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논문 표절과 관련한 구체적 제보 내용을 토대로 길정우 국회의원 당선자의
- 예일대 박사학위 논문의 표절 여부를 검증한 결과 하자가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
- 타인의 수고와 노력 담긴 데이터 도용해
- 일본에서 쓴 다른 페이퍼도 표절시비 일어
- 길정우 당선자 “안이했다, 순진했다”
길정우 당선자의 예일대 박사학위 논문.
“국내 문헌 여러 개와 한국 대학 석사학위 논문 3개를 출처를 밝히지 않고 참조해 논문을 완성한 것으로 안다. 번역에 가까운 곳도 있다. 서울대 출신에다 예일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분이 이례적으로 대학에 자리 잡지 못한 것은 그래서인 것으로 안다.”
또 다른 제보도 있었다.
“중앙일보 재직 시절인 2000년 일본 한 대학의 객원연구원으로 있을 때도 논문 표절이 문제가 됐다. 펀딩을 해준 재단이 문제를 삼았다. 그래서 임기를 마치지 못하고 귀국한 것으로 안다.”
길 당선자는 경기고, 서울대 외교학과를 졸업하고 서울대 대학원에서 정치학 석사학위를 받았다. 예일대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한 때는 1986년. 1991~95년 통일연구원에서 일했다. 1995년 중앙일보로 옮겨 워싱턴특파원, 논설위원, 중앙M·B 대표이사를 지냈다. 중앙일보와 인터내셔널헤럴드트리뷴이 제휴해 창간한 영자지 중앙데일리 발행인도 지냈다.
새누리당은 19대 총선 때 그를 서울 양천갑 선거구에 전략공천했다. 박근혜 당시 새누리당 비상대책위원장은 총선 때 “길정우 후보는 새누리당이 공들여 영입한 후보로 통일·외교·안보 분야의 전략가”라고 소개했다.
오도넬 이론으로 논문 써
‘신동아’는 제보 내용을 바탕으로 길 당선자의 예일대 박사학위 논문과 국내 논문을 비교하는 방식으로 표절 여부 확인에 나섰다.
길 당선자가 작성한 박사학위 논문 제목은 ‘The development of authoritarian capitalism : a case of South Korea’(권위주의적 자본주의의 발전 : 한국 사례 연구)이다. 아르헨티나 출신 정치학자 길레르모 오도넬이 정립한 ‘관료적 권위주의 체제’라는 이론 틀에 박정희 정권 시절의 한국 사회를 끌어넣어 분석한 것이다. 산업화가 진전됨에 따라 정치적 민주화가 이뤄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제한적으로 유지돼오던 민주적 체제마저 붕괴되고 억압적인 정치 체제가 등장한다는 게 오도넬의 주장이다. 길 당선자는 한국의 1972년 ‘10월 유신’을 이에 빗대 분석했다. ‘신동아’는 논문 내용에 ‘관료적 권위주의’가 들어간 국내 논문과 길 당선자의 논문을 비교·검증했다. 길 당선자의 예일대 박사학위 논문의 한 대목을 인용하는 것으로 기사를 시작해보자.
A : Under Park Chung-Hee′s rule, the students were the continuous and challenging activists who made the regime anxious. The first strong anti-government movement was the protest against the negotiation between South Korea and Japan in 1964.
A는 길 당선자의 박사학위 논문(이하 예일대 논문) 148쪽에 나오는 문장이다. 영문을 국문으로 직역하면 다음과 같다. 이 문장은 인용 사실을 밝히지 않고 있다.
“박정희 지배하에서 학생들은 정권을 불안하게 만드는 지속적인 저항운동가들이었다. 첫 번째로 격렬했던 반정부운동은 1964년 한국과 일본 사이의 협상에 대한 반대 운동이었다.”
A 다음에 이어지는 문장(B)을 살펴보자. B에는 각주가 달려 있으나 길 당선자가 부연설명과 함께 각주를 단 논문에는 이 문장이 나오지 않는다.
B: The student demonstration was temporarily stopped by the advance of the military under the Emergency Decree on June 3 the same year, but the anti-government movement continued until the ratification of the Treaty in the National Assembly in August 1965.
국문으로 직역하면 이렇다.
“학생 시위는 1964년 6월 3일 비상계엄령하에서 군대가 진주하면서 일시적으로 중단됐으나 1965년 8월 국회에서 조약이 비준될 때까지 반정부 운동은 계속됐다.”
