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암골 저수지 옆길.
가수 최백호에게는 ‘그야말로 옛날식 다방’이나 ‘밤늦은 연락선 선창가’가 되고 또 누구에게는 술집도 되고 밥집도 되고, 어느 특정 지역도 된다.
누군가 나에게 전라도에서 가장 가고 싶은 곳이 어디냐고 묻는다면 ‘사아고오옹의 밴노래 가아물거리는’ 유서 깊은 목포도 아니고, 청춘의 한 시절 살벌한 현실에 쫓겨 서너 달 숨어 지냈던 순천 송광사도 아니다. 하기야 보조국사 지눌이 꽂은 지팡이가 지금의 나무가 됐다는 곱향나무와 눈빛이 형형한 날선 행자승들이 도를 닦던 공양간 옆 구석방은 지금도 가끔 그립다.
그뿐인가. 한나절 절 뒤편으로 올라가면 법정 스님이 주석하고 계시던 불일암도 눈에 아련하다. 암자 지붕을 훌쩍 넘기며 커다랗게 자란 지금의 파초는 그 시절 묘목에 불과했지만 감나무만큼은 푸른 그늘을 드리우고 있었다.
‘징한’ 전라도 사투리
그럼에도 전라도에서 내가 가장 그리워하는 곳은 영광 땅이다. 영광 땅에 처음 틈입한 것은 대학 신입생 때였다. 시골에서 올라온 초년생 시절 나의 하숙집 룸메이트는 영광 출신이었다. 난생처음 들어보는 ‘징한’ 전라도 사투리, 가끔은 다른 문화에 불편해하기도 했지만 돈독한 우정을 쌓았고 그해 여름방학 전라도 영광 땅을 밟았다. 요즈음 세대에게는 다소 황당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가난한 1970년대 끝자락, 도 간 경계를 건너뛰어 여행한다는 게 쉽지 않았던 시절이다.
지금의 금호고속으로 이름을 갈아치운 광주고속 버스를 타고 광주시 학동 광주고속 전용 터미널에 내려 시외버스를 시간 반 타고 가다 보면 영광에 진입하게 된다. 전라도 호남평야, 탁 트인 벌판이었지만 하루 꼬빡 차멀미에 질린 나에게는 멀고 먼 오지로만 보였다. 그러나 그날 차창으로 보았던 넓은 호남벌은 성장기 산간벽지에서 자란 나에게는 상대적으로 엄청난 충격이었다. ‘친구 찾아 강남 간다’는 말처럼 들뜬 마음 때문이었을까, 그날의 초록빛 영광 벌판은 지금도 내 마음에 뚜렷이 남아 있다. 내 나이 막 스물을 넘긴 시절이었다.
연안 김씨 종택 내 조상을 모신 방.
읍내를 벗어나 서남향으로 달리다 보면 목적지인 용암골에 앞서 동간리 입구에 위치한 연안 김씨 종가가 나타난다. 고종 때 지어진 반가의 고택으로 바깥 대문채부터가 범상치 않다. 하지만 대문은 커다란 복고풍 자물쇠로 잠겨 있고 인적은 간 데 없다. 특기할 것은 네 귀에 높은 기둥을 올리고 위쪽에 ‘삼효문’을 올린 독특한 형태의 2층 구조라는 것. 삼효문은 연안 김씨의 6대손과 11대손, 12대손의 효성이 지극해 조정에서 내린 것이라고 전한다. 조선왕조의 국운이 다해 지방의 토호세력들이 기승을 부리던 때 지어진 연유로 여느 반가와는 달리 아흔아홉 칸을 훨씬 넘긴 145칸이나 되는 거대한 종택이다. 궁궐이 아니고는 엄두도 내지 못했던 용머리 문양을 삼효문에 새기기도 했고, 안채에는 무엄하게도(?) 왕실에서만 허락되던 다섯 계단을 놓았다.
더구나 종택 한편 제사를 모시는 컴컴한 별실에는 영정과 함께 망자의 신발, 모자, 담배 곰방대까지 가지런히 진열되어 있어 다소 기괴한 느낌을 준다. 한 세기를 넘긴 영정과 망자의 물건들을 보다 보니 봄날이 당최 봄날 같지 않은 음산한 기분이 든다.
더욱 눈에 띄는 것은 마당 한가운데에 떡하니 버티고 있는 거대한 느티나무다. 죽은 지 서너 해 된다는 느티나무의 위용이 대단하다. 나무를 옮기는 와중에 뿌리를 흙으로 덮어 질식해 죽었다고 뒤늦게 나타난 종택 관리인 이광춘 씨가 전한다. 그래서 남녘 마을을 지키는 수많은 느티나무가 오로지 숨 쉬기 위해 뿌리를 민망하게 아예 노골적으로 드러내놓고 있다는 것이 이 씨의 설명이다.
