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일 역사 갈등은 일본 역사교과서 검정 때마다 반복된다. 올해 일본 문부과학성 검정을 통과한 사회교과서 39종 가운데 21종(54%)이 독도를 ‘일본 땅’으로 기술했다. 독도 내용이 없던 교과서 3종은 새로 독도 영유권 기술을 넣었다. 일본 역사교과서의 이러한 경향은 일본군위안부 강제연행과 난징(南京)대학살을 부정하는 특정 학파와 그 후학들이 교과서 조사관과 심의위원으로 활동하고 있기 때문으로 분석된다. 이들의 실체는 2007년부터 드러나고 있다. 문부과학성이 제2차 세계대전 말기 일본군의 오키나와 주민 학살을 삭제하거나 수정하는 검정의견을 내놓으면서 오키나와는 분노했고, 이 과정에서 문부과학성 교과서 조사관의 어둠의 계보가 차례로 공개되고 있다.
지난 3월 말 “2013년도부터 사용될 일본의 새 고교 역사교과서에 독도영유권 주장이 강화됐다”는 도쿄발(發) 타전이 있었고, 대한민국 외교부는 “근본적인 시정을 촉구한다”고 항의했다. 그러곤 다시 망각의 악순환.
1982년 교과서 파동과 2000년 ‘새로운 역사교과서를 만드는 모임’(이하 새역모) 파동 때도 그랬다. 다만 그 파장이 조금 길었을 뿐이었다. 이후 해마다 번갈아가며 중고교 교과서를 검정하는 제도의 특성상, 그리고 교과서 기술과 지도의 방향을 설정하는 ‘학습지도요령’ 개정이 사이에 끼어들면서 일본의 역사교과서 문제는 주기적인 편두통이 되어왔다. 통증이 만성화되면서 감각도 무뎌졌다. 최근에는 미국 뉴저지에 세워진 일본군위안부 기림비를 놓고 일본 정치인들의 항의와 철거 요구가 이어지고 있다. 이러한 일본인들의 역사인식에도 역사교과서 왜곡 문제가 자리한다.
‘만성 편두통’
제2기 한일역사공동연구위원회 한국 측 위원장 조광은 “이 불쾌한 연례행사를 하루빨리 끝장내야 하고, 역사 문제에 대한 이견과 갈등은 연구와 대화를 통해 극복될 수 있기 때문에 역사공동연구를 재개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그러나 먼 미래를 기약하며 인내심을 가지고 양국의 역사학자들이 공동연구를 하는 것만으로 일본의 역사교과서 왜곡을 바로잡을 수 있을까? 또 학계의 상투적인 방법처럼 자국 정부에 대로 된 역사인식을 요구하는 일본의 양심적 지식인들을 초청해 그들의 아름다운 문장에 카타르시스를 느끼는 것으로 자족할 일일까?
이러한 의문을 갖게 하는 사건이 2007년 일본에서 발생했다. 그리고 이 사건으로 한 해 동안 일본 조야(朝野)가 들끓었다. 그러나 한국 정부와 언론은 거의 관심을 갖지 않았다.
