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버전 ‘신종’ 운동권 정부 목격한 느낌
‘불순분자’ 솎아내기에 골몰한 1년
주사파 운운할 시간에 민생에 올인하라
여당의 私黨화로 민심 잃어
尹, 부지런히 삶의 현장 누벼야
윤석열 대통령이 3월 29일 서울 용산 대통령실 청사에서 열린 제15차 비상경제민생회의에서 발언하고 있다.[뉴시스]
민생119는 총 15명의 위원으로 구성됐다. 조수진 위원장을 비롯해 8명은 국민의힘 당내 인사, 7명은 각계의 목소리를 전달할 외부 전문위원이다. 필자는 그 가운데 자영업자 몫으로 참여하게 됐다. 임명된 계기는 단순하다. 조 위원장으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신동아’를 비롯해 각종 매체에 연재 중인 칼럼을 잘 보고 있는데, 민생특위에 참여해 조언을 해달라는 부탁이었다. 입당하라는 것도 아니고, 그동안 언론에 글을 써온 것이 단순히 외부에서 미주알고주알 떠들려고만 했던 것은 아니니, 정치권 현장 상황을 가까이에서 지켜보는 경험도 나쁘지는 않겠다고 판단했다. 그것이 더구나 ‘민생’과 관련된 분야이니.
앞으로 필자의 칼럼이 민생119의 입장과는 전혀 상관없음을 분명히 밝혀둔다. 지금까지 그래왔듯 오롯이 필자 개인의 견해일 따름이다. 특정한 정당에 조언하고 있다고 비판의 강도가 눅어지거나 논조가 흔들릴 가능성 또한 전혀 없다.
민생 분야, 낙제 면한 수준
윤석열 정부가 출범한 지 곧 1년을 맞는다. 지난 1년간 민생 분야에 있어 윤 정부가 한 일에 점수를 준다면 D학점을 주고 싶다. 간신히 낙제를 면한 정도다. 그나마 다른 분야에 비해서는 후한 점수다. 외교와 관련해서는 F학점을 주고 싶고, 국내 정치 분야는 F보다 더한 낙제점이 있다면 그것을 주고 싶다.종합적으로 말하자면 윤석열 정부와 국민의힘, 보수 진영은 몇 가지 거대한 착각을 하는 것 같다. 첫 번째 착각은 “내년 총선에 이기면 모든 일이 순조로울 것”이라는 착각이다. 미래는 감히 예측할 수 없다지만 내년 총선에 여당이 승리할 가능성은 20% 미만이라고 본다. ‘이긴다’는 것에 대한 기준은 제각각일 테지만 보수 진영이 생각하는 대로 ‘만사형통’할 의석을 확보할 가능성은 거의 제로에 가깝지 않을까 싶다.
내년 총선에 여당이 승리한다고 치자. 국회선진화법 때문에 아무리 다수당이라도 압도적 의석(180석 초과)을 확보하지 않는 이상 자신들이 원하는 법안을 마음대로 통과시킬 수 없다. 설령 180석 이상을 갖고 있다 해도 당내 이탈표, 국민 여론, 상임위 통과 절차 등이 있기 때문에 마음껏 ‘다수결의 속 시원함’을 구가하지는 못한다. 180석을 갖고 있던 민주당이 꼼수 탈당, 안건조정위 무력화 등 온갖 몸부림을 쳐왔던 것을 떠올려보시라.
민주당이 지난 총선에 180석을 확보한 것은 코로나19라는, 100년에 한 번 생길까 말까 한 역사적 사건 때문에 얻은 특수한 결과다. 국민의힘은 내년 이맘때 그런 특수한 일이 벌어질 것이라고 기대하고 있을까. 대통령 임기 3년차 선거에서 집권 여당이 압도적 과반을 확보할 가능성은 코끼리가 양쪽 귀를 펼쳐 하늘로 날아가길 기대하는 확률과 비슷할 것이다.
