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6월호

“깎인 산 돋우고 끊어진 물길 잇겠다”

용산공원 설계 공모 당선 승효상 ‘이로재’ 대표

  • 송화선 기자│ spring@donga.com

    입력2012-05-23 11:4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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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근 우리나라 최초의 국가공원이 될 용산공원 설계 국제공모 당선작이 발표됐다. ‘미래를 지향하는 치유의 공원(Healing-The Future Park)’. 승효상 대표의 건축사무소 ‘이로재’와 네덜란드의 ‘웨스트8’이 함께 만든 컨소시엄의 작품이다. 조선 말 일본인 거주지로 사용되기 시작해 일제강점기 일본군 병영으로, 광복 후에는 미군 기지로 사용됐던 이 땅에 새로운 역사를 짓게 된 ‘이로재’ 승효상 대표를 만났다.
    “깎인 산 돋우고 끊어진 물길 잇겠다”
    승효상(60) 이로재 대표를 만나기로 한 때는 목요일 오전 8시였다. 그 주 월요일 밤, 열흘간의 유럽 출장에서 돌아온 승 대표는 시차 적응할 새도 없이 지방 출장을 간다고 했다. 목요일 오후 다시 중국행 비행기에 올라야 한다고도 했다. 간신히 찾아낸 틈이 출국일 아침이었다. 그는 이 약속에 30분쯤 늦었다. 하지만 타박할 마음이 들지 않았다. 헝클어진 머리와 충혈된 눈, 가라앉은 목소리만 봐도 얼마나 서둘러 나왔을지 짐작이 갔다. 한국, 중국에서 대형 건축 프로젝트를 진행 중인 그는 용산공원 설계 국제공모에 당선된 기쁨을 마음껏 즐길 여유도 없어보였다. 연거푸 사과하는 그에게 외려 미안해 “건물 구경하느라 시간 가는 줄도 몰랐다”고 했다.

    서울 동숭동 나지막한 언덕 위에 있는 이로재는 자택과 사무실을 겸한 공간이다. 4·5층은 승 대표의 집, 2·3층은 건축사무소 사무실, 1층은 개인 작업실이다. 지하에는 승 대표가 직원들과 함께 월·수·금요일 아침마다 검도를 수련하는 체육관이 있다. 2002년 완공 당시 우리나라 최초로 내후성 강판(코르텐 스틸)을 외장재로 사용해 화제가 된 곳이다.

    건물은 묵직하고 단단해보였다. 내후성 강판은 승 대표가 노무현 전 대통령 묘역을 조성하면서도 사용한 재료다. 세월의 흐름에 따라 색이 변하는 게 특징으로, 처음에는 검은색이다가 표면이 부식되면서 차츰 붉은색으로 변하고, 마지막엔 암적색이 된다. 승 대표는 “기억을 담기에 이만한 재료가 없다”고 했다. 그래서 자택에 썼고, 노 전 대통령의 묘역에도 둘러 세웠다. 이로재 외벽은 이미 검붉었다. 흘러간 세월이, 쌓인 역사가 함께 읽혔다.

    승 대표는 그동안 많은 것을 이뤘다. 2002년 건축가로는 최초로 국립현대미술관이 주관하는 ‘올해의 작가’에 선정됐고, 건축가협회상, 김수근문화상 건축상, 대한민국 문화예술상 등 건축 분야의 굵직한 상을 휩쓸었다. 파주 출판도시의 마스터플랜을 세웠고, 최근엔 세계적인 조경회사 ‘WEST 8’과 함께 우리나라 최초의 국가공원 ‘용산공원’ 설계 공모전에 당선됐다. 그가 내놓은 ‘미래를 지향하는 치유의 공원’ 아이디어는 깊이 있는 인문학적 성찰을 담았다는 점에서 많은 이의 찬사를 받았다. 승 대표를 만나고 싶었다. 바쁜 스케줄을 비집고 들어가는 욕심을 부려서라도.