2007년 9월 29일 오후 3시 오키나와 중부 서해안에 위치한 기노완카이힌(宜野灣海浜) 공원은 오키나와 주민 11만 명이 외치는 분노의 함성으로 뒤덮였다. 당시 오키나와 전체 주민이 137만 명이었으니 도민 10명 중 1명이 공원의 함성에 동참한 셈이었다. 주최 측 예상을 훨씬 상회하는 군중의 함성에 일본의 취재기자들도 고무됐다. 비행기를 타고 상공을 돌면서 집회를 취재한 ‘류큐신보(琉球新報)’(이하 신보) 기자는 “1995년 10월 미군병사의 소녀 성폭행 사건에 항의하는 주민대회(9만 명)를 능가하는 오키나와 역사상 최대의 항의집회”라고 타전했다. 지역 출신 국회의원은 물론 자치단체장, 지방의회 지도자들이 대거 참가한 이 대회에서 오키나와 지사 나카이마 히로카즈(仲井眞弘多)는 “(제2차 세계대전 말기 오키나와 주민의) 집단자결에 일본군이 관여했다는 것은 당시 교육을 포함한 시대적 상황, 그리고 (일본군이 주민들에게 자결하라며) 수류탄을 나누어주었다는 증언 등으로 미루어볼 때 감출 수 없는 사실”이라면서 “문부과학성은 검정의견을 조속히 철회하고, (자결이 아니라 일본군의 ‘주민학살’이었다는 점을) 교과서 기술에 부활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교과서검정 의견 철회를 요구하는 현민 대회’에 집약된 주민들의 타깃은 일본 정부, 특히 문과성이었다. 사태의 발단은 2008년부터 사용될 고교 역사교과서 7권에 대해 2007년 3월 30일 문과성이 발표한 검정의견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 말기 일본군의 오키나와 주민 학살(자결 강요)은 이미 1982년부터 고교 역사교과서에 기술돼왔지만, 문과성이 2008년부터 사용할 고교 역사교과서에 대해 기존의 기술을 삭제하거나 대폭 수정하도록 하는 검정의견을 붙였던 것이다. 야마카와(山川)출판사를 비롯한 5개 출판사는 ‘고교일본사’에 “섬 남부에서는 미일(美日) 양군의 사투에 휘말려 주민 다수가 사망했는데, 일본군에 의해서 참호에서 쫓겨나거나 집단자결을 강요당한 주민도 있었다”는 표현을 모두 바꾸어야 했다. 문과성에 의해 ‘오키나와전의 실태에 관해서 오해할 우려가 있는 표현’이라는 검정의견이 붙여졌던 것이다. 당연히 이 검정의견을 제시한 자가 누구인지에 관심이 모아졌고, 그 핵심 인물로 문과성 직원 두 사람이 떠올랐다.
137만 명을 분노케 한 두 사람
핵심 인물 색출을 시작한 것은 일본 민주당이었다. 4월 25일 제166회 일본국회 교육재생 특별위원회가 열리자마자 가와우치 히로시(川內博史) 민주당 의원은 “오키나와전 자결 강요와 관련한 검정의견을 제시한 자가 누구냐” “(새역모의) ‘새로운 역사교과서’를 집필, 감수한 이토 다카시(伊藤隆) 도쿄대 명예교수와 문과성 교과서 조사관인 무라세 신이치(村 涑頁信一)는 사제관계가 아니냐”며 포문을 열었다. 문과성 장관 이부키 붐메이(伊吹文明)는 “(검정심의회에는 다른 위원들도 참여해 검정의 최종판단을 내리기 때문에) 조사관이 최종적으로 검정의견을 달 수 있는 입장이 아니다. (새역모와) 검정심의회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며 검정 경과와 조사관의 명세를 밝히기를 거부했다. 그러나 가와우치의 질의는 문과성 조사관의 면면과 역할에 관한 공식적인 문제제기의 신호탄이 됐다.
두 달 뒤인 6월 27일과 29일 ‘오키나와타임스’와 ‘신보’는 이미 2006년 12월 검정의견서가 교부되는 현장에서 “문과성 조사관이 ‘집단자결에 관해서는 일본군으로부터 공식적인 명령이 내려지지는 않았다는 견해가 정착되고 있다. 최근에는 군대의 명령이 아니었다는 견해가 대부분이다’고 얘기했다”는 등 과거 그들의 발언을 보도했다. 문제의 조사관이 누구인지에 관한 의문도 증폭됐다. 이번에는 일본 공산당이 나섰다.
7월 3일 아카미네 세이켄(赤嶺政賢) 공산당 의원은 중의원에 제출한 질의서에서 “1944년 11월 오키나와 주둔 일본군은 지상전을 앞두고 ‘군관민 공생공사(共生共死)의 일체화’ 방침을 천명하고, 진지 구축과 식량·탄약 운반은 물론 전투에 주민을 총동원했다는 이 엄연한 역사적 사실을 삭제하게 한 문과성의 검정의견은 지극히 부당하고 결코 용서할 수 없다”고 지적했다. 그는 이어 조사관이 도대체 무슨 조사를 했고, 또 검정심의회에서 어떤 심의위원, 임시위원, 전문위원들이 어떤 의견을 제시했는지, 조사관의 ‘의견서’가 어떻게 검정의견이 됐는지, 이들이 어떤 기준에 근거해 채용됐는지 등을 밝히라고 추궁했다.
