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민 지원에 투신한 서울법대 79학번
봉사하다 만난 아내… “가난해도 좋아”
“난민 돌보는 이유? 한국 사회 평화”
난민·탈북자에 보수·진보 나뉘어서야…
“가치 좇으면 ‘조건’ 없어도 행복해요”
3월 23일 이호택 대표는 ‘신동아’와 인터뷰하면서 “난민도, 난민처럼 길을 잃은 사람도 낙담할 필요 없다”고 말했다. [조영철 기자]
3월 23일 서울 금천구 가산동 ‘피난처’ 사무실에서 만난 이호택(63) 대표는 너털웃음을 지었다. 만남 내내 잘 웃었다. 정말 미친 사람은 아니다만 어떤 사람이라고 잘라 말하긴 어렵다. 누군가에겐 이해가 안 될 만큼 이상한 사람, 다른 누군가에겐 존경심을 불러일으킬 만큼 대단한 사람일 테다. 이든 저든 다소 남다른 사람이라는 데엔 모두 고개를 끄덕일 듯하니 ‘평범하진 않은 사람’이 그나마 적절한 표현일 법하다.
공부를 잘했다. 서울대 법과대학을 나왔다. 79학번으로 동기가 160명, 이 가운데 약 120명이 사법고시에 합격했다. 그렇다보니 대부분 법조인의 길을 걸었다. 윤석열 대통령도 그중 하나다. 꼭 법조인이 아니더라도 학계·재계에서 사회적으로 ‘성공했다’고 할 만한 인물이 즐비하다.
이호택 대표는 다른 길을 택했다. 중학교 때 미션스쿨을 다니며 신앙을 가졌고, 고등학교 때 ‘인권 의식’에 눈을 떠 ‘평범한 길 대신 험한 길로 가자’를 삶의 모토로 삼았단다. “고향이 전북 전주인데, 민주화운동을 하는 사람이 많아 영향을 받았다. 다닌 교회도 개혁적 성향이 강했다”는 게 그의 말이다.
신앙심이 깊어 절대자가 바람을 이뤄준 걸까. 대학교 3학년 때 사법고시 공부를 시작해 단번에 1차 시험에 합격할 때만 해도 탄탄대로일 것 같던 그의 삶에 시련이 찾아온다. 무슨 영문인지 글이 잘 써지지 않았다. 명필 소리를 들었건만 글씨도 망가졌다. 2차 시험에서 번번이 고꾸라졌다. 낙방이 거듭될수록 마음은 조급해졌고, 그럴수록 글은 더 써지지 않는 악순환이 반복됐다. 더욱 더 이기적으로, 앞만 보고 달려도 될까 말까건만 그 와중에 신장 한 쪽을 가족도 아닌, 생판 모르던 사람에게 기증했다. 서른한 살 때다. 그의 말을 옮기자면 이유는 “인간에 대한 열정과 사랑이 몸 한가득 듬뿍 올라와서”다.
마음엔 사랑이 충만했지만 몸엔 피로가 충만해졌다. 신장 두 쪽이 하던 일을 한 쪽이 하니 쉽게 지치고 잠이 몰려왔다. 공부가 잘 될 리 만무했다. 결국 30대 중반에 이르렀고 이른바 ‘고시 낭인’이 됐다. 보통 사람이라면 이때나마 기업에라도 들어가는 게 일반적이련만 그는 공부한 노동법 지식을 갖고 외국인 노동자 인권 보호를 위해 자원봉사활동에 투신했다. 1994년 일이다.
“당시는 외국인 노동자가 한국에 유입되기 시작한 무렵이었습니다. 한국인 노동자는 이미 기득권화 되고, 궂은 일자리를 외국인 노동자가 채워갔죠. 인권 상황이 열악했는데, 이들을 위해 일하려는 법조인이 거의 없었어요. 저라도 그나마 배운 걸 그들을 위해서 써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죠.”
점차 시야가 넓어졌다. 외국인 노동자에서 조선족으로, 조선족에서 북한이탈주민으로, 북한이탈주민에서 난민으로. 그러다 1999년 한국 최초 난민지원단체 ‘피난처’를 창립하기에 이르러 지금까지 이어왔다.