    이슬을 밟는 집



    따뜻한 녹차 한 잔을 앞에 놓고 그와 마주 앉았다. 1만여 권의 책과 1000여 장의 음반이 꽂혀 있는 작업실 안에는 라디오 클래식 채널의 음악이 흐르고 있었다. 평화로웠다. 다행히 그는 곧 생기를 찾았다. 검고 동그란 안경테 너머 눈동자가 반짝였고, 이내 대화가 시작됐다.

    ▼ 책상 바로 옆에 검을 두셨네요. 검도를 꾸준히 하신다고 들었습니다.

    “네, 건물 지을 때부터요. 10년 전이죠.”

    ▼ 그럼 검도장부터 만들고, 뒤에 검도를 시작하신 건가요.

    “검도가 좋은 운동이라는 건 고등학교 때 알았어요. 대학 가자마자 검도반에 들었는데, 하루 하고 다음 날 휴교가 됐죠. 우리 때는 학교가 수시로 문을 닫았어요. 뒤에라도 시작했으면 좋았을 걸 사정이 여의치 않았고…. 나이 들면서 방법을 찾은 거죠.”

    승 대표는 서울대 건축학과 71학번이다. 졸업도 하기 전 ‘공간연구소’ 김수근 선생 문하에 들어갔다. 스스로 “며칠, 몇 주일, 몇 달 계속 밤낮없이 제도판을 붙들고 살았다”고 할 만큼 치열한 시절이었다. 5·18 광주항쟁을 겪은 뒤 ‘숨 쉴 수 없는 사회 분위기’를 벗어나고 싶어 오스트리아 빈으로 유학을 떠났지만, 돌아온 뒤 다시 몸담은 곳도 ‘공간연구소’였다. 밤낮없는 삶이 또 이어졌다.

    승 대표가 자신의 철학을 담은 작업을 시작한 건 김수근 선생 별세 후 개인사무소를 내고 유홍준 전 문화재청장의 자택 ‘수졸당’을 지으면서부터다. 1992년이니 아직 유 전 청장이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로 명성을 얻기 전이다. 가난한 학자였던 그는 승 대표에게 설계비 대신 현판을 하나 건넸다. 전북 부안의 고택에 걸려 있다가 유 전 청장의 애장품이 된 그 널판 위엔 세 글자, 밟을 이(履), 이슬 로(露), 집 재(齋), 곧 ‘이로재’가 적혀 있었다. ‘이슬을 밟는 집’이라니, 꽤 낭만적이다. 속뜻도 깊다. 노자의 ‘도덕경’에 나오는 고사 한 토막, 효심 지극한 가난한 선비가 매일 아침 이슬을 밟으며 부모 문안을 다녔다는 이야기에서 유래했다. 풀이하니 ‘가난한 선비가 사는 집’이 됐다. 승 대표는 이 단어에 반했다. 바로 자신의 건축사무소 이름으로 삼았다.

    1992년 자기 건축을 시작하면서 승 대표가 밝힌 철학이 ‘빈자의 미학’이다. ‘가난할 줄 아는 사람을 위한 집, 절제와 검박을 갖춘 집을 짓겠다’고 선언했다. 1996년 그가 펴낸 책 ‘빈자의 미학’에는 이런 문장이 있다.

    “여기에선 가짐보다 쓰임이 더 중요하고 더함보다는 나눔이 더 중요하며 채움보다는 비움이 더욱 중요하다.”

    군더더기 없는 아름다움, 단순함에서 비롯된 힘 등, 이른바 ‘빈자의 미학’은 이후 그의 건축에서 일관되게 드러난다. 철판으로 외벽을 두르고, 내벽의 시멘트와 벽돌을 선연히 노출시킨 건물 ‘이로재’도 그중 하나다. 그러니 ‘침묵이며 절제이며 또한 진정한 언어’라고 자술하는 그의 건축정신을 드러내기에 ‘이로재’는 썩 괜찮은 이름일 것이다. 검도라는 운동도 그렇다. 승 대표는 “페인트 모션이 없어서 좋다. 스트레이트하게 본질로 들어가는 것이 내 성질과 잘 맞는다”고 했다.

