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6월호

왜 수학을 대학입시 과목에 둘까?

  • 이한음|과학칼럼니스트 lmglhu@daum.net

    입력2012-05-22 17:1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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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국어와 영어는 살아가는 데 꼭 필요하다. 그러나 일상생활에서 미적분을 쓸 일은 별로 없다. 그렇다면 우리 대학입시는 왜 수학을 시험과목에 둘까? 심지어 수학을 잘해야만 좋은 대학에 갈 수 있도록 하고 있을까? 최근 수학 관련 다큐멘터리가 방송상을 받았다. 현대사회에서 수학이 어떤 의미를 갖고 있는지 알아봤다.
    왜 수학을 대학입시 과목에 둘까?

    밀로의 비너스에 나타난 1대1.6의 황금비율.

    EBS TV 다큐멘터리 프로그램 ‘문명과 수학’ 5부작이 최근 방송통신위원회 방송대상을 수상했다. 이 프로그램은 백상예술대상 작품상도 받았다.

    수학을 문명과 연결해 풀어낸 수작이라는 것이 이 프로그램에 대한 평이다. 수학의 발원지인 이집트를 찾아 수란 무엇인지를 탐구하고, 인도를 찾아가서 0의 탄생 배경을 살펴보고, 뉴턴과 라이프니츠의 발자취에서 근대 수학의 최고봉인 미적분의 함의를 알기 쉽게 설명해내고 있다. 수학을 인문학적인 관점에서 조망한 점이 특징적이다.

    이 다큐멘터리를 계기로 문명과 수학의 관계를 다룬 신간서적도 나오고 있다. 사실 수학의 역사를 이야기하자면 단편적으로 이집트, 그리스, 인도 등 옛 문명을 언급할 수밖에 없다. 문명과 수학의 관계를 다룬 기존 도서도 꽤 된다. 하지만 독자로부터 외면받았다. 사람들은 수학이라면 일단 손으로 머리를 싸맨다.

    그러나 수학은 인류 문명의 토대라고 할 수 있다. 인류는 수학을 이용한 덕분에 여기까지 발전할 수 있었다. 좀 과장하자면 수학을 외면하는 것은 문명의 근원을 부정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그럼에도 왜 우리는 수학을 어려워할까? 답은 다양하겠지만, 누구나 떠올리는 공통의 답이 하나 있다. 바로 대학입시 교육의 후유증이다.

    입시 때문에 수학에 학을 떼



    초등학교 때부터 산수나 수학에 워낙 시달린 탓에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수학에 등 돌리는 이가 많다. 반면 최근 인기를 끌고 있는 스웨덴 소설 ‘밀레니엄’에서 여주인공 리스베트는 어려운 수학에 재미를 느낀다. 그녀는 천재적인 두뇌의 소유자이지만 정규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한 덕분에 입시에 시달리지 않았다. 그러니 20세기 수학의 최대 난제이자 ‘문명과 수학’ 다큐멘터리 마지막 편의 주제이기도 한 ‘페르마의 마지막 정리’에 리스베트가 꽂힌 것도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수학은 원래 천재들의 지적 장난감이었다.

    “우리 청소년이 입시 교육 때문에 수학에 학을 떼지 않았다면 수학의 노벨상이라 할 필즈상을 받는 사람이 진작 나왔을 것”이라고 한탄하는 이들도 있다. 그러나 소설에서도 주변 사람들은 어려운 수학책을 끼고 있는 리스베트를 이상하게 생각한다. 스웨덴 같은 북유럽국가는 입시 지옥과는 거리가 먼 것으로 알려져 있다. 수학을 멀리하는 태도는 국가나 교육제도와는 무관한 보편적 현상이라는 추정이 가능하다.