한양대 대학원 정치외교학과 석사학위 논문인 ‘유신체제 성립 원인에 관한 연구-오도넬의 관료적 권위주의 체제이론에 따른 분석’(이하 한양대 논문) 55쪽에는 이런 문장이 나온다.
B-1 : “데모의 양상이 점차 격렬해지자 1964년 6월 3일 비상계엄령이 선포되고 군이 진주함으로써 시위는 일시적인 휴지기에 들어갔으나 그 후 1965년 8월 14일 국회비준안이 통과될 때까지 반대운동은 계속되었다.”
B와 B-1은 사실상 같은 문장이다. B-1 앞에 나오는 문장을 살펴보자.
A-1 : 군부가 공화당 정권의 가장 주요한 지지세력이었다면, 학생세력은 그것을 불안하게 만든 가장 중심세력이었던 것이다. 공화당 정권하에서 첫 번째로 가장 격렬했던 학생들의 반정부운동은 1964년 3월부터 시작하여 1965년 말까지 계속된 한일회담 반대 운동이었다.
A-1은 예일대 박사학위 논문의 A와 같은 문장이다. ‘The first strong anti-government movement’ ‘첫 번째로 가장 격렬했던 학생들의 반정부운동’과 ‘the students…who made the regime anxious’ ‘학생세력은 그것을 불안하게 만든’의 대비가 눈에 띈다.
이후의 문장들도 같기는 매한가지다.
C : However, the inrush of the military to the universities after the Garrison Decree ended the student movements for a time.(예일대 논문)
C-1 : 그러나 이것 역시 1965년 8월 25일 위수령에 의한 무장군인의 대학진입으로 끝을 맺게 되었다.(한양대 논문)
D : Student demonstrations reached a new peak in 1969 in the debate over Constitutional revision for making possible the third-term presidency of Park Chung-Hee.(예일대 논문)
D-1 : 60년대를 거치면서, 가장 격렬했던 반정부 학생운동으로는 1969년 3선개헌에 대한 학생들의 반대운동을 들 수 있다.(한양대 논문)
예일대 논문은 1986년, 한양대 논문은 1984년에 나왔는데 ‘상당히 긴 문장’이 같은 것이다. 역사적 사실을 서술하더라도 서술 순서마저 일치하기는 쉽지 않다. 왜 이런 일치가 나타난 걸까?
단락이 통으로 똑같아
두 논문의 유사성을 설명하기에 앞서 다른 논문과 예일대 논문을 비교해보자. 심영희 한양대 사회학과 교수가 1984년에 쓴 ‘한국 사회의 산업화와 사회통제-조합주의적 노동통제를 중심으로’(이하 한양대-1 논문)라는 제목의 논문에 이런 단락이 나온다.
E : 1973년 후반기에 들어서면서 이른바 ‘유류 파동’으로 심화된 세계적인 경제불황은 한국 경제에도 큰 타격을 주었고 이로 인하여 국내 경기는 침체되었다. 이에 기업활동은 위축되고 고용수준이 둔화되었으며 부당해고·임금체불 등 근로기준법 위반 행위가 속출하였고, 단체협약의 비준수와 부당 노동행위가 빈발하게 되었다. 이리하여 노사관계는 악화되고 노사 간의 질서는 혼란을 거듭하였다. 따라서 이와 같은 혼란을 바로잡기 위해 ‘국민생활의 안정을 위한 대통령 긴급조치(대통령 긴급조치 제3호)’가 1974년 1월 14일자로 공포, 실시되었다.(한양대-1 논문)
예일대 논문에는 다음과 같은 단락이 있다.
E-1 : In the latter half of 1973 the world economy began to suffer a recession because of so called “oil shock.” Subsequently, the South Korean economy was greatly damaged and began to experience a slump in every economic sector. Illegal treatment of labor, like violation, of Standard law and the rule of collective agreement by unfair lay-off and delayed payment of wages, etc. made labor-management relations worse.
E-1을 국문으로 번역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E-1에는 없는 “따라서 이와 같은 혼란을 바로잡기 위해 ‘국민생활의 안정을 위한 대통령 긴급조치(대통령 긴급조치 제3호)’가 1974년 1월 14일자로 공포, 실시되었다”는 문장을 제외하면 E를 영문으로 번역하면 E-1이고, E-1을 국문으로 번역하면 E다. 단락 자체가 똑같은 것이다. 인용 여부를 밝히지도 않았으며 당연히 각주도 붙어 있지 않다.
