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92년 4월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는 대규모 방화, 약탈 사건이 벌어졌다.
- 폭도들이 코리아타운에 들이닥쳤지만 경찰은 수수방관했고, 결국 교민 사회 전체가 큰 피해를 당했다. 재미교포들이 ‘사이구(4·29) 폭동’이라고 부르는 그 사건 이후 20년이 흐르는 동안 한인 사회는 많이 달라졌다. 타인종·타민족과의 교류가 활발해졌고, 한인들의 정치력도 눈에 띄게 커졌다. 미주 한인 사회의 과거와 오늘을 장태한 UC 리버사이드대 소수인종학과 교수가 살펴봤다. <편집자 주>
그날의 악몽을 미주 한인들은 ‘사이구(4·29)’라고 부른다. 한인 사회 2280여 개의 업소가 피해를 당했는데, 피해액은 당시 폭동으로 인한 재산피해 총 10억 달러의 절반에 달했다. ‘아메리칸 드림’을 안고 성공을 위해 열심히 일한 결과 쌓인 모든 것이 순식간에 잿더미가 된 충격으로 이후 정신 상담을 받은 한인이 많았다. 그중 일부는 약을 복용해야 할 정도로 심각한 정신적인 후유증에 시달렸다. 당시 미국 주류 언론이 자신들의 사업체를 지키기 위해 총을 든 한인 상인들을 오히려 무법자로 보도하면서 한인 사회에 대한 부정적인 이미지를 부각시킨 것도 미주 한인들의 삶에 어려움을 더했다.
‘4·29 폭동’의 주역은 흑인이었다. 로드니 킹이라는 흑인 운전자가 로스앤젤레스 백인 경찰에게 마구 구타당하는 장면을 백인 아마추어 카메라맨이 우연히 촬영했고, 이 생생한 구타 모습은 TV로 방영돼 미국은 물론 전 세계를 경악시켰다. 이후 검거된 3명의 백인과 1명의 라틴계 경찰에 대한 재판에서 모두에게 무죄 평결이 내려지자 흑인들이 분노하면서 그것이 폭동으로 번진 것이다. 이내 로스앤젤레스는 방화, 약탈, 폭행이 난무하는 무법천지로 변했다. 특히 흑인 지역 상권을 장악하고 있던 한인 상인들이 흑인 폭도의 주요 표적이 된 건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사실 1980년대부터 한인 상인과 흑인 고객의 관계는 악화되고 있었다. 특히 1990년 1월 뉴욕 브루클린 지역에서 한인 상인과 아이티계 흑인 고객 사이에 발생한 마찰로 무려 15개월 동안 불매운동이 지속된 ‘레드 애플’ 사건이 있었고, 1991년 3월에는 로스앤젤레스의 한인 상인 두순자 씨가 15세 흑인 소녀를 총격해 사망케 한 ‘두순자 여인 사건’도 일어났다. 이런 사건은 이른바‘한흑 갈등’을 전국적으로 사회문제화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됐다. 흑인 주민들의 한인 상인에 대한 불만과 불신이 고조된 상태에서 폭동이 발생하자 한인 상점이 흑인 폭도의 공격 표적이 된 것이다.
반복되는 인종 갈등
미국 주류 언론 역시 ‘4·29 폭동’의 원인을 ‘한흑 갈등’으로 설명하려는 태도를 보였다. 그러나 인종 폭동은 미국이 안고 있는 구조적 문제를 해결하지 못해 생기는 시한폭탄으로, 20년이 지난 지금도 이러한 인종 갈등의 불씨는 여전히 존재한다.
흔히 ‘4·29 폭동’을 흑인 폭동이라고 하지만, 사실 이 사건은 미국 역사상 최초의 다인종 폭동이다. 당시 체포 또는 구금된 사람의 인종별 분포가 이것을 증명한다. 라틴계 45%, 흑인 41%, 백인 11%로 약탈에 참가한 사람 다수가 라틴계 이민자였다.
