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행업 과점 해소·경쟁 촉진 위해 도입 추진
글로벌 금융시장 위기감 높아지며 ‘주춤’
회의적 시각 적잖아… “결국 시장에서 퇴출될 것”
업계 “기존 은행과 서비스 차별화 어려워”
성공사례로 제시한 SVB가…
3월 10일 미국 실리콘밸리은행(SVB)이 파산하며 글로벌 금융시장 불안을 키웠다. 이날 미국 금융당국은 SVB에 대해 폐쇄 조치를 내렸다. 사진은 3월 11일(현지 시간) 미국 매사추세츠주 웰즐리 소재 SVB 지점 모습. [AP 뉴시스]
금융당국은 지난해 5대 시중은행(KB국민·신한·하나·우리·NH농협은행)이 높은 순익을 기록한 것엔 사실상 과점 체제가 형성된 영향이 컸다고 봤다. 이에 따라 다양한 사업자가 특정 영역에서 서비스를 하는 특화은행 등을 도입해 과점 체제를 허물고 경쟁을 촉진하겠다는 구상을 내놨다.
금융위원회는 곧장 ‘은행권 경영·영업관행·제도 개선 태스크포스(TF)’를 구성해 3월 초 1차 회의를 열며 의욕을 보였다. 은행권 경쟁 촉진을 위해 은행권 내 경쟁뿐 아니라 은행권과 비은행권 경쟁, 금융과 IT 간 영업 장벽을 허무는 방안 등을 청사진으로 내놨다.
특히 스몰 라이선스(은행별 라이선스를 기능별로 세분화하는 것)와 챌린저뱅크(소규모 신생 특화은행) 등 업무 범위를 세분화한 특화은행 설립 방안이 주목받았다. 중소기업과 소상공인, 벤처기업 대출 전문은행이나 지급결제 특화은행이 대표적 예다.
은행과 비은행권 간 경쟁 촉진 방안으론 비은행 금융사들의 업무 영역을 확장하는 안을 검토했다. 카드사의 종합지급결제와 증권사의 법인 대상 지급결제, 보험사의 지급결제 겸영 허용 등이다.
TF는 논의를 본격화하기도 전에 커다란 암초를 만났다. 미국 SVB 파산을 시작으로 크레디스위스(CS) 매각, 도이체방크 위기설 등이 잇달아 터지면서 글로벌 금융시장의 위기감이 높아진 것이다.
공교롭게도 SVB는 금융당국이 특화은행 성공사례로 제시했던 은행이다. SVB는 스타트업 고객을 주로 상대해 특화은행과 비슷한 구조를 가지고 있다. 특정 부문에 여신이 집중된 구조가 파산을 초래했다는 점이 우려를 낳았다.
강한 의지를 내비친 바 있기 때문인지 금융당국은 SVB 사태 직후 이를 외면하는 듯한 모습을 보였다. ‘SVB는 수많은 특화은행 중 하나일 뿐이며 이 은행의 파산으로 특화은행 전체가 문제라는 식의 접근은 맞지 않다’는 게 금융당국의 태도였다. 3월 16일 열린 회의에서도 “SVB 사태 이후 관련 정책에 변화가 있느냐”는 질문에 “1차 회의에서 논의했던 스몰 라이선스 등 경쟁 촉진 방안에 대해선 지금도 같은 상황을 전제로 검토하고 있다”며 물러서지 않았다. 결국 여론이 악화된 후에야 한발 물러섰다. 같은 달 29일 열린 회의에서 김소영 금융위원회 부위원장은 “금융소비자 편익 증대와 경쟁 촉진뿐만 아니라 금융안정 등을 종합적으로 감안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어 “TF에서 논의한 스몰 라이선스의 장단점과 경쟁에 미치는 효과, 실효성 등을 바탕으로 스몰 라이선스 도입 여부와 도입 방법 등에 대해 국민과 금융권 등 각계의 목소리를 듣고 공감대를 형성해 나갈 필요가 있다”고 덧붙였다.