가난하지만 가난하지 않다
3월 19일 서울 중구 서울역 광장에서 열린 ‘2023 세계 인종차별 철폐의 날 기념대회’에서 한 참여자가 난민 혐오 근절을 촉구하는 문구를 적고 있다. [뉴스1]
“성격이 내성적인 편이라 학생 시절 동기들과 교류가 많았던 건 아니에요. 졸업 후엔 간간이 동창회에 나가는 정도였고요. 다만 동기들이 저에게 일종의 ‘부채 의식’이 있는 것 같아요. 물론 그 친구들도 다 의미 있고 훌륭하게 살았죠. 하지만 세상의 소외되고, 그늘진 곳을 신경 쓰지 못했다고 느낄 순 있다고 봐요. 저의 삶을 보며 자신들이 하지 못한 일을 대신 해줬다고 여긴 것 아닐까 생각해요.”
아내 조명숙(53) 씨가 이 대표의 든든한 조력자가 돼줬다. 1994년 봉사활동을 하다 만나 지금껏 함께해온 반려자이자 사상적 동지다. 아내 이야기가 나오면 이 대표는 영락없는 팔불출이 된다. 아직도 설레는 건가 싶다. 마치 어제 일처럼 생생한 듯 신이 나 옛날 일을 말한다.
“사법고시 준비를 관두고 봉사활동에 임하긴 했는데, 스스로를 돌아보니 나이는 먹었지, 직장도 없지, 완전 폐인인 거예요. 장가는 다 갔구나 싶었죠. ‘내 조건이 이 모양인데, 누가 나한테 시집오겠어’ 하면서요. 사실 아내에게 호감이 있긴 했는데, 저보다 열 살이 어려요. 다 늙어서 주접을 떨면 안 되잖아요(웃음). 다가갈 생각을 하지 못하고 괜찮은 사람을 소개해줬어요. 이른바 ‘조건 좋은’ 사람이요. 제가 법대 나와서 주변에 법조인이 많잖아요. 그런데 다 맘에 안 든다는 거예요. 조건 소용없다고. 그래서 ‘소개팅 열 번 해도 맘에 드는 사람 없으면 나랑 만나자’고 했고, 결국 그렇게 됐죠(웃음). 법률적으로 말하면 ‘중개인의 개입권’을 행사했다고 해야 할지(웃음).”
1997년 결혼했다. 신혼여행도 남달랐다. 중국 항저우에 며칠 있다가 옌지로 가 북한이탈주민의 탈출을 도왔다. 북한이탈주민 13명과 함께 중국 당국의 단속을 피해 곳곳을 누볐다. 한국대사관에 도움을 요청했지만 대사관 측은 “중국 당국이 경비를 강화해 도울 수 없다”며 보호를 거부했다. 결국 베트남 국경을 넘었다. 최초의 민간 주도 탈출이자 제3국 경유 탈출이다. 하지만 끝이 아니었다. 베트남·한국 정부 모두 이들을 책임지려 하지 않았다. 북한이탈주민 13인은 중국-베트남 국경 사이에서 양국 군인에 의해 상대국으로 추방되길 반복했다. 이른바 ‘핑퐁난민사건’이다. 이 대표 내외는 각고의 노력 끝에 이듬해 초 그들 가운데 한국행을 원하는 11명을 데려오는 데 성공했다. 조 씨는 현재 북한이탈주민 청소년을 위한 대안학교 ‘여명학교’ 교장으로 있다.
살림살이가 넉넉하진 않다. 15평짜리 집에, 물건 하나를 20~30년씩 쓴다. 2000년생 아들, 2002년생 딸이 있다. 하도 아껴서 과거 아들은 ‘절’자 들어가는 말이 제일 싫다고 했단다. ‘절약’ ‘절제’….
“가난하게 사는 건 맞죠. 그렇다고 정신적으로 가난하진 않아요. 넉넉하죠. 특별한 어려움이 있다고 생각하지도 않고요. 저는 아내와 행복해요. 아내도 저를 보면 너무 행복하대요. 행복엔 여러 종류가 있거든요. 가치를 좇는 삶을 사니 조건에서 자유롭게 행복할 수 있어요. 의미도 더 큰 것 같고요.”