    승 대표는 검도 공인 3단이다. 그동안 건축 관련 상을 숱하게 받아온 그가 유일하게 작업실 벽에 붙여둔 게 이 단증이었다. 책상을 중심으로 왼쪽에는 검이, 오른쪽엔 단증이 있다. 그 사이로 예스러운 편액 ‘月流軒(월류헌)’이 보였다. 달이 흐르는 집. 근사하다.

    달이 흐르는 작업실

    ▼ 작업실 이름인가요?

    “최근에 누가 줬어요. 요새 낭만을 통 즐기지 못해 ‘삶을 좀 낭만적으로 바꿔야 하는데…’ 하던 참에 마침 주기에 ‘아, 고맙습니다’ 하고 받았습니다.”

    ▼ ‘이로재’도 그렇고 ‘월류헌’도 그렇고, 참 서정적인 이름이네요.

    “이로재는 착한 이름이죠. 월류헌은 좀….”

    얼굴에 장난스러운 미소가 번진다. 한참을 뜸들이다 내놓은 답이 ‘음, 낭만적이죠’다. 더 나은 단어는 아무래도 찾기 어려웠던 걸까. 같이 웃었다. 그래, 낭만이 ‘나쁜’ 건 아니다. 착하지 않을 뿐.

    이로재가 새벽이라면 월류헌은 밤이다. 전자가 이성이라면 후자는 감성일 게다. 절제와 충동, 순응과 일탈…. 극명하게 다른 두 개념이 승 대표의 공간에 함께 있다. 문득 건축의 속성이 그렇지 않나, 생각했다. 기술이면서 동시에 예술인 것. 승 대표는 건축을 기술로 분류하거나, 예술의 한 부분으로 여기는 것 모두에 동의하지 않는다고 했다. 그가 보기에 건축은 인문학이다. “문학적 상상력과 논리력, 역사에 대한 통찰력, 그리고 사물에 대한 사유의 힘이 있어야 좋은 건축이 가능하다”고 여긴다. 그러니 둘 다 필요한 것이다. 이로재도, 월류헌도.

    “저는 건축이 사람의 삶을 바꾼다고 믿는 사람입니다. 윈스턴 처칠이 ‘We shape our buildings, thereafter they shape us(우리가 빌딩을 만들지만, 그것이 다시 우리를 만든다)’라고 했는데, 정말 그래요. 사람은 공간의 지배를 받습니다. 예전에는 건축 대신 ‘영조(營造)’라는 단어를 썼지요. 저는 ‘지어서 만든다’는 뜻의 이 말이 더 옳다고 생각해요. 집은 세우는 게 아닙니다. 밥을 짓고 농사를 짓듯, 짓는 거예요. 그러자면 건축은 기술이나 예술이 아닌, 인문학이어야 해요.”

    승 대표에 따르면 ‘짓는’ 것은 어떤 재료에 생각과 뜻과 마음을 담아 전혀 다른 것을 만들어내는 행위다. 물리적 운동에 불과한 ‘세우는’ 것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철학이 요구될 수밖에 없다. 다시 그의 책 ‘빈자의 미학’으로 돌아가자.

    “어느 한 건축가의 작업을 … 일관되게 하는 것은 그 건축가가 가진 역사의식에서 비롯된 작의다. 이 건축가의 항성이라고 일컫는, 시대를 관조한 작의가 투영된 건축의 사상적 배경, 이를 이 건축의 시대성이라고 하자. 시대성에 대한 문제의식의 농도가 짙을수록 그 건축을 의미 있는 것으로 만들며 생명력 있는 존재로 인식하게 한다.”

    그가 개인 작업을 시작하며 ‘빈자의 미학’이라는 캐치프레이즈를 내건 이유가 여기에 있다. 역사의식, 작의, 항성을 이 표현에 담아, 그는 스스로의 건축을 규정했다.

    백두대간의 맥

    최근 ‘용산공원’ 설계 국제공모에 당선된 ‘미래를 지향하는 치유의 공원’ 안(案)에도 이 정신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채우기보다는 비움으로써’ 오랫동안 버림받았던 공간을 치유하겠다는 게 승 대표의 생각이다. 그는 “지금껏 해온 모든 작업이 다 소중하지만 특히 용산공원은 굉장한 의미가 있다”고 했다.

