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범함 속 비범함, 나이와 외모 부조화가 강점
“정의롭다? 나 자신에게 떳떳하고 싶을 뿐”
오르지 못할 설경구, 다시 만나고픈 구교환
삶의 지향 바꾼 인생작 ‘해피엔드’
‘나 자신을 믿자’로 슬럼프 극복
전도연은 “어릴 적엔 현모양처를 꿈꿨지만 지금은 배우를 천직으로 여긴다”고 말했다.[넷플릭스]
전도연은 1990년 ‘존슨 앤 존슨’ CF모델로 연예계에 입문했다. 이후 여러 드라마에서 조연을 맡다가 1997년 영화 ‘접속’으로 일약 스타덤에 오른다. ‘접속’의 여주인공 역엔 당대 최고 인기를 구가하던 심은하가 일찌감치 낙점됐으나 스케줄이 맞지 않아 출연할 수 없게 되자 전도연이 그 자리를 꿰찼다. 처음엔 ‘대타’였지만 결과적으로 전도연 캐스팅은 신의 한 수라는 평이 자자했다. 이후 전도연은 영화는 물론 드라마에서도 주연만 도맡으며 수많은 히트작을 낸다. 2007년에는 칸국제영화제에서 한국 여배우 중 처음으로 여우주연상(영화 ‘밀양’)을 받기도 했다. 그해 서울대 출신의 사업가 강시규 씨와 결혼해 2009년 딸을 출산하는 기쁨도 맛본다. 원래 꿈이 “배우가 아닌 현모양처”라고 말해왔기에 연기 공백기가 길어질 것으로 예상됐으나 2010년 영화 ‘하녀’로 출산 1년 만에 스크린으로 돌아온다. 이후 연기 활동은 예전만큼 활발하진 않았지만 간간이 출연하는 작품에서마다 이름값을 톡톡히 해낸다. ‘전도연의 전성기엔 브레이크 타임이 없다’는 얘기가 나올 정도다. 그의 롱런 비결은 대체 뭘까.
영화 평론가들은 평범해 보이는 외모에서 그 답을 찾는다. 주변에 있을 법한 친근한 외모여서 어떤 역할을 맡아도 관객의 감정몰입과 대리만족을 돕는다는 것. 나이를 가늠하기 힘든 동안(童顔)도 강점으로 꼽힌다. 실제 나이보다 앳돼 보여 ‘일타스캔들’의 정경호, ‘길복순’의 구교환 같은 연하 배우와의 러브라인이 어색하지 않다는 것이다.
‘길복순’은 킬러이자 혼자 아이를 키우는 엄마인 길복순의 이중생활을 그린, 그가 처음 도전한 정통 액션물이다. 이 영화가 넷플릭스에서 전 세계 인기순위 1위를 차지한 4월 5일 그를 만났을 때도 아기처럼 뽀얀 피부가 시선을 사로잡았다. 화장기 하나 없는 맨얼굴의 그는 자신의 속내를 드러내는 데도 인색하지 않았다.
필라테스와 손편지의 여운
오늘 ‘길복순’이 넷플릭스 글로벌 인기순위 1위를 차지했다. 기분이 어떤가.“대박 기쁘다. 말로 다 할 수 없을 정도다. 사실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짐승들’(이하 ‘지푸라기’)이라는 영화가 코로나 사태로 큰 타격을 받아 안타까웠다. 그래서 넷플릭스에서 방영될 작품을 하면 개봉 스트레스나 코로나 사태로부터 좀 자유롭지 않을까 하고 가볍게 생각했다. ‘일타스캔들’도, ‘길복순’도 이렇게까지 좋은 반응을 얻을 줄은 몰랐다.”
청부살인업체 대표 역을 한 설경구 씨가 영화 ‘불한당’ 덕에 ‘지천명 아이돌’로 불렸다. 본인도 이번 영화로 같은 찬사를 듣고 있다. 인기를 실감하나.
“딸아이가 지금 15세인데 딸 친구들이 ‘일타스캔들’과 ‘길복순’을 보고 내 팬이 됐다고 한다. 내 출연작 중에 아이들이 볼 수 있는 작품이 많지 않아서 어린 학생들에겐 존재감이 별로 없는 배우였는데 이번에 10대, 20대 팬이 많이 생겼다. 그 덕분에 ‘관객과의 대화(GV)’를 할 때 고등학생, 대학생 팬들로부터 실로 오랜만에 손편지를 받았다. 귀여운 스티커에 진심어린 내용까지 너무 좋았다. 하나같이 ‘예전부터 배우였는데 이제야 팬이 돼서 너무 미안하다. 내 작품을 계속 찾아보고 있다’는 얘기를 해줘서 정말 고마웠다.”