교육인적자원부의 논문 표절 가이드라인은 여섯 단어 이상의 연쇄 표현이 일치할 때, 생각의 단위가 되는 명제 또는 데이터가 동일하거나 본질적으로 유사한 때, 다른 사람의 창작물을 자신의 것처럼 이용한 때가 표절에 해당된다. 남의 표현이나 아이디어를 출처를 표시하지 않고 사용한 때, 창작성이 인정되지 않는 짜깁기로 논문을 쓴 때, 연구 결과를 조작한 것도 표절이다. 예일대 기준은 다음과 같다. 다른 사람의 작업, 문장, 아이디어를 출처를 밝히지 않고 사용한 것(Plagia-rism is the use of another′s work, words, or ideas without attribution), 인용 없이 다른 사람의 문장이나 정보를 사용하는 것은 물론이고 인용없이 다른 사람의 문장을 어구를 바꿔 표현한 것도 표절로 본다.
한양대-1 논문과 예일대 논문을 좀 더 비교해보자.
F : 또한 노사분규가 가장 많은 해는 1960년(227건)과 1980년(206건)인데 이것은 이 두 해가 각각 자유노조시대와 자율화시대로 특징 지워지는, 상대적으로 사회통제에서 자유로운 기간이었다는 사실로 설명될 수 있다.
F-1: on the contrary, in 1960 (227case) and in 1980(206case) the labor disputes were most frequent during the period of free trade unions and in the period of self regulation.
도 똑같다
접속사를 제외하고 F를 영역하면 F-1, 반대로 F-1을 국역하면 F다. F는 한양대-1 논문의 결론 부분에 나온다.
한양대 논문-1에는 ‘노동조합 조합원 수와 및 근로조직자 추이’라는 제목이 달린 도표가 실려 있다.
예일대 논문에는 ‘Number of Unionized Workers and the trend of Organized Ratio’라는 제목의 도표가 나온다
은 노동부 통계를 자료 삼아 그래프를 그린 것이다. 한양대 논문-1의 저자는 배무기 서울대 교수가 1982년에 작성한 그래프를 가져온 것이라는 사실을 밝히고 있다. 예일대 논문는 노동부 통계를 자료 삼아 길 당선자가 직접 그린 것으로 돼 있다. 두 그래프는 완벽하게 똑같다. 배무기 교수와 길 당선자가 ‘우연히’서로 일치하는 그래프를 그렸을 소지는 확률적으로 현저하게 낮다. 한양대-1논문과 예일대 논문의 똑같은 문장과, 똑같은 도표가 같은 부분에 등장한다. 다른 사람의 저작물에서 도표를 가져올 때는 한양대 논문-1의 저자처럼 해야 한다. 길 당선자가 한양대 논문-1이 인용한 그래프를 베끼면서 자신이 리서치한 것처럼 속였다면 타인의 수고와 노력을 도용한 표절에 해당한다.
예일대 논문의 다음과 같은 대목을 살펴보자.
G : We can find there were no dispute in 1961, 1962, 1972, and 1973. this is because the trade unions were dissolved by a military coup in 1961 and labor union activities were completely stopped until 1963 when they were reorganized : the law of national in December 1971 and Constitution for Revitalizing reforms in 1972 rejected the right of collective action and collective bargaining.
이 단락엔 각주가 달려 있다. 그런데 길 당선자가 인용했다고 밝힌 논문에는 G와 같은 구절이 없다. 허위로 각주를 단 셈이다. 인용을 정확하게 했는지 살피는 것이 논문심사위원회의 임무다. 예일대 논문심사위원회가 한국어로 된 논문을 일일이 검증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긴 하다. 이 단락은 길 당선자가 직접 쓴 걸까? 아니면 다른 곳에서 베낀 것일까. 이 단락 역시 한양대 논문-1에서 발견된다.
G-1 : 두드러진 변화는 1961년과 1962년, 그리고 1972년과 1973년에는 노사분규가 없었다는 사실이다. 이에 대한 설명으로는 1961년 5·16혁명으로 전국의 노조가 해산되어 1963년에 재조직될 때까지 활동이 전면 중단되었으며 1971년 12월 보위법 개정과 1972년 유신헌법 제정으로 단체행동권과 단체교섭권이 전면 부인되었다는 것을 지적할 수 있다.