막다른 골목에 우리마저 없다면…
‘행복하다’와 ‘힘들지 않다’가 동의어는 아니다. 난민을 품기란 여간 힘든 일이 아니다. 일단 예산부터 빠듯하다. 1달에 약 5000만 원, 1년이면 6억 원이 든다. 일하는 직원은 이 대표 포함 10명, 모두 최저임금만 받지만 돈 나갈 일이 원체 많다. 한 달에 돕는 난민만 500여 명이다. 아예 건물 4층엔 난민이 거주할 수 있도록 침상 20개를 마련했다. 최장 3개월까지 살 수 있도록 규칙을 정해놓긴 했지만 갈 곳 없는 사람을 어찌 매몰차게 내쫓을 수 있으랴. 몇 년 동안 살고 있는 난민도 있다. 정기 후원금만으론 예산의 절반쯤밖에 채우지 못해 공공기관, 재단, NGO 등 여기저기 발품을 팔며 펀딩을 한다. 국내 난민이란 난민은 다 피난처로 몰려들어 그렇단다.“어찌 생각하면 되게 웃긴 일인데, 난민 관련 사건이나 문제가 생기면 경찰·119에서 피난처로 연락이 와요. 허 참, 자기들이 책임지든지, 담당 기관을 따로 두든지, 하다못해 석열이가 책임지든지 해야 할 거 아니에요(웃음). 국가라면 그래야죠. 그런데도 ‘우린 방법이 없어요’라면서 피난처에 보내버린다니까요.”
사정이 이렇다보니 사명감으로 단단히 무장한 사람조차도 버티기 쉽지 않다. 대부분 직원들은 3년쯤 일하면 ‘번 아웃’ 돼버린다.
“솔직히 힘들죠. 재정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오늘 아침에도 난민 한 명이 몸이 아팠는데 병원을 안 가고 여기로 왔어요. 병원 가봤자 말이 안 통하니까 우리한테 의지하러 온 거예요. 구급차 불러서 응급실로 보냈는데, 비용을 누가 내겠습니까. 당연히 우리가 내죠.”
그도 사람인지라 볼멘소리를 하긴 하지만 절대 포기하지 않는 원칙이 있다. 찾아온 난민은 단 한 명도 그냥 돌려보내지 않는 것.
“‘우린 몰라’ ‘할 수 있는 게 없어’라고 말하지 않아요. 최선을 다해서, 어떻게든, 뭐라도 해줘요. 돈이 얼마가 들든지, 우리가 어떤 상황이든지 상관없이요. 우리마저 외면하면 난민들에겐 길이 없어요. 우린 어떻게든 길을 찾아줘야 해요. 못 찾아주면 찾을 때까지 같이 있어주기라도 해야죠. 그러다보면 끝내 길이 열리니까요. 난민에게 최후의 보루가 돼준다는 건 이 사회를 평화롭게 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예요. 그들이 퇴로가 없는, 막다른 골목에 몰렸다고 가정해 봅시다. ‘이젠 다 끝났어’라면서 조용히 죽길 기다릴까요. 천만에요. 살기 위해 발악하죠. 그러다보면 분노가 생깁니다. ‘다 똑같은 사람인데, 너희들은 잘 살고 왜 우리는 이렇게 힘들어야 해’라는 생각이 싹트면서요. 옆에 있는 사람을 칼로 찌르든, 건물에 불을 지르든 화를 표출하게 돼 있어요. 이런 관점으로 보면 피난처가 한국 사회 평화에 기여하고 있다고 볼 수 있지 않겠어요(웃음).”
“왜 자기 진영에 유리한 인권만 챙기나”
난민에 대한 한국 사회의 따가운 시선도 이 대표를 힘들게 하는 요소다. 2018년 5월 제주도에 500여 명의 예멘 난민이 들어왔을 때 이들에 대한 혐오 여론이 들끓었다. 2021년 8월 탈레반 세력을 피해 아프가니스탄에서 한국 정부를 도운 현지인 377명이 입국했을 때도 반대 목소리가 나왔다. 높은 문턱을 방증하듯 법무부 출입국·외국인정책본부에 따르면 2월 말 기준 난민 신청자 8만7553명(1994년부터 누적 집계) 가운데 난민, 혹은 난민에 준하는 인정을 받은 사람은 3836명. 허용률이 4.4%에 불과하다. 이 대표는 “그래도 따뜻한 시선을 갖고 응원해주는 사람이 있어 힘이 된다”고 했다.“물론 비난 많이 받죠. 비난하는 사람들은 대개 목소리가 큽니다. ‘과대 대표’됐다는 뜻이에요. ‘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돕자’고 생각하는, 중도적·합리적 견해를 가진 사람들이 대부분이라고 봐요. 실제로 난민들과 함께 거리로 나가 시민을 만나면 놀라울 정도로 많은 사람이 모금함에 돈을 넣거든요.”
이어진 이 대표의 말은 다소 의외였다. “오히려 난민보다 북한이탈주민에 대한 시선이 생각보다 곱지 않다”고 했다.
