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상 뛰어넘는 민주당發 악재
與와 대통령실에 가뭄의 단비?
오영환 진심 의심하진 않지만…
‘야당 내 야당’의 전략적 가치
우려스러운 윤석열 4‧19 발언
송영길 전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4월 19일 오전(현지시간) 프랑스 파리의 한 지하철역에서 출강을 위해 이동하고 있다. 송 전 대표는 지난해 12월부터 파리경영대학원(ESCP) 방문 연구교수로 파리에 체류 중이다. [뉴스1]
이정근 전 더불어민주당 사무부총장이 사업가 박모 씨와 통화한 내용을 담은 녹취록 중 일부다. 2021년 민주당 전당대회에서 돈 봉투가 뿌려졌다는 의혹을 수사한 검찰은 이정근을 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법상 알선수재 및 정치자금법 위반 등 혐의로 기소했다. 4월 12일 그는 정치자금법 관련 1심에서 검찰이 구형한 징역 3년보다 높은 징역 4년 6개월을 선고받았다.
민주당은 상상을 뛰어넘는 악재를 만났다. 문제의 2021년 전당대회에서 당대표로 선출된 이는 송영길 전 대표. ‘돈 봉투 논란’의 불길은 송영길을 향해 타오르고 있다. 강래구 한국감사협회 회장은 2021년 민주당 전당대회에서 전달된 9400만 원 중 8000만 원을 조달하고, 전달에도 관여한 혐의를 받고 있다. 그런 그가 2021년 4월 10일 이정근과 나눈 통화 내용은 더욱 문제적이다.
강래구는 이정근에게 이렇게 말했다. “영길이 형이 뭐 어디서 구했는지 그런 건 모르겠지만 내용은 모르고 많이 처리를 했더라고.” 전후 맥락을 놓고 볼 때 송영길은 금품 살포를 인지하고 있었을 뿐 아니라, 그 중 일부분은 직접 전달했다고 짐작하지 않을 수 없다. 이정근이 “신나게 주셨지 않냐. 더 안 해도 되는 거냐”고 묻자 강래구는 또 한 번 ‘영길이 형’을 소환한다. “영길이 형에게 물어보자. 아직 20일 정도 남았으니 막판 속도를 올릴 때 한 번 더 할 수 있다”는 내용의 답을 했던 것이다.
끈끈한 정치적 동맹
지난해 5월 재·보궐선거를 앞두고 경기 김포시 고촌읍 아라김포여객터미널 앞에서 기자회견 중인 더불어민주당 송영길 전 대표(왼쪽)와 이재명 대표. [동아DB]
물론 이재명은 아직까지 이 사안이 본인과 무관하다 주장하고 있다. 현재 해외 체류 중인 송영길의 빠른 귀국을 원한다며 ‘선긋기’에 나섰다. 하지만 사건을 바라보는 이들의 시각은 그렇지 않다. 심지어 이정근의 정치자금법 위반 사건 변호를 맡고 있는 정철승 변호사마저 이 사건을 두고 이재명의 이름을 거론하고 있다. 그는 4월 18일 모 언론과의 통화에서 “검찰이 원하던 건 이 전 부총장을 구속하고 진술을 확보해서 노영민이니, 송영길이니 이런 사람들 구속영장을 치고 결국 이재명 대표를 치는 게 목표인 거 같다”고 이야기한 바 있으니 말이다.
‘돈 봉투 게이트’는 연이은 악재에 시달리던 국민의힘과 대통령실 처지에서는 실로 가뭄의 단비처럼 느껴질 것이다. 민주당 전당대회를 앞두고 돈 봉투를 주고받은 정황이 있을뿐더러, 혐의를 입증할 통화 녹음과 녹취가 법원에 의해 적법한 증거로 인정받은 상태이기 때문이다. 검찰 수사 과정에서 강래구는 돈 봉투를 받은 의원을 20명으로 특정했다. 20명에 대한 수사와 재판이 모두 진행되는 것은 더딜 수밖에 없다. 내년 4월 총선까지 이슈가 살아 있을 테고, 결국 민주당의 발목을 잡아 국민의힘에 반사이익을 주게 되리라는 기대를 품어봄직하다.
