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머스 에디슨.
특히 이 싸움에서는 ‘발명의 아버지’로 칭송받는 에디슨의 내면에 감춰진 추악함이 여지없이 드러난다. 인류 역사에 빛의 혁명을 가져다준 에디슨이지만 그의 삶은 언론에 의해 미화되고 왜곡됐으며, 테슬라의 천재성은 에디슨의 그늘에 가려 빛을 보지 못했다. 두 사람은 피할 수 없는 인생의 라이벌이었던 셈이다.
악연의 시작
세계 최초로 백열전구를 발명한 에디슨은 1931년 84세의 나이로 사망할 때까지 무려 1100여 개에 달하는 발명품을 내놨다. 하지만 그는 사실 천재라기보다는 노력파였다. 그가 남긴 “천재란 1%의 영감과 99%의 노력으로 만들어진다”는 명언은 자신이 해결해야 할 문제는 절대로 포기하지 않았던, 노력으로 점철된 그의 일생을 대변하는 것이었다.
1876년 에디슨은 세계 최초로 미국 뉴저지의 멘로파크(Menlo Park)에 산업연구 실험실을 세웠다. 그곳에서 조수들과 함께 오늘날 거대한 음반 산업의 기초가 된 축음기와 전구를 발명했고 이때부터 사람들은 에디슨을 ‘멘로파크의 마법사(The Wizard of Menlo Park)’라고 불렀다.
그리고 이곳에서 테슬라와의 악연도 시작됐다. 테슬라는 에디슨과 달리 어릴 때부터 물리, 수학, 음악, 언어 등 거의 모든 분야에서 천재성을 보였다. 발명을 할 때도 먼저 정확한 이론을 바탕으로 계획서를 작성한 뒤 일을 진행했고 시행착오를 거의 겪지 않았다. 1856년 세르비아 스미즈란 지역(오늘날 크로아티아)에서 태어난 테슬라는 대학을 졸업한 뒤 프랑스 파리로 향했다.
테슬라는 그곳에서 에디슨의 유럽 자회사에서 근무하며 이름을 날렸다. 어릴 적부터 신동으로 불린 그의 실력은 본사에까지 알려졌고 1884년 6월 테슬라는 미국 에디슨연구소의 연구원으로 뽑혔다. 이때만 해도 두 사람이 ‘전류전쟁’을 벌이게 될 줄은 아무도 몰랐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둘의 관계는 틀어졌다.
오스트리아 그라츠공대에 다니던 시절부터 테슬라는 교류를 이용하면 직류 전동기의 스파크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대학을 졸업하고 부다페스트 전신국에서 근무하면서 대학 시절의 막연한 생각을 실제로 이룰 수 있는 방법을 실행에 옮겼다. 즉 변화하는 자기장의 원리를 이용해 교류 유도 모터를 발명한 것이다. 테슬라의 자서전에 따르면 이 아이디어는 괴테의 ‘파우스트’를 읊조리다가 갑자기 머릿속에 떠올랐다고 한다. 테슬라는 1882년 파리 에디슨 전화회사로 옮겼을 때 평소 생각만 해오던 모터를 제작해볼 수 있었다. 그리고 미국 에디슨연구소로 온 뒤 에디슨에게 교류전기를 제안했다.
하지만 당시 축음기, 전화송신기, 직류전기를 발명하고 전자공업 발달의 원동력이 된 ‘에디슨 효과(도체나 반도체를 가열하면 전자가 밖으로 나오는 현상)’를 발견해 부를 축적하고 있었던 에디슨에게 교류전기는 자신의 명성과 부를 앗아갈 수도 있는 위협적인 전류시스템이었다. 테슬라는 직류전기가 일반인이 쓰기에 비싸서 전기의 대중화가 어렵다는 점을 들어 교류전기로 바꾸자고 제안했지만 이미 직류전기 시스템에 많은 투자를 한 에디슨은 테슬라의 제안을 단칼에 거절했다.