    논의를 세분해보자. 첫째, 지적 유희를 즐기는 천재는 수학을 좋아한다. 그런데 한국인은 아직 필즈상을 못 받고 있다. 둘째, 보통 사람은 수학에 별 매력을 못 느낀다. 입시 교육은 아예 수학을 외면하도록 부추긴다. 똑같이 지겨운 입시 과목임에도 영어는 고등학교를 졸업한 이후에도 비용과 시간을 들여 계속 배운다. 사회가 그렇게 하라고 요구하기 때문이다. 수학은 그렇지 않다. 입사할 때 수학 점수를 따지는 일은 거의 없다. 미적분을 잘한다고 높은 평가를 받는 것도 아니다. 게다가 수학을 잘하는 천재가 의사라는 직업을 택하도록 만든다.

    복잡하기 그지없는 방정식 문제를 풀다가 반항적인 눈빛으로 “대체 이런 걸 왜 배우는 건가요?”라고 묻는 학생들을 위해 교사는 나름의 대답을 준비해야 한다. 두뇌 발달을 위한 지적 훈련이다,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사고 능력을 계발하기 위함이다, 수학을 응용하는 분야에 진출하기 위한 준비 과정이다, 시험에 나오기 때문이다, 너 잘되라고 하는 것이다, 나중에 네 스스로 답을 찾아보도록 하라 등.

    이집트, 그리스, 중국 같은 고대 문명에서는 이유가 더 분명했다. 수학이 곧 권력이었다. 수학 지식은 치수와 농경의 근간이기도 했고, 세계와 자신과 신을 잇는 수단이기도 했고, 미래를 예측하는 수단이기도 했다. 거대한 피라미드를 설계한 사람, 거의 무한한 시간을 다루는 신화 체계를 구축한 사람, 강수량의 변화를 헤아려 치수 계획을 짠 사람, 천체의 순환 주기를 헤아려 역법을 만든 사람은 수학 지식을 갖춘 권력자였다.

    수를 우주의 근본 원리라고 보고 수학 지식을 지키기 위해 비밀주의와 신비주의를 철저하게 고수한 피타고라스학파는 극단적인 사례다. 이런 태도가 지나쳐 대중에게 위화감을 일으켰다. 이것이 피타고라스학파가 몰락한 이유 중 하나다. 지식을 적당히 독점해야지 완전 독점하면 안 되는 법이다.

    문명이 발달하면서 수학은 권력과 점점 멀어졌다. 사회구조가 아무리 복잡해져도 수학이 모든 분야의 토대라는 점에는 변함이 없다. 수학은 더 이상 비밀 지식이 아니었다. 다리를 놓고 집을 짓고 개간을 하고 옷을 짓고 세금을 걷고 하는 데에 수학이 꼭 필요했다. 다만 누구나 그 지식을 배우고 쓸 수 있었다. 수학은 권력을 위해서가 아니라 삶의 질 향상을 위해 배우는 것이 되었다.

    수학이 인생을 좌우한다

    문명이 발달할수록 수학도 발달한다. 수학의 천재들은 더 복잡하고 난해하며 삶과 무관한 듯 보이는 수학 문제를 창안했다. 안타깝게도 현실과의 괴리가 큰 탓에 이런 수학 지식은 권력을 안겨주지 못했다. 응용할 수 없는 수학은 무용지물이다. 그러나 과학이 놀라운 속도로 발전하는 바람에 한때 쓸모없어 보이던 수학 지식도 응용될 자리를 찾곤 했다. 과학은 새로운 이론에 적합한 수학 지식이 눈에 띄지 않으면 새로운 수학 지식을 창안하기도 했다. 이러면서 수학은 현대 교육 과정에도 확고하게 자리를 잡았다.

    그럼에도 ‘수학을 과연 누구에게 어느 수준까지 가르쳐야 하는가’라는 문제는 여전히 남는다. 비판론자들은 “일상생활에서 거의 쓰이지 않는 어려운 미적분 문제를 모든 고등학생에게 가르칠 필요가 있는가?” “사회에 진출하면 까맣게 잊을 텐데?”라고 반문한다. 이 점은 수학을 왜 배우느냐라는 질문에 말문이 막히는 이유 중 큰 부분을 차지한다.

    그러나 사실 ‘수학을 왜 배우는가’라는 질문은 ‘어느 수준까지 배우는 것이 적당한가’라는 질문에 가깝다. 구구단도 수학의 일종인데 우리는 구구단을 익혀두지 않으면 인생을 살아가는 데 매우 불편하다는 점을 잘 안다. 즉 일정한 수준까지 수학을 배워 둬야 할 필요가 있다는 점이 분명하게 드러난다.

