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 영화계에서 여배우의 자리는 오랫동안 변방이었다. 남자 배우에게 스포트라이트가 집중되는 제작 환경에서 여배우는 주인공의 상대역만 거듭하다 대중의 눈요깃거리, 가십의 대상으로 소모되기 일쑤였다. 그러나 1950~60년대부터 달라졌다. 미모와 재능, 개성을 겸비한 여성들이 스크린에서 영역을 확대했다. 동시에 한국 사회 전반의 여성에 대한 인식까지 변화시키기 시작했다. 영화 ‘킬리만자로’를 연출하고, ‘8월의 크리스마스’ 등의 각본을 쓴 오승욱 감독이 한국 여성의 패러다임을 바꾼 여배우들을 조명하는 기획을 마련했다.
- 첫 순서는 눈부시게 아름다운 배우였으며 동시에 떠들썩한 스캔들 메이커였던 여걸 김지미다. 연기·제작·영화 행정 등 여러 분야에서 한국 영화계에 큰 족적을 남긴 그녀를 추억한다. <편집자 주>
눈부신 미모와 연기력, 당당한 매력으로 시대를 풍미한 배우 김지미.
영화가 만들어지는 동안 말도 많고 탈도 많았다. 한 해 전인 1960년 3월 춘향전의 영화화를 기획한 신상옥 감독은 한국 영화 사상 최초로 시네마스코프의 장대한 화면과 총천연색 영화를 시도하기 위해 컬러 필름으로 테스트 촬영을 마치고 시나리오를 다듬고 있었다. 그런데 기막힌 일이 벌어졌다. 흥행 감독 홍성기가 뒤늦게 춘향전을 총천연색 시네마스코프로 촬영할 것을 기획하고 신상옥보다 먼저 영화제작자협회에 촬영신고를 내버린 것이다.
세기의 대결
지금도 그렇지만 같은 아이템과 같은 내용의 영화가 경쟁적으로 만들어지는 것은 서로 피한다. 도의상 문제도 있지만, 대결에서 실패하는 쪽은 재기할 수 없을 만큼 심한 타격을 받기 때문이다. 그런데 ‘성춘향’과 ‘춘향전’양측은 서로 한 치의 양보도 없었다. 먼저 기획을 했다는 신상옥은 억울함을 호소했고, 홍성기 측은 “무슨 말이냐 내가 먼저 시작했다”며 버텼다. 제작자협회장은 홍성기 편이었고, 회원들은 “홍성기 감독과 회장이 밀실에서 협약을 맺은 것 아니냐”며 회장을 규탄했다. 협회가 둘로 나뉘어 싸움을 한 것이다. 이 상황에서 양쪽 모두 한 치의 양보도 없이 촬영을 진행했고 남은 것은 관객의 심판뿐이었다.
먼저 승리한 듯 보인 것은 홍성기의 ‘춘향전’ 쪽이었다. 앞서 개봉한 것이다. 3일 뒤 신상옥 감독의 춘향전은 같은 제목으로 상영불가하다는 판정에 따라 울며 겨자 먹기로 ‘성춘향’이란 제목을 달아 개봉했다.
먼저 김지미·홍성기 조의 ‘춘향전’을 보자. 영화가 시작되면 4대 3 화면비의 영화에 익숙하던 관객을 어리둥절하게 만드는 운동장처럼 넓은 화면의 시네마스코프에 울긋불긋한 총천연색 화면이 펼쳐진다. 단옷날 활쏘기에서 우승한 이 도령이 남원 광한루에 올라 방자와 사령에게 술을 따라주고 자신도 술을 먹으려다 술잔을 멈춘다. 저 멀리 누군가 그네를 타고 있는 모습을 본 것이다. 이 도령이 홀린 듯 바라보는 그네 타는 처녀는 누구인가? 도대체 얼마나 아름답기에 술잔을 마다하고 넋을 잃는가? 화면이 이 도령 시점으로 바뀌면, 아뿔싸. 저 멀리. 너무 멀어 점으로밖에 안 보이는데다 그림자가 져서 시커멓기까지 한 물체, 그 누군가가 그네를 타고 있다. 이 도령이 반했다고 영화 속에서 감탄을 하는데 관객에게 보이는 건 시커먼 점 하나다. 이 도령과 관객 모두가 반해야 할 춘향이 그네 타는 장면에서부터 홍성기·김지미 조는 관객의 동의를 얻어내지 못했다. 관객은 그래도 기다렸다. 홍성기·김지미 조가 춘향이 옥중 장면에서 극장 안을 홍수로 만들어줄 것을 굳게 믿으며.
