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 5월호

대변인보다 ‘盧心’ 에 근접한 대통령의 진짜 ‘입’

윤태영 청와대 연설담당비서관

  • 글 : 김정훈 동아일보 정치부 기자 jnghn@donga.com

    입력2003-04-25 14: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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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윤태영 청와대 연설담당비서관은 노무현 대통령이 참석하는 회의와 행사에는 반드시 참석해야 하는 측근 중의 측근이다.
    • 지난 대선기간 동안 위기 때마다 그의 글은 꺼져가던 ‘노풍’을 재점화시키는 불씨가 됐다. 2002년 4월 민주당 대통령후보 수락연설문과 2003년 4월 대통령 국정연설 등 노대통령에게 명(名)연설문을 선사했던 윤비서관. 하지만 그의 얼굴과 노력을 아는 이는 그리 많지 않다.
    대변인보다 ‘盧心’ 에 근접한 대통령의 진짜 ‘입’
    ‘Mr.Sniper’.

    2002년 7월 16대 대통령선거전이 본격화할 무렵 ‘노무현 홈페이지’의 네티즌 칼럼란에는 ‘스나이퍼(저격수)’라는 필명의 칼럼니스트가 등장한다. 스나이퍼는 민주당 노무현(盧武鉉) 대통령 후보의 참모라고 자신을 밝혔을 뿐 더 이상의 설명은 없었다.

    스나이퍼는 그해 12월 대선이 끝날 때까지 모두 17차례 글을 올렸다. 대부분이 노대통령의 진짜 면모가 무엇인지를 담담하게 보여주는 글들이었다.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노무현 제대로 알리기’라고나 할까.

    11월5일 올렸던 ‘너무나 솔직 담백한, 그래서 존경스러운…’이라는 글과 10월21일 올린 ‘노무현 필승론-7가지 이유’라는 글은 조회건수가 1만건을 넘은 스나이퍼의 대표작이다.

    스나이퍼는 6·13 지방선거 이후 당내 분란으로 노대통령의 지지도가 추락하면서 후보 교체론이 대두됐을 때 “당신은 히딩크 감독이 ‘오대영(5대0)’이라는 비난을 받을 때 과연 월드컵 4강 진출을 예견했는가?”라고 반박했고, “가을 노풍(盧風)이 다시 불면 창(昌·한나라당 이회창 후보)은 추풍낙엽처럼 곤두박질칠 것이다”고 노무현 필승을 장담했다.



    얼굴 없는 저격수 ‘스나이퍼’

    화려하지도 웅장하지도 않았지만 스나이퍼의 진솔한 노무현 제대로 알리기는 무기를 내던진 채 나앉아 있던 노무현 지지자들이 다시 일어나 뛰게 하는 원동력이 됐고, 고립무원의 처지에 빠져 있던 노대통령에게는 흑기사 같은 존재였다.

    이 얼굴 없는 저격수가 바로 지금 노대통령의 ‘입’을 관리하고 있는 윤태영(尹太瀛·42) 대통령 연설담당비서관이다. 그러나 그의 실제 면모는 전혀 저격수답지 않다. 큰 키에 조금은 모범생 같은 얼굴 생김새는 차라리 초식동물을 연상케 한다.

    좀체 나서지 않는, 살벌한 정치판에서는 그리 바람직스럽지 않은 성격 탓에 대통령이 읽고 있는 저 글을 내가 썼노라고 자랑하는 일도 없다. 어쩌다 얼굴이라도 마주치면 조금은 걱정스런 표정으로 “오늘 대통령 연설 괜찮았느냐”고 슬그머니 묻는 정도가 전부다. 장난삼아 “별로였다”고 말해주면 금세 얼굴이 굳어질 정도로 표정 관리에도 서툴다. 어쩌면 그런 면이 늘 이름 없는 필자로 머물러 있어야 하는 스피치 라이터로서는 적격인지도 모른다.

