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여름날 대청마루에 발을 걸면 그늘이 드리워지고 바람은 시원하다. 바깥 사람들의 시선을 막아주면서 안쪽에서는 바깥 풍경을 구경할 수 있는 발은 한때 우리 생활에서 빠질 수 없는 용품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생활용품보다 귀한 예술품이 되었다. 통영에서 발을 만드는 염장(簾匠) 조대용은 아주 가는 대오리로 매우 섬세한 발을 만든다. 특히 아름다운 문양은 통영 발의 특징이자 한국 발의 특징이고 조대용의 특기다.
우리나라 발에 가장 자주 쓰이는 육각형 귀갑문과 그물코 문양을 넣어 짠 발.
重疊雲山露碧尖 겹겹 구름 산, 푸른 꼭대기가 뾰족 드러났다
夜前似聞行雨過 간밤 비 지나가는 소리 들은 듯한데
朝來爽氣滿虛 아침이 오니 상쾌한 기운 빈 처마에 가득하다
조선 중기 시인 석주(石洲) 권필(權)이 여름 새벽에 일어나 북쪽의 구름 덮인 천마산을 보기 위해 걷은 발은 성근 발이었다. 그러나 염장(簾匠) 조대용(趙大用· 61)이 짜는 발은 곱고 촘촘한 발이다. 그래서 옛 시인은 고운 보슬비가 내리는 광경을 ‘섬세한 발처럼 내린다[雨簾纖]’고도 했나 보다. 그 고운 발을 더운 여름날 창이나 방문, 마루에 걸어놓으면 햇볕을 가려 그늘을 만들면서 시원한 바람이 들어오고, 또 굳이 걷지 않아도 바깥 풍경까지 담아낼 수 있었다.
“발을 치면 안과 밖이 분명하게 구분되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차단되는 것은 아닙니다. 물론 발을 치면 밖에서는 어두운 실내가 잘 안 보이지만, 안에서는 상대적으로 밝은 바깥을 훤히 내다볼 수 있지요. 새색시나 부인네가 타는 좁은 가마가 답답해 보이지만, 가마에 발을 드리우면 안에 앉은 여인은 바깥 구경을 다 할 수 있었어요.”
가마에 치는 가로로 긴 모양의 가마발은 요즘으로 치면 자동차 창문의 색유리와 비슷하다 할 텐데, 색유리에 댈 게 아니다. 유리와 달리 발을 치면 바람도 통하고 바깥 소리도 다 들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듯 ‘경계’와 ‘소통’의 기능을 아울러 갖는 발의 장점 덕분에 수렴청정(垂簾聽政)도 가능했으리라. 궁궐의 여인은 자신의 얼굴은 드러내지 않으면서 정사(政事)를 논하는 대신들의 말을 들으며 그들의 얼굴 표정까지 하나하나 다 살필 수 있었을 테니.
이처럼 발은 프라이버시를 지키면서도 바깥을 볼 수 있어, 더운 날에도 방문을 활짝 열어놓기 곤란했던 옛 부인네들이나 선비들에게 매우 요긴했을 터다. 프라이버시를 보호할 수 있다는 점에서 오늘날에도 분명히 쓰임새가 있건만, 애석하게도 요즘 발을 사용하는 집은 거의 없다.
“가옥 구조가 아파트로 바뀐 것이 가장 큰 요인인 것 같습니다. 그래도 이곳 통영 부인네들은 눈이 높아서 발을 찾는 사람이 꽤 됐었는데, IMF 구제금융 때 발 구입이 확 줄더니 그 뒤로 세대가 바뀌면서 발을 사려는 사람이 거의 없어졌습니다.”
극소수를 제외하고 이제 발의 매력과 멋에 빠진 사람이 사라졌나 보다. 아니, 있지만 저렴한 중국 발을 손쉽게 사다 쓰지 섬세하면서도 묵직하고 우아한 우리 발은 까마득히 잊은 듯하다. 그래서 조대용의 발은 이제 일반 가정집 대신 박물관이나 전람회에 자주 내걸린다. 일본이나 미국에서 자주 초청을 받고, 파리 국제박람회에서도 전시회를 열었고, 서울 코엑스에서 현대미술 작가와 함께 공동작품을 만들어 전시회를 하는 등 그의 작품은 국제적인 명품으로 인정받고 있다. 하지만 그는 우리나라에서 발이 더 이상 일상적으로 사용되지 않는 점을 가장 안타까워한다.