“특화은행 도입해도 도태될 가능성 커”
돌연 SVB 사태가 터지면서 금융당국이 체면을 구긴 모양새처럼 보이지만 이것과는 별개로 곳곳에서 특화은행에 대한 반발이 나오고 있다는 점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예기치 못한 변수로 제동이 걸렸다고 해석할 것이 아니라 당초 금융당국의 추진 방안에 대한 회의적 시각이 많았다는 의미다.당국이 은행 과점 체제 해소를 위해 규제를 대폭 완화할 경우 금융시장의 안정성과 공정성이 저해될 수 있다는 지적도 나왔다. 4월 초 김동환 한국금융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보고서 ‘경쟁 제한적 금융규제 완화를 위한 제언’에서 “금융 규제 완화를 통해 효율성을 제고하는 데에만 신경을 쓰다 보면 안정성이나 공정성이 훼손될 가능성이 있다”고 지적했다.
김 선임연구위원은 국내에 특화은행을 설립하더라도 시장을 뒤흔들기 어려울 뿐만 아니라 도태될 가능성이 크다고도 했다. 예를 들어 대형 금융회사가 매우 낮은 대출 금리를 책정하면 소형 금융회사는 어쩔 수 없이 같은 금리로 고객을 유인할 수밖에 없는데, 이는 소형 회사의 수익성 악화로 이어지고 결국 시장에서 퇴출당할 가능성이 크다는 것. 아울러 빅테크(대형 IT 기업) 등 비금융 기업이 금융 결제망에 직접 참여하거나 금융 플랫폼을 장악할 경우 시장 안정성이 위협받을 수 있다는 점도 우려했다.
김 선임연구위원의 보고서 이전에도 이와 궤를 같이하는 지적이 있었다. 지난해 7월 자본시장연구원도 ‘실리콘밸리은행그룹 모델의 국내 도입 가능성 진단’이라는 보고서를 통해 한국에서는 SVB식 사업 모델이 성공하기 어려울 수 있다고 분석했다. 정책금융 의존도가 높은 우리나라의 벤처기업들과 미국의 벤처 생태계와는 차이가 크다는 게 근거다. 이효섭 자본시장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국내 벤처기업들은 정책금융 기관의 보증 기반 대출을 통해 자금을 조달하고 있다. 높은 이자 비용을 내면서 벤처 대출을 활용할 유인이 크지 않다”고 지적했다.
“취지 좋지만 너무 급해”
금융당국이 추진하려 한 비은행권 기업의 소액결제시스템 참여에 대해서도 반대의 목소리가 나왔다. 이는 카드사와 증권사, 보험사, 핀테크 업체 등이 강하게 요구하고 있는 사안인데, 한국은행이 반대 의사를 공식화했다.3월 말 열린 TF 회의에서 한국은행은 “지금은 금융시장의 불안이 확대되며 결제리스크 관리를 한층 강화해야 하는 시점”이라며 “비은행권의 지급결제 업무 허용 논의를 진행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주장했다. 또 “전 세계에서 엄격한 결제리스크 관리가 담보되지 않은 채 비은행권에 소액결제시스템 참가를 전면 허용한 사례는 찾기 어렵다”며 “고객이 체감하는 지급서비스 편의 증진 효과는 미미한 반면, 지급결제시스템 안전성은 은행의 대행 결제 금액 급증, 디지털 런 발생 위험 증대 등에 따라 큰 폭으로 저하될 것”이라고 지적했다.
국내 지급결제망을 총괄하는 한국은행이 반대 의사를 밝힌 만큼 비은행권의 지급결제 업무 허용은 사실상 어려우리라는 전망에 힘이 실린다. 금융시장의 불안이 커지는 상황에서 금융 당국 역시 안정성에 무게를 실을 수밖에 없을 것으로 전망된다. 금융위 관계자는 “한은이 지급결제 최종 대부자로서 지급 결제망 관리 체계에서 핵심 역할을 하고 있다”며 “비은행권 지급결제 업무 허용을 한은의 협조 없이 진행하기가 어려운 게 사실”이라고 말했다.
금융권 안팎에서는 은행 간 경쟁을 촉진해 소비자의 선택권을 넓히겠다는 취지는 좋지만 대통령의 말 한마디에 조급하게 정책을 추진한 점이 문제라는 지적이 나온다. 한 시중은행 관계자는 “특화은행 도입 취지는 좋지만 인터넷은행 사례에서 알 수 있듯 기존 은행과 차별화된 서비스를 만들어 경쟁력을 갖는 게 쉽지 않다”며 “은행에 대한 비판 여론만 의식해 당장 눈에 보이는 성과를 내놓으려 할 게 아니라 장기적 논의를 통해 정책을 추진해야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