G와 G-1은 같은 문장이다. 예일대 논문 4장은 한국의 조합주의(Corpora-tism)와 대중영합주의(populism)를 다루고 있다. 이 부분과 한양대 논문-1의 유사성은 상당하다. 그럼에도 길 당선자는 이 논문을 인용하거나 각주에 명시하지 않았다. 한양대-1 논문 저자가 리서치의 결과로 1961년, 1962년, 1972년, 1973년에는 노사분규가 없었다는 사실을 얻어낸 것이다. 길 당선자가 두 논문의 유사성을 우연의 일치라고 주장하기는 어려워 보인다.
같은 이론, 같은 주제
길정우 19대 국회의원 당선자는 서울 양천갑에서 당선했다.
예일대 논문 1장은 연구의 목적과 주요 가정 및 연구의 방향에 대해 서술하고 있다. 2장은 오도넬의 관료적 권위주의 이론에 대한 전반적인 설명과 한국 사례의 분석을 위한 배경을 서술했다. 한국의 석사학위 논문들이 이론적 배경을 서술한 장과 유사하다. 특히 한양대 논문과 비슷하다. 같은 틀로 같은 주제를 다룬 논문이기에 이론적 배경을 설명하는 부분은 유사할 수밖에 없다. 상세한 부분에서 비슷한 정도가 과하게 느껴지는 곳도 있지만 이론적 배경을 다룬 부분이므로 문제 삼지 않기로 한다.
예일대 논문 3장은 한국 산업화의 패턴을 대외 의존성을 중심으로 설명한다. 1) 수출 중심의 산업화 2) 해외 원조를 통한 경제발전 3) 해외 무역·기술에 대한 의존을 다뤘다. 길 당선자는 정부가 해외자금 유입 활성화를 위한 특별법을 제정했다고 설명하고, 해외차관의 증가 배경 및 그에 따른 이자 부담 가중, 수출입 증가에 대한 이유, 산업화에 따른 기술 의존성 심화, 산업화 위기의 근거 및 국내 상황을 다뤘는데, 내용의 상당 부분이 국내 논문에서 다룬 내용과 같다. 라틴아메리카와 비교한 부분은 한양대 논문 내용과 큰 차이를 보이지 않는다.
예일대 논문은 4장에서 한국의 민중 부문 발전의 실제 과정과 오도넬 모델의 차이점을 논증하고 있다. 한국의 경제성장 과정을 해외 원조를 이용한 개발로 규정한 후 국내 자본가의 발전 없이 공공부문 중심으로 성장한 부분이 라틴아메리카 사례와의 차이점이라고 지적한다. 라틴아메리카는 1940~50년대 민중 부문이 발달할 수 있는 기간이 있었지만, 한국은 제2공화국 때 민중 부문이 충분히 발전하지 못했다고 서술하는 논리는 한양대 논문과 유사하다. 조합주의와 인기영합주의를 다룬 부분은 앞서 언급했듯 심영희 한양대 교수의 논문과 흡사하다.
예일대 논문 5장은 국가-기업 간 관계를 설명하면서 경제 안정화를 위한 조치인 8·3 긴급명령의 주요 내용과 결과를 서술한다. 이 부분 역시 서강대 논문에 나와 있는 내용과 전체적으로 흡사하다.
길 당선자는 논문에서 한국의 관료적 권위주의 체제와 유교 전통의 상관관계를 강조한다. 이는 고려대 논문에서 다룬 내용이다.
물론 같은 이론을 가지고 같은 주제로 논문을 쓰다보면 골조, 전개 방식, 논거, 심지어 디테일도 같아질 수 있다. 덧붙여 길 당선자의 논문은 ‘신동아’가 비교 대상으로 삼은 논문보다 훨씬 풍성하고 논리가 정연하다.
“나도 궁금하다, 어떻게…”
한 국내 대학 정치학과 교수는 “논문 자체로는 아주 훌륭하지만 한국 대학에 예일대 것과 똑같은 논문을 제출했다면 2년 전 선행 연구에서 크게 벗어난 것이 있느냐는 질문과 지적을 받았을 것 같다”고 설명했다. 문장 자체가 똑같은 부분과 관련해서는 “이분이 왜 이렇게 했는지 납득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길 당선자의 의견을 들어볼 차례다. 5월 11, 13일 두 차례 그를 만났다. 아래 문답은 두 번의 대화 내용을 종합한 것이다.