    실제에 있어 ‘수학을 왜 배우는가’라는 질문은 한가한 이야기다. 우리나라의 대학입시에서 수학이 차지하는 변별력 비중은 매우 높다. 수능 점수로 진로가 어느 정도 결정되는 우리 사회 시스템에서 수학은 인생을 좌우하는 문제가 된다.

    수능에서 수학의 비중이 높은 이유는 ‘수학이 사회의 발전에 꼭 필요한 학문’이라는 점과 관련이 있다. 예를 들어 미적분을 모르면 미시경제나 거시경제를 논할 수 없다. 수학적 개념 없이는 재무제표를 볼 수 없고 재무제표를 못 보면 경영을 제대로 할 수 없다. 이공계에선 더하다. 수리적 이해 없이 세계 일류 스마트폰, TV, 반도체, 자동차, 유조선, 초고층빌딩을 만들 수는 없는 법이다. 국가의 처지에선 대학입시에서 수학을 잘 이해하는 사람들에게 이점을 주어 이런 사람들을 상위권 대학 학과 진학으로 유도하는 것이 기술적 진보와 경제적 성장에 유리하다.

    ‘문제 풀이’에서 ‘즐기기’로

    왜 수학을 대학입시 과목에 둘까?

    미국의 한 수학교과서에 수록된 김연아의 피겨스케이팅 사진.

    다만 학교의 수학교육이 진정한 의미의 수학교육인지는 되돌아봐야 할 문제다. 학교에서 배우는 것은 수학이라기보다는 계산에 가깝다. 즉 고교생이 수학 시간에 하는 활동의 대부분은 문제를 푸는 것이다. 한마디로 일정한 공식에 이런저런 숫자를 대입해 답을 알아내는 것에 불과하다. 기술자이자 사업가인 콘래드 울프램은 이런 교육이 잘못됐다고 말한다. 그는 계산 기술을 가르치는 짓은 그만두고 수학을 가르치자고 주장한다. 계산은 수학을 하는 수단이지, 목적이 아니라는 것이다.

    우리는 복잡한 수학 문제를 척척 풀어내는 도구를 갖고 있다. 바로 컴퓨터다. 시험에 나오는 어떤 어려운 문제든 컴퓨터에 입력하면 1초도 안 되어 답이 나온다. 이 컴퓨터는 바로 인류가 만든 것이다. 자신의 지적 능력을 확장시키는 도구를 만들어놓고도 이를 쓰지 않고 문제를 푸느라 여전히 골머리를 앓는 이유가 뭐란 말인가?

    울프램은 학교에서 힘든 계산 작업을 컴퓨터에 넘기면 많은 이점이 있다고 말한다. 우선 수학 시간이 훨씬 재미있어진다. 문제를 내고 푸느라 교사와 학생 모두 스트레스를 받는 대신 그 시간에 갖가지 상상력을 발휘할 수 있다. 일상에서 부딪치는 여러 상황을 설정해 수학을 어떻게 적용할 수 있을까를 궁리하게 된다. 수학은 삶과 무관한 골칫 덩어리에서 삶과 바로 맞닿아 있는 흥미롭고 생생한 오락 거리가 될 수 있다.

    학교는 수학이 실제의 경제활동에서 어떻게 활용되는지를 구체적으로 가르쳐주어야 한다. 현대사회에서 미적분 같은 복잡한 수학이 쓰이는 분야는 대단히 많다. 주식, 보험, 투자, 회계, 경제계획, 연금, 기후, 물 관리, 선거 등 다양하다. 수학이 실생활과 무관하지 않음을 보여주는 사례는 널려 있다. 문제 풀이에만 열중하는 현재의 수학교육으로는 이런 것을 다룰 여유가 없다.

    약간만 방향을 전환하면 통섭이라는 현대의 흐름에 맞는 활동이 수학 시간에 이루어질 수 있다. 수학이 덜 기계적이면서 더 실용적이고 더 개념적인 활동이 될 것이라고 본다. 이러면 수학을 왜 배우느냐는 질문 자체가 사라질 것이다.