    송경희(宋敬熙) 청와대 대변인이 늘 마이크 앞에 서서 대통령의 ‘입’ 노릇을 한다면, 윤비서관은 뒤에서 대통령의 ‘언사(言辭)’를 조종하는 연출자의 역할을 맡고 있다. 물론 연설담당이란 자리 자체가 기능적인 역할이라 돋보이는 참모는 아니다. 그렇지만 노대통령이 워낙 즉흥연설을 좋아해 가끔씩 입으로 사고(?)를 치는 스타일이어서 윤비서관의 역할은 더욱 막중한 상황이다.

    그런 탓인지, 윤비서관은 취임 1주일만인 3월초 노대통령으로부터 대통령이 참석하는 모든 회의와 행사에 반드시 배석하라는 특별지시를 받았다. 평소에 자신의 생각과 말을, 그리고 국정의 흐름을 잘 알고 있어야 제대로 된 연설문이 나올 수 있다는 노대통령의 배려였다. 이 점은 노대통령의 실용주의자로서의 면모가 여실히 드러나는 대목이기도 하다.

    이런 노대통령의 ‘지나친’ 배려 때문에 대북비밀송금 사건 특검법을 수용했던 국무회의가 열리기 전날인 3월13일, 윤비서관은 청와대 근처의 식당에서 저녁식사를 하다가 숟가락을 내던지고 대통령 관저까지 2km 가량을 숨이 턱에 닿도록 뛰어가야 했다.

    특검법 수용 문제로 고민에 빠져 있던 노대통령은 참모들의 의견을 듣기 위해 수석비서관과 보좌관을 관저로 불렀고, 난상토론이 벌어졌다. 특검법을 수용하든 않든 대통령이 대국민 담화를 하는 게 어떠냐는 의견이 제기된 터여서 노대통령은 “연설담당비서관도 내용을 알아야 하는 것 아니냐”며 윤비서관을 급히 찾았기 때문이었다.

    노대통령은 윤비서관에게 아예 청와대 본관으로 사무실을 옮기라는 지시도 했다. 1주일에 서너 차례 준비해야 하는 연설문 원고를 놓고 상의하기 위해서는 수시로 윤비서관을 불러 이것저것 지시해야 하는데, 승용차로 5분 거리인 비서동(棟)과 본관을 오가면 서로가 불편하다는 뜻이었다. 그러나 이 지시는 실행되지 못했다. 청와대 본관에 윤비서관이 들어앉을 만한 공간이 없었기 때문이다.

    역대 대통령의 연설문은 대개 연설담당비서관실에서 작성한 초고를 보고받고 약간의 수정, 가필이 이뤄지는 식으로 만들어졌다. 그나마 김대중(金大中) 대통령의 경우는 연설문의 뼈대를 사전에 상세하게 구술해 자신의 생각을 연설문에 정확하게 반영하려 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그래서 과거 대통령의 연설문을 작성하는 일은 탁상 위의 작업이 되기 십상이었고, 정해진 틀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는 진부한 글이 나오는 일도 적지 않았다.

    그런 반면 노대통령은 아예 윤비서관을 대동하면서 자신의 생각을 정확하게 읽게 하고 연설문에 반영토록 하는 방식을 택한 셈이다. 그래서 윤비서관은 각종 공식회의는 물론 비공식 회의에도 종종 참석하고 있다.

    윤비서관의 시각도 노대통령과 비슷하다. 최대한 노대통령의 생각을 정확하게 표현하는 데 초점을 맞추고, 문장을 다듬는 등 나머지 일은 부수적이라는 것이다. 굳이 신경을 쓰는 대목이 있다면, 불필요하게 중언부언하면서 멋을 내는 것을 피하고 한 문장을 10단어 이내로 짧게 작성하는 것 정도다.