“미국에서 박사학위 논문을 쓰면서 한글로 된 국내 논문을, 특히 석사학위 논문을 접할 기회가 없었습니다.”
그는 석사학위 논문들과의 유사성과 관련해 이렇게 말했다. 앞서 언급한 A, B, C, D와 A-1, B-1, C-1, D-1에 대해 물었다. 그는 곤혹스러워했다.
“나도 궁금해요. 어떻게 이럴 수 있는지….”
그는 이렇게 덧붙였다.
“1983년 무렵 미국에서 열린 크고 작은 학회에서 제 논문의 부분이나 샘플을 한두 편 발표했어요.”
그가 발표한 논문의 부분이나 샘플이 한국으로 흘러들었고, 한국 논문이 그것을 참조했을 수 있다는 취지의 해명이다.
▼ 지금 찾을 수 있나요?
“그건 좀…. 찾을 길이 사실은 없습니다.”
그는 “기억을 되살려보겠다. 미국에 직접 가서 자료를 찾아보겠다. 기사 게재를 미뤄달라”고 말했다. 실제로 5월 12일 미국 정치학회에 과거 기록을 찾는 것을 도와달라는 메일을 보냈다.
“한국을 주제로 논문을 쓰면서 국내 논문을 검토하지 않았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된다”는 취지의 질문을 던졌다. 논문을 준비하거나 작성할 때 기 발표된 논문을 검토하는 것은 기본에 해당한다.
“한국 케이스를 설명하기 위해 꼭 한국 자료만 보고 할 필요는 없어요. 미국에 한국 케이스와 다른 국가 케이스를 비교해서 쓴 논문이 많아요.”
▼ 우연의 일치라는 건가요?
“우연의 일치라고 하기엔 저도 이상하다는 거예요.”
▼ 각주를 잘못 단 부분도 있는데요.
“그건 중대한 실수네요.”
국내 석사논문들과 예일대 논문의 유사성에 대해서는 그의 해명이 맞을 수도 있지만, 한양대 논문-1과 예일대 논문의 관계는 소명의 여지가 거의 없다.
그는 난감해했다. 단락 전체가 같은 E, E-1을 보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안이했다”고 말했다. 인용, 재인용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인정했다. “이노센트(순진)했다”고도 했다.
▼ 과거에 박사학위 논문이 문제가 된 적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그건 박사학위 논문이 아니고, 다른 논문이에요.”
▼ 다른 논문은 문제 될 게 없지 않나요?
“박사학위 논문은 아닌데….”
▼ 경기고, 서울대, 예일대를 나온 분이 학계에서 자리를 못 잡았습니다.
“지도교수가 국제정치 공부한 사람이 현실 국제정치를 한번 해보는 것이 어떻겠느냐 해서 외교부의 미국 의회 담당관으로 나갔습니다. 일주일간 고민했어요. 다른 시간강사들이 부러워했어요. 너는 (교수 임용) 0순위인데 그렇게 했다고. 그때 일생 일대의 전환을 했습니다.”
안이했다, 순진했다
그는 일본에서 객원연구원으로 일할 때 펀딩을 해준 도쿄재단이 논문 표절을 문제 삼았다는 의혹과 관련해서는 이렇게 말했다.
“(도쿄재단과) 조금 싸우다가 접었어요. 페이퍼를 두 개 썼는데, (문제가 된 건 논문이 아니라) 일본의 역할과 관련한 정책 보고서였습니다. (페이퍼를 쓰기 전에) 일본 전문가인 영국학자와 토론을 했습니다. 재미난 콘셉트, 용어가 있어서 좀 가져다 써도 되겠느냐 물어봤더니 쓰라고 하더군요. 인용을 해서 썼어요. 각주를 단 것은 아니고요. 저는 재단 내부에서만 페이퍼를 사용하는 줄로 잘못 알았어요. 그런데 영국 학자가 나중에 페이퍼를 읽고 재단에 항의한 겁니다. 중간에 돌아온 것은 중앙일보 내부 사정 때문이었습니다.”
길 당선자는 한양대 심 교수 논문과 예일대 논문의 유사성과 관련해 잘못을 사실상 인정한 뒤 “혹시 ‘신동아’가 발행되기 전에 다른 이유를 내걸어 사퇴하더라도 기사가 나가느냐”고 물으면서 “그런 경우엔 기사를 쓰지 말아달라”고 부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