나일론 실로 엮은 발을 출품하다
발로 엮을 대나무는 한겨울에 채취해 1년치 쓸 것을 마련해둔다. 작업에 들어갈 때 한 감씩 꺼내와 1mm 두께로 일일이 갈라야 한다.
“증조할아버지가 철종 임금님 때 무과에 급제했는데, 발을 손수 짜서 임금님께 진상해 큰 칭찬을 받았다고 합니다. 그때 증조할아버지가 짠 발은 문양을 넣지 않은 민짜 발에다 먹으로 희(喜)자를 쓴 것이라고 하니, 아마 소박했을 겁니다.”
집안 대대로 발을 짰다고 하나, 그렇다고 그의 집안이 발을 전문적으로 짜는 장인 집안은 아니다. 무관이었던 증조할아버지에 이어 할아버지는 면장을 지냈고, 아버지는 고향 광도면 면서기로 시작해 부면장으로 퇴임하기까지 평생 공무원 생활을 했다. 다만 옛사람들이 농사지으며 일상 생활도구를 손수 만들어 쓰던 전통대로 발도 직접 짰던 것뿐이다. 한 가지 다른 점은, 그의 집안 어른들은 솜씨가 뛰어났던 것이다.
“할아버지도 아버지도 발을 잘 짜셨습니다. 특히 아버지는 퇴직하시고 사촌누나의 부탁으로 자형이 다니던 은행 지점장에게 선물할 발을 짜주셨는데, 이를 본 부산 사람들이 주문을 해올 정도였지요.”
솜씨도 내림을 하는 것인지 그 역시 딱히 짜는 법을 배운 적도 없건만 초등학교 시절에 이미 문양 없는 부분은 어렵지 않게 짤 실력이 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발 짜는 일이 평생 숙업이 되리라고는 그 자신도 생각하지 못했던 것 같다.
“군대 다녀오고 나서 그저 용돈벌이 삼아 발을 짰습니다. 당시 부인네들은 계를 많이 했는데 계원들이 열 개, 스무 개씩 주문하곤 했으니 용돈벌이로는 꽤 괜찮은 편이었지요. 물론 ‘작품’을 만든다는 의식도 없었습니다. 지금처럼 명주실로 짜는 것도 아니고 나일론 실로 엮은 것이었어요. 나일론실이 튼튼하니까요.”
귀여운 명주 솜털을 단 가마발. 시원한 청색 계통 대오리에 하얀 귀갑문을 넣어 짰다.
“그리고 4년 뒤 통영 나전장 송방웅 선생님이 서울에 갔다 와서 전하는 말씀이, 전승공예대전 관계자 분이 ‘통영 공예품으로 나전(자개공예)이나 소목(목가구)은 많이 출품되는데, 발은 단 한 번 올라오고서는 그 뒤로 도통 올라오지 않으니 통영에 가면 발 하시는 분에게 말해서 앞으로 꼭 출품하도록 해달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그 말을 들은 조대용은 비로소 제대로 된 ‘작품’을 해야겠다는 결심을 했다. 그러나 전승공예대전 출품 날짜까지는 두 달밖에 남지 않아, 밀린 주문품을 분주히 만들면서 틈틈이 시간을 내 작품을 만들었다. 그런데 그때 낸 작품은 평소 만들던 대로 나일론 실로 엮은 발이었다. 그런데도 장려상을 받았다.
“출품작 규정 사항을 제대로 알아보지도 못한 채, 전통 기법대로 엮어야 한다는 사실도 의식하지 못하고 만들었던 거죠. 물론 이듬해는 제대로 만들어 출품했습니다.”
이듬해인 1983년 그가 받은 상은 한국문화재보호협회 이사장상이었다. 상도 큰 상이었지만, 이로써 그의 발 작업은 큰 전환을 맞게 된다. 이제 발 작업은 단순한 용돈벌이가 아니라 진지한 작품 활동이 되었으며, 나아가 전통을 잇는다는 의식과 책임감까지 그에게 가져다주었다. 이후 그는 오로지 전통 기법 그대로 발을 만들고 연구하는 일에만 매달려 살게 됐다.