국민의힘이 과반 의석을 확보한다면 물론 정치적 ‘상징’으로서의 의미는 있을 수 있다. ‘발목 잡는 야당에 대한 국민의 심판’이라고 말이다. 그러나 상징 이상의 실질적 의미는 없다. 여론의 탄력을 받아 국정 운영이 다소 수월해지기는 하겠지. 하지만 만사형통은 있을 수 없으며, 어떤 경우라도 의회의 협조는 필수다. 그것이 3권 분립 국가에서 지켜져야 할 당연한 원칙이다.
지난 1년간 윤석열 정부는 말 그대로 ‘국회 패싱’이라고 할 정도로 의회의 협조를 구하려는 노력은 일절 하지 않았다. 비록 야당이 협조하지 않더라도 협조를 구하려는 시늉이라도 했어야 하는데 그마저 하지 않았다. 구차하게 무릎 꿇고 싶지 않다는 뜻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대통령 후보 시절에 “통합 정부를 만들겠다”거나 “야당과 협치를 하겠다”는 약속은 왜 했는지 모르겠다. 그러니 국민 상당수는 대통령에게 속았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썩 내키지는 않지만 윤 대통령을 선택한 중도층은 배신감과 좌절감을 느끼는 중이고, 윤 대통령을 선택하지 않은 47.8%의 국민은 과연 자신의 선택이 옳았다고 씁쓸한 자부심을 갖도록 만들었다. 대통령의 내치(內治)에 F학점보다 더한 낙제점을 주고 싶은 것은 바로 이런 이유에서다.
각설하고, 내년 총선에 국민의힘이 과반을 확보할 가능성도 결코 높지 않아 보인다. 한국갤럽이 4월 4~6일 실시한 여론조사 결과에 따르면 내년 총선에 ‘정부 견제를 위해 야당 후보가 많이 당선돼야 한다’는 응답이 50%, ‘정부 지원을 위해 여당 후보가 많이 당선돼야 한다’는 응답은 36%에 불과했다. 출범한 지 채 1년이 되지 않은 정부에 대해 이토록 ‘견제론’이 높게 나오는 경우도 흔치 않다. 60대 이상을 제외하고 전체 연령층에서 견제론이 높았고, 게다가 20~30대 연령층에서는 견제론이 지원론을 더블스코어 이상으로 눌렀다. 윤 정부 스스로 만든 결과다.
‘정의의 수호자’라는 거대한 착각
윤석열 정부와 집권 여당이 갖고 있는 두 번째 거대한 착각은 자신들을 ‘정의의 수호자’처럼 여긴다는 사실이다. 마치 구악(舊惡)을 몰아내고 새로운 나라를 만든다는 생각으로 정부를 이끌고 있는 것 같다. 부패한 노조를 척결하고, 종북 주사파 세력을 몰아내고, 친중 세력을 솎아내고, 좌파가 망가뜨린 한미일 삼각동맹을 복원하며, 거짓 진보 세력이 무너뜨린 세상을 자신들이 바로잡고 있다는 자부심을 갖고 있는 듯하다.국민이 문재인 정부나 과거 노무현 정부에 등을 돌렸던 이유 가운데 하나가 바로 그러한 편향된 나르시시즘이었다. 지난 1년은 다른 버전의 ‘신종’ 운동권 정부를 목격하는 느낌이다. “기득권 카르텔을 깨뜨리겠다”라느니, “종북 주사파는 협치의 대상이 아니다”라느니, “거짓과 부패가 자유민주주의를 위협할 수 없도록 하겠다”라느니 하는 윤 대통령의 발언은 과거 운동권 총학생회장의 연설을 테이프를 거꾸로 돌려 듣는 느낌이다. 화염병 좌파 운동권 세상이 가니 아스팔트 우파 운동권이 몰려왔다. 극성 지지층에는 감동적인 정부이겠으나 이에 호응하는 국민의 비율은 과연 얼마나 될까.
