ‘신화가 된 천재들’ ‘논어 감각’ ‘매일같이 명심보감’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