비올레타와 미당의 동백꽃
아낙네들이 양파 재배로 분주하다.
용암골 뒤 골짜기에 연흥사라는 작은 절이 있다. 대처 사람들에게 영광 하면 인근 불갑면에 위치한 불갑사가 유명하지만 이곳 사람들은 연흥사를 더 사랑한다고 한다. 불갑(佛甲)이란 불교(佛)가 맨 처음(甲) 도래했다는 의미. 모악리 불갑사는 한국 불교의 첫 전래지로 유명한 고찰인데 384년(백제 침류왕 원년)에 마라난타가 창건했다고도 하고, 백제 문주왕 때 행은이 창건했다는 설도 전한다.
용암골 인근 저수지.
이 작은 절집에서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동백나무다. 천년을 훌쩍 넘겼다는 나무에는 수천의 핏빛 동백꽃이 피어 나무를 뒤덮고 있다. 동백꽃을 자주 접하지 못한 서울 사람들은 남녘 땅 동백꽃의 정서를 알기가 쉽지 않다. 서양에서도 장미 못지않게 사연이 많은 꽃이 동백이다. 그래서 베르디는 오페라 ‘라트라비아타’에서 비운의 여주인공 비올레타 가슴에 동백꽃을 다는 것으로 이야기를 풀어갔으며 미당은 ‘동백꽃은 아직 일러 피지 않았고 막걸리집 여자의 육자배기 가락만 목이 쉬어 남았다’고 하지 않았는가.
그러나 꽃은 오랜 세월 천대를 받아왔다. 떨어지는 모습이 마치 사람의 목이 칼날에 떨어지는 것과 같다고 해서 반가에서는 아예 집안에 들여놓지 않았다고 한다. 특히 그 뇌쇄적인 아름다움에 비해 어느 날 순식간에 후드득 떨어지는 모습이 허탈하다 못해 너무 허망스러워 지배계층들의 외면을 받아온 비운의 꽃이다. 그래서 일찍이 양반들은 예상치 못한 불길한 일들이 갑자기 생기는 것을 동백꽃 춘(椿)자와 일 사(事)를 조합해 ‘춘사(椿事)’라고 표현했다는 기록이 전한다. 이 같은 정서는 일본에까지 전해져 사무라이들이 가장 꺼리는 꽃이 바로 동백꽃이다. 베르디의 라트라비아타가 일본에서 가장 인기 있는 오페라로 자리매김한 것도 이 같은 동백꽃의 숙명이 그네들의 정서와 가장 근접해 있다고 생각한 때문으로 짐작된다.
꿈틀거리는 관능에 일렁이는…
그러나 동백꽃이 눈부신 영광벌 가장 외진 이곳 용암골도 더 이상 빨치산들이 매력을 느꼈던 그 옛날의 오지는 아니다. 남아 있는 노인들끼리 힘을 모아 돈벌이에 나섰다. ‘보리가 있는 추억 여행’이라는 제목의 찰보리 축제 등 외지인을 끌어들이기 위한 다양한 행사에 오지 노인들이 도회 젊은이 못지않게 분주하다. 찰보리가 춤추는 들판은 초록색 크레용 그 자체다. 보리밭은 5월의 바람을 못 이겨 꿈틀거리는 관능에 일렁이고 있다.
격에 맞춰 멀리서 들리는 노래가 있다. 박화목의 시에 윤용하가 곡을 붙인 보리밭이다. 1950년대에 부산에서 지어진 곡으로 처음에는 별로 관심을 끌지 못했으나 1970년대 교과서에 수록되면서 잠깐 동안 널리 불렸다. 하지만 요즈음에는 거의 들을 수 없는 노래, 실로 10여 년 만에 용암골을 떠나는 보리밭에서 듣는다. 땀 젖은 흙냄새에 담긴 어머니의 목소리다.
보리밭 사이 길로 걸어가면
뉘 부르는 소리 있어
발을 멈춘다
옛 생각이 외로워
휘파람 불며
고운노래 귓전에 들려온다
돌아보면 아무도 보이지 않고
저녁노을 빈 하늘만 눈에 차누나
5월의 보리밭은 초록에 지쳐 검푸르다. 남도의 들판은 이미 여름을 맞을 채비에 서성이고 있고, 남아 있는 사람들은 가는 봄과 함께 남몰래 야위어만 간다. 떨어진 동백꽃에도 멍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