이른바 구악, 적폐, 부패 세력과 싸우지 말라는 말이 아니다. 민생에 산적한 과제가 숱하게 많다. 검찰, 경찰, 국정원 등 공안기관은 따로 있는데 대통령이 민생은 살피지 않고 이런 발언만 도드라지게 보도되니 굉장히 엉뚱하다는 말이다. 아직도 자신을 검찰총장이라고 생각하는 것일까. 그러니 이번 정부를 적극적으로 지지하지 않는 국민의 시선으로는 대통령으로서 특별히 할 일이 없으니 (혹은 할 수 있는 일이 없으니) 가상의 적을 만들어 섀도복싱만 하는 것처럼 보이기 마련이다.
물론 윤 정부 입장에서는 억울할 것이다. 민생을 철저히 챙기고 있다고 말이다. ‘열심히 하고 있는데 국민이 우리를 알아주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것 또한 과거 문재인 정부와 크게 다르지 않다. 아니, 문재인 정부는 뭔가 부지런히 하는 시늉이라도 했다. 이번 정부는 그마저 없는 것 같다. 열심히 하고 있는데 잘 알려지지 않는 것뿐인지, 정말 일을 ‘안 하는’ 것인지, 민주주의 국가에서 그것은 국민이 판단할 몫이다. 국민은 선거를 통해 마음을 드러낸다. 내년 총선은 국민이 비로소 마음을 드러내 보여주는 현장이 될 것이다.
억울하게 생각하지 말고 자신의 잘못을 돌아봐야 앞으로 1년간 만회할 기회나마 생길 텐데, 지금 윤 정부에는 그런 성찰의 자세마저 없는 것 같다. 세상만사를 민생이 아니라 대야(對野) 투쟁의 관점에서만 바라본다. 운동권적 세계관이다.
호위무사 자처하는 사람들
김기현 국민의힘 대표(오른쪽)가 3월 31일 부산 연제구 부산시의회에서 열린 ‘2030 부산세계박람회 유치를 위한 국민의힘·부산시 연석회의’에 참석해 장제원 의원과 인사하고 있다.[ 뉴시스]
친윤(親尹) 일색 지도부가 탄생했다. 당대표는 물론 원내대표, 사무총장, 심지어 정당 산하 정책연구소 원장 자리 하나까지 ‘윤석열의 호위무사’를 자처하는 사람들로 획일화됐다. 지금 국민의힘 내부에는 대통령에게 쓴 소리를 할 수 있는 스피커가 완전히 박멸되다시피 했다.
현실 정치에 익숙하지 않고 갑자기 훅 떠오른 지도자가 흔히 저지르는 실수가 바로 이런 부분이다. 단결하면 뭔가 이루어낼 수 있을 것이라고 착각한다. 자신이 성과를 내지 못하는 것은 ‘내부의 적’ 때문이고, 내부부터 단결해야 외부의 적과 맞서 싸울 수 있을 것 아니냐는 절차적 단계론을 운운한다.
이론적으로 그럴듯해 보일지 모르지만 그런 건 좌파 전위 정당이나 파시스트 정당에서나 가능한 일이고, 자유민주주의 국가에서 대중 정당의 작동 원리는 그렇지 않다. 국민은 일치단결하는 정당을 지지하지 않는다. 조금 복잡해 보이더라도 내부에서 지지고 볶는 정당을 오히려 지지한다. 그런 측면에서 국민은 역시 현명하다.
국민은 ‘야당’에 대해서는 단결을 주문한다. 야당은 권력과 맞서 싸워야 하는 존재니까 야당이 지리멸렬하고 적전 분열 상태이면 국민은 지지할 기운을 잃는다. ‘여당’에 대해서는 완전히 다르다. 국민은 여당을 일단 ‘권력 집단’이라고 생각한다. 권력이 집중된 집단이 내부 성찰 없이 똘똘 뭉쳐 있으면 국민은 야당에서 대안을 찾는다. 대표적 사례가 지난 1년간 윤석열 대통령의 행보다. 작금 여론조사 결과를 보라. 당내가 시끌벅적할 때보다 친윤으로 똘똘 뭉친 지도부가 탄생한 이후로 여당에 대한 국민의 지지율은 더욱 떨어졌다. 윤석열 대통령은 심각한 자충수를 둬버린 셈이다. 여당이 조금 시끄럽더라도 대통령은 그러려니 하면서 국정 운영에 몰두하면 됐는데, 그러면 국민은 여당에서 계속 희망을 찾았을 텐데, 여당이 대통령 사당(私黨)이 됐으니 이젠 야당이 제 역할을 해주기만 바라는 것이다. 이재명 대표를 정치적으로 소생시킨 사람은 다른 누구도 아닌 윤석열 대통령이다.