    그런 이유로 윤비서관은 노대통령의 연설문은 노대통령의 것이지, 결코 자신의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자신은 노대통령이 말하고 싶어하는 것을 정리해주는 조력자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실제로 4월2일 노대통령이 취임 후 처음으로 국회에서 한 국정연설의 경우 사실상 노대통령이 직접 쓴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게 윤비서관의 설명이다. 대통령 스스로 국회에 나가 첫 연설을 한다는 데 대해 강한 책임감을 느꼈고, 틈나는 대로 윤비서관을 불러 구술을 하고 메모를 해가며 고치기도 했다는 것이다.

    이 국정연설은 정치권 일각에서 “대통령의 연설 치고는 무게가 좀 떨어지는 것 아니냐”는 핀잔도 받았지만, 구름 잡는 얘기는 하지 말자는 노대통령의 주문에 따라 철저하게 구체성을 띤 데 따른 것이었다.

    이 국정연설문이나 2월25일 대통령 취임사 등 노대통령의 굵직한 연설문들이 모두 윤비서관의 손을 거쳐 완성됐지만, 윤비서관이 개인적으로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연설문은 따로 있다. 바로 2002년 4월28일 노대통령이 민주당의 후보 경선에서 승리를 거두고 감격에 찬 어조로 웅변했던 대통령후보 수락연설문이다. 이 연설문은 시사평론가이자 지금은 개혁국민정당을 주도하고 있는 유시민(柳時敏)씨가 작성한 것으로 알려졌지만, 실은 윤비서관이 작성한 것이다.

    최고의 명문은 후보수락 연설문

    노대통령은 후보 수락연설을 앞두고 역사에 남길 명문이어야 한다는 주문을 했고, 윤비서관은 경선 승리가 유력해진 한 달여 전부터 이 연설문에 매달려야 했다.

    후보 수락연설에는 노대통령이 대선 승리 직후 제시해온 동북아 중심국가 구상, 성장과 분배의 조화, 지역대결구도 타파, 정치개혁 등과 같은 국정 운영 구상의 단초가 대부분 담겨 있다. 여기에 ‘겸손한 대통령’ ‘친구 같은 대통령’이라는 부드러운 이미지를 가미해 장단고저가 적절히 조화를 이룬 연설이라는 호평을 받았다. 특히 연설 마무리 부분의 “정직하고 성실하게 사는 사람, 정정당당하게 승부하는 사람이 성공하는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어봅시다. 우리 아이들에게 정의가 승리하는 역사를 물려줍시다”라는 대목은 진한 감동을 주었다.

    그러나 연설문 후반부의 ‘거리에서 마주친 시민들과 소주 한잔을 기울일 수 있는 대통령’ 부분은 나중에 논란이 되기도 했다. 평소 노대통령이 자주 해왔던 얘기였지만 요즘 노대통령이 ‘소주파티 하지 말자’ ‘기자들과 소주 마시고 헛소리나 하고…’ 등 ‘소주’라는 단어를 그리 좋지 않은 뜻으로 사용하면서부터다.

    이와 별개로 경선 당시 기호 2번 노무현의 캐치프레이즈였던 ‘단 한 장의 필승카드’도 윤비서관의 작품이었다.

    윤비서관이 노대통령과 인연을 맺은 것은 1994년 출판된 노대통령의 자전 에세이 ‘여보, 나 좀 도와줘’를 통해서였다. 윤비서관은 1993년부터 잠시 도서출판 새터의 편집주간으로 일하고 있었다.

    당시 출판사에서는 1988년 5공 청문회로 스타가 됐던 노무현 의원의 자전 에세이를 출판하면 잘 팔리지 않겠느냐는 아이디어가 나왔고, 1992년 총선에서 낙선하는 바람에 곤궁한 처지에 빠져 있던 노대통령도 출판사측의 제의에 선뜻 응했다.

    이때 윤비서관은 노대통령과 함께 무릎을 맞대고 ‘여보, 나 좀 도와줘’의 출간작업을 하게 됐고, 이 일로 노대통령의 주변 인사 중에서 ‘노대통령의 과거를 가장 잘 아는 사람’이 됐다. 출판 책임을 맡은 윤비서관에게 노대통령은 자신의 어린 시절부터 정치인이 되기까지의 과정을 소상하게 털어놓았기 때문이다.