일주일 뒤, 일본 총리 아베 신조(安倍晋三)는 답변서를 통해 “조사관은 조사의견서를 작성함에 있어 학습지도요령, 교과용 도서 검정기준 등에 비추어 신청도서가 적절한지 아닌지에 관해 학술적 전문적인 관점에서 조사했지만, 주민의 증언은 청취하지 않았다”고 했다. 또 “심의회 위원, 임시위원 또는 전문위원들이 어떤 의견을 제시했는지에 관해서는 자유로운 의견교환이 제약되고 중립적인 심사가 이루어지지 못할 우려가 있기 때문에 답할 수 없다”고 거부하며 조사관이 검정과정에 차지하는 비중이 높지 않음을 강조했다.
아울러 아베는 조사관 41명의 명단을 공개하면서, 일본사 담당자는 다카하시 히데키(高橋秀樹), 데루누마 야스타카(照沼康孝), 미타니 요시유키(三谷芳幸), 무라세 신이치 4명이라고 밝혔다. 공개된 것은 이름뿐이었지만, 아무튼 이로써 1956년에 조사관 제도가 채택된 이래 반세기 동안 베일에 싸여 있던 조사관의 면면이 드러났다. 외국인 8명을 포함한 심의회 전문위원 59명의 명단도 공개됐다.
조사관 명단은 처음 공표한 것이지만, 심의회 전문위원과 임시위원 명단은 이미 문과성이 홈페이지를 통해 여러 차례 공개한 것이어서 새로울 것이 없었다. 그럼에도 여전히 의문이 남았다. 2007년 5월 16일 문과성 홈페이지에 공개된 ‘교과용도서 검정조사심의회 위원, 임시위원 명부’에 등장한 인물은 모두 147명이었고, 여기엔 외국인이 한 명도 없었다. 아베의 답변서는 일본인 심의위원 147명 가운데 51명만을 거명했던 것이다.
의도한 것이든 아니든 거명되지 않은 심의회 위원 96명 가운데 누군가 ‘검은 인물’이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혹이 생길 만도 했다.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면 곤란한 그런 인물들이 있었던 것일까. 밝히지 않은 심의위원 가운데도 이토 다카시 도쿄대 명예교수의 제자가 있었다.
‘오키나와 언론-일본공산당-네티즌’ 연대
아무튼 아베의 답변서는 조사관 의견서는 심의회의 기초 자료에 지나지 않으며, 조사관은 심의회에 개입하지 않는다고 주장하고 있었다. 그러자 오키나와 주민들이 이 주장을 반박하고 나섰다. 9월 23일 ‘신보’는 “심의회는 이름뿐이며, 토론도 거의 없었다. 오키나와전 연구자도 없었다니 놀랄 수밖에 없다. 가장 큰 문제는 논의 자체가 사전에 문과성 조사관이 제출한 의견서를 그대로 따른다는 점이다. 국가(문과성)의 생각대로 교과서가 만들어진다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3주 뒤에는 바로 그 검정심의회 일본사 소위 위원 하타노 스미오(波多野澄雄·쓰쿠바대 교수)가 아베의 답변을 무색게 했다. 하타노는 10월 11일자 ‘신보’와의 인터뷰에서 “교과서 출판사의 신청본 합격, 불합격 및 검정의견을 결정하는 심의회에 문과성 조사관이 구체적으로 관여하고 있다”고 폭로했다. 총리의 답변과 달리 심의회는 중립적이고 공정한 제3자적 기관으로서 심의를 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하타노에 의하면 2006년 10, 11월 두 차례에 걸쳐 조사관 4명을 포함한 20여 명의 심의위원이 참석해 일본사 소위원회가 열렸고, 조사관이 작성한 검정의견서가 낭독된 후 이어진 논의에 조사관도 참여했다. 하타노는 조사관의 역할이 단지 의견서를 작성하는 데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고 했다.