윤 대통령은 이상하게도 내부 군기를 다잡는 데 모든 열정을 불태웠다. 추측건대 세 가지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첫째, 검사로서 평생 ‘동일체’ 원칙이 통하는 조직에만 몸담다 보니 내부 이견이나 상급자의 권위에 도전하는 듯한 행태를 견디지 못하는 것이다. 둘째, 현실 정치에는 자타 공인 초보이다 보니 정당 내부에서 치받아 올라오는 것을 ‘내가 초보라고 우습게 보는 것인가?’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갖고 있던 콤플렉스와 비슷해 보인다. 셋째, 국정 운영에 성과를 내지 못하고 있으니 그런 것으로라도 대리만족을 하려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거대한 착각 3가지
앞에서 윤석열 정부의 거대한 착각 세 가지를 이야기했다. △총선에서 이기면 모든 일이 술술 풀릴 것이라는 착각 △자신들을 정의의 수호자라고 생각하는 착각 △집권 여당은 대통령을 중심으로 단결해야 한다는 착각 등이다.이제 윤석열 정부는 변명할 거리가 없어졌다. 정치적 허니문 기간이 끝났다. 처음 1년은 ‘익숙지 않아 그러는 거겠지’ 하고 국민들도 양해했지만 앞으로는 그런 프리미엄이 통하지 않는다. 내부에 시끄러운 사람들도 몰아냈겠다, “모든 것은 저 사람들 때문”이라고 분풀이할 대상마저 사라져 버렸다.
윤 대통령과 보수 진영이 외부적으로 의지할 대상은 두 가지뿐이다. 문재인과 이재명. ‘지난 정부 때문’ 혹은 ‘지금 야당 때문’밖에 남지 않았다. 일부 언론이 열심히 그것을 돕고 있다. 전혀 의미 없는 시도는 아니지만 “세상 만물의 잘못은 전 정권과 민주당 때문”이라는 정치적 프로파간다가 총선까지 1년 동안 먹혀들 수 있을까. 극성 보수층은 유쾌할지 모르겠으나 적잖은 사람들은 벌써 권태로워하고 있다. 일부 언론은 윤석열 정부, 혹은 보수 진영을 진정으로 돕는 길이 과연 무엇인지 겸허하게 돌아봐야 한다.
정치 초보가 어설픈 멘토들의 도움을 받으며 꼼수를 부릴 생각을 말고 정공법으로 나아갈 때다. 국민의 삶이 달라지는 ‘성과’로서 모든 것을 증명하지 않으면 아무런 의미가 없다. 집권 2년차에 접어들었고, 내부 비판도 평정됐고, 그럴 수밖에 없는 상황에 직면한 것이다.
그럼 민생을 보자. 흔히 경제는 ‘운칠기삼’이라고 한다. 세계경제가 하나로 연결된 시대에 세계적으로 경기가 좋지 않은 상황에서 특정한 국가만 결과가 좋게 나오는 경우는 별로 없다. 현재 경기가 좋은지 나쁜지에 대해서는 해석이 엇갈린다. 아직 코로나19의 덫에 갇혀 경기가 좋지 않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코로나19의 긴 터널을 벗어나 오히려 성과를 드러내는 데 적기라고 말하는 사람 또한 있다. 둘 다 맞는 말일 수도 있다. 어쨌든 적잖은 사람들이 ‘지난 3년보다는 지금이 외부적 제약 요건이 없다’고 생각한다. 코로나19 시기에는 뭘 하고 싶어도 내외부 상황이 그러하니 할 수 없는 일이 많았는데, 지금은 상황 탓을 할 수 없게 된 것이다. 이제야말로 운칠기삼이 아니라 ‘기칠운삼’이라고 보는 것이다.