예용해 선생이 재발견한 장인의 세계
그런데 그때 통영 발을 잊지 않고 출품하라고 채근해, 젊은 조대용이 뒷날 무형문화재가 되는 계기를 마련해준 이는 누구였을까? 바로 예용해 씨였다. 한국일보 논설위원으로 활동하던 예용해 씨는 기자 시절 전국을 돌아다니며 우리 미술과 전통공예품을 생산해내는 장인들을 발굴하고, 그들을 ‘인간문화재’로 승격시킨 주인공이다.
“지금도 흔히 인간문화재라고 부르지만 정식 명칭은 ‘무형문화재 기능[또는 예능] 보유자’입니다. 하지만 처음에는 인간문화재라고 불렀고, 전승공예대전도 인간문화재 공예작품 공모전이라고 했어요. 그때 예인과 장인을 ‘인간문화재’로 명명하게 되면서 예인과 장인을 보는 사람들의 시각이 달라졌고, 우리 전통문화에 대한 인식도 한 단계 발전한 계기가 되었던 것만은 분명합니다.”
전승공예대전에 처음 출품한 1982년 이후 14년 동안 그는 무려 열한 번이나 상을 탔는데, 1990년에 문화부장관상, 그리고 1995년 대통령상을 수상함으로써 화려한 수상경력에 정점을 찍었다. 그리고 1992년에는 중요무형문화재로도 인정받았다. 중요무형문화재는 지방무형문화재와 달리 국가가 인정하는 무형문화재로서, 문화부장관상 이상을 수상한 사람만 지원할 자격이 있다. 그만큼 보존할 가치가 높은 분야에서 뛰어난 솜씨를 가져야만 가능하다.
국가가 인정하고 보호하는 귀한 기능을 가진 인간문화재로 인정받았지만, 그는 불만이 아주 없지 않다.
“유홍준 전 문화재청장이 텔레비전에 나와 경회루를 소개하는 프로그램을 본 적이 있습니다. 건축물로서 경회루의 훌륭한 점과 이를 단기간에 지은 옛사람들의 솜씨를 자랑스럽게 알려주어 반가웠지만, 그 누각에 당연히 걸려 있었을 발에 대해서는 아무 언급이 없어 아쉬웠습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의 문화재에 대한 인식은 유형의 유산에 치중해 있는 것 같아요. 그래서 건물을 보호하고 보수하는 데 주력하는데, 그것도 물론 중요하지만 그 건축물을 어떻게 치장하고 사용했는지, 그 안에서 이루어졌던 문화도 함께 소개되어야 합니다.”
예전에는 웬만한 다락[루·樓]에는 발을 걸었던 모양이다. 선조들이 지은 한시에 ‘樓外山光翠滿簾(다락 저편 산 빛은 발을 비취색으로 가득 채운다)’는 등의 시구가 종종 등장하는 것을 보면.
“사대부들이 정자나 다락집에서 기생을 끼고 술자리를 여는데, 지나가는 사람이 다 보도록 했겠습니까? 성근 갈대발이라도 사방에 걸어두고 연회를 즐겼을 겁니다. 발을 걸면 야외 정자에서도 오붓한 분위기를 낼 수 있으니 묘한 정취도 있었을 테고요.”
이 정도 되면 발은 단지 그늘을 드리우고 프라이버시를 보장하는 도구가 아니라 적절한 조명효과까지 발휘하는 예술품이 된다. 더욱이 바깥에 녹음이 우거졌으면 발은 풀빛으로 물들고 노을이 지면 홍조를 띠었을 테니, 그 내밀한 공간을 시시각각 물들이는 은은한 색감은 참으로 사람의 흥취를 돋웠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발이 등장하는 옛 시가 많은데, 추사 김정희와 대원군도 발에 관한 시를 남겼다고 한다.
세종대왕 능과 종묘의 발을 복원하다
발은 정자나 다락에도 걸었지만 양반집 안방마님의 방문부터 서민의 창문에까지 두루 걸렸고 또 족자용으로, 또는 붓을 싸는 데도 사용됐다. 그리고 곡식이나 채소를 말리는 데 쓰이는 발(자리)도 있다. 그렇다고 발이 일상용품이었던 것만은 아니다. 임금의 능에 있는 정자각과 종묘에도 발을 걸었다. 휘장이 위엄과 예식을 상징하듯 발 역시 그런 제의가 이루어지는 곳에 꼭 필요한 물품이었다.