사흘 뒤인 10월 14일에는 일본 공산당 신문 ‘아카하타(赤旗)’가 또 하나의 새로운 사실을 폭로했다. 문과성 조사관 58명은 국가공무원임에도 채용시험 없이 문과성 장관 임의로 임명한다는 것이었다. ‘아카하타’는 조사관 임명과 채용 루트가 온통 베일에 싸여 있다면서 ‘문과성과 연줄이 닿는 자’가 조사관으로 채용되는 것 아니냐는 의혹을 제기했다. 그리고 오키나와 전투에 관한 의견서를 작성한 조사관은 일본사 담당 무라세와 주임조사관 데루누마라고 적시했다. 총리의 답변에 거명된 4명 가운데 근현대사를 전공한 자를 ‘색출’해낸 것이었다. 이뿐만 아니라 ‘아카하타’는 이들 2명이 ‘새역모’ 이사이자 ‘새로운 역사교과서’(후소샤)를 집필, 감수한 이토 다카시 도쿄대 명예교수의 제자라는 사실도 보도했다. 가와우치 의원의 문제제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간 것이었다.
이어 10월 24일 공산당 의원 이시이 이쿠코(石井郁子)는 중의원 문부과학위원회에서 문과성 장관과 교육국장에게 “문과성이 조사관에 관해 뭔가를 감추려 한다”고 비난하면서, 문과성 내에 이토-데루누마-무라세로 이어지는 시대착오적 역사관의 저류(底流)가 흐르고 있다고 따졌다. 다음은 이시이-문과성 고위공직자 간 일문일답 요지.
‘새역모’(이토)-데루누마-무라세
이시이 “조사관이 오키나와 전투의 실태에 관해 오해할 우려가 있다는 검정의견을 붙인 이 의견서에는 국장까지 날인했다. 심의회 전문위원, 임시위원 등이 의견을 개진한 것이 아니라, 조사관 4명이 합의해 작성한 것이다. 조사관 가운데 일본사 담당자의 성명, 출신대학, 전공을 밝혀라.”
가나모리 에쓰야(金森越哉·문과성 초·중등교육 국장) “일본사 담당 조사관은 4명이다. 데루누마 주임과 무라세, 미타니는 도쿄대 대학원을 졸업했고, 다카하시는 가쿠슈인(學習院)대 대학원을 졸업했다.
이시이 “출신학부와 전공은 왜 밝히지 않는가.”
국장 “조사관의 개인정보이므로 밝힐 수 없다.”
이시이 “문과성 직원의 출신 학부, 전공을 밝힐 수 없다? 데루누마는 도쿄대 국사학과, 무라세 역시 도쿄대 일본사학과 출신이다. 바로 이 두 사람에 관해서 문제를 제기하려 한다. 근현대사 전공인 이 두 사람은 후소샤(扶桑社) 교과서 감수자 이토 다카시의 제자들이 아닌가? 이토의 추천으로 조사관으로 임용된 것 아닌가?”
국장 “추천이 있었는지 없었는지는 인사관리에 관한 개인정보이므로 밝힐 수 없다.”
이시이 “자꾸 뭔가 숨기려 하는데 이해할 수 없다. 이토와 데루누마는 1983년 공동저작(육군 하타 슈ㄴ로쿠 일지)을 출간했고, 무라세도 1997~2000년 이토가 연구책임자인 ‘일본근대사 자료센터에 관한 예비연구’ ‘그 구체화에 관한 연구’에 참여했다. 2000년 4월 ‘새역모’ 교과서가 문과성에 검정신청본으로 제출됨과 동시에 무라세도 조사관으로 임용돼, 데루누마와 함께 검정에 임하지 않았나?”
국장 “공동저작에 관해서는 모른다. 그리고 과거의 일은 현재의 직무와 무관하다.”
이시이 “검정심의회 일본사소위원회 위원, 특히 근현대사 전문가의 성명을 밝혀라.”
국장 “위원들의 자유로운 의견교환을 위해 분과 소속은 공표할 수 없다.”