    대변인보다 ‘盧心’ 에 근접한 대통령의 진짜 ‘입’

    윤태영 비서관이 청와대 수석비서관 회의에 참석한 정찬용 인사보좌관과 숙의하고 있다.

    이 책의 출간으로 인해 원칙과 소신의 정치인이라는 다소 딱딱한 느낌을 주었던 노대통령은 인간적인 체취가 있는 따뜻한 사람으로 알려지게 됐다. 보통 자화자찬으로 가득차 있는 여느 정치인의 자서전과는 달리 변호사 시절의 부끄러운 이야기나 부인 권양숙(權良淑) 여사와의 러브스토리, 집안의 반대를 무릅쓰고 결혼에까지 이른 과정 등 어려웠던 과거를 감추지 않고 솔직하게 드러냈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윤비서관의 감성적인 필치도 한몫했다.

    ‘글’로 먹고 살고 있는 윤비서관의 인생행로를 현재의 자리로 몰고 온 것 역시 한 장의 글 때문이었다. 연세대 3학년에 재학중이던 1981년 5월이었다. 연세대의 대표적인 이념서클인 ‘평문(평화문제연구회)’에서 활동하던 윤비서관은 당시만 해도 제대로 그 실상이 알려지지 않았던 1980년 신군부의 광주학살을 고발하는 유인물 원고를 작성했다. 그 유인물은 교내에 대량으로 뿌려졌다.

    그 일로 인해 그해 7월에 터진 ‘학림사건’에 연루돼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 위반으로 구속돼 8개월 동안 복역했고 학교에서도 제적되고 말았다. 대학 동기동창으로 사학과에 다녔던 부인 백혜연(白惠然)씨도 그해 11월 교내 시위를 주동한 혐의로 구속된 전력이 있다.

    처음부터 운동권 학생은 아니었지만, 윤비서관은 “뜻 있는 일을 하는 친구들이 잡혀가는 모습을 보고 방관할 수 없었다”고 말한다. 그래서 1학년 2학기 때에 ‘평문’에 들어갔고, 운동권 학생으로 변신했다.

    1990년 안희정 등 10여 명과 모임 결성

    출소 후 윤비서관은 노동운동에 투신하기 위해 1년여 동안 구로동과 영등포의 ‘마치코바’에서 용접기술 등을 배우기도 했다. 그러나 1983년 학원자율화조치가 나면서 복학했고, 1986년 7년 만에 대학 졸업장을 받았으나 구속 전력 때문에 취업이 쉽지 않았다.

    그래서 손을 댄 일이 출판사의 번역 일이었다. 당시 대학 이념서클에서 널리 읽혔던 사회과학 서적인 ‘경제사입문’ ‘강좌철학’ 등이 윤비서관이 직접 번역한 책들이다.

    윤비서관은 이때 글 솜씨가 상당히 늘었다고 말한다. 평소에는 글을 잘 쓴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는데, 2년 정도 번역에 매달리면서 글에 대한 나름의 감을 잡게 됐다는 것이다.

    대학 졸업과 함께 결혼했지만, 번역료 수입으로는 생계를 꾸리기에 급급한 정도였다. 윤비서관은 1988년 대학 친구의 소개로 통일민주당 소속의 최정식 의원 비서관으로 들어갔다. 그때만 해도 정치에 무슨 뜻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아내가 출산을 앞둔 상황에서 하루빨리 안정된 직장을 찾아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이때 청문회 스타로 활약했던 노무현 의원을 먼발치에서나마 처음 보았고, 노대통령의 386 핵심측근인 이광재(李光宰) 국정상황실장이나 안희정(安熙正) 민주당 국가전략연구소 부소장도 알게 됐다. 이씨는 당시 노의원의 비서관이었고, 안씨는 김덕룡(金德龍) 의원의 비서관이었다.