“문화재청에서 무형문화재 관리를 맡았던 이가 세종대왕 능인 영릉의 관리소장으로 부임해갔는데, 하루는 제게 연락을 해왔어요. 제사를 지내는 영릉 정자각에 달 발을 짜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정자각의 앞문은 사람이 출입하는 곳이지만 신위를 모셔둔 뒤쪽에 있는 문은 신문(神門)이라고 한다. 이 신문에는 본래 발[신렴·神簾]을 걸어두도록 되어 있었다. 그래야 제사 지내는 곳의 위엄과 엄숙함이 살아나기 때문이다.
“실제로 신문의 위쪽 문틀에는 축(軸·굴대)이 있고, 문지방에는 고리도 있습니다. 신문에 거는 발은 무게가 15㎏은 좋이 나가니, 그런 장치가 필요한 거지요.”
그가 제작한 거대한 발을 걸고 있자니, 영릉에서 일하던 이가 와서 보고 하는 말이 “20년 동안 문틀 위에 달린 저게 무엇인가 했는데, 바로 발을 다는 장치였군요!”라고 했다.
언젠가 유인촌 당시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이 매물도에 들어가기 위해 통영을 찾은 적이 있는데, 그때 통영의 문화 관계 종사자들과 간담회 자리가 열렸다. 그는 이 자리에서 장관에게 한 가지 건의를 했다.
“종묘가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었는데, 종묘 안에 제대로 된 발을 설치하면 금상첨화일 거라고 했습니다. 종묘에는 발이 설치돼 있지만 오래되고 관리도 제대로 되지 않아 많이 훼손돼 있었거든요.”
그는 7,8년 전 궁중유물전시관에서 신렴이 필요하다는 주문을 받고 종묘를 드나들며 사당에 걸린 신렴을 관찰하는 기회를 가졌는데, 많은 발이 축 처져 있는데다 평소 문을 닫아두어 습기로 발 밑 부분이 삭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종묘에 설치하는 발은 신렴도 가로가 1m50㎝가 넘고, 신위 사이를 구분하는 발은 길이가 2m가 넘으니 몇 백 년간 걸려 있던 그 큰 발들이 처지고 망가지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유 장관에게 했던 제의가 받아들여졌는지 다행히 예산안이 통과되어 지난해 종묘의 발을 새로 제작하게 되었어요. 모두 100개가 필요한데, 제가 옻을 타는 체질이라(종묘의 발은 습기를 방지하기 위해 옻칠한 대오리를 사용한다) 모형으로 스무 개만 만들고 나머지는 다른 이들이 똑같이 만들었습니다.”
종묘 사당은 정전 19실에 49위가, 영령전 16실에 34위가 모셔져 있다. 각 신위 뒤편에 신렴이 걸려 있고, 신위와 신위 사이에도 발을 쳐서 공간을 구분하고 있다. 또 사람이 출입하는 문에도 발을 치므로 발이 100개나 필요하다. 이번에 새로 만든 발은 이전 발과 몇 가지 차이가 있다.
“종묘의 발은 시대별로 차이가 있지만 본래 문양은 하나도 안 들어갔습니다. 이번에 문양을 넣느냐 마느냐로 문화재청과 이씨종친회 사이에 의견이 갈렸는데 결국 귀갑문을 넣기로 했습니다.”
붉은 옻칠한 대에 노란색 실로 귀갑문을 넣고 테두리를 노란색으로 장식한 종묘의 발은 강한 원색의 생기와 우아한 자태를 뽐낸다.
“남한에만 능이 40기가 있다고 합니다. 제가 서울 올라가서 선릉을 찾은 적이 있는데, 선릉의 정자각에도 역시 축이 달려 있더군요. 이제 건물만 덩그러니 보존할 게 아니라, 내부도 제대로 갖추어야 할 때가 되었습니다.”
바닷가에서 자란 부드럽고 질긴 시누대로 만든 통영 발의 매력
명주실이 감긴 고들개가 주렁주렁 매달린 발틀. 가는 대오리를 명주실로 일일이 엮는데, 각 고들개에 감긴 실이 제자리를 찾아가야 멋진 문양이 나온다.