1975년 영화 ‘육체의 약속’으로 제14회 대종상 여우주연상을 수상한 김지미.
홍성기의 몰락
자, 다시 고개를 돌려 홍성기의 ‘춘향전’으로 가자. 춘향이 김지미가 그네를 타는 현장으로 달려온 방자. 이 도령의 미팅 신청을 향단이에게 전하며 수작을 부리는데, 그들 뒤 배경으로 김지미가 너무나 힘들게 그네를 탄다. 다홍치마를 공중에 훨훨 날리며 새파란 하늘 속으로 들어갔다 나왔다 하는 시원한 맛이 있어야 그네타기 아닌가? 김지미는 고작 3~4m를 힘들게 왔다갔다 할뿐이다. 그네 줄을 잡은 손이 부들부들 떨리기까지 하고, 그네 끝에 매달아놓은 붉은 비단은 물에 젖은 것처럼 축 늘어져 영화를 보는 나는 방자와 향단이의 능청스러운 수작에 집중을 못하고 김지미가 그네에서 떨어질까 조마조마하다.
영화의 하이라이트. 춘향이 옥중 장탄식 장면도 역시 최은희의 완승. 김지미·홍성기 조는 ‘별아 내 가슴에’에서 선보여 당시 최고의 흥행카드가 되고, 50여 년이 지난 지금 우리 어머니와 이모, 누나, 여동생들까지도 막장 드라마라 욕을 하면서도 끝끝내 TV 앞에서 본방사수를 하게 만드는 “내가 네 아비다” “아버지, 우리는 오누이 사이인가요? 그렇다면 우리 사랑은 이루어질 수 없나요?” 신공을 안타깝게도 춘향이에게는 사용할 수 없었다. 만약 사용한다면 그것은 춘향전이 아니니, 오호통재라. 그들의 춘향전은 흥행에 참패하고, 대한민국 영화계를 뒤흔든 세기의 대결은 최은희·신상옥 조의 압승으로 끝나고 말았다.
그리고 1년 후 홍성기 감독과 김지미의 결혼은 파경을 맞는다. 영화 ‘춘향전’의 실패로 엄청난 빚을 지게 된 제작자 겸 감독 홍성기는 다음 영화를 만들었지만 재기에 성공하지 못했고, 게다가 바람까지 피우다 걸린 것이다. 춘향전의 실패는 홍성기와 김지미 두 사람의 운명을 바꿔놓았다.
한국 영화 최고의 흥행작을 만들어낸 감독과 여배우는 결혼까지 하는 행운을 누렸지만, 감독 홍성기는 관객을 눈물 흘리게 만들면 흥행에 성공한다는 생각에 젖어 비슷비슷한 내용의 신파 멜로를 만들다 몰락의 길을 걸었다.
1957년 데뷔작 한 편을 찍은 김지미는 이듬해 흥행작 ‘별아 내 가슴에’의 성공 이후 1959년까지 2년 동안 23편의 영화에 출연한다. 이쯤 되면 20대 초반의 신인은 아무것도 모른 채 소모돼버리고 사라져야 할 텐데 이상한 일이다. 춘향전에서 완패했지만 김지미는 살아났다. 남편 홍성기가 진 빚 갚으랴, 영화에 출연하랴, 애 키우랴, 제대로 된 역을 소화해낼 겨를이 없었는데도 그랬다. 1950년대 말부터 1960년대 초까지 김지미가 마구잡이로 출연한 50여 편의 영화에서 그가 당당한 여배우로 인정받을 만한 연기를 펼친 경우는 거의 없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김지미는 사라지지 않고 버텨냈다. 게다가 비슷한 시기 등장해 남성들의 가슴을 설레게 한 문정숙, 도금봉, 주증녀 등을 제치고 선배이자 라이벌인 최은희의 아성을 위협하는 새로운 개성의 여배우로 자리 잡는다.