글쎄, 과연 그럴까? 필자는 동의하지 않는다. ‘돈 봉투 게이트’는 민주당의 총선 가도에 그리 큰 악영향을 미치지 못하리라 본다. 외려 반전의 기회를 제공하는 나비효과를 낳을 수도 있다. ‘나비효과’라는 말은 어쩌면 적절치 않을지도 모르겠다. 이 초대형 정치 스캔들의 영향을 최대한 자신들에게 유리한 쪽으로 끌고 가기 위한 정치권의 움직임이 벌써부터 관측된다. 이는 나비효과처럼 순전히 우연에 기대는 게 아니다. 상황을 분석한 후 의지를 가지고 움직이는 모습이 벌써 보인다는 소리다.
‘돈 봉투 게이트’는 민주당의 악재가 맞다. 하지만 민주당의 ‘총선 악재’라고 장담할 수는 없다. 그렇게 믿고 있다면, 이 ‘돈 봉투 게이트’는 오히려 국민의힘에게 ‘총선 악재’로 작용할 가능성마저 있다. 돈 봉투를 받은 당직자들이 감옥에 간 정당이 선거에서 심판 받기는커녕 예상외의 좋은 성적을 내는 일마저 불가능하지 않다.
“소방관으로 돌아간다”
4월 10일 오영환 민주당 의원이 국회에서 기자회견을 열었다. “이제 저는 국민을 위해 헌신하던 저의 사명, 제가 있던 곳이자 제가 있어야 할 곳인 국민의 곁을 지키는 소방관으로 돌아가고자” 한다며 22대 총선 불출마를 선언했다. “한 달 전인 지난달 9일 주택 안에 사람이 있다는 말 한마디에 주택 화재 현장에 뛰어들어 순직한 만 29세의 또 한 명의 젊은 소방관의 유골을 현충원에 묻어야 했다”며 “이제 소방공무원 수험생으로 돌아가겠다”는 뜻을 밝혔다.소방관으로서 헌신과 봉사의 삶을 살았고, 그 일로 돌아가고자 한다는 그의 진심을 의심하지 않는다. 한 사람의 시민으로서 감사의 말을 전하고 싶다. 하지만 필자는 오영환의 불출마 선언이 이낙연계의 활동 재개를 알리는 신호탄이라 생각한다. 그가 기자회견을 한 시점이 너무도 공교롭기 때문이다. 이정근의 1심 선고를 앞두고 있지만, 당장 재판 결과가 나와서 모든 뉴스가 묻히지는 않을, 적당히 사람들의 관심과 호응을 이끌어낼 수 있을만한 그런 타이밍을 잡은 것이다.
과연 그의 불출마 선언이 문자 그대로 지켜질 수 있을까? 어쩌면 젊은 정치인에게 좋은 이미지를 심어주기 위한 이낙연계의 포석이 아닐까? 세상일을 너무 삐딱하게 보는 것 아니냐는 비판을 스스로에게 잠시 던져 본다. 하지만 더욱 공교롭게도 비슷한 시기인 4월 8일 이낙연이 장인상을 치르기 위해 잠시 귀국했다는 점, 18일까지 가족과 시간을 보내며 미국으로 돌아가지 않았다는 점, 13일 친이낙연계 의원들과 만찬을 가졌던 그가 당 원로로서 ‘돈 봉투’ 게이트에 대해 걱정스럽다는 견해를 밝혔다는 언론 보도가 나왔다는 점 등을 종합할 필요도 있다.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필자는 소방관으로 돌아가겠다는 오영환의 진심을 의심하지 않는다. 그러나 동시에, 어떤 정치인이건 ‘불출마 선언’이 꼭 출마를 안 하겠다는 뜻은 아니라는 것, ‘나는 출마하지 않는다’라는 말을 함으로써 발생할 수 있는 다양한 효과를 노리는, 그 또한 정치적 행보의 일부라는 점을 잊어서도 곤란하다.
‘한 마리의 제비가 봄을 불러올 수는 없다.’ 귀납법을 설명할 때 흔히 인용되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이다. 불출마 선언, 소방관 복귀 선언을 함으로써 일약 언론의 주목과 세간의 호평을 얻은 오영환은, 아직까지는 한 마리의 제비다. 하지만 한국 정치의 속성상 머잖은 시점에 여러 마리의 제비가 하늘을 날아오를 수도 있다.