길복순이 “애 키운 거에 비하면 사람 죽이는 거 쉽다”고 말한다. 실제로 육아가 일(연기)보다 어려운가.
“일도 힘들지만 아이 키우는 게 가장 힘든 것 같다. 극중에서는 육아의 어려움을 단순한 대사 한마디로 짧게 표현했지만 엄마들이 얼마나 힘든지 나는 알 것 같다. 아이를 키우는 일은 결코 심플하지 않다. 정답도 없다. 아이도 성숙하지 않은 상태고, 엄마도 실은 육아에 서툴기 때문에 계속 실수하고 부딪히고 반성하는 과정을 반복한다. 그러면서 아이와 함께 엄마도 성장한다. 난 딸에게 솔직하게 말하는 편이다. 서툰 점을 인정하고 모르는 건 모른다고 얘기한다. 그러면서 아이의 이해를 구하고 아이의 선택을 믿어주기도 한다. 그 결과의 책임은 아이가 져야 하지만 그렇게 하고 있다.”
필라테스를 오래했다. 체력 관리를 위해서인가.
“영화 ‘해피엔드’(1999) 촬영을 끝내고 재미있게 할 만한 것을 못 찾아서 시작한 게 운동이다. 어릴 때 아빠를 따라 산에 다닌 기억이 나서 운동을 하기 시작했는데 해보니 너무 재미있었다. 다만 내 멋대로 막 해서 자꾸 다쳤다. 이래선 안 되겠다 싶어 필라테스로 전향했는데 나와 잘 맞았다. 선생님을 잘 만난 덕분에 체형이 보정되고 깨져 있던 몸의 균형도 되찾았다. 키도 1cm 커져 건강검진 할 때 되게 뿌듯했다(웃음).”
목주름 없는 것도 필라테스 덕인가.
“필라테스의 교정 효과일지도 모르지만, 목주름은 원래 없는 편이다. 하하.”
장항준 감독이 무서워하는 두 명의 여배우로 전혜진, 전도연 씨를 들었다. 둘 다 불의를 못 참고, 강자한테 강한 정의로운 여성상이라고도 했다. 인정하나.
“내가 정의로운지는 잘 모르겠다. 스스로 생각할 때 나 자신에게 떳떳한 사람이고 싶긴 하다. 그런 점은 길복순이 살아가는 방식과 조금 닮았다.”
일할 땐 완벽주의
영화 ‘길복순’에서 승률 100% 킬러 역으로 열연한 전도연. [넷플릭스]
“예전에도, 지금도 첫째가 시나리오다. 처음으로 시나리오를 안 보고 예외적으로 선택한 작품이 ‘길복순’이다. 감독님이 처음부터 저를 길복순 역으로 놓고 쓴 작품이기 때문이다. 사실 감독님이 오래전부터 내 팬이었다. 작품을 같이 하고 싶었는데 엄두를 못 내다가 ‘지푸라기’를 보고 용기가 났다고 한다. 내가 해보지 않은 액션 장르라면 얘기해볼 수 있을 것 같아 나를 주인공으로 놓고 시나리오를 쓴 거였다. 그러다 보니 나에 대한 많은 얘기를 들었고, 우리 집에 여러 번 놀러오기도 했다. 집에서의 모습이 밖에서와 많이 달라 놀라워했고 그 차이를 흥미롭게 여기더라. 집에서 아이한테 쩔쩔매는 엄마의 모습에서 영감을 받았다고 한다.”
집에서의 모습이 많이 다른가.
“가장 편한 공간이니 일할 때와는 다른 모습일 수밖에 없다. 일할 땐 완벽주의를 추구하지만 집에선 그렇게 하지 못한다. 내 취약점과 부족한 면을 잘 드러낸다. 의도적인 건 아니다. 몰라서 아는 척할 수 없으니 솔직하게 얘기한다. 그리고 딸아이의 의견을 존중해주려고 한다. 어릴 때와 달리 지금은 좋아하는 취향과 스타일이 있고 맞는 얘기를 할 때도 많기 때문이다. 덕분에 딸과 사이가 대체적으로 좋다.”
변성현 감독과 대화를 많이 했다고 들었다. 무슨 얘기를 했나.
“대화보다 술을 많이 한 것 같다. 감독님이 술을 좋아한다. 나도 애주가여서 같이 많이 마셨다. 그러면서 작품을 어떻게 풀어갈지, 딸과 어떤 얘기를 하는지, 어떤 스토리를 넣으면 좋을지에 대해 많은 대화를 나눴다.”
주량이 어느 정도인가.
“소주 두세 병!”