에디슨, 교류 위험성 알리는 캠페인 벌여
특히 에디슨은 테슬라에게 모터와 발전기의 효율을 높일 수 있는 설계를 요구했고 이를 실현시킬 경우 테슬라에게 5만 달러를 주겠다고 약속했는데, 몇 개월 뒤 테슬라가 결국 이 일을 성공적으로 마치고 에디슨에게 약속대로 보너스를 요구했지만 에디슨은 “테슬라, 자네는 미국식 유머를 이해 못하나보군”이라며 약속했던 보너스를 지급하지 않았다. 대신 에디슨은 1주일에 18달러를 받고 있던 테슬라에게 매주 10달러를 더 올려주겠다고 제안했다. 하지만 테슬라는 이 제안을 바로 거절했고 그 자리에서 에디슨연구소를 뛰쳐나왔다.
에디슨에게 몹시 실망한 테슬라는 1886년 자신의 회사를 설립했다. 그리고 1887년 교류 시스템에 필요한 발전기, 모터, 변압기를 모두 만들어내는 데 성공했다. 테슬라는 ‘테슬라코일’이라는 세계 최초의 교류 전기 모터의 특허를 획득한 발명가로 역사에 기록됐다. 그 뒤 테슬라의 교류 시스템은 조지 웨스팅하우스의 투자로 한층 발전했고 이를 계기로 직류 시스템을 고집한 에디슨과의 전류전쟁이 본격적으로 불붙었다. 이때가 1888년이었다.
이 무렵 에디슨은 백열전구, 전선, 전기 모터, 발전기 등 직류를 이용한 전기 시스템에 사용되는 모든 것을 개발해 전기 산업을 장악하고 있었다. 반면 웨스팅하우스는 기차에 사용되는 공기 브레이크를 발명해 백만장자가 된 후 테슬라에게서 교류 변압기의 특허를 사들여 전기 분야로 사업을 확장하기 시작했다. 웨스팅하우스는 테슬라에게 현금으로 5000달러를 줬고, 회사 주식 50주에 교류전기를 팔 때마다 생기는 로열티를 지불하는 등 파격적인 대우를 약속했다. 발명가이자 타고난 사업가였던 에디슨에게 테슬라의 교류 시스템을 앞세운 웨스팅하우스는 눈엣가시 같은 존재였다.
자신의 분야에서 2등이 되는 것을 참을 수 없었던 에디슨은 테슬라의 교류 시스템에 어떻게든 흠집을 내려고 했다. 직류 방식과 교류 방식으로 전기를 생산할 때 차이점은 다음과 같다. 직류 방식으로 전기를 생산하고 전송하면 전류를 세게 하기는 쉽지만 전압을 높이기는 어렵다. 에디슨은 120V의 전기를 생산해 각 지역으로 전송했다.
토머스 에디슨이 1929년 10월 전기회사의 창립 50주년 기념행사에서 그가 백열전구를 발명하게 된 과정을 재현하고 있다.
테슬라의 발전 방식이 전기를 싸고 편리하게 공급할 수 있다고 소문이 나면서 교류 전기는 에디슨의 직류 시장을 파고들기 시작했다. 하지만 미국에서 가장 큰 시장인 뉴욕은 처음에 교류를 외면했다. 에디슨이 이미 뉴욕 전체를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점차 교류의 장점이 입소문 나면서 테슬라의 교류 시스템은 에디슨의 직류 시장을 잠식해갔다.
에디슨은 곧바로 교류에 흠집 내기 ‘캠페인’을 벌이며 반격에 나섰다. 가령 에디슨은 ‘에디슨전기회사로부터의 경고(A Warning from the Edison Electric Company)’라는 팸플릿을 제작해 사람들에게 뿌렸는데, 팸플릿에는 고전압 교류전선에 가까이 갔을 때 발생할 수 있는 위험을 경고하면서 고압 교류전선에 감전된 사람들의 명단을 실었다. 에디슨의 직류 시스템은 전선을 땅에 묻는 방식이어서 감전될 위험이 없었다.