이시이 “일본사 소위원회의 근현대사 심의위원 4명은 스루가다이(駿河台)대 교수 히로세 요시히로(廣涑頁順皓), 규슈(九州)대 대학원 교수 아리마 마나부(有馬學), 고쿠가쿠인(國學院)대 교수 우에야마 가즈오(上山和雄), 쓰쿠바(筑波)대 교수 하타노 스미오(波多野澄雄)가 아닌가?
국장 “밝힐 수 없다.”
새로운 이름들이 거론됐다. 조사관이 좌지우지했다는 심의회의 전문위원과 임시위원이었다. 7월 아카미네 의원 질의에 대해 아베가 공개한 심의위원 명단에는 히로세와 아리마, 이 두 사람의 이름이 없었다.
이시이 “‘일본근대사 자료센터에 관한 예비연구’ 및 ‘그 구체화에 관한 연구’에는 무라세와 함께 아리마, 히로세가 공동연구자로 참여했다. 조사관과 심의위원 가운데 이토의 문하생들이 박혀 있는 것이다. 무라세, 데루누마, 아리마가 공동집필한 ‘근대일본의 정치구조’라는 책을 보면, 아리마가 자신의 선생 이토 다카시를 극찬하고 있다. 결국 조사관 4명 가운데 2명, 심의회 근현대사 위원 4명 가운데 2명이 이토의 문하생이거나 공동연구자, 공동저작자인 셈인데, 이래도 검정이 공정중립이라고 할 수 있는가?”
국장 “조사관과 다른 사람의 관계가 교과서검정의 공정중립성에 영향을 줄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이시이의 주장대로 ‘근대일본의 정치구조’의 필진은 이토의 후학들이었고, 무라세, 데루누마, 아리마의 논문이 실려 있었다. 다만 ‘극찬’이라는 표현은 과장이었다. 필자가 확인한 결과 아리마 등은 책의 ‘후기’에서 “본서의 집필자는 모두 (이토)선생의 학은(學恩)을 입었다”고 했지만, “우리의 연구가 선생님의 역사관, 업적과 항상 어느 정도 긴장감을 유지할 필요가 있을 것”이라고 병기했다. 그리고 자신들이 “이토의 연구자세의 계승자, 공유자라 해도 좋을 것”이라고도 썼다. 즉 역사관의 계승자가 아니라 방법론의 문하(門下)라는 것이다. 그러나 어쨌든 문제는 특정 인맥을 중심으로 구성된 교과서검정심의회가 ‘공정중립’일 수 없다는 데 있었다. 이어지는 문답이다.
이시이 “이건 정말 중대한 문제다. 이토가 감수한 후소샤의 ‘새로운 역사교과서’를 검정한 것이 데루누마와 무라세다. 이토의 제자란 말이다.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는가? 이토는 아베 총리의 자문기구 ‘일본교육재생기구’의 설립 대표발기인이다. 이 기구는 ‘날조임이 분명한 일본군 위안부의 강제연행에 관해서는 기술하지 않겠다. 난징(南京)대학살은 그 자체가 허구라는 설이 유력하다’며 자신들의 교과서에 이 역사적 사실들을 싣지 않고 있다. 오키나와 집단자결에 관해서 단 한마디도 없다. 문제는 이러한 주장에 화답이라도 하듯 조사관, 심의위원, 전문위원이 배치돼 있다는 점이다. 이야말로 문과성이 교육 내용에 정치적으로 개입하는 것이 아니고 무엇인가?
“역사를 역행(逆行)시키는 지하수맥”
도카이 기사부로(渡海紀三朗·문과성 장관) “이번 검정을 위해서 그런 진용을 형성한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이 생겨 점검했는데, 그게 그렇지 않다. 무라세의 경우는 (이미) 10년 전에 채용됐다.”
국장 “데루누마는 1983년, 무라세는 2000년, 다카하시도 2000년, 미타니는 2002년에 채용됐다. 이번 문제가 생기기 이전에 채용된 조사관들이다.”