    컴퓨터는 17세기에 ‘계산하는 사람’을 가리키는 용어였다. 어려운 계산을 맡아주는 직업이 컴퓨터였다. 그러다가 기계인 컴퓨터가 등장하면서 컴퓨터라는 직업이 사라졌다. 새로 출현하는 문명의 이기들이 대부분 그렇듯이, 컴퓨터도 교육 측면에서는 부정적인 대상으로 여겨진다. 아이를 멍청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책상 앞에 진득이 앉아 책을 보면 사고력이 좋아지고 창의력이 발달하는 반면 컴퓨터만 하면 지적 능력이 퇴화된다는 주장이다. 컴퓨터는 또한 학생을 검색, 짜깁기, 표절의 대가로 만든다고 한다. 그러니 시험 시간에 컴퓨터를 쓰도록 하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일이다. 이것은 학생의 지적 수준이 아니라 검색 능력을 측정하는 꼴이 된다.

    그러나 울프램 같은 이들의 관점에서 보면 이런 태도는 옳지 않다. ‘주어진 시간에 주어진 문제의 정답을 얼마나 잘 맞히는가’를 평가 기준으로 삼기 때문에 이런 고정관념이 나왔다는 것이다.

    기구를 이용하는 모든 분야에서 해당 기구를 얼마나 잘 다루느냐는 평가의 중요한 요소가 된다. 골프 경기에선 드라이버나 아이언을 잘 다뤄야 하고 야구 경기에선 배트나 공을 잘 다뤄야 한다. 자동차 운전이나 비행기 조종에서도 마찬가지다. 컴퓨터 조작이 수학 능력 발달에 방해가 된다는 주장은 이런 관점에선 말이 안 되는 이야기다. 오히려 컴퓨터로 수학 문제 푸는 것을 더 장려해 컴퓨터 활용 능력을 더 키워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경우 수학시험은 정답을 계산하는 것이 아니라 수학 원리를 어떤 상황에 응용하는 방법을 찾는 것이 되어야 한다.

    과학기술 문명이 고도화하면서 이 토대인 수학도 더 난해해지고 있다. 사람이 수작업으로 계산하면 수십 년, 수백 년이 걸릴 수학 문제도 등장했다. 컴퓨터가 이런 문제를 풀어준다. 그런데 많은 사람은 컴퓨터가 어떠한 연산 작용으로 이 문제를 풀었는지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면서 결과만 가져다 쓴다. 오랜 세월 수학자들 사이의 난제였던 페르마의 마지막 정리를 푼 것도 컴퓨터 덕분이었다. 그러나 컴퓨터가 어떻게 풀었는지를 이해하지 못하는 전문가가 많다. 심지어 과연 풀었다고 할 수 있는지조차 의심하는 사람도 있다.

    현대 문명에서 이런 사례는 흔히 목격된다. 사람들에게 컴퓨터는 일종의 블랙박스와 같다. 우리는 입력하면 결과가 나온다는 것만 알 뿐이다. 컴퓨터가 어떤 연산 작업을 거쳐 그런 결과를 내놓는지는 잘 모른다. 그럼에도 우리는 이 결과를 믿고 이에 따라 행동한다. 과학기술의 산물이 우리의 지적 육체적 능력의 확장임을 확신하기 때문이다.

    과학기술이 현대 문명을 떠받치고 있다는 인식이 확산되면서 새로운 발명품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인식이 교육계에서도 확산되고 있다. 교과서 대신에 태블릿을 쓰겠다는 이야기도 나온다. 웬만한 과제물은 컴퓨터를 이용해 제작하도록 하는 것도 그렇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문명의 이기가 지적 발달에 장애가 된다는 우려도 나온다. 교육계나 사회 여러 분야에서는 체계 자체를 변혁하지 않은 채 컴퓨터만 그냥 도입하고 있다. 이런 경우 문명의 이기로 지적 퇴화가 발생하는 일이 실제로 일어날 수도 있다고 본다.

