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 안쪽 마을을 향해 걷는 때는 농로 옆으로 맑은 도랑물이 함께했다. 둔덕에서 만난 마을사람들에게 ‘이효석’을 말해봤지만 아는 이가 드물었다. 뒤늦게 만나 중년 남자가 산 아래 외딴집으로 가는 길을 일러주었다. 도랑을 건너고 밭두렁길을 걸었다. 큰비 내린 뒷날이었던가. 구두 바닥에 자꾸 진흙이 달라붙었는데 도랑에는 흰 모래가 쓸리고 있었다. 솔숲 길을 돌아 외딴집으로 드는 때까지도 너른 밭에는 감자꽃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었다.
그 무렵에도 더러 찾아오는 이들은 있었던 모양이다. 효석의 옛터에 살고 있는 이가 방명록을 보여줬는데 공책 앞뒷면에 빽빽이 이름이 적혀 있었다. 마당 나무그늘에 앉아 감자꽃을 바라보며 담배를 피웠다. 뒷산 숲에서 뻐꾹새 소리가 들렸던가.
마당에서 혼자 사금파리를 갖고 노는 효석, 허리에 책보자기를 질끈 맨 채 꼬챙이 하나를 휘두르며 밭길을 걸어오는 어린 효석을 그려보는 일은 어렵지 않았다. 이 산골에 드리워지는 막막한 햇살과 바람은 내 유년에도 항상 마주했던 것. 하도 세상이 고요해, 하도 세상이 아득해 장독 뚜껑에 고인 빗물에 떨어진 송홧가루 한 알마저 지극정성으로 건져보던 그 어린 시절이 아닌가 말이다. 손톱 끝으로 아카시아 이파리를 훑고 있어도 기울 줄 모르던 햇살. 고요와 아득함, 그리움과 안타까움. 산골의 정적과 무량한 권태는 외롭고 감수성 예민한 아이에게는 천연적인 문학세계일 수밖에 없는 것. 작품은 그를 바탕으로 먼 훗날 새롭게 생산되게 마련이다.
이효석의 길, 봉평에서 대화까지
그 후로도 서너 해에 한 번꼴로 봉평의 그 집을 찾아가는 일이 생겼지만 더는 별다른 감흥을 갖지 못하는 여정은 일거리에 지나지 않았다. 왜 그대로 있음을 그대로 있질 못하게 하는가. 갈 때마다 바뀌는 그 터의 풍경을 보면서 내가 가지는 항변이었다. 감자밭을 죄 메밀밭으로 바꾼 것쯤은 이해가 간다. 가산공원 귀퉁이에 재현(?)해놓은 ‘충주집’ 운운의 술집들은 도대체 뭔가. 귀여운 장삿속이라면 정녕 귀여운 맛을 풍겨야 하고 풍속의 재현이라는 야무진 속셈이라면 봉평마을 전부를 1910년대쯤으로 돌려볼 일이다.
봉평마을은 이제 우리나라에서도 가장 유명한 문화답사지가 되었다. 효석의 소설 한 편 읽지 아니한 이들까지 관광버스를 타고 오는 명소가 된 것이다. 그리하여 이들의 편리와 재미를 위해 기막힌 건물과 조형물들이 늘어섰으며 그 사이 정겹던 밭두렁길은 대형 버스가 드나드는 포장길로 바뀌었고 적막하던 생가터에도 찻집이며 술집이 들어섰으며 이윽고 기념관까지 만들어졌다. 서구식 펜션에서 잠을 자고 허브마을에서 박하향에 잔뜩 취한 뒤에 작가의 생가터를 일별하고 기념관에 들러 흑백사진 몇 장을 보고 나오면서 일용의 양식처럼 ‘문화’를 섭취했다고 여기는 행태는 지극히 속물적인 것이다. 문학을 문학으로 만나지 않는 여하한 만남도 세속적 놀이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봉평에서 영동고속도로 장평인터체인지로 되돌아 나오는 길, 산과 골이 겹치는 이 어디쯤도 ‘메밀꽃 필 무렵’의 무대다. 봉평 장거리에서 술 한잔 걸친 뒤 대화장으로 이동하는 장돌뱅이들 즉 허생원과 조선달 그리고 동이가 걷는 길이 이쯤으로 상정돼 있기 때문이다.