그럼에도 윤석열 정부와 일부 언론은 많은 것을 지난 정부 탓을 한다. 지난 정부에서 방만하게 재정을 늘려놓았다, 지난 정부에서 전기 가스 등 공공요금 인상을 지나치게 억제했다, 지난 정부에서 무분별한 탈원전과 탄소중립으로 전력산업 생태계를 망가뜨렸다, 지난 정부에서 검수완박으로 치안 공백 상태를 초래했다, 지난 정부에서 국민 여론을 갈라놓으면서 정치적 극단주의가 심화됐다, 지난 정부에서….
물론 그중에는 수긍되는 지점이 있다. 필자 또한 문재인 정부 시절 ‘신동아’ 지면을 통해 숱하게 이야기한 내용이다. 그러나 이제 와 ‘지난 정부’를 주야장천 떠드는 것은 과연 어떤 의미가 있을까. 지금은 주어진 권력에 무한 책임만 남아 있을 뿐이다. 억울해도 어쩔 수 없다. 국민은 당신들이 억울함을 하소연하라고 뽑아준 것이 아니니까.
‘종북 주사파’ 운운할 시간에 민생부터
김기현 국민의힘 대표가 4월 3일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민생119 임명장 수여식 및 제1차 회의에서 발언하고 있다. 왼쪽은 조수진 위원장. [뉴시스]
물가뿐인가. 경상수지 적자 행진이 이어지고 있다. 1월에는 사상 최대 적자 폭을 보였고, 2~3월에도 연속 적자다. 반도체 수출이 급감하고 대(對)중국 수출이 부진해 상품수지 적자가 5개월째 이어지고 있는가 하면, 코로나19 사태가 어느 정도 진정됐다고 생각하니 해외여행에 봇물이 터져 서비스수지 적자도 껑충 뛰었다. 12월 결산 법인의 배당이 보통 4월에 이루어지니 조만간 본원소득수지마저 대규모 적자를 기록할 것으로 보인다. 한미 간 금리 역전 폭이 사상 최대인 가운데 외국인 배당금 지급까지 시작되면 환율은 또 어떻게 될까. 물가가 폭등하니 실질임금이 줄어 임금인상에 대한 요구 또한 과거 어느 때보다 높을 텐데 그건 또 어떡할 것인가. ‘첩첩산중’이란 말이 자연 떠오른다. 윤석열 정부의 사람들은 “지지리도 복도 없다”고 억울하게 생각할 테지만, 국민은 이것을 모두 현 정부의 잘못으로 받아들인다. 그중에는 윤석열 정부가 제대로 대응하지 못해 발생한 문제 또한 분명히 있다.
국민의힘 민생119 위원으로서 이 무슨 악담이냐고 할지 모르지만 윤석열 정부가 과연 민생 살리기에 모든 열정을 쏟아부을 의지가 있는지조차 의심스럽다. 대통령이 집권당 원외 당협위원장 간담회 같은 자리에 참석해 현실 정치에 특별한 의미도 없는 ‘종북 주사파’ 운운할 시간에 민생 회복을 위한 거국내각이나 민관 협의체 구성이라도 제안하는 편이 훨씬 낫지 않았을까.(필자가 이른바 종북 세력에 대해 누구보다 적극적으로 비판해 왔다는 사실은 독자들이 익히 알고 있을 것이다.)
칼럼을 쓰고 있는 현재까지 국민의힘 민생119 회의는 딱 한 번 열렸다. 회의에서 느낀 점은 이렇다. 민생 회복을 위한 여러 아이디어가 쏟아졌지만 대체로 캠페인성 ‘국민운동’ 같은 것을 제안하는 수준이다. 조수진 위원장 스스로 “예산과 법령 개정 없이 할 수 있는 일을 고민하겠다”고 선을 그었다. ‘정치’라는 것의 본질이 예산과 법률을 다루는 일 아니던가. 그런 것 없이 변화를 모색하겠다니, 정치인 본연의 임무를 방기하는 것이다. 의도를 이해하지 못하는 바는 아니지만 집권당의 ‘1호 특위’ 위원장으로서 대단히 유약한 발상이 아닐 수 없다. 이러니 국민이 여당을 믿고 지지할 수 있겠나. 결국 조 위원장은 민주당의 양곡관리법 개정안에 대해 라디오 인터뷰에서 “(우리는) 밥 한 공기 다 비우기 운동에 대해서도 논의하고 있다”는 발언을 했다가 여론의 뭇매를 맞았다.