이시이 “문과성의 역사를 알고나 있는가? 1998년 후쿠치 아쓰시(福地惇)라는 조사관이 있었다. 이자도 이토의 제자다. 후쿠치는 ‘(근린국가조항이라는 것이 생겨서) 일본이 침략전쟁을 일으키는 잘못을 저질렀다고 (교과서에) 써야 하기 때문에 곤란하다’고 발언해 해임됐다. 그는 지금 ‘새역모’ 부회장이다. 특정 사고방식을 교과서에 주입하고자 하는 자들이 ‘일본의 교과서 문제’를 일으켜오지 않았나? 예를 들면 히라이즈미(平泉) 학파, 천황중심주의를 신봉하는 황국사관을 지닌 도쿄대 슈코카이(朱光會)가 있는데, 이 학파의 무라오 지로(村尾次郞)가 당시 주임조사관이었다. 이후 슈코카이의 야마구치 고스케(山口康助), 도키노야 시게루(時野谷滋) 등 이런 사고방식의 소유자들이 조사관 자리에 앉아 왔다. 그래서 전쟁책임, 일본군 위안부에 대한 일본군 관여 사실 등이 더 이상 교과서에 실리지 않게 됐다. 그러더니 이번에는 ‘집단자결’이다. 이번 검정의견의 배후에는 편파적인 조사관 인선, 채용이 도사리고 있다. 역사를 역행(逆行)시키는 지하수맥이 있단 말이다. 어느 검정심의위원(하타노를 가리키는 듯)은 (심의회가) 독립적 기관이 아니며, 조사관의 의견이 상당히 강하게 작용하고 있다고 발언했다. 이번 검정의견을 철회하고 장관은 책임을 져라.”
장관 “검정제도는 민간 교과서 회사의 교과서에 오류가 있는지 점검하는 것이다. 이 일을 하는 심의회는 제삼자적 입장의 전문가가 참여해 학술적 견지에서 검토하는 제도다. 철회하라는 말을 안 하는 게 제도의 중립성과 공정성을 보장하는 길이 아닌가?”
검정의견을 둘러싼 논쟁은 ‘검정의견을 제시한 자들의 정체’에 관한 논쟁으로 바뀌었고, 검정의견을 붙인 자들 즉, 조사관과 일본사소위 심의위원들과 ‘새역모’의 관련성이 부각되었다. 이시이의 “정말 중대한 이 문제”는 대대적으로 보도됐다.
블로거들도 가세했다. ‘데무파’라는 블로거는 문과성 홈페이지에 게시된 검정조사심의회 위원명부에는 심의위원 히로세와 아리마가 있으나, 7월의 아베 답변서에는 이들의 이름이 보이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블로거 ‘아주리블루’는 10월 9일 무소속 스즈키 무네오(鈴木宗男) 의원이 제출한 ‘오키나와의 집단자결 강제를 삭제한 교과서검정을 둘러싼 현민대회에 관한 질문서’에 대해 후쿠다 야스오(福田康夫) 총리가 히로세와 아리마를 포함한 심의위원 120명을 공개했다면서 “(심의의원 수가 달라지는 이유가) 뭔지 잘 모르겠다”고 썼다.
그러나 사실 이것은 어려운 수수께끼가 아니었다. 7월에는 일본 공산당 소속 의원의 질의에 대해서 이토와 긴밀한 관계의 아베가 답변했고, 10월에는 무소속이지만 ‘자민당 중진’이었던 스즈키의 질의에 ‘새역모’로부터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후쿠다가 답했던 것이다.
이시이의 질의에서 새로이 부각된 사실은 역대 조사관과 히라이즈미라는 인물의 상관관계였다. 히라이즈미 기요시(平泉澄)는 1930년대 국체관념·일본정신을 근본으로 하는 학문과 교육체제의 방도를 심의하는 정부기관인 ‘교학쇄신평의회’에 주도적으로 참여했다. 비합리주의, 정신주의, 신비주의, 광신적인 일본 파시즘의 이데올로그로서 일본 국민을 침략전쟁으로 총동원해 사지로 몰아넣는 역할을 적극 수행했고, 전후에도 천황중심사관, 영웅(충신)사관을 설파해 황국사관의 거두로 비판받는 인물이었다(마쓰오 쇼이치, ‘일본 파시즘사(史)론’).