“가는 대오리에 명주실도 직접 꼬고 염색해 쓰면 손이 많이 가는 고급품을 만들 수 있고, 굵은 대오리에 무명실로 툭툭하게 엮으면 또 그런대로 질박한 맛이 있습니다. 예전에는 대를 적당히 쪼개서 대충 실로 엮어 편하게 쓰기도 했고요. 아예 갈대를 쓰면 쪼개고 다듬고 할 것 없이 갈대 줄기 그대로 발을 엮을 수도 있습니다.”
예전에 발은 오늘날 커튼이나 블라인드보다 더 널리 쓰였으므로 아주 섬세한 것부터 갈대를 얼기설기 엮은 성근 발까지 종류도 다양했다. 흔히 발을 한자말로 ‘주렴(珠簾)’이라고 하지만, 주렴은 구슬이나 대나무로 엮은 발을 통칭한 것이다. 우리나라는 전통적으로 대나무를 주로 썼으므로 엄밀히 말해 ‘대발’인 ‘염(簾)’만 있는 셈이다. 하지만 대나무만 발의 재료였던 것은 아니다. 갈대로 짠 갈대발(노렴(蘆簾)이라고도 한다)도 있고, 겨릅(삼 줄기)으로 만든 겨릅발, 그리고 달풀로 짠 달발도 있다. 하지만 튼튼하고 아름다운 발은 역시 대나무로 만든 것이어서 대발이 발의 대명사가 되었다.
우리나라에서 대나무 발은 죽세공품으로 유명한 담양을 비롯해 여러 곳에서 만들어왔다. 통영 대발이 보통 대나무 발과 다른 점은 왕대를 쓰지 않고 통영 바닷가에서 나는 시누대(시릿대)를 쓰는 점이다.
“시누대는 왕대보다 키도 작고 두께도 새끼손가락 정도로 가늘죠. 그래서 발을 짜놓으면 대 마디가 크게 두드러지지 않아 좋습니다. 또 굵기는 가늘어도 세포 수는 왕대와 같아서 그만큼 질기고 튼튼한데다 부드럽기도 해서 충격에도 잘 견디지요. 하지만 워낙 촘촘하게 자라는 탓에 서로 부대껴 흠이 많이 생깁니다. 그래서 발을 짜놓으면 때깔이 왕대만 못하죠.”
그의 작품에 달린 이름표. 중요무형문화재 114호 염장 조대용의 작품임을 확인해준다.
“대나무 밭을 찾아다니다 보니 얼마 전 고성 쪽에 시누대가 자라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찾아가봤습니다. 시누대라고 다 쓸 수 있는 것은 아니고, 발에 적합한 시누대를 찾는 것이 중요한데, 과연 쓸 만한 시누대가 있더군요. 그래서 지금은 시누대와 왕대 둘 다 쓰고 있습니다.”
가는 대오리 만드느라 지문은 닳고
그는 3년 정도 자란 대나무 밭을 찾아다니는데, 대나무는 첫해에 훌쩍 다 자란 이후로는 속으로 여물기만 하므로 3년은 되어야 적당히 단단해진다.
“새로 난 대나무가 보기에는 멋져 보이지만 그런 대를 짜개보면 속이 물렁하고 찐득해서 발을 짤 수가 없습니다. 발감으로는 3년 된 대나무가 가장 알맞습니다.”
발에 쓸 대나무는 겨울철에 채취한다. 집 지을 때도 겨울철에 벌목한 목재를 쓰는 것과 마찬가지로, 대나무도 일단 물이 오른 다음에 베어내면 습기로 좀이 슬게 되므로 건조한 12월과 1월에 1년치 재료를 다 마련해둔다. 그가 한 해 준비하는 양은 발 열 감 정도다.
잘라온 대는 곧장 겉껍질을 칼로 얇게 벗겨낸다. 그러지 않고 오래 두면 까맣게 변하고 잘 벗겨지지도 않기 때문이다. 박피한 대나무를 네 쪽 내지 여덟 쪽(쪽살내기) 낸 다음 속살을 발라내고 밤에 서리를 맞히고 낮에 햇볕에 쪼여가며 한 달 보름간 말리는데, 그 과정 동안 대나무는 연한 미색으로 바래간다. 잘 바랜 대쪽을 보관해두었다가 발 짜는 작업에 들어가면 한 감씩 꺼내 와서 1㎜ 두께로 자른다(잔살내기). 그러나 조대용의 발은 1㎜ 굵기 대오리로 충분치 않다. 더 가는 대오리를 얻기 위해서는 쇠판에 못으로 낸 구멍 사이로 대오리를 훑어내는 고무쇠 작업(조름질)을 거쳐야 한다.