김지미는 고등학생 때 김기영 감독의 눈에 들어 배우가 됐다. 김기영 감독의 첫 작품 ‘황혼열차’에 출연한 그녀는 이듬해 신성으로 떠오른다. 내 기억 속 첫 영화관 풍경은 하얀 손수건과 눈물이다. 10대 후반의 이모와 사촌누나들은 대여섯 살 난 나를 사내랍시고 극장에 갈 때면 꼭 데리고 갔다. 영화 내용은 하나도 기억이 안 나지만 이모와 사촌누나들이 하염없이 흐르는 눈물을 하얀 손수건으로 찍어내던 풍경만은 선명하다. 왜 우는지 이해도 안 되고 빨리 집에 가고 싶어 안달하던 게 기억난다. ‘별아 내 가슴에’에서 갓 스무 살 나이에 양아버지의 아들을 사랑하게 된 비련의 여주인공을 연기해 스타가 된 김지미는 흥행 감독의 아내가 됐고 남편의 회사인 선민영화사 작품에 출연해 주연 자리를 어렵지 않게 독차지하는 행운을 누렸다. 이때부터 김지미는 여배우로서 최은희와 항상 비교되는 운명에 놓이게 된다.
한국의 엘리자베스 테일러
그녀의 라이벌이라고 호사가들이 떠들어댔던 최은희와 비교할 때, 적어도 1960년대 초까지의 김지미는 주연급 배우가 아니다. 그때까지 최은희는 자신의 캐릭터를 당당하게 구축한 진짜 배우였다. 1955년에 만들어진 신상옥 감독의 ‘꿈’을 보자. 평생 수도에 정진할 것을 맹세한 중을 상사병에 이르게 하는 최은희는 너무나도 정숙하고 아름답다. 그래서 인간의 욕망이 만들어낸 희생자 최은희는 충분히 동정을 받는다. 남자 배우만 주역이고, 여배우는 남자 주연의 상대역 정도가 고작이던 초창기 한국 영화계에서 최은희는 한국 영화 최초의 진정한 여자 주인공이었다. 그녀의 정숙한 캐릭터가 관객에게 얼마나 인정받았는지, 신상옥 감독의 1958년 작 ‘지옥화’에서 최은희가 양공주로 출연하자 남성 관객들은 분노했다. ‘지옥화’에서 최은희는 미군부대 PX 물품을 도둑질하는 사나운 밀수꾼들을 농락하며 살아남기 위해 몸부림치는, 남성의 입장에서 보자면 악녀다. 절망적인 현실에서 나른한 손놀림을 하며 담배를 피우던 최은희의 모습은 충분히 매력적이었지만 그녀에게서 전후(戰後)의 황폐한 시절 정신적인 구원자인 누나 또는 어머니의 모습을 찾던 남성 관객들은 그런 변신을 용서할 수 없었다. 톱스타 최은희가 끊임없이 영화 속에서 보여주는 이미지는 수절하는 과부, 참고 인내하는 여성, 불행에 빠져도 여자가 지녀야 할 덕목을 끝까지 놓지 않는 기품 있고 강인한 여성이었다. 고단하고 불안한 전후 대한민국 남성들의 안식처가 될 성모 마리아였던 것이다.
그에 비해 김지미는 아직 자신의 캐릭터가 없었다. 그런데 춘향전 대결과 홍성기 감독과의 이혼에 이은 최무룡과의 재혼으로 영화 외적인 캐릭터가 만들어진다. ‘한국의 엘리자베스 테일러. ’엘리자베스 테일러의 연기력과 비교된 것이 아니라, 이혼 스캔들과 관계된 별명이었다.