일본에서 전쟁책임 문제가 거론될 때마다 “군부의 도조 히데키(東條英機), 문학계의 다카무라 고타로(高村光太郞), 학계의 히라이즈미 기요시가 죄인”이라는 식으로 세인의 입에 오르내리는 인물이었다. 그리고 그가 이끌던 슈코카이의 제자들로 이시이가 지적한 무라오, 야마구치, 도키노야 등이 있다는 점도 아는 사람은 알고 있었다. 이런 일반적 인식을 토대로 이시이는 역대 조사관들이 이른바 황국사관에 충실한 자들이었고, 조사관이라는 자리가 ‘새역모’와 관계 깊은 이토 다카시의 제자들로 채워지는 것이 아니냐고 추궁했던 것이다.
‘세계의 구석에서 뉴스를 읽다’라는 블로거의 지적대로, 이토가 검정심의회 위원, 조사관을 추천하고 있거나, 적어도 문과성이 이토와 인선(人選)을 상의할 개연성이 있는 것이다. 일본사담당 조사관의 절반이 동일 문하라는 것은 정상이라고 할 수 없다.
후일 ‘아카하타’가 표현한 것처럼 문제의 초점이 ‘조사관, 연고채용 어둠의 계보’로 바뀌어가는 동안 오키나와 주민들은 9월 29일에 있었던 11만 명 집회의 열기를 이어가고 있었다. 10월 3일 나카이마 지사는 일본 국회 내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교과서검정 기준에 아시아 국가들을 배려하는 근린제국조항(近隣諸國條項)이 있는 것처럼 ‘오키나와조항’을 신설하라고 문과성에 요구했다. 집행위원장 나카자토 역시 “앞으로 같은 문제가 발생하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다. 10년이 지나면 (전쟁을 겪은) 증언자도 없어지고, 검정(내용)이 (사실로) 통용돼버릴 것”이라고 호소했다.
‘산케이’와 ‘요미우리’의 반격
흥미로운 것은 언론의 태도였다. 각 언론매체의 본색(本色)이 가감 없이 드러났다. ‘신보’와 ‘오키나와타임스’가 오키나와 주민의 분노를 대변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두 신문은 “22만 개의 눈동자에 답하라”며 문과성 비판에 전력을 쏟았다. ‘아사히신문(朝日新聞)’은 사설을 통해 “검정의견 철회”를 요구하면서 “오키나와 전투에서 일본군은 주민을 대피시키지 않고, 전투로 몰아넣었다. 집단자결도 각지에서 발생했다. 일본군의 강제가 있었다는 것은 오키나와에서는 상식”이라며 문과성 비난에 동참했다. 북단의 ‘홋카이도신문(北海道新聞)’은 “지금 본토(일본 정부)가 할 수 있는 일은 검정의견 철회밖에 없다”며 이것은 “오키나와만의 문제가 아니다”라고 주장했다.
‘마이니치신문(每日新聞)’은 “오키나와는 근현대사의 집약이며 다양하고 깊이도 있는 교재다. 다음 세대의 학교 교육에도 계속 ‘오키나와에 배우자’고 할 것인가? 이를 생각하는 기회로 삼고 싶다”며 중립적 입장을 견지했다.
예상대로 반격의 선봉에는 ‘산케이신문(産經新聞)’과 ‘요미우리신문(讀賣新聞)’이 자리했다. ‘산케이’는 “‘일본군은 수류탄을 나눠주어 오키나와 주민들을 서로 살해하게 하여 800명 이상의 희생자를 냈다’는 부분을 ‘일본군이 나눠준 수류탄으로 서로 살해하는 일이 발생했다’로 수정한 것이 ‘역사왜곡’이라 할 수 있는가”라는 묘한 논리를 전개하며, “검정방침 변경은 안 된다. 검정철회, 재검토야말로 교과서에 대한 정치개입”이라고 주장했다. ‘요미우리’도 이와 궤를 같이했다. “검정의견은 집단자결에 대한 일본군의 관여를 부정한 것이 아니다”면서 “역사적 사실에 기초, 집필돼야 할 교과서 내용이 ‘기분’에 대한 배려에 의해 좌우돼서는 안 될 것”이라며 오키나와 주민의 분노를 ‘기분’으로 격하했다.