“발 만드는 과정에서 이 작업이 제일 힘들어요. 큰 구멍을 한번 통과해 깎이면 지름 0.8㎜ 정도 되고 두 번째 구멍을 통과하면 0.7㎜, 세 번째 훑어내야 0.6㎜의 가는 대오리를 얻을 수 있거든요. 지금은 쇠판을 단단히 붙들어주는 무거운 틀이 있지만 예전에는 고무쇠 작업을 내 힘으로만 했기 때문에 더 힘들었습니다.”
발 하나를 짜려면 가는 대오리가 적어도 1800개 내지 2000개가 필요하므로 한 대오리당 세 번씩 철판에 통과시키면 6000번 가까이 손으로 잡아당겨야 하는 셈이다. 그래서 그의 엄지와 검지는 지문이 다 닳다시피 했다.
이렇게 마련한 대오리 2000가닥과 고운 명주실로 발을 엮는데, 문양을 넣어 큰 발을 엮어 완성하기까지 100일이 걸린다. 그렇게 만든 발 한 점 가격은 800만 원 선. 대쪽을 손질하고 말리는 과정은 빼고서라도 잔살내기부터 완성하기까지 들어가는 100일의 시간과 힘든 공정을 감안하면 결코 비싼 편이 아니다. 모든 과정이 일일이 손으로 이뤄진, 세상에서 ‘단 하나의 작품’에 대한 가격치고는 오히려 낮은 편이라고 하겠다.
500가닥 실로 만든 문양은 보일락 말락
두께 1㎜짜리 대오리를 쇠판 구멍 사이로 세 번 훑어내면 지름 0.6㎜의 가는 대오리를 얻을 수 있다. 구멍에서 뽑을 때 손가락 힘을 써야 하므로 그의 지문은 닳고 말았다.
조름질이 육체적으로 힘든 작업이라면, 발에 문양을 섞어가며 짜는 작업은 정신력이 필요한 작업이다. 너비가 1m가 넘는 발에 문양이나 글자를 넣으려면 수많은 실을 제자리에 짜 넣어야 하기 때문이다. 긴 발틀에 실을 감은 작은 실패 모양의 고동(고들개)을 매달아 대오리를 하나씩 엮어 이어가는데, 만약 복잡한 문양을 넣는다면 많게는 500개가 넘는 고동을 발틀에 주렁주렁 달아야 한다. 그 500개의 고동에 감긴 실은 그가 도안한 문양대로 제 길을 찾아가야 한다.
“좀 까다로운 문양을 넣다보면 자칫 길을 잃고 헤맬 수가 있어요. 그러면 한참 짜던 발을 풀어 다시 짜야 하는 경우도 생기게 되지요. 문양이 안 들어가면 발 짜기는 사실 아주 쉽습니다.”
그의 장기는 바로 아름다운 문양이다. 가령 발에 자주 쓰는 쌍 희(喜)자 문양이나 아(亞)자 문양을 넣을 때도 그 글자를 이루는 획을 가까이 들여다보면, 획을 육각형의 귀갑문이나 그물코 문양으로 채운다. 그러니 전체로 보면 글자가 한 자 크게 들어가 있는 모양이지만, 그 글자를 이루는 획은 무수한 작은 문양으로 이루어진 것을 알 수 있다. 말하자면 이중의 문양인 셈이다.
“통영 발은 다른 지방 발과 달리 문양이 차지하는 비중이 높습니다. 크기도 크고, 글자 문양의 경우 획도 굵은 편이고요.”
그래서 통영 발은 문양이 발 전체에 고루 퍼져 있는 인상을 준다. 그렇다고 문양이 눈에 확 띄는 것은 아니다. 때로 선명한 색깔로 문양이 돋보이게 짜기도 하지만, 대개는 발 색깔과 같은 계열 색깔의 명주실로 문양을 넣기 때문에 문양은 발 속에 숨어 있다. 언뜻 눈에 띄지 않는 문양은 그러나 햇빛이 비치는 각도에 따라 은은하게 나타났다 사라지곤 한다. 그래서 통영 발은 베일을 쓴 여인처럼 우아하고 신비롭다.