    “현대 도시에 73만 평이 넘는 크기(242만6866㎡)의 공원을 만드는 건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것도 신생도시가 아닌 역사도시에서, 한가운데 있는 땅을 공원으로 꾸미는 건 굉장히 센세이셔널한 일이죠. 이 프로젝트가 발표됐을 때 세계 조경계가 다 놀라며 관심을 쏟았습니다.”

    세계적인 조경가 아드리안 구즈가 있는 네덜란드 조경업체 ‘West 8’도 마찬가지였다. 이로재에 먼저 연락을 해왔다. 이 공모에 참가하려는 외국업체는 반드시 한국 회사와 컨소시엄을 구성해야 했는데, 협력사로 이로재를 택한 것이다.

    “그쪽 실무진이 먼저 한국에 와서 현장을 봤습니다. 그 뒤 제가 ‘West 8’이 있는 네덜란드 로테르담으로 날아갔지요. 처음 만난 자리에서 5시간 동안 회의를 했어요. 그들이 생각하는 공원의 이미지와 제 생각이 완전히 달랐거든요.”

    아드리안이 처음 그려 보여준 설계도는 환상적이었다. 하지만 용산에 구현할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네덜란드의 평지 위에 만든다면 분명 멋진 공원이 될 것이다. 하지만 우리 땅에는 산이 있고, 그와 맞물려 흐르는 물이 있다. 산수의 맥락을 이해하지 못하면 건축이 불가능하다.” 설명을 시작하며 승 대표는 준비해간 대동여지도를 펼쳐 보였다고 했다. 백두산에서 시작된 산줄기가 금강산을 넘은 뒤 함북정맥을 따라 남쪽으로 내려오면서 삼각산, 북악산, 남산을 지나고, 다시 용산을 거쳐 한강까지 이어지는 모습이 뚜렷이 보였다.

    “그들에게 용산공원이 들어설 장소는 외따로 떨어진 평면이 아니라 거대한 흐름의 일부라는 걸 보여준 겁니다. 백두대간에 대해 설명하고, 지난 100년간 외세가 용산을 차지하면서 우리 땅의 맥이 어떻게 끊어졌는지에 대해서도 이야기했어요. ‘이 공원은 오랫동안 단절돼 있던 한국의 역사와 자연을 다시 잇는 치유의 공간이 돼야 한다. ‘치유(healing)’를 설계의 주제어로 삼자’고 하자 아드리안이 ‘정신적으로 큰 영향을 받았다(spiritually impact)’고 하더군요.”

    이후 크고 작은 의견 차이를 조율하며 설계안을 만드는 동안, 이 최초의 아이디어는 변하지 않는 밑그림이 됐다. 설계 공모 당선작에는 용산의 산자락을 원형대로 복원하고, 현재 아파트 등에 가로막힌 용산과 한강 사이 생태 흐름을 다시 연결하는 계획이 담겨 있다. 일제의 병영 및 감옥, 미군 시설 등 용산기지 곳곳에 남아 있는 건물 역시 역사적인 모습 그대로 일반에 공개할 예정이다.

    “좋은 역사든 나쁜 역사든 기록을 해야 하니까 건물은 웬만하면 다 남겨두려고 합니다. 헐 수밖에 없는 건물 자리에는 표석을 세워 어떤 형태의 건물이 있었는지 알 수 있게 할 겁니다.”

    승 대표의 바람은 용산에 남아 있는 역사의 흔적을 복원해 앞으로 그 공간을 향유할 이들에게 돌려주는 것이다. 시민들이 그곳에서 땅이 들려주는 지난 이야기를 듣고, 앞으로 그들이 만들어갈 새로운 이야기와 기억을 덧댈 수 있기를 바란다고 했다. 땅의 의지와 그 공간을 사용할 사람의 의지가 함께 완성하는, ‘미래를 지향하는 치유의 공원’의 청사진이다.