반면 당시 뉴욕 하늘은 고압선과 전화선으로 검게 뒤덮여 있었고 매년 수십 명의 사람이 고압선에 감전돼 죽었다. 에디슨은 팸플릿의 마지막 부분에서 “이렇게 무서운 교류를 가정에서 사용하시겠습니까?”라는 질문을 던지며 상식적인 사람이라면 교류 대신 직류를 사용할 수밖에 없음을 피력했다. 직류와 교류를 놓고 사태가 인간의 생명에 관련된 문제로 확대되자 과학자들이 심판으로 나섰다. 시카고 전기클럽은 언론의 관심이 집중된 가운데 직류와 교류를 과학적으로 비교하는 토론회를 열었다.
하지만 과학자들은 이미 에디슨의 로비에 매수당한 상태였다. 이들은 직류가 사용 범위가 넓고 안전성이 뛰어나기 때문에 직류를 전기 시스템의 표준으로 삼아야 한다고 결론 내렸다. 하지만 시카고 전기클럽의 토론 직후 상황은 테슬라에게 유리하게 흘러갔다. 프랑스 기업이 구리 시장을 장악하면서 구리 가격이 3배나 껑충 뛰었는데, 직류 방식은 전기를 굵은 구리선에 보내야 하는 반면 교류 방식에서는 구리선이 가늘어도 됐기 때문이다. 상황은 점점 교류를 사용할 수밖에 없는 분위기로 바뀌었다.
전기의자로 교류 폐기 노렸지만 실패
궁지에 몰린 에디슨에게는 교류를 폐기시킬 결정적인 한 방이 필요했다. 경제적인 면이나 과학적인 논리로 교류를 폐기시킬 수 없다면 교류의 위험성을 강조해 대중의 감정에 호소하는 수밖에 없었다. 마침 에디슨의 눈에 해럴드 브라운(Harold P. Brown)이라는 인물이 띄었다. 브라운은 어린 시절 고압 교류 전화선에 사람이 감전돼 죽는 것을 직접 본 뒤 직류 신봉자가 된 인물이었다. 그는 ‘뉴욕 포스트’에 자신의 경험을 기술한 편지를 보내며 교류는 저주받은 위험한 것으로 법으로 금지해야 하며 직류를 채택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뉴욕 포스트에서 이 편지를 본 에디슨은 즉시 브라운을 고용했다. 에디슨은 자기 회사의 최고 기술자를 브라운의 조수로 붙여주며 교류가 인간에게 얼마나 치명적인지 입증하도록 부추겼다. 브라운은 이번엔 ‘뉴욕 타임스’에 공개적으로 광고를 냈다. 말이 광고지 사실은 테슬라를 향한 일종의 결투 신청서였다. 브라운은 “내 몸에 직류를 흘려보내는 동안 당신의 몸에는 교류를 흘려보내 누가 오래 견디는지 알아보자”며 “100V에서 시작해 50V씩 올리고, 둘 중 먼저 비명을 지르며 고통스러워하는 사람이 자신의 전류 방식의 결점을 공개적으로 시인하자”고 제안했다. 하지만 테슬라 측은 브라운의 결투를 무시했다. 오히려 테슬라는 몇 백만V가 흐르는 전기 불꽃 밑에 앉아서 책을 읽고 있는 사진 한 장을 공개해 에디슨의 꼼수를 잠재우려 했다.
사실 이 사진은 교류 송전의 안전성과는 관련이 없었지만 전기의 특성을 제대로 모르는 대중에게 교류가 그리 위험하지 않다는 생각을 심어주기에 충분했다. 에디슨은 지치지 않고 계속 다른 방법을 찾았다.