…대화까지는 팔십 리의 밤길, 고개를 둘이나 넘고 개울 하나를 건너고 벌판과 산길을 걸어야 된다. 길은 지금 긴 산허리에 걸려 있다. 밤중을 지난 무렵인지 죽은 듯이 고요한 속에서 짐승 같은 달의 숨소리가 손에 잡히듯 들리며 콩 포기와 옥수수 잎새가 한층 달에 푸르게 젖었다. 산허리는 온통 잡히듯 메밀밭이어서 피기 시작한 꽃이 소금을 뿌린 듯이 흐뭇한 달빛에 숨이 막힐 지경이다. 붉은 대공이 향기 같이 애잔하고 나귀들의 걸음도 시원하다. 길은 좁은 까닭에 세 사람은 나귀를 타고 외줄로 늘어섰다. 방울소리가 시원스럽게 딸랑딸랑 메밀밭께로 흘러간다…
- 이효석의 ‘메밀꽃 필 무렵’중에서
아름다운 자연이 욕정을 쓰다듬고 욕정 끝에 남는 회한을 다스린다. 장터 술집 거리에서 허생원이 주모에게 마음이 끌린 동안 그의 늙은 노새는 암컷을 보고 욕심을 내다가 무안을 당했다. 장터 꼬맹이들까지 노새의 주책을 놀려댔다. 심기가 상한 허생원은 젊고 건장한 동이한테 몹쓸 소리를 한 찜찜한 기분이 남아 있다. 이 고약한 심경과 분위기는 ‘흐뭇한 달빛’과 이 달빛으로 조명되는 청신한 밤 풍경이 변화시키고 위무한다. 이 밤길, 나귀들의 걸음걸이가 시원하고 방울소리가 명랑한 것도 그 때문이다.
이효석, 1907년생이다. 여덟 살 때까지 봉평에서 자란 그는 초등학교에 들어갈 나이가 되자 마을에서 100리나 떨어진 군 소재지의 학교에 입학했다. 어린 나이에 그는 그때부터 평창에서 하숙생활을 했는데 봉평집을 오갈 때면 예사로 100여 리 길을 걸어 다녔다. 집에서 지금의 가산공원이 있는 봉평 본 마을까지가 10여 리, 봉평에서 장평까지가 20리다. 지금 찻길이 나 있는 노루목고개를 넘으면 장평 개울을 만난다. 장평에서 대화까지가 또 30리 길이다. 대화면의 대화거리가 곧 대화장터인데 이곳도 효석이 봉평과 평창을 오가며 거치던 길목이었다.
지금은 도중에 영동고속도로가 관통하고 있지만 봉평-장평-대화-평창을 잇는 오늘의 국도는 그 예전 어린 효석이 학교와 집을 오가며 걷던 길인 동시에 소설 속의 인물들이 걷던 길이다. 그 사이 도로가 말끔히 포장되고 주유소며 ‘가든’이 서 있다고 해서 달라질 산천이 아니다. 따라서 국도를 달리면서 이 어디쯤이 동이가 허생원을 업고 건너던 개울이구나, 요량도 해보고 여태도 옛 모습을 지닌 대화장터를 슬쩍 구경하고 나오는 것도 나그네 걸음에서 전혀 쓸모없는 것이 아니다.
목어(木魚)를 두드리다
졸음에 겨워
고오운 상좌 아이도
잠이 들었다
부처님은 말이 없이
웃으시는데
서역(西域) 만리(萬里)길
눈부신 노을 아래
모란이 진다.
- 조지훈 시 ‘고사(古寺)’ 전문
전나무 숲 너머 응달에는 아직도 무명 포대를 널어놓은 듯 잔설이 쌓여 있으니 볕 바른 절간 마당이라고 해서 하마나 모란이 필 턱이 없다.
지훈을 그리게 하는 월정사
1940년대 초 일제의 정치가 날로 포악해가던 때, 스무 살을 갓 넘긴 시인 조지훈은 오대산 월정사에 몸을 피해 잠시 심신을 자연과 부처에 의지했다. 스님도 아닌 이가 스님들에게 불교 경전을 강의하던 것도 이 무렵이었으며 솔잎 술을 담아 스님들을 유혹하던 때도 이 시기였다(수필집 ‘돌의 미학’). 젊은 의기를 분출할 수 있기는커녕 우리말로 시 한 줄 쓸 수 없는 절망의 시대에 붙잡아본 선(禪)의 세계는 그나마 약간의 위안이 되었다. 천재적인 하이틴이 제 빼어남을 자랑하듯이 화려현란하게 읊고 있는 초기 시 ‘고풍의상(古風衣裳)’이며 ‘승무(僧舞)’에 비하면 이 무렵에 쓴 ‘고사(古寺)’는 파격적으로 단정, 얌전하다. 짐짓 선시(禪詩) 투를 내면서 멋을 부리고 있기는 하나 예쁘게 봐줄 요량이면 얼마든지 예쁘게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월정사에 이르면 더럭 지훈이 그리워지는데 막상 절간에는 오래 머물지 못한다. 지극히 주관적인 느낌이지만 절의 품새에서 느껴지는 안온한 맛이 덜한 탓이다. 지세 때문인가, 가람의 배치 탓인가, 근래의 치장 덕인가. 나름으로 요량해보지만 까닭을 알지 못한다. 하여 전나무 숲을 지나 상원사로 가는 그 골짝 길을 곧장 오른다. 권세를 위해 사람도 많이 죽인 세조 임금. 제 몸에 생기는 오만 가지 병이 모두 그 탓인가 여기고 부처님을 찾는 심사에서는 제법 인간미가 느껴지기도 하는데 그래서 이 골짝에서 진물 흐르는 피부를 씻다가 동자 보살을 만났다는 설화도 적막한 이야기로 세간에 남는다.
