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오 새누리당 의원은 최근 대선 출마를 선언하면서 4년 중임제 개헌을 공약으로 내걸었다.
우리 헌법은 1948년 7월 17일 제정된 이래 4·19혁명, 유신헌법, 6·29선언 등의 고단한 역사의 굴곡과 함께 9차례에 걸쳐 개정된 10번째 헌법이다. 마지막 헌법 개정이 1987년 10월이었으니 현행 헌법은 25년의 수명을 누리고 있다. 그 이전의 헌법들이 평균 4년 남짓 지속된 것에 비하면 장수를 누리는 셈이다.
현재 정치권의 헌법 개정 논의는 대통령 임기를 5년 단임제에서 4년 중임제로 하는 등의 정치체제 변경에 집중되어 있다. 그러나 정치권은 자신들의 직접적 이해관계가 걸린 정치체제뿐 아니라 국민의 기본권을 정하는 내용에 대해서도 심도 있게 논의해야 할 것이다.
최초의 살아 있는 헌법
서구 국가는 국민의 힘에 의해 왕정에서 공화정으로 넘어간 역사적 경험을 가지고 있다. 이와 달리 우리 국민은 일제에 의해 조선왕정이 몰락하고 일제 패망으로 준비 없이 공화정을 시작하게 됐다. 이런 배경 때문에 국민은 헌법의 제정에 거의 참여할 수 없었다. 상위의 몇몇 사람에 의해 만들어진 제헌헌법은 그 정신과 내용에서 국민의 생활과 유리된 채 흘러갔다. 게다가 수십 년간 집권자들이 헌법과 법률을 초월한 통치를 일삼는 바람에 국민에게 헌법은 ‘공자님 말씀’과 같을 뿐인 냉소와 무관심의 대상이었다.
그런데 현행 헌법은 이 헌법을 근거로 해 1988년 출범한 헌법재판소의 활발한 활동으로 인해 처음으로 국민적 주목을 받는 헌법이 됐다. 헌법재판소는 5·18특별법에 대해 합헌결정을 내림으로써 전두환 전 대통령을 무기징역형으로 처벌할 수 있는 터전을 닦았다. 탄핵소추가 의결되어 직무가 정지되어 있던 노무현 전 대통령을 다시 대통령 자리로 돌려보내기도 했다. 또한 행정수도 이전을 막아내기도 했다. 이처럼 헌법재판소는 현대 정치사에서 손꼽을 만큼 중요한 정치적 결정을 해왔다.
크고 굵직한 사건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재학생에게 과외 수업을 금지한 학원의 설립 및 운영에 관한 법률에 대해 위헌결정을 내림으로써 오늘날 대치동으로 대표되는 사교육 전성시대의 발판을 마련한 것도 헌법재판소였다. 백화점 셔틀버스 운행을 금지한 법률을 합헌으로 결정하기도 했다. 덕분에 백화점 세일기간만 되면 대형 백화점 주위 도로가 승용차로 몸살을 앓고 있다. 헌법재판소는 헌법 규정을 토대로 국민 개개인의 피부에 직접 와 닿는 변화를 끊임없이 만들어 온 것이 사실이다.
이런 왕성한 활동 덕분에 그전까지 액자에 걸려 있기만 했던 헌법이 국민 생활에 직접 영향을 미치는, 마치 법전을 뚫고 나와 움직이는 ‘살아 있는 헌법’이 됐다.
한미 통상마찰이 심하던 10여 년 전 언론에는 수퍼301조라는 미국 통상법 조항이 자주 언급됐다. 국민은 반복학습으로 인해 먼 나라 미국의 통상법 조항번호를 암기하게 되는 희한한 일이 벌어졌다. 또 미국에서는 총기난사사건이 벌어질 때마다 총기 소지를 금지해야 하는지에 대한 논쟁이 벌어지곤 했다. 이를 지켜보다 미국 수정헌법 제2조가 무기 소지 권리를 보장하고 있다는 것도 자연스레 알게 됐다.
이렇게 미국의 헌법이나 통상법은 잘 알고 있으면서 정작 우리 헌법에 대한 지식은 의외로 얕은 경우가 많다. 국민 중 ‘대한민국 헌법 제1조는?’이라는 퀴즈의 정답을 맞힐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헌법을 한 번이라도 읽어보았거나 헌법의 기본권 규정 중 하나라도 외우고 있는 사람은 또 얼마나 될까. 필자의 경험에 의하면 국민의 10%가 안 될 것으로 보인다. 반면 ‘국민의 4대 의무 중 아는 것 두 개만 쓰라’는 문제가 나온다면 절반 이상이 답을 할 수 있을 것이다.
교육과 근로는 권리다
사람은 보통 자신에게 부담이 되는 의무보다는 자신에게 이익이 되는 권리에 더 관심을 두게 마련이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우리는 헌법상 권리는 잘 모르면서 헌법상 의무는 잘 안다. 이렇게 된 것은 우리 책임이 아니다. 학교가 그렇게 가르쳐왔기 때문이다. 교과서 저자의 손을 타지 않은 상태의 우리 헌법 원문을 보는 것은 그래서 의미가 있다.