20세기 들어 미국에서는 주기적으로 인종 폭동이 발생해왔으며, 주로 흑인과 백인 사이 대결 양상을 보였다. ‘붉은 여름’으로 불리는 1919년 시카고 폭동, 1943년 할렘 폭동, 1964년 동부 7개 도시 폭동, 그리고 1965년 로스앤젤레스 와츠 폭동 등이 그렇다.
미국 인종 폭동의 원인은 크게 3가지로 분류된다. 첫째, 흑백 간 빈부 차다. 1960년대 보고서는 흑백 인종 간 빈부 차가 해소되지 않으면 폭동은 재발할 것이라고 경고하고 있다. 1992년 미국의 현실은 흑백 간 빈부 차가 1960년대보다 더 커졌고 흑인들의 불만 역시 최고조에 달했다.
둘째, 흑인 지역의 낙후한 교육시설과 교사의 자질이다. 이 때문에 흑인 청소년의 고교 중퇴율은 매우 높고, 그것은 높은 실업률로 이어진다. 일부 흑인 지역의 고교 중퇴율은 50%가 넘는다. 흑인 학교의 질이 백인 학교에 비해 매우 열악하기 때문에 흑인 학생의 경쟁력이 떨어지고 그것이 빈곤과 직결되는 구조적인 모순을 해결하기란 쉽지 않다. 또한 흑인 청년 남성의 경우 대학에 진학한 숫자보다 범죄로 감옥에 수감된 숫자가 많다. 이러한 현실은 흑인 사회의 미래가 어둡다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마지막으로 경찰의 과잉진압이다. 경찰에 대한 흑인 사회의 불신으로 경찰과 흑인 주민 간의 대립상태가 지속돼 양자 관계가 악화되는 것이 문제로 지적된다. 흑인 지역에서 경찰은 범죄자로부터 주민을 보호하는 집단이 아닌 ‘공포의 대상’이다. 이 때문에 ‘로드니 킹 사건’ 같은 것이 도화선이 돼 폭동으로 번질 위험이 농후한 것이다. 최근 플로리다에서 발생한 ‘트래번 마틴 사건’, 즉 백인이 흑인 소년을 총으로 쏘아 죽인 사건도 인종 폭동으로 번질 위험이 있었으나 정부가 즉각 대처해 막을 수 있었다.
1970년 이후 아시아계 및 라틴계 이민자가 급증하면서 미국 대도시의 인구 구성은 크게 변했다. 특히 로스앤젤레스의 경우 이 과정에서 흑인 백인 중심 도시에서 다인종 다민족 사회로 급변했다. 이후 인종 갈등이 심화된 것도 ‘4·29 폭동’의 한 원인이다.
그러나 당시 큰 사회문제를 일으킨 한인 상인과 흑인 고객 간의 마찰, 즉 ‘한흑 갈등’이라는 단어는 20년이 지난 지금, 더 이상 들을 수 없게 됐다. 지난 세월 미주 한인 사회가 로스앤젤레스 폭동을 교훈 삼아 변화를 위해 노력해왔기 때문이다. 최근 미국 주류 언론들은 미주 한인들이 어떻게 재기에 성공했는지 상당한 관심을 보이고 있다.
새로운 시작
‘4·29 폭동’으로 미주 한인 사회는 엄청난 피해를 당했으나 동시에 많은 교훈을 얻었으며 그것은 미주 한인 사회 변화의 시작이 됐다. 20년 전 미국인들은 한인 사회에 대해 무관심했다. 미국 사회에서 한인의 존재는 전혀 각인되지 못하고 있었고, 중국계 또는 일본계로 오인되는 일이 흔했다. 그러나 ‘4·29 폭동’의 최대 피해자가 한인이라는 사실을 접하면서 미국인들은 비로소 한인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됐다. ‘4·29 폭동’이 미국인에게 한인 사회의 존재를 알리는 시작점이 된 셈이다.