두 번째 이혼
최무룡과 간통 사건에 휘말려 옥고를 치른 뒤 결혼한 김지미는 그와 단짝으로 수많은 영화에 주·조역으로 출연하면서 마침내 자신의 캐릭터가 드러나는 영화를 만들기 시작한다. 그중 하나는 남자를 좌지우지하는, 매력적이지만 어둡고 퇴폐적인 여자 캐릭터다. 1963년 김수용 감독의 ‘혈맥’에서 최무룡과 단짝으로 출연한 김지미는 양공주다. 일본 도쿄로 유학을 다녀왔지만 일을 못 찾고 방황하는 가난한 남자. 그 남자를 사모하며 무슨 짓을 해서라도 돕고자 하는 가련하지만 녹록지 않은 여자. 빚더미에 앉아 방황하는 지적인 남자 홍성기의 아내였던 현실 세계에서의 김지미와 겹치는 영화 속 김지미. 이 캐릭터는 점차 발전해 1965년 작 ‘불나비’에 이르러서는 확고한 자기만의 세계가 된다. 김상국이 부른 영화 주제가 ‘불나비’가 더 유명한 이 작품에서 남자 주인공들은 사랑하는 여자 김지미를 향해 정염에 불타올라 불나방처럼 돌진하다 하얗게 재가 돼버린다. ‘불나비’ 속 김지미는 40여 년이 지난 지금 봐도 남자를 불행에 빠뜨리기에 충분한 매력이 있다. 김지미는 남자를 유혹하는 요염한 이혼녀, 깡패의 아내로 핍박을 참아내는 정숙한 가정주부, 불처럼 타오르는 정욕을 주체 못해 밤마다 거리로 뛰쳐나가는 요부 같은 부잣집 딸로 매 시간 변신하는 수많은 이름과 얼굴을 가진 정체를 알 수 없는 여인이다. 단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그녀 주변의 남자는 모두 죽거나 미친다는 것. 영화에서 김지미가 등장하자마자 한 남자가 목을 칼에 찔려 죽는다. 왜 그녀가 가는 곳에는 이런 일이 생길까? 모든 사건이 해결된 라스트에서도 김지미는 자신을 죽도록 사랑한다는 신영균을 뿌리치고 혼자만의 삶을 지키겠다며 홀연히 떠나버린다. 이 매력적인 캐릭터를 누가 연기할 것인가? 도금봉인가? 주증녀인가? 아니면 문정숙인가? 최지희가 비슷하지만 그녀는 깡패 남편의 핍박을 참아내는 정숙한 가정주부로 순식간에 페이스 오프 하기에는 뭔가 어색하다. 오로지 김지미만이 해낼 수 있었다. 이후 김지미는 ‘육체의 길’(조긍하 감독, 1967)에서 건실한 은행원 김승호를 파멸에 빠뜨리는 여인 역도 멋지게 해냈다. 남자들이 파멸에 빠질 것을 각오하고 기꺼이 몸을 던지게 하는 여인이 김지미의 캐릭터가 된다.
비슷한 시기에 형성된 김지미의 또 다른 캐릭터가 있다. 1960년대에 들어서면서 한국 영화계에서는 전후의 새로운 여성상을 표현하는 작품이 만들어진다. 이른바 ‘또순이’다. 북에서 내려온 여자들은 전쟁 통에 헤어진 남편 또는 월남 이후 모든 것을 상실해 폐인이 된 남편을 대신해 억척같이 일하며 자식을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한다. 1963년 도금봉이 함경도 출신 여성 또순이 역을 맡은 영화 ‘또순이’는 화제를 일으켰다. 영화가 흥행에 성공하자 김지미를 주연으로 비슷한 영화가 만들어진다. 김지미가 황해도 출신의 억척내기 해주댁을 연기한 영화의 제목은 ‘선술집 처녀’(박상호 감독, 1963). 황해도에서 월남한 홀몸의 처녀 김지미는 선술집을 운영한다. 동네 홀아비와 남정네들이 그녀를 사모해 난리가 난다. 김지미는 오직 돈을 벌기 위해 남정네들의 애간장을 태우고는 돌아서서 사악한 미소를 짓는다. 그녀에게 치근대며 구애하는 남정네는 사랑에 빠진 순간 김지미 손바닥 위에 올라간 약자가 된다. 김지미는 그들을 요령 좋게 요리하며 악착같이 돈을 번다. 그런데 뛰는 놈 위에 나는 놈이 있다고, 가짜 기자인 최무룡이 다가가자 그 요령 좋고 똑똑하던 김지미는 여지없이 무너져버린다.