우리 헌법은 전문과 본문의 130개 조항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 중 제10조부터 제39조까지 30개의 조문이 모든 국민에게 보장되는 기본권과 의무에 관한 부분이다. 28개 조문이 권리를 규정하고 있다. 순수 의무를 규정한 조항은 국방, 납세의 의무 두 개뿐이다. 학교에서는 교육의 의무와 근로의 의무도 가르친다. 그러나 교육의 의무와 근로의 의무의 경우 헌법은 교육받을 권리와 일할 권리를 먼저 정하고 있다. 이런 사실을 아는 국민은 많지 않을 것이다.
나는 군사정권 말기 헌법을 처음 접했는데 가장 인상적이던 조항은 제10조였다. 제10조는 “모든 국민은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가지며,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가진다. 국가는 개인이 가지는 불가침의 기본적 인권을 확인하고 이를 보장할 의무를 진다”라고 되어 있다.
부자나 권력자만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갖는 것이 아니라 가난한 사람, 실직자, 심지어 데모를 하다 체포된 피의자도 국민이므로 이들에게도 ‘아무도 침해할 수 없는’ 기본적 인권이 있고, 국가는 이들의 인권을 보장할 의무를 지는 것이다! 경찰조사를 받으며 고문을 당하기도 하고 성추행까지 당하는 소식을 들어야 했던 그 시절 제10조는 복음이었다.
또한 헌법은 모든 국민은 인간다운 생활을 할 권리를 가지고(제34조 ①), 모든 국민은 건강하고 쾌적한 환경에서 생활할 권리를 가진다(제35조 ①)고 규정한다. 중고등학생들도 국민이므로 이들은 입시기계가 아니라 인간다운 생활을 할 권리를 가지고 있고, 반도체 회사의 공장라인에서 일하는 근로자들도 국민이므로 유독성 물질이 없는 건강하고 쾌적한 환경에서 생활할 권리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헌법에 따르면 모든 국민은 사생활의 비밀과 자유를 침해받지 아니하고(제17조), 통신의 비밀을 침해받지 아니한다(제18조). 그러므로 국가든 대기업이든 개인의 사생활을 엿보거나 개인의 전화나 e메일을 몰래 엿듣고 훔쳐보아서는 안 되는 것이다. 만일 국가기관이 이러한 일을 했다면 ‘국기 문란행위’를 한 책임을 물어 엄벌로 다스려야 마땅하다.
헌법은 모든 국민이 양심의 자유를 가지고(제19조) 종교의 자유를 가지는데(제20조), 이러한 사상이나 생각을 표현하고 출판할 언론의 자유도 가진다(제21조)고 정하고 있다. 자유에는 ‘무언가를 할 수 있는 자유’와 ‘아무것도 하지 않더라도 누구로부터도 강요받지 않을 자유’가 포함된다.
특히 양심의 자유와 종교의 자유와 같은 정신적 기본권은 가장 높은 수준으로 보장되어야 한다는 것이 헌법재판소가 일관되게 강조하는 원칙이다. 이에 따르면 국민은 국가에 대한 충성이나 맹세를 강요당해선 안 된다. 종교행사에 참여하지 않는다고 해서 불이익을 당해서도 안 된다. 개인의 양심과 종교의 자유, 국가에 대한 충성이 대립하는 상황에서는 당연히 개인의 자유를 우선시해야 한다는 것이 헌법의 명령이다.
미션스쿨의 이중 잣대
그러나 아직 현실은 헌법과 다르게 진행된다. 미션스쿨은 예배에 참석하지 않는다고 학칙위반을 내세워 학생을 징계한다. 애국가를 부르지 않는다는 이유로 사상을 의심하거나 반국가행위자로 몰아가는 일이 여전히 벌어지고 있다. 학교의 학칙이 헌법보다 우위에 있다고 믿는 사람이 다른 한편으로는 자유민주주의를 내세워 다른 사람들을 정죄(定罪)하고 있다. 이는 우리 시대의 블랙코미디가 아닐 수 없다.
개인적으로는 헌법에서 가장 감동적인 기본권 규정은 ‘국민의 자유와 권리는 헌법에 열거되지 아니한 이유로 경시되지 아니한다’라는 조항이다(제37조 제1항). 헌법에 열거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국민의 자유와 권리를 함부로 침해하거나 제한할 수 없다는 의미로서 기본권 조항의 밑바탕을 이루는 기본정신이 담겨 있다. 사실 열거된 기본권조차 갖가지 이유로 잘려나가고 막히는 것이 현실이다. 열거되지 않은 기본권 보호라는 것이 공허해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이 조항은 국민 기본권의 지평을 넓힐 수 있는 소중한 근거로서 언젠가는 이를 통해 새로운 기본권이 도입되는 날이 올 것이다.
놀랍고도 중요한 변화를 만들었던 현행 헌법에 대한 개정 논의는 더욱 의미가 있고 특별하다. 이제 주류층 몇몇이 모여서 급하게 처리하는 개정이 아니라 다수 국민이 적극적으로 참여해 지혜를 모으는 개정이 되어야 할 것이다. 11번째 헌법이 명실상부한 민주주의 헌법으로 만들어질 수 있도록 할 책임은 국민에게 있다. 정치권에서 정치제도에 집중하고 있는 개헌 논의를 기본권 영역으로 확장시켜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