동시에 그 사건은 미주 한인들에게 ‘코리안 아메리칸’의 정체성을 심어준 결정적인 계기가 됐다. 당시만 해도 미주 한인들은 ‘미국 속의 한국인’으로 살아가고 있었다. 이민은 했으되, 일상생활은 주류 사회와 단절된 한국인의 그것이었다. 그러나 폭동을 경험한 이후 이들은 비로소 ‘코리안 아메리칸’의 새로운 정체성을 갖기 시작했다. 미국에서 주인 의식 없이 이방인으로 살아가면 또다시 엄청난 피해를 당해도 억울함을 호소할 방법이 없다는 걸 알게 됐기 때문이다. 코리안 아메리칸은 ‘한국계 미국인’을 의미한다. 미국 속의 한국인이 아니라 한국계 미국인으로서 당당히 주인 의식을 갖고 정치, 사회, 문화, 교육 등 모든 분야에서 책임과 의무 그리고 주권을 행사하는 사회구성원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이러한 새로운 정체성 확립은 미국에서 태어나고 성장하는 차세대에게 매우 중요한 변화다. 그들이 미국에서 성장하면서 주류 사회에 진입하고 미주 한인 사회에 기여하는 발판을 마련해주고 있으며 동시에 그들이 한미관계 그리고 모국인 한국의 국제적 위상을 높이는 데도 기여할 수 있도록 하는 바탕이 된다.
‘4·29 폭동’이 가져온 또 다른 변화는 이때부터 미주 한인들이 모국 지향적인 성향을 지양하고 미국에서 정치력을 신장하는 것을 당면 과제로 인식했다는 점이다. 당시 한인 사회는 엄청난 재산 피해를 당했으나 미국 정치인 중 누구도 한인 사회에 관심과 배려를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흑인 지역에서 사업하다 전소된 업소들이 재기하지 못하도록 하는 내용의 시 조례를 통과시켜 한인들이 또 한 번 피해를 당하기도 했다. 미주 한인 사회가 전혀 정치력을 갖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은 현실이 많이 바뀌었다. 이제 한인 사회는 한인 사회에 불리한 법규가 제정될 움직임이 보이면 즉각 대응해 한인의 목소리를 제대로 반영할 수 있을 만큼 성숙해졌다. 주목할 것은 미주 한인 사회의 정치력 신장은 한미관계에도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점이다. 가령 유대인은 미국이 친(親)이스라엘적인 외교정책을 펴도록 하는 데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한다. 미주 한인 사회의 정치력은 한미관계뿐 아니라 나아가 한반도 평화에도 큰 기여를 할 수 있다.
정치력 신장 캠페인
‘4·29 폭동’을 통해 미주 한인 사회에 나타난 이런 변화는 현실에서 구체적으로 드러나고 있다. 우선 코리아타운에서 다인종 다민족이 어울리고 있다. 1992년 당시만 해도 일반 미국인은 로스앤젤레스 코리아타운을 ‘이방인의 장소’로 인식하고 방문은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그러나 요즘은 한인 식당에서 타인종이 갈비와 불고기 그리고 김치를 먹거나 한인 커피숍에서 대화를 나누는 모습이 전혀 생소하지 않다.
또 20년 전 코리아타운은 범죄가 자주 일어나는, 안전에 문제가 많은 곳으로 알려졌으나 이제는 범죄가 크게 줄어들어 안전한 주거 지역으로 인식되고 있다. 시내와 근접해 있어 타인종 젊은이들의 주거지로도 각광받고 있고, 은퇴한 노년의 한인들이 살기 편한 코리아타운으로 돌아와 정착하는 일도 많다.
그 사이 미주 한인의 정치적 위상도 달라졌다. ‘4·29 폭동’ 이후 많은 한인이 선출직에 당선돼 활동 중이다. 지난 2008년 민주당 대통령후보 지명 선거 운동 때 유력한 민주당 후보였던 힐러리 클린턴이 로스앤젤레스 한인타운을 방문해 모금활동을 전개한 것도 달라진 한인 사회의 정치적 위상을 잘 보여준다.