마침 1887년 미국 뉴욕 주 사법당국은 전통적 사형집행 방법인 교수형의 대안을 찾고 있었다. 당시 뉴욕 주가 교수형 집행에서 몇 차례 심각한 실수를 범했기 때문이다. 교수용 올가미가 너무 느슨해 사형수가 천천히 고통스럽게 질식사하는 경우가 있었는가 하면, 때로는 올가미가 너무 꽉 조여 사형수가 교수형이 아닌 참수형을 당하는 끔직한 경우도 발생했다. 에디슨은 원래 사형제도에 반대해왔지만 사업 앞에서는 달랐다. 사업가로서 에디슨은 무자비하고 악랄했다. 그는 뉴욕 주 사형집행에 자신이 직접 고안한 전기의자를 사용하도록 로비를 벌였다. 뉴욕 주지사는 다양한 사형집행 방법을 검토한 후 전기를 이용한 사형집행을 위해 연구위원회를 구성했고, 위원회는 전기 방면의 대가인 에디슨에게 자문을 구했다.
에디슨은 “고압 전류가 가장 빠르고 고통 없이 사형수에게 죽음을 가져다줄 것”이라며 교류를 의자에 흘리는 전기의자를 쓰자고 제안했다. 전기의자에 전압이 높은 교류를 흘려 사형수를 죽이면 테슬라의 교류 전류는 ‘사람을 죽이는’ 전류로 인식될 게 뻔했다. 에디슨의 작전은 성공했다. 에디슨은 브라운을 시켜 사형집행용 전기의자를 만든 뒤 동물에 감전시키는 실험을 보여주며 뉴욕 주를 설득했다. 처음엔 길거리에서 한 마리에 25센트를 주고 산 개와 강아지 같은 작은 동물로 시작했다. 그러다 브라운은 점점 동물의 크기를 키워 송아지와 말을 에디슨의 실험실로 끌고 와 교류에 감전시키는 실험을 했다.
신문들은 일제히 “15초 만에 송아지는 쇠고기 덩어리로 변했다”고 보도하면서 “보라! 인간보다 더 큰 포유동물을 죽이는 데도 아무런 문제가 없지 않은가? 인간도 이들 동물만큼 빠르게 처형시킬 수 있다”는 브라운의 주장을 실었다.
결국 뉴욕 주도 전기의자를 사형집행에 쓰기로 결정했다. 물론 테슬라는 에디슨에게 교류 발전기를 팔지 않았다. 그러자 에디슨은 자기 회사의 가장 뛰어난 기술자인 아서 켈리(Arthur Kelly)를 시켜 전기의자를 설계하고 발전기도 다른 방식으로 구입하게 했다. 전기의자의 첫 희생양은 내연녀를 도끼로 죽인 죄로 감옥살이를 하던 윌리엄 케믈러(William Kemmler)라는 죄수였다. 1890년 8월 6일 케믈러는 전기의자에 앉아 사형 집행을 기다리고 있었다.
자신의 몸으로 교류 안전성 입증한 테슬라
드디어 집행이 시작됐고 17초 동안 1000V가 전기의자에 흘렀다. 케믈러는 비명을 질러댔고 곧 죽은 것처럼 보였지만 사실은 살아 있었다. 이번에는 72초 동안 전류를 흘렸다. 하지만 연기만 솟아오른 뒤 전기는 끊어졌다. 전기의자를 이용한 사형은 실패였다. 에디슨의 노력도 수포로 돌아갔다. 나중에 밝혀진 것이지만 에디슨의 전기의자가 실패한 것은 전기를 흘린 방식에 문제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에디슨은 사형수의 손을 소금물이 담긴 그릇에 담근 뒤 그 그릇에 전류를 흘려보내게 했다. 하지만 이 정도로는 치명적인 효과가 나타나지 않는다. 이후 사형수의 머리에서 종아리로 전류를 보내는 처형 방식이 채택됐다.
에디슨의 전기사형 작전이 실패로 돌아가자 테슬라의 교류 방식이 시장에서 유리한 위치를 차지했다. 하지만 에디슨은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다. 그는 1903년에도 조련사 3명을 죽인 코끼리를 교류에 감전시켜 죽이면서 끝까지 직류를 고집했다.