“북한이탈주민은 같은 민족이니까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이긴 해야 하는 존재로 생각하는 거지, 결코 좋게 보진 않는다고 느껴요. 북한이탈주민 스스로도 난민보다 정서적으로 더 불안정해요. 북한 수준의 독재 정치가 행해지는 나라가 거의 없거든요. 그런 곳에서 있다 보니 문제 해결 방식이 폭력적·단선적일 때가 많아요. 한국에 들어온 난민들은 대개 자국에선 지식인 대접을 받고, 민주 국가에서 지냈던 사람이거든요. 의식 수준은 난민이 더 나아요.”
그렇다고 난민과 북한이탈주민 사이 우열을 가리는 건 아니다. 이 대표에게 이 둘은 모두 감싸 안아야 할 존재들이다. 오히려 이 대표는 진보·보수, 이른바 ‘진영’에 따라 둘을 차등 대우하는 게 못마땅하다고 했다.
“진영에 따라 난민·탈북자에 대한 태도가 너무 달라요. 난민에 대해선 진보 진영이, 북한이탈주민에 대해선 보수 진영이 관심을 가져요. 인권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진보 진영도 북한이탈주민에 관심을 가져야 하는 게 맞거든요. 이상하죠. 미얀마인 인권은 신경 쓰면서 북한이탈주민 인권은 외면하니까요. 북한과의 교류·평화·통일을 위한답시고 북한을 옹호하다보니 북한이탈주민이 마치 ‘평화를 깨는 이단아’로 느껴지는 거예요. 반대로 보수 진영은 북한의 실패를 부각하려니 북한이탈주민에 관심을 갖는 거고요. 저는 북한이탈주민·난민을 다 신경 써야 하니까 난민을 위해 일할 땐 진보 진영 사람들을 만나고, 북한이탈주민 문제를 두곤 보수 진영 사람들을 만나요. ‘둘 중에 하나만 해’라면서 박쥐 취급을 당하곤 하죠(웃음). 하지만 약자 인권에 좌·우가 어디 있겠어요.”
길 잃은 자는 모두 난민… Refugee→Refuge 되길
난민 인권에 대해 열변을 토하는 이 대표를 바라보다 문득 그의 자녀들은 이런 그를 어떻게 생각할지 의문이 들었다. 자식으로선 아버지가 세상을 구하기보단 자신을 구해주길 바랐을 수 있으니까. 좀 더 이기적으로, 가족만 생각하면서, 경제적으로 풍요로운 가정을 꾸려가는 부모를 소망하더라도 그게 나쁜 건 아니니 말이다. “자녀들은 아버지가 하는 일을 지지하나”라고 물으니 “그렇다”고 했다. 아들이 “아버지처럼 NGO를 이끌고 싶다”고 장래희망을 밝힌 적도 있단다. 교육 비결은 ‘방목’이다.“제가 공부를 잘했어도 딱히 잘 되진 못했잖아요. 공부 잘한다고 잘 사는 게 아니라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래서 자녀에게 ‘공부해라’, 꼭 공부가 아니어도 ‘뭘 해라’라고 말한 적 없어요. 하고 싶은 것 하면서, 행복하게, 보람을 느낄 수 있는 가치를 좇아 살라고만 했죠. 방목하니까 오히려 아이들이 더 바르게 잘 크더라고요. 스스로 자신의 길을 찾은 거죠.”
이 대표는 가치·가정을 모두 지켰다. 후회 없는 삶이다. 그는 “한때 길을 잃어 ‘난민’과도 같았지만 결국 길을 찾아 여기까지 왔다”고 했다. 그렇기에 난민도, 난민처럼 길을 잃은 사람도 좌절할 필요가 없다고 했다.
2017년 경기 고양시 사법연수원 소강당에서 열린 ‘난민의 인권과 사법’ 세미나에서 콩고 난민 출신 욤비 토나가 한국 난민정책에 관해 발표하고 있다. 욤비의 아들은 ‘콩고 왕자’로 알려진 방송인 조나단이다. [동아DB]
이현준 기자
mrfair30@donga.com
대학에서 보건학과 영문학을 전공하고 2020년 동아일보 출판국에 입사했습니다. 여성동아를 거쳐 신동아로 왔습니다. 정치, 사회, 경제 전반에 걸쳐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에 관심이 많습니다. 설령 많은 사람이 읽지 않더라도 누군가에겐 가치 있는 기사를 쓰길 원합니다. 펜의 무게가 주는 책임감을 잊지 않고 옳은 기사를 쓰겠습니다.
과거와 현재 대화로 ‘K-아트’ 새로 태어나다
대한항공, ‘복 주는 도시’ 푸저우 가는 길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