하지만 중국계 또는 일본계에 비하면 아직 미주 한인의 정치력은 초라한 수준이다. 특히 현직 연방 하원의원과 상원의원을 아직 배출하지 못하고 있다. 게리맨더링(Gerrymandering)이라고 하는 선거구 분할 제도가 한 원인이다. 백인들은 정치력을 독점하기 위해 소수계 지역을 여러 지역구로 분할해 소수계 표를 분산시키는데, 로스앤젤레스 코리아타운의 경우도 현재 4개의 시의원 지역구로 분할돼 있어 한인의 정치력이 결집될 수가 없다. 현 상황에서는 한인의 시의원 당선이 거의 불가능하다. 최근 한인들은 이런 제도적인 문제를 바로잡기 위해 힘을 모으고 있다. 2010년 인구 조사 결과에 따라 새로운 선거구가 결정될 당시 한인들은 코리아타운을 하나의 선거구로 재조정할 것을 요구하는 캠페인을 전개했다. 미 주류 언론이 “잠자는 호랑이를 깨웠다”고 대서특필했을 정도로 힘찬 움직임이었다. 미주 한인들이 정치력 신장의 중요성을 깨닫고 실력 행사를 하기 시작한 것이다. 비록 선거구 재조정에는 실패했지만 미주 한인들이 이제 정치력 신장을 위한 직접 실천을 시작했다는 건 큰 의미가 있다.
한인 교회도 조금씩 달라지고 있다. ‘4·29 폭동’ 직후 한인 사회에서는 교회의 구실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가 높았다. ‘한인 사회에서 이민 교회의 역할이 무엇인가. 한인 사회의 문제에 좀 더 관심을 갖고 적극적으로 참여해야 하는 것 아닌가’ 하는 주장이었다. 이후 일부 한인 교회가 사회 참여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지역 주민과의 유대 강화에 앞장서기 시작했다. 그러나 아직도 대부분의 한인 교회는 한인 사회 문제에 관심을 갖고 참여하는 데 소극적인 듯하다.
더불어 사는 지혜
‘4·29 폭동’이 미주 한인들에게 준 가장 큰 교훈은 다인종 다민족 사회에서 타민족과 어울려 더불어 사는 지혜를 배워야 한다는 것이었다. 코리아타운에서 한인 교회를 다니며 한인끼리 어울리는 폐쇄적인 삶에서 벗어나 보다 능동적으로 타인종·타민족과 어울리고 함께 발전하는 사회를 구축하는 데 앞장서야 한다는 것이다. 이후 한인 1.5세와 2세 단체들은 다인종·다민족 연대에 적극적으로 앞장서왔다. 한인청소년회관의 이름을 ‘코리아타운 청소년회관’으로 바꾸고 다인종·다민족 커뮤니티를 대상으로 봉사 활동을 전개하고 있기도 하다. 한인노동연대도 코리아타운 노동연대로 이름을 바꿔 한인과 라틴계 노동자 권익신장을 위한 활동을 전개하고 있다.
‘4·29 폭동’ 후 20년이 지난 지금 미국 주류 언론은 한인 사회가 폭동의 쓰라린 경험을 이기고 짧은 시간에 재기에 성공한 것에 큰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민 1세들은 아직도 모국 지향적인 삶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정치력 신장과 발전은 한인 사회가 이뤄야 할 당면 과제다. 한인 사회의 목소리가 정책에 제대로 반영돼 2세들이 미국 사회에서 뿌리내리고 제대로 경쟁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필요하다.