능력 있고 독립적인 여성
또 다른 영화 하나. ‘동대문 시장 훈이엄마’(서정민 감독, 1966)에서도 김지미는 홀몸으로 시장에서 장사하며 어린 아들 하나만 보고 살아가는 과부 훈이 엄마였다. 김지미의 육체를 노리고 선심과 협박으로 접근하는 시장 통의 늑대 같은 남자 무리 속에서 김지미는 힘들어하지만 강인하게 버티며 자수성가한다. 그는 영화 속에서 남자 없이 험한 세상을 살아가는 여자다. 정절을 지키기 위해 남자 없이 사는 것이 아니라, 웬만한 남자들과 같이 사느니 혼자 사는 게 더 낫기 때문에 혼자 사는 여자다.
최무룡은 홍성기처럼 자신의 영화사를 만들고 감독이 되는 길을 택한다. 김지미는 또 여러 영화에서 자신을 소모해가며 실패를 거듭해 빚더미에 올라앉은 최무룡에게 헌신한다. 최무룡의 영화 ‘나운규 일생’(1966)은 최무룡 본인의 이야기를 나운규에 이입해 만든 작품이다. 극 속에서 나운규는 자신의 괴팍한 예술관에 의거, 절대 본처 조미령에게 가지 않고 기생 김지미의 품에서 괴로워한다. 기생 김지미는 나운규, 즉 최무룡의 수발을 들지만 아내가 되지는 못한다. 영화 속 주인공과 현실의 김지미는 이렇게 이상하게 겹친다. 1960년대 그녀가 출연한 영화에서 김지미는 남편이 없는 여인이다. 반쪽 가정을 가진 여인이다. 최은희의 ‘사랑방 손님’과 비교되는 것은, 최은희는 지적이고 단아한 풍모로 본의 아니게 남자들을 끌어들인 뒤 갈등하지만 마지막에는 정숙을 강요하는 윤리관을 택하는 여성이라는 점. 반면 김지미는 교태로 남자들을 끌어들이고, 그들을 파멸시킨다. 새로운 여성상이다. 현실에서 최은희는 남편과 함께 북한의 영화인이 되는 선택까지 인내하지만, 김지미는 1960년대 말 파산한 최무룡을 떠난다. 이 시기에 그녀는 수많은 남자에게 구애를 받는다. 오죽했으면 아시아 영화제에서 김지미에게 반한 홍콩 스타 왕우가 자신의 영어 이름을 김지미에 대한 사모의 마음을 담아 ‘지미 왕’으로 지었을까?
1957년 여고생 신분으로 영화계에 들어와 온갖 풍파를 견딘 김지미는 1960년대 말, 어느새 여장부가 돼버렸다. 최무룡과 이혼한 후 더 이상 사고치는 남자 뒷바라지를 할 필요가 없어지자 그녀는 영화 출연 횟수를 점점 줄인다. 물론 1960년대 말 등장한 새로운 유형의 여성 스타 문희·남정임·윤정희, 이른바 트로이카의 시대가 밀려왔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김지미 본인의 선택도 있었다. 자신을 데뷔하게 해준 김기영 감독의 영화에 의리로 출연하는 등 우정에 기반을 둔 출연만 하는 정도였다. 김지미와 남다른 우정을 맺었던 배우 박노식은 그녀를 가리켜 “웬만한 남자와는 비교가 안 되는 여장부”라며, 자신의 첫 주연·감독 영화(인간 사표를 써라, 1971)에 출연한 것은 물론이고, 영화 촬영을 위해 자기 집 안방까지 빌려줬다고 고마워했다. 그리고 그녀는 다 알다시피 가수 나훈아와 결혼하고 또 헤어지고, 네 번째 결혼을 하고 헤어진다. 그리하여 동네 양아치들이 화투판에서 패를 싹쓸이할 때 ‘김지미’를 외치는 별로 아름답지 못한 풍경까지 낳게 된다.