극중 길복순처럼 ‘후배들에게 자리를 좀 양보해줘야 하나’ 하는 생각이 들 때도 있나.
“배우는 누군가를 위해 양보하거나 배려하는 직업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카메라 앞에선 모두 동료이자 라이벌 관계다. 나이나 경력을 떠나 서로 라이벌 의식을 갖는 건 작품을 위해서도 좋다고 본다.”
나이를 의식하지 않는 편인가.
“그렇다. 나이를 의식하지 않고 살았는데 ‘일타스캔들’ 반응을 보고 깜짝 놀랐다. 나이에 대한 선입견이 있을 수밖에 없겠구나 싶으면서도 조금 화도 나고 답답하기도 했다. 그렇다고 해서 이제 두 번 다시 로맨틱코미디를 할 수 없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다른 형식의 로맨틱코미디가 들어온다면 또 새로운 모습을 보여줘야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 상대 배우가 길복순의 후배 킬러로 나오는 구교환 씨여도 좋을 것 같다.
“구교환 씨가 예전에 출연한 ‘꿈의 제인’ ‘메기’ 같은 작품을 보면서 팬이 됐다. ‘DP’도 인상 깊게 봤다. 어떤 배우인지 궁금했는데 교환 씨가 너무 바빠서 촬영할 때 많이 교류하지 못했다. 다음에 또 기회가 된다면 같이 호흡을 맞춰보고 싶은 배우다.”
설경구 씨와는 ‘나도 아내가 있었으면 좋겠다’(2001), ‘생일’(2019)에 이어 세 번째로 작품을 같이 했다. 옆에서 지켜본 그를 한 줄로 평가한다면.
“(잠시 고민하더니) 오르지 못할 산인 것 같다. 다 올랐다고 생각하는데 그 위에 또 뭐가 있고, 계속 오르다 보면 또 새로운 감정이 느껴진다. 사실 세 작품을 같이해서 더 궁금한 게 있을까 했는데 이번 작품을 하면서 그가 만들어낸 인물의 새로운 면면이 느껴졌다. 다음 작품에서는 또 어떤 산을 오르게 될까라는 궁금증이 드는 배우다.”
현모양처보다 배우
영화 ‘무뢰한’, 드라마 ‘일타스캔들’의 한 장면(왼쪽부터). [CGV아트하우스, tvN]
“흰색이다. 흰색은 색을 계속 덧입힐수록 다른 색깔이 나오지 않나. 나 스스로도 작품을 통해 어떤 색이 입혀질지, 그런 색들이 섞이면서 어떤 색이 나올지 궁금하다.”
어릴 때 꿈도 배우였나.
“전혀 아니다. 배우는 되게 특별한 사람만 가질 수 있는 직업이라고 생각했다. 난 무척 평범하게 살았고, 주변에 이쪽 일을 하는 사람도 없었다. 무엇보다 내가 제일 잘하는 건 집안일이라는 생각이 들어 꿈이 현모양처였다. 배우가 된 건 운이 좋아서였다. 꿈이 아니었기에 일에 집착하며 힘든 시간을 보내지 않았다. 여유를 갖고 시간을 보낸 덕에 지금까지 연기를 할 수 있는 게 아닌가 싶다. 지금은 꿈이 배우고 그 꿈을 이뤄가는 중이라고 생각한다.”
지금은 제일 잘하는 일이 연기이고 배우가 천직으로 보인다.
“나도 내가 연기를 이렇게 잘할 줄 몰랐다(웃음). 연기를 배운 적도 없고, 잘하기 위해 뭘 해본 적이 없는데 이 정도면 천직이라고 생각할 만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지금은 한다.”
이런 사람이 한 인터뷰에서 “자존감이 낮다”고 고백해 이해가 안 됐다.
“자존감이 낮다고 생각하는 이유는 내가 일을 잘하는지 계속 확인받고 싶어 해서다. 내 선택을 후회하고 싶지 않아서 늘 최선을 다하는 거지, 자신감이 있어서가 아니다. 어떤 작품이나 캐릭터를 자신 있게 잘할 수 있어서 하는 게 아니라 스스로 잘하도록 이끌면서 연기해왔다. 그래서 더 완벽하려고 노력하고 하나라도 놓치지 않으려고 하는 것 같다.”
배우로서 반드시 지키려고 하는 철칙이 있나.
“시간 약속을 잘 지키자, 그리고 대사로부터 자유로워지자는 것이다. 대사 안에 갇히면 그 대사를 생각하느라고 많은 부분을 놓친다. 그래서 대사를 좀 미친 듯이 죽어라 외운다. 현장에서는 대사보다 작품 속 인물로서 뭘 할 수 있을지에 골몰한다. 애드리브는 잘 못 한다. 대사의 맛을 살리는 데 집중한다.”