하지만 에디슨과 테슬라의 ‘전류전쟁’ 2라운드에서 에디슨은 직류의 단점을 시인할 수밖에 없었다. 이 일은 1893년 시카고 만국박람회장에서 벌어졌다. 당시 시카고 만국박람회는 콜럼버스의 미 대륙 발견 400주년을 기념해 열린 터라 규모가 매우 컸다. 박람회에 켤 전구만 25만 개나 됐다. 에디슨과 테슬라 측은 서로 이 사업을 따려고 노력했다. 테슬라는 고주파 교류 전력이 자신의 몸을 통과하는 실험을 진행해 교류 전기의 안전성을 입증했다.
결국 25만 개의 전구를 켜는 행사는 테슬라 측에 돌아갔고, 웨스팅하우스는 테슬라가 특허권을 무상으로 양도하면서 자금난이 해소돼 박람회를 성공적으로 마쳤다. 이 일로 에디슨 진영은 패배를 인정해야 했다. 이후 에디슨의 재정적 후원자였던 JP모건은행은 에디슨전기회사를 다른 회사와 합병해 대형 전기회사로 만들었다.
미국을 대표하는 제조업체인 제너럴일렉트릭(GE)이 이렇게 탄생했다. GE의 주식 5%를 얻은 에디슨은 이때부터 전기사업에서 멀어졌고 미국의 전력산업은 테슬라와 에디슨의 손을 벗어나 웨스팅하우스와 GE 간의 경쟁으로 커나갔다. 에디슨과 테슬라의 ‘전류전쟁’은 ‘나이애가라 대결’로 완전히 끝이 났다. 당시 캐터랙트라는 기업이 나이애가라 폭포의 풍부한 수자원을 이용해 발전소를 설치했는데, 약 42㎞ 떨어진 버팔로 시에 전력을 공급할 수 있는 송전 사업자를 물색했고 여기서 에디슨의 GE와 테슬라의 웨스팅하우스가 한판 대결을 벌이지만 승리의 여신은 또다시 웨스팅하우스의 손을 들어줬다.
이로써 전류전쟁은 테슬라와 교류의 승리로 끝났고 교류 시스템은 전력 공급 방식의 표준으로 자리 잡았다. 흥미롭게도 에디슨과 테슬라의 ‘악연’은 노벨상까지 이어진다. 1915년 뉴욕타임스는 노벨상 수상자로 에디슨과 테슬라가 내정됐다는 기사를 실었다.
하지만 둘은 앙숙을 넘어 원수로 불릴 만큼 반목이 심한 상태였다. 기사가 나간 이후 에디슨과 테슬라는 공동 수상을 거부할 것이라는 얘기가 돌았고, 그해 노벨상은 다른 사람에게 돌아갔다. 게다가 1908년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한 가브리엘 리프만은 최초로 컬러사진을 만들어 노벨상을 받았는데 이게 오늘날 컬러사진의 원리와 전혀 다른 바람에 노벨위원회는 이후 발명에 대해서는 수상을 꺼리게 됐다.
발명가인 에디슨이 노벨상을 받지 못한 데는 이런 점도 작용했다는 해석이 있다. 말년에 에디슨은 테슬라와 사이가 틀어진 것을 후회하며 그를 존중하지 않았던 점을 뉘우쳤다고 한다.
테슬라는 뛰어난 천재였지만 특이한 성격으로 평생 독신으로 살며 1943년 뉴욕의 한 호텔에서 빚에 시달리다 쓸쓸히 숨을 거뒀다. 에디슨은 당대에 화려한 삶을 누렸지만 테슬라는 죽은 뒤에야 세상의 인정을 받았다.
오늘날 자기장의 세기를 나타내는 단위로 테슬라의 이름을 딴 T(테슬라)를 쓰는 것도 테슬라의 천재성을 기리기 위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