“다 안다, 네 서러움”
그리고 1985년. 김지미는 임권택 감독이 연출한 ‘길소뜸’의 민화영 역으로 돌아온다. 어린 시절 풋사랑을 나눈 남편과 그 사이에서 생긴 아들을 6·25전쟁 통에 잃어버리고 남한으로 내려와 자수성가한 여인을 연기한 이 영화에서 김지미는 한국 영화 사상 최고의 연기라는 평가를 받는, 그녀가 살아온 내력을 잊게 만드는 명연기를 펼친다. 특히 개장수가 돼 하루벌이를 하며 천하고 상스럽게 살아가는 아들 앞에 서는 장면에서 그는 대사 하나 없이 눈썹의 떨림만으로 모든 것을 표현하는 기적의 연기를 선보인다. 이 세상 모든 여배우가 연기만으로 자신의 존재감을 알리지는 못한다. 영화계는 남성 중심의 투박하고 삭막한 곳이기 때문이다. 때때로 그녀들은 유치한 권력자가 자신의 권력을 확인하고자 하는 데 이용당하고, 대중에게 창녀 취급을 받기도 한다. 연기 외적인 문제로 침몰하거나 떠오른다. 그러나 김지미는 ‘길소뜸’을 통해 그동안의 모든 오명을 날리고, 그녀가 걸어온 힘든 세월을 떠올리며 숙연케 할 만한 연기를 이룬 것이다. 그녀는 암사마귀도 아니고, 독거미도 아니고, 팜파탈도 아니었다. 남성들의 세상에서 그녀만의 방식으로 생존한 끝에, 그간의 포한(抱恨)을 숭고한 경지까지 밀고 올라간 것이다.
몇 년 후, ‘지미필름’을 만들어 외국영화 수입과 영화제작 등을 하던 그녀는 일생의 역작을 만들기로 결심하고 당시로서는 거액의 제작비가 투입된 ‘명자 아끼꼬 쏘냐’(1992)의 제작·주연에 온 힘을 기울인다. 당대 최고의 감독 이장호와 송길한 작가가 투입됐지만, 결과는 관객의 외면이었다. 그녀가 전 남편들과 달랐던 건 더 이상 영화 제작에 연연하지 않고 바로 손을 뗐다는 점이다. 이후 영화 행정에 전념한다. 그 결과 젊은 영화인들에게 지탄의 대상이 됐고, 항상 갈등의 중심에 서게 됐다. 지금도 그 갈등은 여전하다. 참 파란만장한 일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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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년 전, 선배 시나리오 작가에게서 김지미에 얽힌 일화를 들은 적이 있다. 몇 해 전 춘사영화제 때 얘기다. 그해 영화제는 깊은 산속에서 열렸다. 어느 비 내리는 밤. 주최 측의 안이한 발상으로 인해 행사는 성공적이지 못했고, 먼 길을 달려온 참가자들은 불만이 가득했다. 이때 가뜩이나 어수선한 행사장에서 소란을 일으키는 자가 있었다. 남루한 행색의 늙은 사내였다. 그는 술에 엉망으로 취해 주정을 부렸는데, 잘 들어보니 영화인으로 살면서 괄시받고 무시당한 한의 표출이었다. 가진 것 하나 없는 알코올중독자가 된, 이름 없는 시나리오 작가였다. 1960년대와 70년대, 흥행만을 목표로 질주한 척박한 우리 영화 시장에서 소모당한 불행한 작가의 표상 같은 인물이었다. 누구 하나 알은 체하지 않고 슬금슬금 피했다. 그를 아는 원로 영화인들조차 “또 주정이군. 창피하게” 하면서 난처한 얼굴로 외면했다. 그때 김지미가 나섰다. 김지미는 비에 흠뻑 젖은 그에게 다가가 자신의 코트를 벗어 입혀주고 다독였다. “다 안다. 네 서러움을 나는 안다.” 순간, 고함을 지르던 사내는 입을 다물었고 김지미의 품에 안겨 숙소로 돌아갔다. 원한에 가득 찬 술 취한 사내도 한국 영화계 속에서 원념에 가득 찬 세월을 견딘 김지미 앞에서는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었나 보다. 한 시대를 풍미하고 온갖 풍파에 맞섰던 여걸 김지미만이 할 수 있는 행동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