    지문을 읽는 까닭

    “제가 요새 ‘터 무늬’라는 말을 자주 써요. 사람에게 각자 다른 지문(指紋)이 있듯, 모든 땅에도 고유한 무늬(地紋·지문)가 있습니다. 그게 ‘터 무늬’죠. 일차적으로는 땅의 형상이나 무늬를 뜻해요. 거기서 좀 더 들어가면 그 무늬를 만든 역사, 인간의 삶이 남긴 기억과 이야기까지 포괄하고요. 그래서 터 무늬는 동시에 ‘지문(地文)’이기도 합니다. 영어로 하면 ‘landscript’쯤 되지 않을까 싶어요. 제가 만든 단어지요.”

    승 대표는 2009년, 이런 생각을 담은 책 ‘지문(地文)’을 펴냈다. 거기에 이런 대목이 있다.

    “터무니라는 말이 있다. ‘터-무늬’에서 파생된 이 말은 말 그대로 터에 새겨진 무늬를 뜻한다. 터무니없다는 것이 근거 없다는 말이고 보면, 터에 새겨진 무늬를 몽땅 지우고 백지 위에 다시 짓는 재개발 같은 사업은 터무니없는 사업이요, 그 결과로 얻어져 판에 박은 아파트에 사는 삶은 터무니없는 삶 아닐까. 그래서 도시의 유목민이 된 우리의 삶은 떠돈다.”

    그는 사막 위에 지은 두바이를 ‘터 무늬가 없는 도시’라고 했다. 달리 말하면 ‘터무니없는 도시’다. 반면 서울은 ‘터무니 있다.’ 자연이 만든 터의 무늬 위에 수천 년 세월 동안 수많은 사람이 그려놓은 역사의 무늬가 덧대져 있다. 그런데 왜 우리 건축은 두바이를 벤치마킹하는 걸까. 왜 산을 깎고 축대를 세우고, 마천루를 지어 랜드마크로 삼는가, 터무니없게. 승 대표는 혀를 찬다.

    그는 최근 뜻 깊은 경험을 했다. 박원순 서울시장과 함께 헬기를 타고 서울 상공을 비행한 것이다. 도시계획 밑그림을 그려야 하는 박 시장이 서울의 ‘지문’을 전체적으로 파악하기 위해 그의 도움을 청했다. 승 대표는 몇 년 전 김문수 경기지사와 함께 경기도 지역을 헬기로 돌아본 적도 있다. 당시 수도권 상공을 모두 비행하면서 서울 쪽만 보지 못해 아쉽던 마음을 이번에 풀었다.

    “굉장히 좋은 공부가 됐어요. 청와대 지역을 빼고 나머지는 다 봤습니다. 용산이 서울에서 얼마나 중요한 위치에 있는지도 알았고, 서울의 구조를 이해하는 눈이 생겼지요.”

    하늘 위에서 산세를 내려다보니 서울의 생리, 즉 ‘생긴 원리’가 한눈에 들어왔다. 그는 “정도전과 무학대사가 서울을 도읍으로 정할 때 본 것이 안에 있는 네 개의 산, 즉 내사산(인왕산 북악산 남산 낙산)과 밖에 있는 네 개의 산, 즉 외사산(삼각산, 관악산, 용마산, 덕양산)이었다”며 “지난 몇 십 년 동안 잘못된 도시개발이 계속됐는데도 이 틀이 여전히 굳건했다. ‘지금은 엉망진창이라도 우리에겐 돌아갈 곳이 있구나’ 하는 안도감이 들었다”고 했다.

    “세계에 인구 1000만 명 이상이 사는 도시가 20개 정도 되는데, 그중 도심에 산이 있는 곳은 서울뿐입니다. 서양 도시는 다 평면 위에 있어요. 그러니 그들의 건축 기법을 우리나라에 그대로 들여오면 문제가 생길 수밖에 없죠. 서울의 랜드마크는 산세입니다. 이미 주어진 조건을 받아들이고, 그것과 조화를 이루도록 도시를 만들어야 해요. 그런데 높기만 하면 좋은 줄 알고 너도나도 랜드마크를 만들겠다며 건물을 올리다 지금의 모습이 된 거죠.”