산행을 하기로 한다. 이번에는 오대산 다섯 봉우리를 온전히 내 발로 디뎌보는 것이다. 그동안 월정사, 상원사를 거치는 나그네 걸음은 여러 차례였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남 따라 이름난 산천을 눈으로 더듬는 탐승의 범주를 벗어나지 못하는 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산에 들고서도 제대로 산을 보지 못하고 물을 따르면서도 물길을 헤아리지 못했다.
다섯 해 만에 다시 찾은 상원사 큰 도량인데 이 절의 모습도 예전과 판이하다. 돌계단 끝에는 전에 없던 전각이 위압적인 자세로 우뚝 서 있다. 산이 안온히 절간을 품고 절간이 산세의 자랑을 보탠다는 말은 이래서 옛말에 지나지 않는다. 되레 절간이 산을 다스리고 산을 내치는 형국이라면 지나친 말이 되는가. 한데 중화의 궁전 하나를 옮겨놓은 듯한 수덕사, 직지사를 보고 동학사, 설악 봉정암을 보고 나면 절간이 더 이상 산중 깊이 있어야 할 까닭을 알지 못한다고 한탄하는 환경론자들의 심정을 함께 헤아릴 만하다.
절을 내치고 고즈넉한 산길을 걷기 20여 분, 적멸보궁의 향불을 지키는 분수승(焚修僧)이 머무는 노전(爐殿)에 닿는다. 예전에는 이 또한 벼랑 끝의 제비집 모양으로 운치 있는 향각(香閣)이었을 터인데 이 계절에는 기도처를 넓힌다고 바위 절벽을 부수는 굴삭기의 굉음이 요란하다. 못 볼 것을 본 양 걸음을 재촉해 이른 곳, 오대산 중대(中臺)의 적멸보궁이다. 비로봉에서 흘러내린 혈맥을 타고 날렵히 앉은 팔작지붕의 기와채. 여기가 곧 부처님의 이마뼈에서 나온 사리가 봉안돼 있다는 법열의 처소다.
그 옛날 당나라에서 구법(求法) 행각을 하던 자장 스님은 청량산(오대산)에서 문수보살을 친견했다. 스님께 부처님의 금란가사와 발우를 전한 보살은 “그대의 나라 동북방 명주땅에도 오대산이 있으니 그곳에서 다시 나를 만날 수 있을 것이다”고 말했다. 신라에 돌아온 스님은 지금의 월정사터에 초옥을 짓고 기도를 올렸지만 날이 음산해 보살을 친견치 못해 대신 이곳에다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모셨다고 한다.
산 하나를 온전히 진성(眞聖)의 거처로 여기는 ‘오대산 신앙’은 이렇게 자장 스님에 의해 이 땅에 옮겨졌으며 삼국통일 뒤에 더욱 신비화 보편화되었다. 그러나 지금 보궁은 있지만 정확히 부처님의 사리가 어디에 모셔져 있는지를 아는 이 없는 바 이 또한 물상(物像)을 상징으로 환치시킬 줄 알았던 선인들의 지혜라고 아니 할 수 없다.
저곳 비로봉 아래 적멸보궁에 이르면
바람의 뿌리를 만날 수 있을까
삶의 근원으로부터 울려오는 비밀한
목소리 한 번 들을 수 있을까
옴마니반메훔, 옴마니반메훔
밑도 끝도 없이 들뜬 숨만 몰아쉬며
마음의 진신사리를 더듬어 보는 것이다
하산하는 사람들의 막막한 표정들을
애써 지우며 적멸보궁에 오르는 것이다
- 정해종 시 ‘적멸보궁에 무엇이 있길래’ 부분
시인이야 뭐라고 하든 춥고 바람 드센 날임에도 불구하고 맨땅에 머리를 조아리는 참배객들이 가득한 뜰에 서서 주위를 둘러보라. 불법과 풍수를 모르는 문외한이라고 해도 이 땅이 천하의 명당임은 절로 느껴 알 만하다. 휘어져 감겨 내려온 좌우 산맥은 말 그대로 좌청룡 우백호이며 한가운데 비로 주봉에서 도톰하니 흘러내린 산줄기 하나가 막 이마를 쳐드는 그 자리 정혈(正穴)에 보궁이 앉아 있는 것이다.
오대산에서 느끼는 향기로운 땅 기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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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의 향기, 땅의 기운을 몸으로 느껴 신앙의 정수처를 정한 1000년 전 선각의 놀라운 안목에 대한 탄성이 절로 날 수밖에 없다. 용이 여의주를 희롱하는 형국으로 알려진 이 명당의 실상은 사실 보궁을 돌아 나와 비로봉으로 오르는 등산로에서 거듭 되돌아보는 가운데 더욱 확연해진다.
길지(吉地)에서 저절로 체감하는 상서로운 땅기운으로 하여 가파른 비탈을 오르고 눈길에 미끄러지면서도 도무지 육신의 고단함이 느껴지지 않는 이런 뜻밖의 경험도 오대산의 깊은 품속에서나 가능한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