텅 빈 ‘중원’
‘돈 봉투’ 게이트가 지금의 민주당을 괴롭힐 수는 있어도 민주당의 총선에 미칠 영향은 미지수로 봐야 한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다. 이 사건으로 인해 친이명계가 큰 피해를 입고 다음 총선에서 줄줄이 컷오프 된다면 이재명계는 심각한 타격을 입을 것이 분명하다.민주당을 향한 국민의 불만, 부패 정당 아니냐는 의혹 등을 이재명이라는 한 사람에게 모두 덧씌워버린 후, 선거를 적당히 앞둔 시점에 이재명과 친이재명계를 ‘정리’하는 모습을 연출할 수도 있다. 그 경우 민주당은 부패의 온상에서 일약 부패를 ‘손절’한 신선한 이미지를 갖게 된다. 상대적으로 정치의 때가 덜 묻은 이미지 좋은 이들을 앞세운다면 그 효과는 한층 배가될 수 있다. 산뜻한 모습으로 총선에 임하는 새로운 민주당, 승산이 없지 않다는 소리다.
이런 식으로 정치적 위기를 모면하는 전략은 집권 정당, 특히 보수 정당이 흔히 써오던 것이다. 이른바 ‘여당 내 야당’ 전략이다. 같은 당이지만 다른 계파로 존재하며 그 사실을 모두가 아는 정치 세력. 그 존재를 용납하고 심지어 어느 정도 활동 범위를 보장함으로써, 정부 심판 여론이 드세게 몰아치는 선거 국면을 무사히, 혹은 상대적으로 적은 피해를 입으며 넘기는 방식이다.
2023년 4월 현재 대한민국의 정치는 정 반대다. ‘돈 봉투’ 게이트에 휘말린 야당은 ‘야당 내 야당’을 가지고 있다. 반면 지난 국민의힘 전당대회 및 당대표 선거를 거치며 ‘윤심으로 대동단결’한 국민의힘은 ‘여당 내 야당’을 용납하지 않고 있다.
이 상황은 국민의힘의 총선 구도에 결코 유리하지 않다. 윤석열 대통령은 여러 잡음을 무릅쓰고 대통령실과 여당을 일체화했다. 득이 있을 수 있지만 실을 우려할 수밖에 없는 세팅이다. 대통령과 일체가 된 여당은 ‘정부 심판 여론’이 불어 닥칠 때 그 풍랑을 함께 맞을 수밖에 없다. 금태섭 전 의원과 김종인 전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이 제3지대 창당 여론을 조성하고 있는 것도 마찬가지 맥락에서 봐야 할 일이다. 대통령이 국민의힘을 완전히 장악하는 과정에서 이른바 ‘중원’이 크게 비어 있는 상황이 조성됐다.
4·19 혁명 기념식에 참석한 윤석열은 기념사에서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피와 땀으로 지켜온 민주주의는 늘 위기와 도전을 받고 있습니다. 독재와 폭력과 돈에 의한 매수로 도전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현 정부의 열혈 지지층이라면 이 발언을 ‘사이다’로 받아들였을지 모르겠다. 필자는 그보다 큰 우려를 느낀다.
‘이재명 때리기’로 버티기엔 1년은 너무 길다. 미래의 민주당이 과연 지금처럼 ‘이재명의 민주당’일지조차 장담할 수 없다. 이재명을 버리고 이미지를 갱신한 민주당은 국민의힘 처지에선 이재명의 민주당보다 훨씬 까다로운 상대다. ‘여당 내 야당’은 고사하고 ‘여당 내 이견’조차 용납하지 않는 대통령실과 국민의힘이 쥔 승산은 과연 얼마나 될까.
노정태
● 1983년 출생
● 고려대 법학과 졸업, 서강대 대학원 철학과 석사
● 前 포린 폴리시(Foreign Policy) 한국어판 편집장
● 저서 : ‘불량 정치’ ‘논객시대’ ‘탄탈로스의 신화’
● 역서 : ‘밀레니얼 선언’ ‘민주주의는 어떻게 망가지는가’ ‘모던 로맨스’ 外