일부 언론을 제외한 대부분의 일본인이 오키나와 주민을 지지했지만 성과는 없었다. 2007년 말 검정조사심의회는 ‘군의 강제’가 아니라 ‘군의 관여’라는 표현만을 인정했다. 이후에도 오키나와 주민들의 외로운 싸움은 지속됐지만, 2009년 2월 일본 정부는 오키나와 출신 민주당 참의원 의원 기나 쇼키치(喜納昌吉)의 질의에 대해 ‘오키나와 조항’을 교과용도서 검정기준에 포함할 생각이 없음을 분명히 했다. “국내 특정지역의 전쟁 중 피해를 다른 지역과 다르게 기술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신보’ 2월 3일).
그러나 2007년 여름 뜨거운 햇살 아래 폭발했던 오키나와 주민의 분노는 의도하지 않았던 열매도 맺었다. 2008년에 들어서도 ‘아카하타’와 블로거들을 중심으로 무라오, 도키노야, 데루누마, 후쿠치, 무라세 등으로 이어지는 조사관 ‘연고채용’에 대한 비난이 거세지자, 문과성은 결국 2009년 4월 1일 51명의 조사관 명단을 공개했다. 여기에 지리역사과(일본사) 주임조사관 데루누마, 조사관 다카하시, 미타니, 무라세 등 4명이 포함돼 있었다.
무엇을 할 것인가?
같은 날 ‘교도통신’은 “교과서검정 투명화정책의 일환으로, 문과성은 지금까지 비공개였던 조사관 51명의 성명, 직함을 발표했다. 이들이 각 출판사에 통지하는 검정의견서 원안인 ‘의견서’를 작성한다”고 보도했다.
“2006년도 고교 일본사교과서 검정에서 오키나와전 집단자결에 대해 ‘일본군에 의한 강제’라는 서술의 삭제를 요구한 검정의견서가 조사의견서를 답습했음이 판명됐다. 심의과정의 불투명성이 지적돼 검정심의회가 조사관의 성명 등을 공표하기로 결정했다.”
2007년 파동 이후 알려질 만큼 알려진 조사관의 비공개를 고집해봐야 실익이 없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2007년 9월 23일 ‘신보’ 사설은 오키나와의 모든 주민이 문과성의 교과서 검정의견에 반발해 그 철회를 요구하는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이것은 결코 오키나와만의 문제가 아니다. 현행 교과서검정제도는 사실상 국정교과서(제도)가 아닌가 하는 의문을 갖지 않을 수 없다. 그렇다면 이는 오키나와뿐 아니라 일본 전체에 해당하는 보편적인 문제를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이 논리의 연장선 위에서 보면, 2007년 오키나와 주민을 분노케 하고, 일본 열도를 소연케 했던 이 문제는 결코 일본만의 문제가 아니다. 제국주의 일본의 침략과 식민지 지배를 경험하고, 여전히 역사적 ‘사실’과 ‘인식’ 그리고 ‘책임’을 둘러싼 항의와 논쟁을 거듭하고 있는 한국을 비롯한 아시아 국가들에 해당하는 ‘보편적인 문제’인 것이다.
2007년 사건을 반추해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일본 문과성 교과서검정심의회에 특정 학파가 인맥을 형성하고 있고 이들이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일본의 소위 주류역사학계의 인물들이 교과서검정제도의 구성에 영향력을 행사하고, 또 그 핵심적 직위들을 장악하고 있는 한 한국인의 ‘만성 편두통’이 사라질 가능성은 거의 없다. 일본인과 일본 정부의 왜곡된 역사관 혹은 역사의식 빈곤 뒤에 똬리를 틀고 있는 일본 역사학계의 파워구조에도 돋보기를 들이대는 접근방법의 전환을 시도하지 않으면, 통증의 원인을 찾아내지 못한 채 기억과 항의, 그리고 망각의 사이클에 익숙해지고 말 것이다. 연례행사처럼 일본의 ‘교과서검정결과’가 발표될 때마다 그 내용을 보고 항의하는 데서 그칠 것이 아니라, 검정 주도자들의 정체성과 인맥, 학맥을 떠올려야 할 까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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