    1990년 1월 전격적으로 3당 합당이 이뤄지면서 윤비서관의 행로도 바뀌기 시작했다. 통일민주당 소속 의원들이 대다수 김영삼(金泳三) 당시 총재를 따라 3당 합당에 합류했지만, 일부 의원 보좌진은 이를 따를 수 없었다. 그래서 10여 명의 보좌관 비서관들이 모시던 의원을 따르지 않았고, 안희정씨의 주도로 따로 모임을 만들었다.

    이들은 3당합당을 거부한 의원 사무실을 중심으로 재취업에 나섰고, 윤비서관은 가장 나이가 많은 운동권 선배라는 이유로 당시 민주당 총재였던 이기택(李基澤) 의원실을 배정받았다. 윤비서관은 총재실에 근무하면서 이총재의 각종 연설문을 작성하는 일을 맡게 됐다.

    이때부터 ‘스피치 라이터’의 길에 들어선 것이다. 당시 윤비서관이 쓴 연설문들은 거대야당인 민자당의 횡포를 비난하는 이총재의 기자회견문이 대부분이었다.

    1992년 총선에서 이기택 총재가 전국구 의원으로 당선되면서 윤비서관은 잠시 정치권을 떠나 출판사 일을 하게 됐다. 이때 노대통령의 자전 에세이를 펴낸 인연으로 1997년 노대통령이 SBS 라디오의 MC로 활동하면서 정치칼럼 코너를 맡았을 때에 원고를 작성해주는 일을 했다.

    김재천(金在千) 의원 보좌관을 거쳐 2001년 2월 문희상(文喜相) 의원의 보좌관으로 일할 때 윤비서관은 대학 후배인 이광재씨로부터 “홍보 쪽 일을 맡아달라”는 부탁을 두 차례 받고, 노대통령의 경선캠프인 자치경영연구원에 참여했다.

    후배에게 존대말 쓰는 ‘천사표’ 선배

    대통령직인수위 시절에는 비서실 공보팀장으로 ‘인수위 브리핑’을 만드는 일을 맡았던 윤비서관은 잠시 노대통령을 따라 청와대에 들어가느냐 마느냐를 놓고 고민하기도 했다. 더 이상 글로 먹고 사는 일은 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또 주변 사람들에게 그런 뜻을 직접 밝히기도 했다. 그러나 노대통령이 직접 “연설담당비서관은 윤태영씨를 시키죠”라고 말하자 한마디 항변도 못하고 지금의 자리로 왔다.

    공교롭게도 김대중 대통령 초기에 연설담당비서관을 맡았던 고도원(高道源)씨와 같은 제주 출신이어서 제주 지역에서는 화제가 되기도 했다. 두 사람은 연세대 선후배 사이이기도 하다.

    윤비서관은 아버지 어머니가 모두 북제주군 애월읍 하가리 출신이고, 아직도 많은 친척들이 제주에서 살고 있다. 해병대 장교 출신인 부친을 따라 세 살 때 서울로 올라와 서교초등학교를 거쳐 숭문중, 대신고를 나왔다.

    40대의 나이에 79학번이라 엄밀히 따지면 386세대는 아니지만, 386 참모그룹의 일원으로 분류되는 윤비서관은 청와대에 들어온 운동권 출신 참모 중에서는 선배급에 꼽힌다. 그렇지만 새카만 후배들에게도 꼬박꼬박 존대말을 써 ‘천사표’ 선배로 통한다. “그 착한 윤태영 선배까지도 화를 내더라”는 말은 곧 윤비서관이 누군가에게 화를 냈다면 그 사람은 정말 나쁜 사람이라는 말과 동의어로 통할 정도로 신망도 받고 있다.

    그가 정치판에 아직도 이런 사람이 남아 있나 하는 말을 들을 만큼 때묻지 않은 순수함을 간직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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