흔히 경제의 3주체를 가계, 기업, 정부라고 한다. 민생을 살리기 위해 각자의 역할과 고통 분담이 필요할 텐데, 민생119 회의에서 느낀 점은 ‘기업’ 쪽의 분담을 고민하는 흔적이 거의 없다는 사실이다. 우리나라 보수 진영의 특성이 대체로 그렇다. 기업은 논외로 치는 분위기가 있다. 경제 분야에 있어 정치의 역할은 3주체 사이의 균형을 유지하는 일인데 그 역할에 무지한 것이다. 시장에 맡겨놓으면 된다는 이른바 시장만능주의적 시각으로 접근한다. 그렇다면 정치는 왜 필요한가. 여당은 캠페인이나 고민하는 시민운동단체가 아니다. 그러라고 국민이 권력을 주지 않았다.
하루아침에 민생 문제가 풀릴 리 없다. 국민도 그것을 기대하지는 않는다. 다만 국민은 거시적 관점에서 대기업집단의 횡포와 시장의 오작동을 바로잡길 소원하고, 우리 사회의 양극화 문제를 바로잡는 제도적 개혁을 추구하길 기대한다. 집권 여당이 그런 입법을 선제적으로 준비해 야당에게 협조를 구하고, 야당이 그것을 거절한다면, 그때야말로 국민은 정부와 여당을 지지할 것이다. 전 정부나 민주당, 주사파를 욕하는 것은 오롯이 언론의 역할로 돌리고, 되든 안 되든 정부는 제발 ‘민생’에만 올인하는 모습을 보이라. 대통령이 부지런히 삶의 현장을 누비는 모습을 보이라. 일단 국민의 마음부터 움직이시라. 지금 윤 대통령에게는 변화를 기대하기 힘든 주문이 된 걸까.
적이 적을 도우리라
“국민과 역사 앞에 씻을 수 없는 죄를 짓는 일입니다.” 2021년 11월 5일 서울 용산구 백범기념관에서 열린 국민의힘 전당대회 현장에서 대통령후보로 선출된 윤석열 전 검찰총장의 수락 연설 가운데 이 부분이 가장 인상적이었다. 정권교체에 성공하지 못하면 ‘역사의 죄인’으로 남을 것이라는 각오의 표현이었다. “조국의 위선과 추미애의 오만을 무너뜨린 공정의 상징”이라고 자신을 표현했던 것도 기억에 남는다.칼럼을 마감하는 이 시각, 국회의원 보궐선거에 당선된 진보당 강성희 의원이 “이석기 복권”을 주장했다는 뉴스가 눈에 띈다. 진보당은 종북 논란 끝에 해산된 통합진보당의 후신이고 이석기 씨는 거기서 ‘작은 수령’ 역할을 했다. 조국 전 법무부 장관이 전국을 순회하며 북콘서트를 열고 있다는 뉴스가 보인다. 그의 딸 조민 씨가 자신은 당당하다고 자랑하는 듯한 사진을 연일 SNS에 올리는 중이다. 문재인 전 대통령을 추억하는 내용의 다큐멘터리 ‘문재인입니다’가 5월 개봉을 앞두고 있다.
열성 보수층은 이러한 흐름을 경멸하고 조롱하기 바쁘지만 내년 총선에 국민의힘이 패배한다면 국민은 오히려 보수를 경멸하고 조롱하게 될 것이다. 종북 주사파와 조국, 추미애, 문재인, 이재명을 역사에 화려하게 부활시켜 준 ‘죄인’은 윤석열 대통령 자신이 될 것이다. 적이 적을 도우리라. 역사의 역설이다.
신동아 5월호 표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