    “꿈꾸면 이뤄진다”

    서울의 난개발은 문외한의 눈에도 심각해 보인다. 그런데 그는 ‘돌아갈 수 있다’고 말한다. 평화롭고 아름다운 서울의 원형으로. 그게 정말 가능할까.

    “네. 북악산에 올라가서 남쪽을 바라보면 제 말을 이해하실 겁니다. 이렇게 아름다운 도시가 없어요. 건물이 엉망으로 지어진 것과 별개로, 그 틀은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승 대표는 박원순 시장에게 “서울을 살리려면 임기 내에 끝내지 못한다 해도 도시계획의 큰 그림을 그릴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들어야 한다”고 주문했다고 말했다.

    “새로운 서울은 몇몇 건축가나 공무원이 만들 수 있는 게 아니잖아요. 시민들이 어떤 서울을 원하는지에 대해 1년이든 2년이든, 매주 한 번씩 토론에 부쳐보면 어떨까요. 그 과정에서 우리가 원하는 ‘서울의 정체성’에 대한 공감대가 차츰 형성되지 않겠습니까.”

    좋은 제안이다. 시민들이 뜻을 모아 서울의 내일을 만든다는 것. 이 과정에서 난개발을 멈추고 뒤엉킨 이 땅의 ‘지문’을 바로잡을 수 있다면 더 좋을 것이다. 승 대표가 용산공원에서 하듯, 아파트를 건설하느라 깎은 산을 돋우고, 끊어진 물길을 잇고, 생태와 환경을 되살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산세를 거슬러 지은 건물은 허물고, 땅의 질서에 맞는 새로운 도심을 건설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승 대표는 저서 ‘지문’에서 “지문은 끊임없이 변하는 생명체이며 스스로 무엇을 덧대어달라고 요구하는 기운체다. 따라서 … (건축은) 그 장구한 역사를 체험해온 땅이 새롭게 요구하는 말을 경청하는 것으로 시작해야 한다. 온갖 예의를 갖추어 그 경이로운 언어를 들추어내고 깊이 사유하여, 새로운 시어를 그 위에 겸손히 지어 덧대는 일이 건축이다”라고 했다. 그렇게 겸손하게, 새로운 건축을 구현하는 일. 분명 아름다울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인구 1000만 도시 서울에서 현실적으로 가능할까. 그는 “정말 그렇게 될 수 있다고 생각하느냐”는 물음에 “그럼요”라고 답했다. “가능합니다”라고 힘주어 덧붙였다.

    ▼ 재산권이 얽혀 있지 않나요.

    “재산권이라는 게 참 우스운 거예요. 제가 공산주의를 주장하는 건 아니지만, 소유권에 대해서는 생각해봐야 합니다. 땅의 소유권은 시민과 사회에 있어요. 자기 돈으로 땅을 점유하고 있다 해도 사용권만 갖는 거죠. 건축도 마찬가집니다. 집을 지은 사람은 사용권을 가질 뿐이고, 소유권은 시민과 사회의 것입니다. 공공적인 가치는 굉장히 중요한 거고, 그게 땅과 건축이 가져야 하는 윤리라고 생각해요. 건축과 토지를 소유하겠다고 생각하면 굉장히 곤란합니다. 이 문제에 대해서도 우리가 얘기를 해야 합니다.”

    그가 제안하는 서울시민 토론회의 안건 중 하나가 될 수는 있겠다. 몇 년이든 결론이 날 때까지 토론을 계속하다 보면, 새로운 서울은 건축과 토지의 소유권을 인정하지 않는 곳으로 만들어질지도 모른다. 정말 그럴까. 승 대표는 “나를 이상주의자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고 했다. 하지만 꿈만 꾸고 있는 건 아니라고 덧붙였다. 변화를 위해 꾸준히 노력한다.