그가 가장 많이 쓰는 문양은 거북등딱지 무늬를 표현한 육각형의 귀갑문이다. 우리나라 발은 그물코 모양의 고문(·#53698;文)과 함께 귀갑문이 특히 많다.
“오래 사는 거북은 고대부터 신성한 영물로 생각해서 장식에 귀갑문을 많이 써왔습니다. 또 육각형이 가장 신비하고 완벽한 도형이라는 말도 있지 않습니까.”
사실 육각형은 공간을 가장 경제적으로 이용할 수 있는 구조다. 문양을 만들려면 계속 이어가야 하는데, 삼각형이나 사각형도 연속 문양을 만들 수 있지만 결속력이 육각형만 못하다. 그러니 육각형 문양을 넣으면 가장 적은 실로 가장 튼튼하게 대오리를 이어갈 수 있게 된다. 또한 미적인 면에서도 삼각형이나 사각형보다 다채롭고 아름답다.
사실 다양한 문양을 넣는 것은 한국 발의 특징이기도 하다.
“중국산 발은 대오리가 얇고 납작합니다. 그래서 걸어두면 종잇장같이 바람에 펄럭거리게 되지요. 우리처럼 문양을 넣어 짜지 않고, 위에 색을 칠하거나 그림을 그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일본 발은 대가 툭툭한 대를 써서 두꺼워요. 문양도 없이 실을 한두 줄 넣는 정도지요.”
또 우리 발은 펄럭이는 중국 발이나 곧장 수직으로 내려오는 일본 발과 달리, 걸어두면 가운데가 살짝 부풀고 테두리는 문틀을 빈틈없이 덮는다. 가는 대오리로 엮었기 때문에 자연히 그런 굴곡이 생긴 것인데, 그래서 벌레들도 잘 들어오지 못한다. 우리 발은 방충 기능까지 갖추고 있는 것이다. 일제강점기 조선 미술품을 사랑했던 일본 학자이자 수집가였던 야나기 무네요시는 조선의 미술품은 세련된 아름다움보다 투박하고 고졸한 미(美)가 뛰어나다고 했지만, 진짜 우리 공예품은 섬세함과 치밀함, 과학적인 지혜가 더 돋보인다. 우리가 가는 대오리로 문양을 넣어가며 힘들게 발을 짠 것은 미적으로 보아도 과학적으로 보아도 매우 치밀하게 계산된 뛰어난 선택이었다.
명품을 갖기 위해 필요한 것은
그는 일본에 자주 초청되어 가곤 하는데, 발을 짜는 장인 입장에서 보면 일본의 환경이 부러울 만하다.
“일본은 아직도 발을 많이 사용합니다. 대개 중국에서 발을 제작해 들여와 테두리를 일본식으로 장식해 판매하는데, 일본 국내에만도 발 공장이 70여 곳이나 된다고 합니다.”
일본은 신사(神社)도 많은데다 신주단지를 모시는 곳에는 늘 발을 걸어두고 있고, 고급 식당이나 호텔 등에도 발을 장식용으로 많이 건다. 심지어 사극에도 발이 자주 등장해 일본 특유의 분위기를 한껏 살린다. 하기는 그도 지난해 사극을 제작하는 측에서 발을 협찬해달라는 부탁을 받은 적이 있다.
“고민을 했는데…. 사극에는 격한 장면이 많이 등장하니 아무래도 훼손될 우려가 있어 거절했습니다. 그쪽에서야 책임지겠다고 했지만, 만드는 사람 입장에서는 두 번 다시 같은 발을 만들 수 없으니 자칫 잘못되지 않을까 조심스러워질 수밖에 없어요. 나중에 그 사극에서 공주와 젊은 선생 사이에 쳐진 발을 보니 중국 발이더군요.”
수공예품을 애호하는 풍토나 장인에 대한 예우도 일본은 우리보다 한참 앞서 있다.
“나고야 시에서 한국 공예품을 소개하는 축제를 열어 민속촌 같은 데 가봤는데, 일본 사람들은 수공예품을 무척 아끼더군요. 손으로 만든 대나무 가방을 1000만 원씩 주고 살 정도로 명품에 대한 가치를 잘 안다고 할까요?”