매일이 전성기인 것처럼 지금까지 승승장구하고 있다. 혹시 우리가 모르는 슬럼프가 있었나.
“개인적으로 힘든 시기가 있었다. ‘지푸라기’ 촬영을 끝내고 변 감독님을 처음 만났을 때만 해도 오랫동안 들어오는 작품이 없었다. 심적으로 너무 괴로워 ‘무뢰한’(2015)의 오승욱 감독님도 만나 많은 얘기를 했다. 작품을 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한데 왜 내가 할 수 있는 작품이 없지 하는 생각이 들어 정말 힘든 시간을 보냈다. 그때가 슬럼프라 할 만한 침체기였다.”
그렇게 힘들 때 마음을 다잡아주는 인생의 나침반 같은 좌우명이 있나.
“좌우명까지는 아니고 그냥 ‘나 자신을 믿자’고 스스로에게 주문한다. 지금까지 잘해왔고 앞으로도 잘해낼 것을 의심하지 않으려 한다. 뭔가 의미를 부여하기보다 나 자신을 믿으며 힘든 시간을 버티고 견딘다. 슬럼프도 그렇게 극복했다.”
‘무뢰한’은 지금도 동호회가 존재할 정도로 그 영화에 중독된 팬이 많다. 차기작 ‘리볼버’를 오승욱 감독과 다시 함께하게 돼 감회가 남다를 것 같다.
“나도 ‘무뢰한’이라는 작품을 정말 좋아한다. 그때 다른 작품 촬영이 잡혀 있어 출연하기가 어려웠는데 시나리오를 읽고 며칠 동안 잔상이 남아서 다른 작품에 양해를 구하고 찍은 영화다.
오승욱 감독님은 굉장히 세련되거나 트렌디하진 않지만 영화적 깊이와 글을 존중하는 그분의 우직함을 좋아한다. 다음 작품을 빨리 보고 싶은 감독 중 한 분인데 글 쓰는 단계부터 집착해 시간이 오래 걸린다. 그런 담금질을 거친 작품을 함께하게 돼 기대가 크다.”
부모까지 설득하게 한 인생작
어느덧 연기 인생도 30년을 넘어섰다. 그동안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작품이 필모그래피에 담겼고, 그중 상당수가 큰 사랑을 받아 대표작 반열에 올랐다. “모든 작품이 소중하겠지만 인생작을 하나만 꼽으라” 하니 전도연은 쉽게 입을 열지 못했다. “너무 어려운 질문”이라며 한참 고민하던 그가 비로소 꺼낸 제목은 1999년 ‘18세 관람가’ 등급으로 개봉한 정지우 감독의 ‘해피엔드’다.“내 인생의 작품이라기보다 내가 어떻게 살아갈지 방향을 바꾸게 한 작품이다. 그 영화가 배우로서의 길을 선택하게 했다. 그때는 사회분위기가 지금보다 훨씬 더 보수적이어서 여배우는 어때야 한다는 선입견이 있었다. 게다가 당시 내가 엄청 잘나갔기에 그 작품에 출연하는 걸 많은 사람이 반대했다. 내가 감수할 게 많은 작품이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새로운 도전이었기에 그 작품에 출연하려고 부모님까지 설득했다. 다른 사람을 설득하면서 내 선택이 더 확고해졌던 것 같다.”
연기하기가 만만치 않았을 것 같다. 그 작품에 출연한 걸 후회한 적은 없나.
“막상 촬영에 들어가니 노출 장면이 너무 부담스럽고, 현실적으로 미처 생각하지 못한 것들을 내가 해내야 했을 때 굉장히 많은 벽에 부딪혔다. 정지우 감독님이 그럴 때마다 굉장히 큰 힘을 실어줬다. 이전까지는 감독님이 시키는 것들을 군소리 없이 따르기만 했는데 그 영화를 찍을 땐 감독님이 원하는 것과 내가 하고자 하는 것을 같이 이야기하면서 조율해 장면을 만들어갔다. 그게 내겐 특별한 의미가 있다. 수동적으로 임하던 촬영을 좀 더 능동적이고 적극적으로 하게 됐달까. 부모님을 비롯해 모두가 반대하는 작품이었지만 그 영화를 했기에 지금의 전도연이 있는 것 같다. 전도연을 오롯이 배우로 살게 한 작품이니까.”
김지영 기자
kjy@donga.com
방송, 영화, 연극, 뮤지컬 등 대중문화를 좋아하며 인물 인터뷰(INTER+VIEW)를 즐깁니다. 요즘은 팬덤 문화와 부동산, 유통 분야에도 특별한 관심을 갖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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