    수학은 권력이다

    필자는 수학을 잘했다. 대학에서 전공과 다소 무관한 어려운 수학 과목 몇 강좌를 들은 적이 있는데 좋은 학점을 받았다. 이유는 필자의 뇌가 수학이 아니라 계산에 맞추어져 있었기 때문인 듯하다. 당시 문제가 무엇을 의도한 것인지는 알지 못해도 일단 정답을 풀어내는 데엔 재주가 있었다. 인간 계산기 역할에 충실한 쪽이었다.

    이런 능력은 강의실 밖에선 별 쓸모가 없다는 점을 알게 됐다. 계산기와 컴퓨터라는 훨씬 더 값싸고 성능 좋은 대체 수단이 있기 때문이다. 현대 문명이 요구하는 사람은 인간 계산기가 아니라 일종의 기획 설계자다. 고도의 수학을 이용해 복잡한 문제를 해결하거나 결과를 예측하는 프로그램을 짜는 사람이다. 주식, 보험, 투자, 경제계획, 도시설계, 미래예측 등에서 이런 사람은 귀한 대접을 받는다. 물론 과학기술 분야에서는 말할 것도 없다. 이런 설계자는 모바일 게임인 ‘앵그리버드’ 우주 판을 만드는 데에도 필요하다.

    문제 풀이 수학교육에 진절머리가 난 대다수가 수학을 외면하는 사이 이런 소수의 기획설계자가 알게 모르게 우리 사회와 경제를 좌지우지하고 있다. 그러나 이들이 내놓는 결과물이 항상 정확한 것은 아니다. 최근의 금융위기 사례에서 보듯이 때로는 잘못된 예측이 세계를 위험에 몰아넣기도 한다.

    문명 발달과 함께 수학은 분화를 거듭하고 있다. 수학 지식의 수준은 사람마다 달라졌다. 지금도 현실과 무관해 보이는 추상적인 수학 문제를 붙들고 씨름하는 이들이 있다. 반면 계산기의 사칙연산 기능 외에는 전혀 쓸 일이 없는 이들도 있다.

    그러나 결론적으로 수학 지식이 대단히 중요한 역할을 하는 분야가 늘고 있다. 이런 분야가 우리 문명의 발전이나 퇴보에 점점 더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당연히 이 분야의 핵심적 인물은 높은 대가를 얻게 된다. 결론적으로 현대에 들어 수학은 다시 권력이 되고 있다. 적어도 삶의 여러 맥락에 적용되는 수학의 원리나 가치 정도는 이해하고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권력으로부터 멀어지게 되어 있다.

    정신과 우주를 연결하는…

    고대 문명은 수학과 더불어 꽃을 피웠다. 그리고 현대 과학 문명은 고도의 수학을 토대로 발전하고 있다. 과학자들은 한 가지 의구심을 갖는다. “왜 수학이 현대 과학 문명의 토대가 될 수 있는가”라는 점이다. 해답으로 “수학 자체가 현실에 잘 들어맞는다”는 점이 제시된다. 이는 반증으로 입증될 수 있다. 비행기 항법 장치에 쓰이는 수학이 현실 세계와 맞지 않다면 비행기는 추락할 것이다. 수학은 원의 지름과 둘레의 비가 일정하다고 말한다. 그런데 실제로 재어보았을 때 지역마다 다르다면? 그러나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고 수학은 현실을 잘 설명해내고 있다.

    소크라테스, 플라톤과 현대 사회학자인 카를 만하임 등 여러 학자는 수학을 사회적, 문화적, 역사적 구축물이 아닌 절대 진리로 봤다. 이는 수학이 외부 세계에 영향을 받지 않은 정신의 산물이라는 의미다.

    정신이 수학을 낳았고 수학이 세계를 설명하므로 정신과 세계도 연결된다. ‘정신이 우주의 산물이 아닐까’라는 가정이 가능할 것이다. 과학자들은 아직 우주 전체에 하나의 수학 체계가 작동한다고 믿는다. 이에 따르면 수학은 우리의 정신과 우주를 연결해주는 매개체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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