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경험이 있는 한 씨에게도 토크 프로그램 출연은 쉽지 않았다. 그는 “방송에 나가면 북에 있는 친지가 보복당할까 싶어 망설였는데 부모님의 권유로 용기를 냈다”면서 “북한 방송은 대본을 완벽하게 외워 그대로 해야 하는 반면 한국 방송은 대본이 있어도 내용만 전달하면 돼서 편하다”고 말했다.
평양음악무용대학을 졸업한 그는 협주단 안에서도 최정예 단원 10여 명으로 구성돼, 고 김정일 국방위원장 앞에서 노래하던 어은금병창조에 속해 있었다.
“어은금은 만돌린과 비슷하게 생긴 4줄짜리 현악기예요. 어은금병창조는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개인 연회에 불려가 비밀 공연을 하는 일이 잦다 보니 선발과정이 까다로웠어요. 김 위원장도 공연이 끝나고 와인을 한잔할 때 ‘어은금병창조엔 미인만 있다’는 칭찬을 잊지 않았어요. 과일통조림이나 화장품세트, 서양녹음기 같은 선물도 주고….”
한 씨의 아버지는 이름이 꽤 알려진 행정 간부였다. 그런데도 한 씨 가족은 2006년 10월 두만강을 건넜다. 출신 성분이 좋지 않은 여자와 사랑에 빠진 한 씨의 친오빠가 먼저 탈북을 감행했고 이를 닷새 만에 알아챈 한 씨 가족도 보름 후 뒤를 따랐다.
“간부 집안에서 탈북자가 나오면 온 가족이 정치범수용소로 끌려가요. 중국을 거쳐 몽골 난민수용소에서 4개월을 보냈는데 생활이 너무 고달파서 차라리 고향에서 죽을 걸 그랬다는 후회가 들기도 했어요. 2007년 온 가족이 한국 땅을 밟은 뒤에도 아버지가 갑자기 쓰러져 처음 3년간은 힘들었고요. 지금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자유와 행복, 여유를 찾았어요.”
현재 안보강사로 일하는 그는 “언젠가 여건이 되면 성악 공부를 더 하고 싶다”며 “한국에서는 노력한 만큼 대가를 얻을 수 있고 누구에게나 기회를 주는 게 정말 좋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