또 도쿄 한국문화원을 개원할 때도 초청받아 간 적이 있는데, 그때 일본 장인들과 함께 밥을 먹는 자리에 문화재를 보수하는 회사의 사장과 임원들이 찾아왔다고 한다. 그들은 장인들이 식사하는 동안 내내 옆에 무릎 꿇고 앉아 질문을 했다고 한다.
“그들의 예의 바른 태도도 인상적이었지만 무엇보다 문화재를 아끼는 마음과 그런 일에 종사하는 자신들에 대한 자부심, 그것이 더 부러웠습니다.”
아니 그가 진짜로 부러워하는 것은 어딜 가나 걸려 있는 발이었을 것이다. 식당에도 찻집에도, 그리고 무엇보다 일반 가정집에서도 늘 발을 쓰는 그 풍속이 부러웠을 것이다. 명품을 만들어도 잘 알아주지 않고 써주지 않는 우리 발의 앞날을 생각하면 더욱 그랬을 것이다.
“지금은 발을 짜서 생활이 제대로 안되니 젊은이들에게 이 일을 하라고 말하기도 힘들어요. 그렇다고 제 대에서 이 전통이 끊어지게 할 수 없어서 다른 일 하던 작은아들을 겨우 설득해서 가르치고 있지만, 더 많은 장인이 나와야 합니다.”
그의 아들 조영(趙英·32) 씨는 오랜 전수장학생 시기를 거쳐 막 이수자가 되었다. 종묘의 발 작업에도 참가한 조영 씨는 이제 아버지를 대신해 여러 시연회에 나서고 있다.
“전통적으로 통영은 풍요로운 고장이었습니다. 조선시대 300여 년간 삼도수군통제영이 있던 곳이어서 물자가 풍부하고 돈이 몰렸어요. 그래서 ‘외지 사람들은 통영에서 돈 자랑하지 마라’ ‘통영에 들어오려면 말에서 내려 걸어서 오라’는 말도 있습니다. 외지 사람이 와서 ‘에헴!’ 큰기침하기 힘들 만큼 통영이 잘살았던 것이죠.”
통영 사람의 부와 자존심 덕택에 통영은 우리나라에서 전통 수공업이 그래도 가장 많이 살아남은 고장이다. 갓과 나전, 소반, 두석(경칩 등 가구에 붙이는 쇠붙이 장식), 부채 등 통영 12공방은 통제영에 소속되어 여러 가지 기물을 만들어냈고, 이곳에서 만든 부채는 서울에서 몇 백 개씩 주문이 들어올 정도로 품질이 좋았다고 한다. 그러나 지금은 12공방 중 일곱 개가 사라졌고, 가장 잘나가는 나전도 뇌물금지법이 시행되면서 선물용 보석함을 찾는 수요가 줄어 힘들 정도니 다른 분야는 말할 것도 없다. 조대용의 집안 역시 굴도 까고 한때 세탁소도 하는 등 아내가 부업을 해야 했다.
통영은 지금 삼도수군통제영을 한창 복원 중이다. 통제영 복원계획도를 보면 12공방도 마련돼 있다. 예전에는 군수물자를 만드는 공방이 통제영 안에 있었기 때문이다. 복원한 12공방은 장인들이 진짜 작업할 수 있도록 꾸밀 계획이라고 한다. 아마 그를 위한 자리도 마련될 듯하다.
“발은 전통적인 12공방에는 들어가지 않습니다. 그러나 ‘경국대전’에 보면 서울의 내공방에 염장이 12명이나 소속돼 있는 걸로 나와 있어요. 이런 근거로 저도 무형문화재가 될 수 있었지요. 통영 12공방 중 다섯 개 분야는 무형문화재가 됐지만, 갓 테두리를 만드는 양태와 동고리(생활용품을 담는 동글납작한 상자), 부채 등 맥이 끊긴 일곱 공방이 다 대나무를 다루는 분야예요. 이를 대신해 발이 들어갈지도 모르겠습니다.”
더러는 맥이 끊기고 더러는 안간힘을 쓰며 버티고 있다. 우리 고유의 명품이 세월에, 시속(時俗)에 휩쓸려 사라지는 것은 안타깝다. 부와 자존심을 가진 사람이 명품을 즐긴다고 한다. 우리에게 부족한 것은 무엇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