마지막으로 ‘4·29 폭동’이 대한민국에 던지는 교훈에 대해 말하고자 한다. 대한민국은 이미 다문화 사회로 바뀌었지만 ‘인종·민족’에 대한 개념적 이해는 전근대적인 수준에 머물러 있는 것으로 보인다. 세계는 21세기로 변했는데 대한민국의 ‘인종·민족’에 대한 이해는 아직 19세기 수준이라는 진단이다. 많은 한국인은 인종과 민족이 혈통에 의해 정해진다고 믿고 있다. 그러나 미국과 같은 다인종 사회에서 인종은 혈통에만 근거해 형성되는 것이 아니다. 당시의 정치적, 문화적 그리고 사회적 변수에 의해 형성되고, 없어지고, 재형성될 수 있다는 것을 역사가 증명하고 있다. 가령 미국 사회에서 인도인들은 백인인 ‘코케이전’으로 분류됐다가 1980년대부터 ‘아시안계’로 재분류되고 있다. 이제는 한국 사회에서도 ‘인종·민족’에 대한 개념 변화와 이를 뒷받침할 제도적 장치 마련이 시급하다. 교과 과정도 바뀌어야 하고 교사에 대한 교육도 필요하다. 다문화 교육에 대한 투자는 궁극적으로 한국의 사회비용 절감에 큰 도움이 될 것이다.
특히 한국인과 외국인 사이에 태어난 아이, 특히 한국 남성과 타인종 여성 사이에 태어난 아이들을 ‘한국인’으로 인정하고, 그들이 집단적 따돌림과 차별을 당하지 않도록 법적, 제도적, 사회적, 그리고 정치적 장치를 마련하는 게 시급하다. 이들의 숫자는 점점 증가할 텐데, 사회적 소외 집단으로 남겨둔다면 가난과 빈곤 그리고 차별의 대상이 돼 언젠가 대한민국에서도 미국과 같은 인종 폭동이 발생할 수 있다.
다인종·다민족 사회
다인종·다민족 사회를 맞이하는 대한민국의 미래를 어떻게 설정하고 설계할 것인지는 아주 중요한 과제다. 현 정부는 다문화 시대에 맞는 다문화 정책을 시행한다고 하지만, 사실 그것은 한국으로 시집온 외국인 신부들을 한국인화하는 데 초점을 맞춘 ‘동화정책’이다. 물론 외국인에게 한국 사회 적응 교육을 제공하는 건 필요하다. 그러나 그들의 고유한 언어, 문화 그리고 정체성을 유지하면서 동시에 한국 사회에 기여하도록 하는 다문화 정책이 중요하다. 맹목적 동화를 요구하는 현재의 정책은 실패할 확률이 높다. 이미 미국에서도 인디언, 멕시칸, 흑인, 아시안 등에게 동화정책을 실시했다가 실패한 경험이 있다.
다인종·다민족 사회의 표본인 미국의 가장 큰 장점은 다양하고 풍부한 인적 자원을 충분히 활용하는 제도적 장치를 갖고 있다는 점이다. 일례로 로스앤젤레스 통합교육국은 코리아타운에 새로 생긴 공립중학교 이름을 ‘김영옥중학교’로 하는 조례를 만장일치로 통과시켰다. 재미교포로 미군에 입대해 제2차 세계대전 등에서 큰 공훈을 세운 고(故) 김영옥 대령의 이름을 딴 것이다. 필자가 재직 중인 UC리버사이드 대학교도 ‘김영옥 재미동포연구소’ 설립에 동의하고 적극적 지원을 아끼지 않고 있다. 언젠가는 한국에도 외국인 출신자의 이름을 딴 학교가 세워질 날이 올 것으로 기대한다.
우리가 역사를 망각한다면 ‘4·29 폭동’과 같은 비극이 또다시 한인 사회에, 또는 한국에 닥쳐올 수 있다. 따라서 로스앤젤레스 폭동은 반드시 기억돼야 하며 차세대 교육에 적극 활용해 코리안 아메리칸의 정체성과 다인종 사회에서 더불어 사는 지혜를 습득하는 교훈의 장으로 삼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