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분쯤 지났을까, 그는 스마트폰을 식탁 위에 놓거나 앉은 자리 옆에 두거나 하면서 만지작거렸다. 이어 음식을 먹거나 술잔을 기울이거나 이야기하는 틈틈이 폰을 보기 시작했다. 참석자가 세 명뿐이어서 그의 행동은 쉽게 눈에 띄었다.
그는 스마트폰에서 본 뉴스 내용을 화제로 올리기도 했다. 새누리당 측에 따르면 이 비대위원은 회의 중에도 스마트폰을 자주 본다고 한다. 박근혜 위원장이 말하는 도중 옆에서 스마트폰을 사용하는 장면이 찍혀 보도되기도 했다.
참석자 중 한 사람이 잠시 자리를 비웠다. 남아 있던 기자와 그의 대화는 완전히 끊겼다. 그가 두 엄지로 자판을 열심히 두드리고 있어서 말을 걸 수가 없었다.
기자가 우두커니 앉아 있고 그가 고개를 푹 숙인 채 스마트폰에 열중하는 어색한 광경이 꽤 오랫동안 연출됐다. 이윽고 그가 기자 쪽을 보면서 어떤 질문을 던졌다. 1분이 안 되어 기자가 답변하는 도중임에도 그의 시선은 다시 아래로 떨어졌다. 어떤 웹사이트에 들어가 여기저기 기웃거리는 게 보였다.
식사자리에서 고개 푹 숙이며…
상대에게 질문을 해놓고선 답변이 나오고 있는데 듣지도 않고 다시 스마트폰 속으로 들어가다니. 정치권을 취재하면서 대통령까지 된 분 등 고위직들과 여러 번 만났지만 이런 경우는 처음 접했다. 여태 보아온 정치 엘리트들은 대체로 자기중심적인 건 사실이지만 함께 있는 동안만큼은 동석자에게 집중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이는 정치나 이념을 떠나 사람과 사람 사이의 기본에 관한 문제다.
그러나 이 비대위원만 탓할 일도 아니다. 그의 모습은 정치인들에게서 나타날 새로운 악습의 전조일 수 있다. 이미 민간에선 흔히 목격되는 풍경이다. 임정욱 전 라이코스 대표는 미국 식당에서 한국인 유학생 커플이 각자의 아이폰 화면만 보는 장면을 소개하면서 ‘정말 기묘한 광경’이라고 혀를 찼다. 미국의 한 TV 모닝 쇼는 이런 세태를 빗대어 ‘스마트폰 또라이가 되지 말자’고 했다.
‘진짜 인간관계’의 위기
많은 사람이 스마트폰을 즐기면서도 옆 사람과 소통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여러 학자에 따르면 이는 신의 영역에 가까운 일이다. 스마트폰은 이용자에게 정보와 유희를 준다. 이용자는 욕구가 충족되어 쾌감을 느낀다. 그러나 이내 내성이 생기고 만다. 즐거움을 다시 맛보고자하는 금단증세가 나타난다. 스마트폰으로 다른 새로운 것을 찾게 된다. 결국 욕구충족-내성-금단증세-욕구충족-내성-금단증세가 반복되면서 이용자는 플로(flow·몰입) 상태에 빠지게 된다. 폰에 몰입되므로 그 밖의 옆 사람에게 신경을 쓸 겨를이 없다.
민영 고려대 교수에 따르면 소통은 설득과 경청을 통해 구현된다. 그런데 스마트폰에 몰입하면 상대의 말을 경청할 수 없으므로 소통이 될 리 없다. 인간관계가 틀어지는 것은 어찌 보면 시간문제일 뿐이다.
기자가 대학생들에게 SNS와 관련해 작문과제를 낼 일이 있었는데 한 학생은 “만나기만 하면 스마트폰만 들여다보는 친구가 점점 질린다”고 썼다. 평소 친하게 지내온 교수는 “아내는 늘 아이폰 이어폰을 귀에 꽂은 채 귀가한다. 대화가 끊긴 지 오래”라고 털어놓는다. 잡 코리아에 따르면 가족 간 대화 시간은 휴대전화 이용 시간으로 점점 대체되고 있다.
TV나 인터넷이 처음 나왔을 때도, 유사한 문제 제기가 있었다. 그러나 TV와 인터넷은 특정 지점에 고정되어 있었다. 반면 TV와 인터넷을 집어넣은 스마트폰은 신체의 일부처럼 늘 붙어다닌다. ‘스마트폰의 긍정적 효과가 혁명적’이라고 설명하는 홍보문구를 그대로 대입하면, 부정적 효과도 가히 혁명적이라고 할 수 있다. 삶의 근간인 ‘진짜 인간관계’의 위기인지 모른다.
정치나 일상생활이나 원리는 비슷하다. 누군가를 만나는 것은 대화를 하기 위해서다. 이런 만남의 확장이 가족, 직장, 국가다. 바로 눈앞의 실존하는 대화 상대를 사물화(事物化)하면서 시공을 초월해 국민과 소통한다느니, SNS 친구들과 소통한다느니 하는 것은 우스운 이야기다.
앞에 사람 앉혀두고 스마트폰에 몰입하는 사람들. 우리는 이들의 진정성을 의심해봐야 한다. 그리고 우리 자신이 이러지 않도록 노력해야 한다.