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윤택(60) 연희단거리패 예술감독이 연출한 연극 ‘궁리’는 장영실이 사라진 이유에 대해 추적한다. 뮤지컬, 무용, 극작 등 분야를 넘나들며 활약해 ‘문화 게릴라’로 불리는 이 감독이 직접 연극 대본을 쓰고 연출까지 맡은 건 10년 만이다. 4월 24일부터 3주간 서울 국립극단 백장극장에서 공연된 이 작품은 순수 연극으로서는 이례적으로 전석 매진됐다. 마지막 공연이 열린 5월 13일 그는 “장영실은 전문성을 갖췄지만 소수자라는 이유에서 정치적으로 배척된 인물”이라고 지적했다.
이 감독은 지난해 한 박물관에서 장영실 관련 전시회를 보며 과학적 자료 없이 상상력만을 바탕으로 한 조선시대 과학이 얼마나 우수했는지 감탄한 한편 측우기, 해시계 등 대단한 ‘물질’을 남긴 장영실의 ‘영혼’은 어디로 사라졌는지에 대해 의문을 품었다. 장영실이 역사에서 사라진 것은 당시 정치적 상황과 그의 신분 때문이었다.
“당시 명나라는 장영실의 과학적 성과를 경계하며 불만을 표했고, 영의정 황희 등 대다수 사대부는 명나라의 뜻을 거슬러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습니다. 게다가 장영실을 등용한 사람은 황희의 라이벌 격인 태종 때 도승지 조말생이었고 장영실은 천민, 지역(부산 동래) 출신에 원나라 이주민의 피가 섞인 ‘잡종’이니, 그를 제거할 이유는 충분했던 거죠.”
천문학자인 장영실이 임금의 수레를 만드는 단순 업무를 맡게 된 것도 정치적 논리 때문이었다. 게다가 세종의 수레가 부서졌을 때도 실제 수레 제작자는 개국공신의 자녀라는 이유로 사면됐고 단순 자문을 했던 장영실이 형벌을 받았다. 그는 “문제는 현 시대에도 무수한 장영실이 있다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천문학에 남다른 재능을 보인 장영실처럼, 우리 사회에는 자신만의 분야에 전문성을 가졌지만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지 못하고 직책에 맞춰 전문성을 마모시키며 살아가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러다 극중 장영실의 나이처럼 예순 남짓이 되면 ‘명예퇴직’이라는 이름으로 사라지죠.”
그는 “또한 이 작품에 대한 20~30대 젊은 관객의 반응이 특히 뜨거운 것 역시 주목해야 한다”고 말했다. 주군을 위해 열정을 품고 일하지만 정치적 논리에 따라 사회에서 배척받는 장영실을 통해, 많은 젊은이가 사회 구조의 냉정함과 인간의 무력함을 목격하고, 장영실과 자신을 동일시한다는 것이다.
대표적인 성군으로 평가받는 세종은 이 작품 속에서 무기력한 인간일 뿐이다. 100㎏이 넘는 거구에 제대로 걷지도 못할뿐더러 ‘자기 사람’ 장영실이 억울하게 옥에 갇혔는데도 그를 구하지 못한다. 반면 황희와 사헌부 관료들이 명나라 논리에 따라 세종을 압박하는 정황이 도드라진다. 이 감독은 “세종은 결과론적 국가주의자일 뿐이고, 황희와 사헌부는 본인들의 정치적 생명을 위해 장영실을 희생시키는 인물”이라고 평가했다. 그는 “특히 황희 등을 통해 현재 우리나라 검찰, 경찰 모습을 볼 수 있다”며 “그들 역시 스스로 애국자라고 생각할 테지만 결과적으로 우리 역사에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 돌아봐야 한다”고 꼬집었다.
작품 속 장영실은 자신이 만든 측우기가 ‘명나라의 하사품’으로 둔갑한 것을 보고 ‘북문’으로 떠난다. 세종의 등 고름을 입으로 짜내고 “남근을 자르더라도 주군 곁에 있겠다”며 떼를 쓰던 그가, ‘북극성’으로 대표되는 세종이라는 주군을 버리고 ‘스스로의 별’을 찾아 떠나는 것. 이 감독은 “장영실의 말년에 대한 추측은 분분하지만, 나는 그가 예속된 신분을 버리고 주체적 자아를 찾아 떠났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이 연극에서 눈에 띄는 것은 배우들의 움직임이다. 모두 무명, 신인인 배우 27명이 출연하는데 마치 행위예술을 하는 것처럼 적극적으로 몸을 활용한다. 특히 극 초반 배우들의 몸만으로 수레를 만드는 장면은 장관이다. 그는 “요즘 연극은 너무 게으르다”고 지적했다.
“사실 연극은 선율, 행위 등으로 구성하는 종합예술입니다. 1990년대까지만 해도 몸을 활동적으로 이용하는 연극이 많았는데 요즘 연극은 제작비와 배우 부족을 핑계로 유명 배우를 섭외해 대사로만 전달하는 작품이 대부분이에요. 이럴 때일수록 국립극단 같은 국공립단체가 실험적이고 종합적인 연극성을 보여주는 작품을 주도적으로 올려야 합니다.”
이 감독은 극중 장영실과 같이 올해 예순을 맞았다. 그는 “청춘은 60부터라고 하는데 다 거짓말이다. 이제 나도 퇴물”이라고 손사래를 치면서도 앞으로 빼곡한 계획을 털어놓았다. ‘우리극연구소’에서 젊은 연극인을 양성하는 그는 조만간 불운했던 세종 아들들에 대한 연극 극본을 쓸 예정이다. 1979년 ‘현대시’로 등단해 시인이기도 한 그는 “요즘 김해 도요마을에서 시인 최영철 씨와 함께 거주하며 시를 쓴다”고 말했다. “나이 예순에도 사람들이 좋아하는 글을 쓸 수 있다는 게 얼마나 다행인가”라며 웃는 그에게서 ‘자신만의 별’을 찾아 떠나던 장영실의 꿋꿋한 모습이 엿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