    “예컨대 제게 설계를 부탁하러 오는 건축주가 있어요. 자신의 이익을 위해 집을 지으려고 하죠. 저는 그에게 집은 공공의 이익에도 부합해야 한다고 얘기하고 설득합니다. 설득이 안 되면 그 일을 하지 않아요. 대신 둘의 뜻이 통하면 정말 열심히 합니다. 그 사람의 이익을 지켜주기 위해, 더불어 공공의 이익도 지키기 위해 제가 할 수 있는 건 다 하지요. 그게 우리 사회를 풍요롭게 만드는 거라고 믿어요. 개인의 이익만을 위해 집을 짓는 건 죄악입니다.”

    ▼ 그런 노력으로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보십니까.

    “물론이지요.”

    stay out, stay alone

    그는 오스트리아 유학 시절 본 ‘로스하우스(Losshaus)’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다. 합스부르크 왕가의 겨울 궁전이 있는 빈 시내 미카엘 광장의 6층 건물이다. 외관은 지금의 시각으로 보면 평범하다. 하지만 1907년 장식 하나 없는 이 건물이 빈 도심에 나타났을 때, 시민들은 건축가 아돌프 로스에게 격렬하게 항의했다. ‘아름다운 장식’이야말로 빈의 정체성이라고 믿어온 이들에게 왕궁이 바로 건너다보이는 위치에 세워진 단조로운 건물은 모욕이자 반역으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로스는 “현대인에게 장식은 죄악”이라며 자신의 뜻을 꺾지 않았고, 결국 이 건물로부터 모더니즘이 시작됐다. 당대의 철학가인 카를 크라우스는 로스하우스에 대해 “아돌프 로스는 미카엘 광장에 건축을 세운 것이 아니라 철학을 세웠다”고 했다.

    “세상은 이렇게 변하는 겁니다. 한 사람의 힘이 결코 작은 게 아니지요.”

    그가 사람 좋은 표정으로 웃는다. 정말 믿는 눈치다.

    ▼ 대표님은 그러니까 땅에 대한 사람들의 생각을 바꾸기 위해 1년이고 2년이고 계속 대화하고 설득하겠다는 말씀인거죠.

    “네. 그게 굉장히 중요하죠.”

    승 대표의 검박한 믿음을 들으며 노무현 전 대통령을 떠올렸다. 건축애호가 사이에서는 일찍이 유명했던 승 대표의 이름이 대중에게까지 알려진 건 2009년, 그가 노 전 대통령의 묘역을 설계하면서부터다. 승 대표는 노 전 대통령 서거 당일 유홍준 전 문화재청장에게서 묘역에 대해 의논하자는 전화를 받았고, 유언의 한 구절대로 ‘작은 비석’을 만들기 위한 위원회가 구성됐을 때 바로 참여했다고 했다. 노 전 대통령을 존경했기 때문이다. 그는 노 전 대통령을 “항상 자신을 객관화하려고 노력했고, 제도권에 포함되기를 거부했던 분”으로 기억한다.

    “스스로를 추방하는 자가 지식인이라고 에드워드 사이드가 말했습니다. 저는 그 말을 믿습니다. 그런 분이 항상 세상을 바꾸죠.”

    승 대표의 좌우명은 스티브 잡스가 얘기한 ‘stay hungry, stay foolish(갈망하고 충직하라)’를 자신의 버전으로 고친 ‘stay out, stay alone’. ‘스스로 왕따가 되고, 스스로 고독해져라’라고 풀이한다. 그는 건축가로서, 이렇게 살고 싶다고 했다.

    “그리고 언젠가는 마을을 하나 설계하고 싶습니다. 정말 근사한 공동체를 만들어 촌장을 하면 좋지 않을까요. 안 되면 청소부라도.”

    그가 웃었다. 가난할 줄 아는 사람과, 터 무늬 있는 땅에서, “그 경이로운 언어를 들추어내고 깊이 사유해 새로운 시어를 그 위에 겸손히 지어 덧대는” 집을 짓고 더불어 살고 싶다는 말로 들렸다. 그렇게 되기까지 그는 내내 현실에서 ‘stay out, stay alone’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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